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문학촌 문학기행 관련// 240422
황순원 문학의 동심의식과 서사구조 - ③ 동심에 뿌리를 둔 긍정적 인물
황순원 소설에서의 동심의식은 늘 긍정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대부분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황순원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대체로 사회나 역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시대나 역사를 초월한 인간본성의 문제야말로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주제의식이었다. 작중의 주인공으로 어린이나 노인이 빈번하게 설정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원형적 선의지로서의 동심
작품집 「기러기」가 보여주는 황순원 소설의 변모는 등장인물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게 된다. 「늪」에서는 주로 지식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기러기」에 와서는 아이와 노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병든 나비」(1942)에서는 어린 생명을 한송이의 꽃에 비유하는 노인을 등장시켜 죽음과 생명의 상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애」(1942)라는 작품은 노년의 허전함을 느끼며 자식 잉태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맹산」(1943)에서는 타인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보여주는 노인이 등장한다. 「독짓는 늙은이」(1944)에서는 절망적인 외부 상황을 장인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인이 등장한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노년과 동심을 동일한 선상에 둠으로써 인간의 원형적 세계로서의 모성의 위상을 드러내려한 것이다. 황순원 작품에서 관조적이고 화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노인들은 어린아이들과 순수함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타락한 성인의 남성세계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2. 변모하는 삶과 지속적 인간상
「기러기」에서 전통적 세계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부터 좀 더 현실에 밀착하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가 직시한 사회문제는 계급대립이나 민족갈등보다는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의 붕괴였다. 해방기 황순원 소설은 주로 역사이 힘에 의해 훼손되고 붕괴되는 공동체의 상황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해방기 문학의 보편적 주제는 식민통치로 인한 실향에서 비롯된 귀향과 귀소의 문제라고 할 때, 황순원 역시 이러한 귀환 동포의 실상을 「두꺼비」와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에서 예리하게 폭로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인륜마저 포기해야 하는 참혹한 현실과 그것이 ‘집’의 빼앗김에 대한 집중 탐구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 「곡예사」 시기의 황순원에게는 현실에 대한 한층 강화된 대응 양상이 드러나는 바, 당대 현실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에서 수용하기 시작하며, 작품의 서사구조 내에 외부 현실이 중요한 상관관계를 맺으며, 주인공으로 어린이와 노인이 아닌 성인이 설정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시기 작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의 핵심은 ‘집의 빼앗김’으로 요약되는데, 그들은 외부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물형으로 본질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3. 운명에의 순응과 인고의 미학
황순원의 첫 작품집 「늪」에 실렸던 「닭제」의 반수영감이 보여주는 샤머니즘적 세계관, 「기러기」의 세계가 보여주던 ‘전통적인 것, 토속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애착, 즉 노새 달구지 재니, 독짓는 늙은이 주영구슬 따위의 전통적인 것에 대한 애착’은 「학」과 「잃어버린 사람들」에 투영된 설화적 상상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변화하는 사회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보여주고 있다.
「과부」(1952)에서는 유교적 윤리관의 굴레로 인해 평생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던 두 청상과부의 비극적 생애를 보여준다. 「두메」(1952)에서는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그것에 순응하고 마는 비극적 여인상을 보여준다. 「필묵장수」(1955)에서 이십여 년 간 서화를 공부하였지만 특별한 능력도 없이 괴나리봇짐 행색에 필묵을 팔며 전국 각지를 떠돌아 다니는 필묵장수 서노인도 있다.
이처럼 일련의 작품들에서 황순원은 주어진 생활 조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각이나 저항 이전에 원형적 가치의 세계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시대적 변화와 거리를 둔 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논리를 따르며 정해진 길을 가는 존재들이다. 즉 시간성이 배제된 설화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인 셈이다. 황순원 작품에 나타나는 설화성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지닌 선한 심성이 타락한 현실에 오염되지 않은 채 순수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세계라는 것을 위의 인물들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황순원의 인간의 근본적 선성에 대한 믿음과 동물에 대한 애정은 이후의 작품세계에서 상처 입은 여린 생명을 따뜻하게 감싸는 무한 포용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황순원은 어떠한 어두운 시대상황 속에서도 끝내 절망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바탕으로 궁극적 긍정과 희망의 문학을 추구해 간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정수현, 『황순원 소설 연구』, KSI한국학술정보(주),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