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여름 밤을 장식했던 최고의 TV 드라마라면 단연코 ‘전설의 고향’을 들 수 있다. 한여름 밤하늘을 이불삼아 평상에 누워 살랑살랑 할머니가 손부채를 부시칠 무렵이면 우린 ‘귀신 얘기’를 졸라댔고, 할머니는 못이시기는 척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곤 하셨다.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칼을 풀어 헤친, 하얗다 못해 창백했던 귀신들은 상당히 ‘과묵’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기에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 하지만 도무지 말을 해야 풀든 끊든 할 것 아닌가. 그저 무표정한 얼굴만 들이밀어대니 멀쩡한 사람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묵한 귀신은 ‘동방의 고요한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보다. 폐허가 된 집에 기거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만 놀래키는 우리네 귀신과 달리 바다 건너 일본의 귀신들은 더 적극적이다. 자신의 homeground를 정해놓고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니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이들 역시 말이 없다.
기왕에 귀신 얘기를 하는 김에 중국의 귀신도 생각해보자. 홍콩의 강시. 얘들이 두 팔을 앞으로 뻗고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은 차라리 귀엽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설치고 다녀도 부적을 이마에 척 붙이는 순간, 강시는 귀신에서 장승으로 변한다. 허우대는 멀쩡하게 생겨서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생명 연장의 꿈과 함께 종족을 번성시키는 서양의 귀신도 마늘과 십자가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하지만 우리나라나 일본의 귀신에게는 도무지 약이 없다. 그저 자신들의 원한을 풀어주기만을 바라며 오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산 사람들을 놀래키고 있다.
전설의 고향을 볼 때의 필수품은 바로 이불. 땀을 뻘뻘 흘릴만치 더운 여름에도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려서 보곤 했다. 그러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라치면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하지만 무섭다고 악악거리다가도 손가락 사이로 화면을 쳐다보는 나를 발견하곤 했지. 이브가 선악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판도라가 상자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처럼 귀신에 대한 호기심은 기어코 나를 TV와 대면하게 했다. 이불이란 어떤 것인가. 햇살에 잘 말린 보송보송한 이불은 포근함과 나른함, 피곤한 몸을 편하게 하는 개인적이고 안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의 이불 속은 그런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비틀어낸다. 긴장이 풀리는 장소가 바로 새로운 긴장감과 사건을 유발하면서 우리의 허를 찌르는 셈이다.
그렇다면 집은? 여기서는 home, sweet home~ 이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아무리 치장을 하고 감추려해도 그 기저에 깔린 음습한 기운을 덮지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냥 오르려해도 난간을 잡아야만 하는 좁고 가파른 계단, 항상 커튼은 드리워져 있는 커다란 창은 불안감을 조성하는데 일조를 한다.
이런 외형적인 요소 외에 귀신 영화의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음향이다. 과묵한 우리네 귀신들이 온전하게 완벽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련님~”하는 호칭이나 “아하하하~~” 하는 웃음이 대부분이다. 왜?? 귀신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기절을 하니까. 어쨌거나 이런 귀신들의 움직임과 말을 대변하는 장치로 음향효과를 사용하는데, 귀신 영화의 전형이 되어버린 Ring에서의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과 딱딱 하는 관절들의 꺾임 소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의 제목인 「주온」은 우리말로 해석하면 ‘원한’을 뜻한다. 무릇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육신은 이승에 묻히거나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영혼은 저승으로 가서 조상으로 남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혼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것을 사령(死靈)이라고 한다. 얘기가 넘 어려워졌는가? 간단하다. 이들을 이곳에, 산 자들이 머무르는 이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바로 한(恨)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저에 깔린 ‘권선징악’은 바로 이 죽음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읽고 왠지 뒤가 캥기는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심은 어떨런지... 장난삼아 던지 돌이 개구리를 황천길로 인도할 수 있듯이, 나의 말 한 마디, 무심한 태도가 상대방에게 아픔으로 남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마시라. 지금도 그대를 보고 있는 수많은 눈들이 있음을 기억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