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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적에 둘러싸인 집안은 흔한 시계초침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침묵의 무게가 이렇게나 무거운 줄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다.
혼자 남은 집안의 고요함이 무겁게 어깨를 내리누르고, 숨막히게 가슴을 조여 온다.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간 스스로를 아무리 자책해보아도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순 없다.
연호가 집을 나간 후 도원은 새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정까지도......
손에서 빠져나간 후에야 자신이 잡고 있던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은 다녀와 라는 인사를 들을 수도, 퇴근 후 따뜻하게 차려진 저녁식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텅 빈 집안, 싸늘하게 식은 식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늘 그래왔었건만 연호가 있던 그 짧은 기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변화에 익숙해져 버렸다.
밀린 빨랫감을 들고 눈앞을 종종거리며 다니는 모습이나 야채를 썰고 찌개를 끓이던 뒷모습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싫은 듯 투덜대면서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향이 진한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과음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술냄새 지독하다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지만 쏟아지는 잔소리와는 달리 옷을 갈아입혀주는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신문을 보다, TV뉴스를 보다 문뜩문뜩 의미를 알기 힘든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호를 느낄 때가 있었다.
그 때의 표정은 뭔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픈 듯도 했다.
자신이 좀 더 솔직했다면 그런 연호를 두 팔 가득 안아주었을 것이다.
뭘 째려보냐고 퉁명스레 핀잔밖에 던질 줄 몰랐던 어린애 같은 마음이 얼마나 바보같은 것이었는지 이제와 뼈저리게 깨달을 줄 그땐 미처 몰랐었다.
지금이라도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연호가 돌아와 줄까...
하루에도 수백번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 집을 나갈 때 자신이 했던 말과 그때 연호의 원망어린 눈빛을 떠올리면 도저히 핑크빛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이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여 괴로웠다.
연호가 나간 후 도원은 일주일 내내 술을 마셨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적막에 둘러싸여 불조차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쓰디쓴 술을 들이켰다.
주인 잃은 방을 확인이라도 하듯 연호가 쓰던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몇 번이고 그의 회사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한 번도 통화하지 못했다.
회사 앞까지 찾아갔다 되돌아오기도 했다.
지금 이 나이에 이런 감정에 휘둘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로울 것도 없는.. 예전에 헤어진 연인.
호기심에 시작해 장난처럼 끝난 인연.
그때의 이별이 슬프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 새삼 그때와 똑같은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원, 자신의 마음이었다.
더 이상 호기심도, 장난도 아니었다.
손에 넣을 수 없어 안타깝고, 보지 못해 괴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우연히 재회했던 그날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연호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이어 나갈 수만 있다면 남은 인생 전부를 걸어도 좋다.
도원의 집을 뛰쳐나온 연호는 한평이 겨우 넘는 좁디좁은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다.
손바닥 만한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힌 곳에 앉아있으려니 저절로 가슴이 조여오는 듯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넓고 좋은 집에서 사느니 발 한번 편히 뻗지 못할 좁은 곳이나마 눈치 볼 것도 가슴 졸일것도 없는 이곳이 오히려 적당한 곳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그의 집을 나온 이후 혼자가 된 연호는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이었다.
생활의 어려움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 아니었다.
넓은 침대에서 쾌적하게 잠들 수 없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도 아니다.
짧은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고, 편의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불편함 쯤은 이미 어려운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연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끝끝내 잊어버릴 수 없었던 사람. 그의 모습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깊은 상실감이었다.
오랜 시간 도원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미 자신에게 정도원이란 인간은 잊혀진 옛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겨우 막아놓은 둑이 터지듯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 쌓아놨던 10년 치의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겉으로 드러낼 수도, 소리내어 말할 수 도 없는 감정을 겨우겨우 안으로 삯이며 몰래 숨겨두었다.
그런 북받치는 뜨거운 마음을 감추고 애써 차갑게 외면하면서도 하루하루 견딜 수 있었던 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핀잔을 늘어놓으면서도 자신이 해준 밥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며 기뻐했고, 깨끗이 다려놓은 셔츠를 입고 나갈 때면 알 수 없는 뿌듯함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에 사로잡혀 매일이 꿈결같이 흘러간 것만 같다.
다시 혼자가 되어 낯설고 좁은 곳에 갇혀 있으니 버려진 강아지 같은 심정이다.
그런 쓸쓸함에도 불구하고 연호는 도원에게서 오는 전화를 피했다.
더 이상 그에게 휘말렸다간 정말 자신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더는 슬픔과 서러움 속에 버려져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연호는 오늘도 애써 마음을 다잡고 힘겹게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고시원에 터를 잡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연호는 다시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숙소비용뿐 아니라 이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어머니와 출산일이 다가오는 동생에게도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주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가 태어날 날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말썽만 부리던 순구가 정신을 차리고 취직을 한 것이다.
또 언제 사고를 칠지 심히 걱정은 되지만 나이는 어려도 아빠가 된다는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된다.
한동안 쉬다 다시 야간에 일을 하려니 처음 며칠간은 피곤이 몰려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출근길 전철에서 졸다가 무릎이 꺾여 주저앉을 뻔하기도 하고, 고객과 상담하느라 수화기를 잡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자연스레 피로는 나날이 쌓여가고, 얼마간의 편안한 생활로 좋아졌던 혈색도 다시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로 돌아갔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버티다가도 어느 순간 어깨에 올려진 삶의 무게를 모두 내던지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불야성 같은 네온사인이 눈부시게 빛나는 거리 한구석에 숨듯이 기대서서 술 취한 누군가의 차를 몰아주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문뜩문뜩 진저리나게 싫어진다.
그럴 때면 가족도, 일도 수시로 생각나 마음을 괴롭히는 도원도 잊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다.
이 도시가 지긋지긋해 지고,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이 싫다.
이런 못난 생각에 사로잡혀 입술을 깨물다가도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리면 정신없이 달려가 일을 한다.
술 취한 사람이 앞뒤 없이 시비를 걸고 욕을 해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하며 어두운 도로 위를 묵묵히 달릴 뿐이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이따금 아는 얼굴을 만나는 일은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에서 세훈을 만났을 땐 연호 역시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사실 세훈은 연호가 도원의 집을 나오게 된 도화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세훈 역시 대리운전 기사로 온 사람이 연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셨어요?"
연호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잠시 당황하여 말을 더듬던 세훈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연호에게 다가선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 집에서 나갔다는 얘기 듣고 많이 놀랐어요. 전화도 몇 번 했었는데..."
연호는 도원에게서 오는 연락 뿐 아니라 세훈의 전화 역시 피해왔었다.
"..죄송해요."
연호가 미안한 듯 살짝 고개를 떨구자 세훈이 급히 손사레를 친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둘 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이 이어졌다.
"집으로.. 가시는 거죠? 차키 주세요."
그러다 연호가 입을 떼자 세훈은 그제야 대리운전 기사를 부른 걸 기억해내곤 얼른 열쇠를 넘긴다.
당연히 주소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차는 익숙한 도로로 들어섰다.
어두운 차 안에 내리던 침묵을 깨고 세훈이 입을 열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연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도원의 집에서 나온 거... 저 때문입니까?"
더는 침묵할 수 없어 연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럼..."
"..이 나이에 남의 집에 오래 얹혀 살 순 없죠. 그냥.. 때가 되어 나온 것 뿐입니다."
연호는 일부러 도원을 친구가 아닌 남이라고 표현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다시 정적이 흐르고 옆을 스치는 차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온다.
세훈의 집 앞에 차가 멈췄다.
"연호씨."
돌아서려는 연호를 세훈이 붙잡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되니까 시간 좀 내줘요."
부담스러웠지만 세훈의 진지한 눈빛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일하는 중이라 바쁘니까 오래는 안 돼요."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이면 됩니다."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는 연호의 팔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막 집안으로 들어섰을 무렵, 도원의 집엔 지연이 와 있었다.
"그러게 없다고 말했잖아."
도원이 귀찮은 듯 말했다.
"분명 이 집에 빼 놓은 거 같은데..."
"그런게 있었으면 진작 찾아서 보냈지. 내가 뭐하러 당신 반지를 보관하고 있겠어?"
"아무튼 나한텐 중요한 물건이란 말에요."
"중요하긴 개뿔. 그런 소중한 반지를 한 달이 다 되도록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었단 말야?"
"그게.. 그러니까.. 끼고 나간 것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후우.."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바보같음을 한탄하던 지연은 문뜩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데 당신... 집안 꼴이 이게 뭐에요?"
깔끔하던 집안이 돼지우리가 되어있었다.
빨래는 곳곳에 내던져 있고 빈 술병에 맥주캔이 테이블과 거실 바닥을 나뒹군다.
그 중에서 제일 가관인건 정도원이란 남자의 모습이었다.
넥타이 한번 삐뚫어진 걸 못 봤었는데 지금은 턱에 까칠한 수염이 돋아있고 풀어헤쳐진 넥타이는 어디로 빼버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얼굴도 까칠하고 이미 술을 마신 듯 단추 풀린 셔츠에선 술냄새가 풍긴다.
"아무리 치워주는 사람 없어졌기로 이렇게 엉망이 되다니... 업체에 전화해서 도우미 구해줘요?"
지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스러운 듯 말했지만 도원은 손을 저을 뿐이다.
"필요 없어."
"절대 필요할 것 같은데..."
"볼 일 끝났으면 그만 나가줘."
"더 있으래도 있기 싫어요. 욕실이고 방이고 더러워서... 나, 참... 연호씨 없기로 이렇게 금방 쓰레기장이 되다니..."
연호의 이름에 도원의 미간이 움찔하고 구겨진다.
"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집안일 해 주던 사람 없어도 그렇게나 깔끔하게 해 놓더니 왜.."
"잔소리라도 할 셈이야?! 우린 이미 헤어진 사이 아니었던가?"
도원이 화난 듯 소리 지르자 지연은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누가 뭐래요? 이 꼴을 보면 헤어진 사이가 아니라 누구라도 한소리 했을 거에요."
지지 않고 되받아친 지연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이만 갈게요. 앞으로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거에요."
거칠게 대하는 도원의 태도와 말투가 기분 나빴지만 어차피 끝난 사이라 생각하고 지연은 돌아섰다.
그 시각, 세훈의 집으로 들어선 연호는 그가 내 주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밤을 새워 일하려면 커피는 필수다.
오늘밤도 벌써 세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새벽이 되면 속이 쓰리고 아팠지만 이나마도 마시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세훈은 연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옆집에서 지낼 때 보다 안색이 많이 나빠지고 몸도 말라있었다.
이러다 또 쓰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안쓰러운 만큼 연호를 안아주고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연호씨"
세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연호는 거의 다 마신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세훈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걱정됩니다."
세훈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 한마디에 연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전..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얼굴을 보니 또 쓰러질 것 같아요."
연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훈은 팔을 뻗어 연호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란 연호가 손을 빼내려 하자 더 강한 힘으로 잡았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도원이 때문에 이곳이 싫다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있어요. 전 연호씨를..."
"..그만..."
세훈의 고백에 당황한 연호가 잡힌 손을 확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호씨!"
세훈은 문으로 향하는 연호를 쫓아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놔주세요!"
"싫습니다.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세훈씨!"
"저는 안 되는 겁니까?!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
순식간에 연호를 돌려세운 세훈이 입술을 부딪쳐왔다.
연호는 두 팔로 세훈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훈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연호의 입술을 빼앗고 그를 쓰러트렸다.
옷이 흐트러지고 뜨거운 숨결이 귓가로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오자 연호는 두려움을 느꼈다.
"시..싫어!"
달아오른 몸에 정신을 빼앗긴 세훈은 그런 연호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 사람을 온전히 소유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강한 욕망에 이성마저 빼앗겨 버렸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차가운 이성으로 환자를 대하던 의사인 자신의 내부에 이런 욕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저항하는 상대의 움직임이 더 기묘하게 욕구를 자극한다.
생전 처음 맛보는 열매처럼 연호의 피부를 빨아들이는 혀 끝은 달콤하기만 하다.
"윽!!"
바지를 벗겨내려 세훈이 몸을 일으킨 사이 연호는 있는 힘껏 그의 배를 무릎으로 쳤다.
아픔보다 순간적인 충격에 세훈이 쓰러지자 연호는 급히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연호가 문을 박차고 달려나옴과 동시에 옆집 대문이 열리며 도원이 걸어 나왔다.
늦은 시각 여자 혼자 주차장까지 가게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동행한 것이다.
지독하리만큼 잘 맞춘 타이밍으로 마주친 연호와 도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며 놀란 듯 동시에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그러다 문뜩 도원은 연호의 흐트러진 옷가짐과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달려나온 발을 보고는 서서히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제야 연호는 너무 서두르다 맨발로 뛰쳐나온 걸 깨닫고는 난처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연호의 뒤를 이어 한발 늦게 달려나온 세훈을 보고는 도원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진다.
연호 역시 도원과 함께 나온 지연을 발견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늦은 밤 한 집에서 나오는 남녀를 보면 으레 떠오르는 상상 때문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잠시 대치하듯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뜻밖의 만남에 놀라 할 말도 잊은 듯 했다.
"너..."
그러다 도원이 한발 연호에게로 다가서려는 순간 세훈이 먼저 그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들어와요. 아깐.. 미안했어요."
연호에게만 들리게 읍조리듯 말했지만 가까이 선 도원에게도 또렷이 들려왔다.
도원의 눈빛에 순간 분노가 서린다.
그는 세훈에게로 끌려가는 연호를 강한 힘으로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쓰러지듯 도원에게 안긴 연호.
세훈은 당황했지만 연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연호는 세훈에게 팔이 잡힌 채 도원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서로가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통에 연호의 모양새는 더욱 우스워졌다.
"이봐요. 지금 세 사람 뭐하는 거에요?"
지연이 황당하다는 듯 그들을 보며 말했다.
말없이 완력싸움을 벌이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난처하게 된 연호가 불쌍해보였다.
지연의 말에 팽팽하게 날이 섰던 긴장감이 깨지고 세훈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는 순간적으로 연호의 팔을 놓았다.
도원은 기다렸다는 듯 연호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세훈을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잡아당겨 늘어난 연호의 옷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볼 때 상상하기 싫은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못 견디게 화가나 당장에라도 세훈을 때려눕히고 싶은 마음뿐이다.
게다가 품에 안은 연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호는 어서 이 품에서,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세훈이 좋은 사람이고 자신을 아껴준다는 건 알지만 부딪쳐온 입술과 몸을 훑는 손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약해진 몸에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닥쳐오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리에 힘이 빠지며 무너지려는 몸을 도원이 가뿐히 안아들었다.
"네 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도원은 죽일 듯 한 눈빛으로 세훈을 노려보다 돌아서 집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숨을 몰아쉬는 연호를 조심스레 소파에 눕혔다.
거칠던 숨결이 점차 안정되고 캄캄했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자 연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원은 곁에 앉아 연호가 진정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만 가보겠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던 연호는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엉망이 된 집안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잊고 멍해졌다.
나뒹구는 술병과 먼지가 뽀얗게 쌓인 테이블. 신문과 빨래가 뒤엉켜 쓰레기더미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멀끔하던 집주인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왜 저리 처량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걸까...
어이가 없어 피식하는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나온다.
"너무 한 거 아냐? 내가 그동안 열심히 청소하고 가꾼 보람도 없이 집안이 이게 뭐야."
맥 빠진 말투에 집주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다.
"차라리.. 빨리 결혼을 해. 아까 보니 지연씨.. 계속 만나는 거 같던데.. 지연씨 만큼 괜찮은 상대도 흔하지 않아. 너한테 과분할 만큼 좋은.."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고 해서 찾으러 온 것 뿐이야."
더는 듣기 싫은 듯 도원이 말끝을 잘라버렸다.
"아무튼...... 천하의 정도원이 이런 꼴로 살아서 되겠어? 빨리 결..."
또다시 말을 맺지 못하는 연호.
도원의 손끝이 뺨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눈가를 훔치는 손길에 연호는 그제야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건.. 그냥 좀 놀라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연호가 어설픈 변명을 한다.
"..내가.. 진짜 왜 이러지... 나.. 이만 갈게"
봇물 터진 듯 주체할 수 없이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황급히 감추며 연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그때였다.
고개를 떨군 도원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연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도원을 돌아보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진심어린 사과였다.
"내가.. 잘못했어. 연호야."
멎을 듯 하던 눈물이 도원의 말 한마디에 시야를 가릴 만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돌..아와..줘..."
연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말을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단 듯 되묻는 연호에게로 천천히 다가선 도원.
두 손으로 연호의 얼굴을 감싸며 촉촉하게 젖은 눈을 바라본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내 곁으로 돌아와 줘."
"너.. 정말..."
뭐라 대꾸의 말을 찾기도 전 연호는 도원의 품에 안겼다.
"제발.. 돌아와 줘."
사라져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던 입술이 어느새 연호에게로 다가온다.
눈물로 젖은 입술을 감싸고 붉어진 뺨과 반듯한 이마, 단정한 코끝에 입맞춤이 이어졌다.
연호는 마치 안개에 휩싸인 채 꿈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늘 가슴 한곳에 아프게 묻어두었던 사람, 그리움에 밤잠을 설치고 괴로워했던 수많은 나날.
마치 그 모든 걸 보상받듯 꿈같은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안고 싶어."
부드럽던 입맞춤이 어느 순간 격렬하게 변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귓가를 덥혀왔다.
조금 전 세훈의 입술이 닿을 때만해도 소름이 끼칠 만큼 싫어하던 몸이 지금은 마치 거짓말처럼 달아올라 흐물흐물 녹아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툰 욕망만을 위해 안고 안기던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한번의 손길에도 자제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감정이 실려 있었고, 맞닿은 몸 구석구석이 아플 만큼 저려왔다.
도원의 기대에 부응하듯 연호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연호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안방 역시 지저분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두 사람에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성가신 옷가지가 모두 벗겨져 나갔다.
그동안 장난치듯 연호에게 키스하던 때와는 달랐다.
무언가 안타까운 매달림이 느껴졌다.
그동안 몇 번이고 도원의 이런 행동을 거부해왔던 연호지만 지금은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제압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도원이 주는 격렬한 열정에 온 몸을 맡긴 채 폭풍 속에 던져진 작은 배처럼 사정없이 흔들릴 뿐이다.
데일 듯 뜨거운 몸이 닿고 그보다 더한 열기를 띤 입술이 몸 구석구석을 훑어간다.
자신의 기억을 새기듯 부드러운 살갗 위에 짙은 자국을 남겨간다.
"흣!"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억눌렸던 신음소리가 터져 나와 어두운 방안을 가득 메운다.
스치는 입술과 더듬는 손끝에 피부가 타들어갈 듯 뜨겁다.
오랫동안 사람의 체온을 잊고 살았던 만큼 사납게 부딪쳐오는 도원의 욕망을 버텨내기 힘겨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어 끝내 연호를 점령하는 도원.
도망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강한 힘에 연호는 그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밤이 깊어 새벽이 올 때까지 지나온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두 사람의 행위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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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 잘 보내셨나요?....;;;
저는.. 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참.. 죄송하다는 말씀 밖엔.... ;;
너무 늦게 올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 쓰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주인공들 이름도 헷갈려버렸어요. ㅜㅜ
혹 오타나 잘못된 점을 발견하시면 꼭 고칠 수 있게 지적해 주셔요....흑...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첫댓글 와!!!엄청 기다렸어요...혹시나 연중하는건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오셨네요.
급한 마음에 읽기전에 댓글부터 다네요. 재미있게 읽을게요.
기다린만큼 순식간에 다 읽었습니다. 드디어...힝...부끄부끄 들어가네요.
다음편 기다릴게요~~~
많이기다렸어요^^ 오늘도 잼께 잘읽었어요~~ 도원이랑 연호 이뿐사랑만남았네요~~ 세훈이도 좋은사람인데~ 맘이 아프네요~~ㅠ 그럼 담편도 기대할게요!!
아 왜이리 늦게오셨어요 ㅠㅠ 기다리다 목빠지는 줄 알았어요 ^^잘봤고요 이제 연호 잘먹고 잘사는 거죠 !!ㅋㅋ
드디어오셨군욬ㅋㅋㅋ와주셔서너무감사해욬ㅋㅋㅌㅋㅋ
기다리고 있어었요!! 조금 미워질려는 찰나~폭풍 분량으로 마음이 사르르~녹아버렸네요ㅎㅎ
드디어 오셨군요 ㅋㅋ데코님 맴매해야겠어요!!ㅋㅋㅋ
드디어!!!!! 정말 많이 기다렷어요 ㅠ 그래도 다시 써주셔서 감사해요!! 도원이랑 연호도 드이어 만났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