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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17
구자근 사모(광주 화평교회)
"맨날 똑같은 밥"
바야흐로 9월 하순께가 되었다. 고추 말리고, 쪽파 심고, 김장갈이 하고, 마을 전체가 원초적인 퇴비냄새로 진동에 진동을 거듭하고, 이제 다 꾸며진 밭에서는 거의 6-70대인 동네 아낙들이 10여명 이상씩 몰려다니며 마늘을 놓느라 정신없이 바쁜 철이 돌아와 있었다. 2년 사이에 화평교회는 3명의 노인네들이 세상을 떠나고, 이 마늘 심고 양파 심는 한달여가 다 지나기까지 그나마 더 썰렁해진 예배시간도 고단한 몸과 마음으로 졸린 기운은 여전하였다. 10명도 안되는 사람들 앞에서 마치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오 목사는 절제 못한 채 소리쳐대고 있었고, 들을 귀 있는 자만 그 소리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도 저도 다 지나간 시간...
"......더운 여름 날씨도 꺾이고, 오늘부터 다시 사택에서 점심을 같이 먹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은 한 그릇 드시고 가시고 너무 바쁘신 분은 눈치 보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교제로 하는 거니까, 그냥 가셨다고 목사가 안삐지니까 편하게 하세요. 음식 만드는 사람이 솜씨는 없지만 맛있게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오늘 오후 헌신예배 인도차 출타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김 집사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목사님, 잠깐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목사님이 설교는 잘하시는데요, 목사님은 들어도 들어도 계속 똑같은 말씀만 하시거든요? 제 신앙생활로 알고 있기는, 성경에는 우리 인간들이 알아야 할 무진장 많은 훌륭한 교훈들이 들어있는데, 목사님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예수님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처리하신다, 우리 같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 같은 말씀만 하시거든요? 그런 얘기는 처음 나온 교인들에게는 듣기 좋겠지만 그런 얘기를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야기도 골고루 듣고 싶은 겁니다. 2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하나님이 다 하시니 인간들이 하는 일은 다 소용없다... 는 식으로 말씀하시니, 우리 교인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열심도 다 없어지고 냉랭하기만 한 것이 힘도 안납니다..."
"집사님, 예배 마치고 다시 얘기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목회자들의 사명이고, 또 믿는 자들의 사명인데 그런데 전도해도 소용없다, 전도하지 마라... 는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이런 말씀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한가지 설교밖에 못하십니까... "
"예... 저는 그 설교 밖에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설교만 할겁니다. 집사님이 다른 말씀 듣고 싶으시면 다른 교회에 가셔서 듣고 오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전도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집사님이 그렇게 들으신 게지요. 예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목사도 매일 전도합니다. 인간의 전도는 소용없다는 걸 알고 전도하세요... 그럼 예배 마치고 다시 말씀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에 인간이 상식적으로 교훈 받을 행실이 얼마나 많은데, 목사님은 그런 것들은 하나도 가르치지 않고..."
"집사님! 있다가 다시 말씀 나누자고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혈기가 나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
"...... 진리와 생명 되신 주~ 이 몸을 바치옵니다~ 믿음과 소망 사랑에~ 한마음 되게 하소서~ 아멘~"
믿음, 소망, 사랑이 어디서부터 오냐, 생명되신 주께로부터 온다는 것이 아니냐, 왜 생명이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값이 청산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가 놓여남을 입었으니까 생명이지. 우리는 매일 죄인이야, 단지 예수 안에 있기에 의인으로 봐주시는 것이지.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죄를 덜 짓게 되는 것인가? 뭐? 노력하면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다고라? 하나님은 99점까지 열심히 애써서 달성해도 미처 할 수 없었던 단 한가지로 모든 걸 0점 처리하시는 분(야고보서 2:10)이라고 그렇게 가르쳐도... 그래서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이지. 끊임없이 우리 죄를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믿음...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그래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러는거지. 예수 믿으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끼어들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일을 다 처리하시는데(요1:1-3, 롬11:34)... 인간의 행위는 끼어들 자리가 없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그 행위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그게 왜 기분이 나쁜 걸까? 왜? 왜 자꾸 자기 행위를 끌어들여서 예수 믿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나서는 거냐 이거지......
아- 그런데 가슴이 왜 이렇게 벌떡거리나... 드디어 폭발할 것이 폭발했군. 그동안 예배 시간에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뒤통수가 두 갈래로 땅겨 왔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어. 집사님께서 무슨 생각이 어떻게 들어가고 있는지 말씀 안하셔도 다 알고 있었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참으셨습니다...
"집사님, 이거 끝내시고 국수 드시러 들어오세요..."
여느 때보다 더 다정하게 한 말씀 강조하고 집 안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어느새 교인 대부분은 바쁜 걸음으로 나가버리고, 몸이 불편하신 분만 방으로 들어오셨다. 오 목사는 평소처럼 재빨리 행주를 빨아다가 상을 깨끗이 닦고, 숟가락 통을 찾아서 주섬주섬 놓고, 김치를 나르고... 좀 지나자 집사님이 들어오시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집사님, 집사님과 목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보는 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셔야 맞습니다. '목사님, 성경 이 부분이 저랑 틀리네요. 목사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똑같지가 않아요. 이 부분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면 목사는 집사님이랑 같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어떤 예수님인지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해야 되는 것이지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집사님은 지금, '나는 목사님이 맨날 똑같은 얘기, 예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고만 말하니까 이제는 들을 것이 없다. 그건 다 아는 얘기니까 이제는 다른 것을 말해주쇼. 나는 그것 다 먹어봤으니까 이제 다른 맛 좀 보여주쇼.' 이런 뜻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맞지요?"
"사람이 밥을 먹어도 맨날 똑같은 밥만 먹는 것보다 어떤 날은 다른 메뉴로 먹어야 더 맛있을 때가 있는 것이 아니겄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왜요? 성경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오로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밥만 먹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 한번 보세요. 자~ 여기요......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책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보이는 부분도 다 예수님 이야기 할려고 있는 겁니다. "
"그래도 이 두꺼운 성경책 속에 얼마나 많은 교훈거리가 있는디요."
"그만큼 우리 죄가 두껍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어떤 교훈거리가 있는데요?"
"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자식을 노엽게 말라...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같은 것이지요. 열심히 구하도록 교인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을 전해야 되는데 목사님은 계속 예수님이 하신 일만 믿으라고 하거든요..."
"구하라... 는 것은 지난번에 설교한 부분입니다. 그때 '구하라'는 것은 집사님이나 우리들이 이 땅에서 원하는 것을 열심히 구하면 준다는 뜻이 아니예요. 예수님이 좋은 걸 구하셔서 그의 자녀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노엽게 말라... 노엽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우리는 순간순간 노엽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마찬가지예요. 이제까지 살아오시면서 그것이 인정이 안되십니까. 그럼 이 말씀을 왜 주셨을까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죄악된 우리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셔서, '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존재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거지요. '그러니 다 이루신 예수를 믿고 살아라.'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또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동시에 그거 하나 못지키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녀삼아 주셔서 아직도 내가 예수 믿고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저절로 범사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
"그래도 믿는 자가 열심히 행하고 행실을 똑바로 할 수 있도록 목사님이 가르치셔야지요. 그래야 안다니던 사람들도 교회에 오게 되고, 그러려면 많이 기도하고 전도해야 되는데 우리 교인들은 아무 것도 안해요. 주일날도 품앗이 맞춰놓고 일하러 가고, 낙지 잡으러 가고... 교회가 썰렁해지고요..."
"집사님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님도 그러실 거라고 여기지 마세요. 하나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틀립니다.... 행실을 똑바로 해야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세상 다른 책에 더 잘나와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 부분에 신경쓰게 되어있지 않나요? 더 좋은 칭찬을 듣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텔레비전에도 얼마나 많이 나와요. 세상 사람들이 감동적이고 좋은 일은 더 많이 잘하거든요. 그런 말들을 목사가 교회에서 왜 또 해야 됩니까? 그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착하고 감동적인 인간의 행위가 아니지요? 집사님, 교인들이 아무 것도 하는지 안하는지, 왜 집사님이 신경 쓰십니까? 누가 기도하는지 언제 기도하고 있는지, 누가 전도를 하는지 안하는지, 왜 집사님이 신경 쓰십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나를 신경 쓰세요. 여기 6장 39절 40절도 보세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뜻을 두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왜 자꾸 교회걱정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얼 해서 기뻐하고 안해서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인 예수 믿는 일에, 우리도 똑같이 관심갖고 있으면 됩니다.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걱정하지 마시고 이걸 두려워 하세요."
"그래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요..."
"그렇지요. 누가 행함이 없다고 했나요? 믿음은 행함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야고보서 2장에 있는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자식 목숨을 내주면서까지 하나님 섬김니까? 인간은 그거 못하지요. 다 아시잖아요. 이 땅에서 다 잘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우리 인간들이 자식 목숨을 어디라고 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목숨은커녕 남들만큼은 그럭저럭 살게 해주고 싶은 것이 우리 부모들 속사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또 이 말씀을 대하면서도 성도는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아, 나는 끝까지 나와 내자식... 내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죄인일 수밖에 없구나...'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번제로 준비하셔서 완벽하게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또 고마운 마음만 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함만 증거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나도 예수님이 죄사함 주시고 긍휼을 주셔서 무조건 자녀삼아 주신 거구나' 인정하실 때, 그 가난한 심령에서 온유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그저 범사에 감사가 되는 겁니다..."
"집사님, 어서 국수 드세요. 다 뿔어요..."
"부탁이 있는데요. 사모님도 토요일 같은 때는 다인이 손잡고 동네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 일하고 있는 데도 들여다 보셨으면 하는데요, 사람들이 그러면 좋아하거든요."
"집사님이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가끔씩 그렇게 해왔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안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꼭 '저 분들이 교회 나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줄 알고 그 사람들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뭐 하나라도 도와주거나 갖다주면 그것보다 더 크고 많은걸 가져오거든요. 제 도움이 부담스럽다는 뜻이지요. 집사님이 보셨듯이 그런다고 교회 나오는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인간의 전도가 소용없다고 설교해도 제 머리 속에는 집사님처럼 전도생각이 제일 많이 나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렇지만 말씀에 있는대로 하나님이 예수님께만 그 일을 다 맡겼다는 것을 점점 더 확인하게 되지요. 전도 해보면 해볼수록 더 그래요. 설사 제가 전도한 사람이 교회에 나왔었다고 한들, 그게 어디 제가 한 것일까요? 주님께서 한 거지요. 그리고 집사님은 저희가 들로 산으로 자꾸 다니면 화평교회가 활발하게 살아있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집사님 생각하고 틀려요.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일없이 괜히 돌아다니면 그 사람들 일하는 시간만 빼앗기는 것이고... 제가 무슨 대통령 마누라라도 되면 모를까... 물론 그렇게 해야 될 때도 있지만요...(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건데...)"
다 불어터진 국수를 한 젓가락에 훅- 입 안으로 쑤셔넣은 오목사가 마지막 분위기로 한마디를 더했다.
"집사님, 집사님 주인이 누구십니까? "
"......"
"말씀하세요. 집사님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지요..."
"저는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 집은 예수님이 주인이니까 전도든 기도든 다 주인의 뜻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된다는 걸 인정하세요. 종은 그냥 종일 뿐이예요. 여기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도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교회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시는지... 시간이 가도가도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일 낌새가 안보이니까 안타깝고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나신 듯 하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건만 한평생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농촌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많은 빚에 눌릴 수밖에 없는 생활이 전부가 되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자식들도 모두 반듯하게 자라주었고 즐거운 일도 많고 앞으로도 더욱 살맛나는 일이 많아지겠지만, 집사님의 생활이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목수가 되어 헌신해서 세운 '화평교회'가 될 터였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인 것이다. 이 교회가 조금만 성장해주어도 집사님의 자존심과 인생의 성취도는 아주 만족할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도 큰 감사와 기쁨으로 더욱 더 몸 바쳐 충성하실 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회는 설립 이래 10년이 넘도록 계속 힘들어 왔다. 처음에는 잘해보자고 몇십명씩 몰렸으나 교역자와 교인들의 관계가 악순환이 되면서 많은 교역자가 갈리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서 다시는 안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소문을 종합해 보건데, 이 원동 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이 지들끼리 싸우고 쫓아내고 시끄럽기만 한 것이 돈버는 일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절대로 다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어쩌란 말인가...
이 곳에 와서 주변 시골 교회들을 보니, 교회도 많거니와 사람들도 다 몇십명씩 채워져 있었고, 나름대로 자부심들이 대단했다. 그런데 하필, 이 화평교회만이 부흥의 싹이 싹둑 잘려버린 듯(그러니까 오목사 차례가 온 것이겠지만), 진짜 나올 만한 사람이 언뜻언뜻 보여도 냉큼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자는 없었다. 70세가 가까워오도록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려고 애쓰신 김집사님의 복장이 터질 만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청해온 오목사는 진솔하면서도 인간성도 다정다감하니 괜찮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지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만 소리쳐댈 뿐, 헌금이니 기도니 전도니 봉사니... 교회 살리는 생활설교는 오늘날까지 한마디 강조하는 걸 본적도 없을뿐더러 아니, 오히려 그런 인간의 행위로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려는 의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하고 죄악된 발상인가를 외쳐댈 뿐이니, 그런 설교를 처음 접해보는 집사님으로서는 무엇이 무엇인지 도대체가 답답하고 한심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거 다 알고 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 나오게 되는 설교 좀 하시지... 열심히 돌아다니시고... 그러면서 참고 또 참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이렇게 터진 것은 집사님으로서는 너무나도 지당하신 일이었다. 백번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침착하게 진단해 보건데, 그렇게도 자신들의 행실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각자가 오히려 차분히, 미련하게 예수 믿는 일에만 온 마음을 모아야 될 때였다. (그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밉보인 일을 우리가 당장 어떻게 되돌려 놓으란 말인가) 그러는 중에 10명이라도 지금껏 해 온 것처럼 그렇게 재미나게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가운데, 이웃에게 넘쳐날 생수의 강물을 그저 바라만 보면 될 일이었다. 그 다음 일도 마땅히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을...
사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일투성이인가. 교인들이 헌금 잘 못해도 돈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목사 사례비가 밀린 적이 없고, 교회 청소니 손님 밥이니 크리스마스 행사 선물이니 여름성경학교 행사비니 주일 식사니 어린이 간식이니 때때로 있는 병원 심방비니 명절날 교인들 선물이니 야유회 식비니... 한번이라도 신경 쓰게 한 적이 있었던가. 사택 보일러를 새로 바꾸고 양수기를 새로 설치하고 봉고차를 바꾸고 종합보험 들고 교회 난방 6개월간은 지속해서 때고... 그러면서 언제 한번이라도 교인들에게 의논함으로 신경 쓰이게 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신경 쓰일까봐 보고 안한 것은 있을지언정... 그런 일들로 얼굴 한번 붉힌 적이 있었던가. 이런 일이나 할 정도로 제일 할 일이 없는 것에 대해서, 하루 온종일 일하는 교인들에게 오히려 미안해하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뜨리는 일이 없고 예수님하고만 모든 일을 다 처리하심으로, 우리는 그저 고마워할 것 밖에는 없다고 가르친 것이, 이제는 다른 것을 안가르친 것으로만 보이니... 새로운 밥 생각이 나실 만도 하겠다. 아무 문제없이 화평스럽게 돌아가던 화평교회가 너무나 할 일이 없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것인가...
되돌아보면, 이 불순한 시대에 김집사님같이 성실하고 정직하면서도 강인하고 곧은 성격에 사려깊고 똑똑하시며 때로는 어린 아이같은 순전함이 돋보이는 사람을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너무나 감동적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오목사도 유독 김집사님을 좋아하고 챙기고 싶어했다. 자주 자주 마음으로 소원하기를, 어느날 갑자기 집사님 빚이 스리슬쩍 다 청산되면서 후련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이 놈의 나라는 도대체가 농민 말아먹는 정책만 써 왔으니... 사시사철, 새벽부터 밤중까지 하루종일 뼈빠지게 일하는 걸로 보면, 대한민국에서 이 무안 바닷가 쪽에 있는 농촌 사람들이 제일 많은 돈을 벌어야 맞는데... 하며 얼마나 분통터져 했는지.
똑똑... 똑똑... "사모님, 계쇼!"
"예... 아이구 김집사님..."
"이거... 찌게 끓여드세요. "
"이건 또 언제 잡으셨어요? 바쁘신데..."
"어제 밤에 잡았는데 잘 안잡히네요..."
"아이구, 그만 주세요. 맨날 얻어먹기만 하네요..."
게가 너댓마리, 크고 작은 세발낙지 다섯 마리... 집사님은 제일 큰 놈들만 골라왔음이 틀림없다. 늘 이런 식으로 우리를 섬겨오신(그러면 그럴수록 섭섭함이 쌓이련만!) 분이다. 농사지은 가지가지 종류들에서 첫 번째로 소득 얻은 좋은 것들, 그러니까 감자 특대, 고구마, 방울 토마토, 고추, 호박, 쪽파, 낙지, 양파, 마늘, 배추, 열무, 수박... 등등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 있으면 가져오곤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집사님의 입맛에 맞게 '여러분, 더 열심히 애쓰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눈물과 인내와 노고로 정성 드린 몇 배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돌아다니지도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 같은 오목사도 일주일 내내 자기 할 일로, 때로는 꿈속에서도 설교해대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복음을 추구하는 목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콜록거리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마누라가 듣기에도 지겨울 정도로 밥상머리든 잠자리든 가리지 않고 그 '말씀들'을 상고하고 파헤치느라 사투를 벌이기는, 집사님이 양파 심을 밭에 하루종일 거름을 해대도 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죽을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김 집사님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풀어주는 이 부분의 설교는 목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전후 사정이 들여다보이기에 이토록 마음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기가, 좋은 것을 갖다 주실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그랬다.
각자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걸, 주인이 알아서 지금도 모두를 도구로 삼아 일하고 있다는 걸 믿으면 더 이상 의심할 일도, 정죄할 일도 없건만, 꼭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불협화음이 생긴다. 예수님이 다 하신다고 하면 인간의 입이 가만있지 못한다. 인간의 행위가 점점 성화되어 하나님의 자리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 난무하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자들은 전도의 미련한 짓을 계속하고 있다. 그 최후의 보루가 교회이다.
'교회건물과 조직'을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 간주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교회'에 붙잡힌바 되었다. 목사든 집사든 모든 성도가 말씀에만 매여야 하는데 교회에 매인 자가 된 것이다. 말씀에 매이면 예수 증거하는 일로만 나서게 되고, 교회에 매이면 인간의 공로를 앞세우게 되는 갖가지 일들과 경쟁들과, 복음만을 기뻐하는 자를 정죄하는 일로 나서게 된다. 마귀가 바보가 아니다. 교회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인간들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 뒤에 딱 버티고 서서 많은 교인들을 호리고 있는 것이다. 더 안정된 자리가 어떠냐고, 앞서가는 아름다운 날개짓이 어떠냐고, 저 바벨탑보다 더 왕성한 성장은 어떻겠냐고... 너희들은 할 수 있어. 암, 너희의 하나님이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되지. 열심을 내어 정성드리는 만큼 응답해 주시지. 예수 혼자서 다 하는 것이 아니야. 너희들의 몫이 따로 있어. 너희에게 주신 온갖 지혜와 지식과 감성을 충분히 발휘해라. 그래, 잘한다......
마귀는 그정도 부채질하고 응답해주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과 결투한 대단한 마귀가 아닌가 말이다. 자기에게 경배만 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준다고 한 마귀이다. 경배가 어느 때, 왜 나오는 것인가. 주인이라고 인정될 때 나오는 것이다. 어떤 일에서 최고의 가치와 영광이 인정될 때 나오는 행위이다. 이 천하만국의 영광의 모습을 가지고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교인들이, 예수만 바라보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발광을 떨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똑같이 앞세워가는,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꿈꾸는 자들을 향해서 말이다.
인간의 세련된 구미를 잘 맞춰주는 멋있는 설교들과 다양한 목회방법들로 차려진 진수성찬은 언뜻 보기에 새로운 밥 같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매일 똑같은 밥'에 불과하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함이 없고 그 눈은 차지 않으며 그래서 또 새로운 메뉴들을 찾아 방황하도록 고달픈 행로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밥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용서'뿐이다. 그곳에서 솟아나는 물은 다시 목마름이 없는 영생의 샘물이기 때문이다(요4:14).
예수님에게 눈에 띌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던가. 터럭만큼이라도 보기 좋은 모습이 있었던가. 아니다.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님만 우리의 주님이시다. 보기좋고 아름답게 내세워지는 곳에서 십자가지신 주님은 계시지 않는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곳에서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많이 성화되었다고 여기는 인간)에게 보내는 박수갈채와 칭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더 이상 애써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 주님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 우리가 그 곳만은 내보이기 싫어서 은밀하게 숨겨둔 가장 밑바닥, 하필이면 그 비밀스러운 곳으로 예수님은 내려오신 것이다. 만나려고 올라갈 일이 없다. 그 낮고 천한 깊은 곳에서 오히려 기다리고 계신다.
그 곳을 들키운 자는 복되다. 그 곳이 주님께 폭로되었음을 안 자는 가슴이 뻐근하도록 아플지라도 정녕 복되다. 그 곳에서만 십자가지신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편 90:8,9)'라고 고백하게 된다. 즉 성도는 십자가지신 주님 앞에 서면 자신의 은밀한 죄가 다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 중 주님을 몰랐을 적 몇 날만 그렇고 예수 믿고 난 나머지 날들은 괜찮다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그렇다는 것이다. 평생이 그러다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이름을 내는 일로 정진하다가도 말씀 앞으로 붙들려오면, 예수를 바라보는 일로 목숨을 바치기까지 힘을 내도록 인도함 받는다.
쉬쉬... 샤악샤악... 그리고 조용조용... 어느새 장성한 풀잎과 나뭇잎들이 이 가을바람에 마른 잎이 되어 서로의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다. 그 소리조차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또 듣고 싶으니... 뒤꼍에 숨긴 채로 피어, 바라볼 때마다 더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저 연분홍 코스모스 한무리는 또 어떻고... 갑작스런 찬 바람결에 그 몸이 처참하게 부서져내려도, 꽃잎만큼은 여전히 하늘보고 하늘거리기를 쉬지 않는다. 매일 아침, 동트기 전부터 뒤꼍으로 난 창문을 통하여 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이토록 가슴 설레인다. 똑같다고 지겹지 않으며 오히려 날마다 새롭다. 마치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한 딱지를 천하의 보물인양 숨겨놓고, 혼자서 생각하며 좋아하고 남몰래 꺼내보며 어쩔줄 몰라 하는 철부지 아이처럼...
결혼한 지 11년째, 밤마다 함께 잘 수 있는 남편이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지루함이 아니라 기적이다. 하물며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에베소서 1:4-6)'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에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 한 분만을 날마다 기뻐하는 자가 성도이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알면 알수록 '내가 무언가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보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이루신 예수 안에서 새 언약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만 지탱되는, '은혜의 왕노릇하심'만 펼쳐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 회색벽돌 담장 뒤로도 또 다른 보금자리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보인다. 약한 놈을 잡아채 올리려고 저 높은 곳에서부터 급 하강하는 매도 보인다. 꽃잎도 가만히 떨어질 준비를 하는가하면 지금 떨어져 내리기도 한다. 뒤늦게 막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도 있다. 아마도 저 봉오리는 피기도 전에 바싹 말라버릴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주인 안에서 그 분이 내리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주어진 자리를 채우고 있다. 날아오르는 새만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아무도 모르게 떨어져 내림도 사명 감당중인 것을 제발 인정하라!!! (*) ------(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