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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동심원 노경찬 밤바다는 윤곽조차 구별하기 힘들었다. 저기쯤이 바다일 거라고 짐작된 곳은 먹물을 엎지른 것처럼 누워있었다. 커다란 아가미를 벌린 채 먹이를 노리고 있는 괴물처럼 보이는 어둠 속으로 가뭇없이 빨려들 것만 같아 윤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잠시 멈추었나 싶던 눈발이 하나 둘 유리창에 부딪치며 사라지곤 하더니 순식간에 함박눈으로 변했다. 휘날리는 눈발이 굵어지면서 창밖은 부유스름해지고 있었다. “어라? 요상헌 날씨구먼 그려. 이월 중순인디 이러코롬 많은 눈이 끝일 새 없이 쏟아징게 말여. 겨울 내내 눈 한번 구경하기 심들었던 곳인디. 뭔 일이당가? 이렇게 발이 푹푹 빠질 맨큼 쌓인 눈을 보기는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고 혔쌌드만.…… 그나저나 내일은 시내 병원에 가서 복수를 빼내야 헐틴디 나갈 수나 있을랑가 모르것네.…… 뭣땀새 뱃속에 물이 차오른당가? 마치 아를 밴 것처럼 뽈쏙 나온 것이 영 남새스러워 죽것구만. 그려.” 윤주를 향하여 말한다기보다 허공에 던지듯 노인은 어둔한 어투로 말했다. ‘저 노인네가 실성을 했나?’ 노인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서있던 윤주는 이마에 굵은 주름을 잡았다. ‘복수가 차오른다는 것은 죽을 날이 가깝다는 뜻인데, 소풍이라도 떠나는 초등학생처럼 구는 모습이라니!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게야. 뭐야.’ 못마땅한 마음이 배배꼬인 심사가 되어 윤주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며칠 만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낯선 모습이 거울처럼 상을 잡아주는 유리창에 떠올랐다. “엠병할! 비싼 돈 처들이고 와서 저놈의 인사 땜에 낫기는커녕 병골이 더 깊어지게 생겼으니. 나 원 참!” 노인 또래의 뚱보가 혼잣말로 불평을 쏟아놓았을 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병실의 분위기를 익히기 전까지 윤주는 노인의 병자답지 않은 변죽과 그럴 때마다 이상스럽게 반응하는 환자들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노인의 병실은 이 병실에서 두 칸 건너에 위치한 514호실이라 했다. 입원료가 3배가 넘는, 보통 처지에선 감히 들 수 없는 일인용 병실을 놓아두고, 환자와 간병인으로 복작대는 6인용 병실로 찾아드는 노인을 이해할 수 없어 윤주는 아예 무시하곤 했다. 오늘 퇴원한 선희 엄마는 5년 전에 왼쪽 가슴을 그리고 2년 전에 오른쪽 가슴마저 들어낸 유방암 환자였다. 임파선까지 전이되어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선고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니 먹이고 싶다며 울면서 짐을 쌌다. 데리러온 남편 차에 오르며 그녀는 윤주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해요. 그러다 시기를 놓치면 나처럼 된다고요. 젊은 나이에 유방 없이 살아야한다는 결심을 하긴 쉽지 않겠지만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손을 꼭 잡으며 진심으로 걱정하던 선희 엄마였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보니 울컥 넘어오는 심란함으로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노인은 오늘밤 그 빈 침대를 차지하고 이곳에서 잘 모양이었다. 서른 살 문턱에 선 윤주에게 젊은 의사는 냉철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 유방암입니다. 의사는 파랗게 질린 환자에게 자신이 방금 뱉은 끔찍한 말에 대해 충격을 완화할 목적인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 유방암과의 싸움은 이길 승산이 높은 싸움이며 충분히 싸울만한 가치도 있습니다. 미리 절망하지 마십시오. 암과의 싸움은 금방 끝나는 100미터 달리기는 아닙니다. 지칠 정도로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즐기면서 달려야 합니다. 부디 암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십시오. 윤주의 왼쪽가슴에 있는 2.5센티 크기의 종양에 대해 의사는 완전 절개 수술을 권했다. 가슴 한쪽을 완전히 들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을 몇 달 앞둔 예비 신부에게 그건 얼마나 가혹한 주문인가?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수술만하면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은 윤주의 귓가에 윙윙거릴 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뒤엉켰다. 느닷없이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 공포가 온몸을 내리눌렀다. “뭐시 보인다고 그리 넋 놓고 보고 있당가? 자넬 떨구어 놓고 간 젊은이를 생각허는 겨? 건강혔을 때 애인도 필요헌 거지. 거시기혀야 아무 소용없응게 이리 와서 잠이나 자랑게.” 괜한 참견에 윤주는 도끼눈을 뜨고 노인을 째려보았다. 하루하루 삭정이처럼 말라가는 노인의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윤주는 황망히 눈길을 돌렸다. 약혼자인 그의 차를 타고 온 그날도 오늘밤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요양병원은 남녘 해변 가 둔덕에 고즈넉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병원 뜰에 내려서자 전면에 펼쳐진 바다의 정경은 장관이었다. 망망대해라고 했던가.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출렁임도 없이 잔잔했다. 푸른 물속으로 새하얀 눈꽃은 아픔을 순응하듯 스며들고 있었다. - 아! 이 맑은 공기, 참 좋다. 이모 말대로 정말 희망이 보이네. 그렇지? 바다를 향하여 가슴을 쭉 펼치면서 불안을 없애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그가 위로했다. - 희망? 어떤 희망이 보여? 여기에 있으면 내 몸에서 암 덩어리가 빠져나간대? 유방을 잘라내지 않아도 된대? 소용없어. 모두 미친 짓이야. 마치 발병이 그의 탓이라도 되는 냥 윤주는 심술을 부렸다. 그런 앙탈을 부릴 적마다 넉넉한 웃음으로 감싸주던 그. 이모의 권고로 그를 만나기 시작했을 땐, 무엇보다 미적지근한 그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술에 물탄 듯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그의 사고방식은 중늙은이처럼 느껴졌다. 그랬는데, 요즈음 들어 그의 포근한 이해심이 한결 위로가 되긴 했다. 의사가 수술을 권했을 때 윤주는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와 이모가 번갈아가면서 종용했지만 윤주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윤주의 고집을 꺾지 못한 이모는 자연치유적 생활로 중증의 암환자들을 많이 치유했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며 이 요양병원을 추천했다. 처음 이곳에 짐을 풀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노인의 수다였다. 노인은 끊임없이 말을 붙여왔고, 그런 노인의 말을 묵살해버리는 것으로 윤주는 부글거리는 속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노인은 말을 참고 살다 병이든 사람처럼 굴었다. 설사병 환자가 썩어 악취 나는 오물을 쏟듯이 순간순간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그런 노인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몸을 야금야금 무너뜨리고 있는 병에 대해 알고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윤주는 창에서 몸을 돌려 병실을 둘러보았다. 암이 돋아난 부위는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병원에서 모든 치료를 다해본 다음, 이제 먹고 싶은 것이나 마음껏 먹으라며 선심 쓰듯 내보낸 사람들이었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잘 먹기 위해 그들은 이곳으로 왔다. 맑은 공기로 새카맣게 변한 폐를 씻어내려는 환자, 좋은 재료를 골라 만든 음식으로 찌들고 꼬인 위장을 개조하려는 사람, 규칙적인 운동으로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건강을 찾고자하는 그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전국각지에서 모였다. 희망을 가졌다고 하나 수시로 찾아드는 고통 때문에 그들은 빈번하게 지옥을 드나들고 있는 형편이어서 노인의 말에 대거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병실로 찾아와 노인은 가슴을 툭툭 치곤했다. - 워따, 폴짝 뛰고 환장허것네. 부처님맨키로 고렇게 수양허면 암이란 놈이 아이 무시라하며 항복허간디? 웃어야 혀! 웃으랑게. 위와 아래에 각각 네 개씩 남은 누런 앞니를 보이며 노인이 히히 웃었을 때도 모두들 눈을 감거나 돌아눕곤 했다. 웃으라는 노인의 말에 윤주는 웃다가 죽은 불쌍한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웃음은 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함께 몸 섞고 살던 아버지마저도. 맨홀에 빠져 숨이 끊어진 남동생의 시체 앞에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실실 웃음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는 화를 냈다. 그만 웃으라고. 웃음을 그치라고.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 웃었다. 둘러 싼 구경꾼들의 비웃음에 울화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던졌다. 그중 어머니의 머리를 명중한 것은 불행하게도 끝이 날카로운 맨홀 뚜껑의 손잡이였다. 어머니는 억, 소리와 함께 동생의 사체 위로 엎어졌고, 병원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 죽은 어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의 잔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존속치사상해죄로 유치장에 들어간 아버지는 폐인이 되어 석방되었다. 열세 살이었던 윤주를 거둔 이모에게 짐으로 남기 싫었던지 아버지는 말없이 떠났다. 부모의 얼굴도 그들에 대한 연민도 희미해질 무렵 이모가 말했다. - 그건 병이었단다. 웃는 병, 웃을 수밖에 없는 병.…… 그런 병이 어디 있느냐는 윤주가 따지자 예로부터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고 하지 않더냐며 이모는 한사코 우겼다. 어른이 된 윤주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웃다가 날아온 돌덩이에 맞아죽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어머니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그와 코믹영화를 보러간 적이 있었다. 시작부터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박장대소를 하던 그가 웃음기하나 없는 정색한 얼굴로 심각하게 화면을 응시하는 윤주를 발견하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안 우스워? - 응.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더니 배꼽을 잡으며 웃는 것이었다. 웃지 못하는 여자. 그런데, 노인은 자꾸 웃으라 했다. 그때마다 윤주는 노인이 어서 죽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기를 마음속으로 몰래 빌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든 눈은 그쳐 있었다. 밤 사이에 노인의 배는 터질듯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래서인지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무척 힘들어보였다. 응급차에 실려 시내 병원으로 떠나면서도 노인은 씩씩했다. “나 댕겨 올팅게 걱정 말더라고. 그라고 먹고 잡픈 기 있으면 말해 보랑게.” 노인이 간다고 해도 서운타고 하는 표정들이 아닌데 눈치도 없이 부득부득 말하라고 했다. 마치 오일장을 다녀오려는 마나님처럼 굴었다. 반응이 없자 무안했던지 노인은 윤주를 지목해 물었다. “자넨 뭐시 먹고 싶은겨?” 윤주는 문득 노인을 골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노인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의 사랑. - ” 윤주를 바라보던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얼러려? 시방 뭐라고 혔데여? 말 못하는 벙어리 처자인 줄 알았더니 아닌개비네!” 알았다는 듯 크게 머리를 주억거리며 떠났다. 노인이 떠나자 그녀의 존재가 갑자기 절실하게 느껴졌다. 진절머리를 내던 노인의 수다가 사라지며 찾아든 고요는 더 참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병실은 커다란 무덤처럼 내려앉았고, 환자들은 죽음의 검은 날개에 휩싸인 듯 불안해 했다. “썩을 놈의 인사. 빨리 오지 않고 뭐하고 있남!”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끝내 참지 못하고 뚱보노인이 중얼거렸다. “갈수록 복수 빼내는 시간이 길어지는데요.” “그러게 말예요. 그만큼 갈 날도 멀지 않다는 거겠지요.” 병실 이쪽저쪽에서 한숨소리가 터졌다. 그때, 퇴원한 선희 엄마 자리를 메울 환자인 듯 요란한 옷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서 큰 가방을 끌고서.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위암 말기라는 판정이 오진일까? 의심할 정도로 병색은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병실의 침묵 속에서 여자는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병실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 찬 시선으로 작은 가방을 꺼내는 여자를 보지 않는 척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아세톤을 꺼내더니 화장 솜에 묻혀 손톱을 닦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자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눈치 챈 병실 사람들은 모두들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여자의 다음 행동을 궁금한 얼굴로 기다렸다. 열 손가락을 다 닦아낸 여자는 작은 가방 속을 아예 침대 위에 쏟아 붓는 것이었다. 주르르 굴러 나오는 작은 병들, 그것은 색색의 매니큐어였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에 흰색, 은색, 금색까지. 병실사람들은 아예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열 손가락에 각기 다른 색을 정성스럽게 입히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병색을 전연 느낄 수 없는 이유를 알아챘다. 화려할 정도로 두껍게 바른 화장으로 위장한 모습.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들자 윤주는 씁쓰레한 심정이 되었다. 노인은 그날 저녁 늦게 요양원으로 돌아왔다. 차오른 복수를 빼낼 수 있도록 아예 옆구리에 구멍을 내어 호스를 꼽고 돌아왔다.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노인은 힘이 들었던지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르게, 자신의 병실로 가더니 조용히 잠이 들었다. 대신 우리 병실의 환자 모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싶게 노인은 기력을 되찾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병실로 들이닥쳐 잠들어있는 병실 사람들을 깨웠다. “나 왔응게 조깨들 일어나 보더라고. 나가 자네들 줄라고 사온 것이 있응게 싸게싸게 일어나란 말이시.” 뒤척이다가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질 때에야 겨우 잠이 든 탓으로 병실 사람들은 병든 닭 마냥 붉은 눈을 비볐다. 노인이 눈앞에 들이민 것은 회포대봉지에 싼 군고구마와 군밤이었다. “따술 때 먹어야 맛난디……, 식어버려 어쩐다냐? 그려도 옛날 맛이 나긴 헐 것여. 자, 어서 먹어 보랑게.” 노인은 껍질까지 벗겨 겨우 눈을 뜬 병실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내밀고 다녔다. 그러다가 새로 들어온 여자를 발견하곤 참지 못하겠는지 한마디 했다. “얼려려! 이게 무슨 화상이데여. 왜놈 연극 가부키에 나오는 게이샤처럼 흰색으로 떡칠을 한 상판이 가관이네! 그려. 그라고 그 손톱은 또 왜 그려! 미친 년 맨크롬 오색 잡것을 다 칠했구먼!” 순간 병실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 거침없는 노인의 지청구에 여자가 어떤 반격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행태로 봐서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여자의 성질은 불같았다. “상판에 떡칠을 허든, 오색 잡것을 다 칠허든, 곧 염라대왕 앞에 바칠 내 몸뚱이 내 맘대로 헌다는디 무슨 참견여. 참견이.” 나이든 노인의 면전에 뱉어낼 수 없을 따름이었지 속으로는 욕설을 가득담은 어조였다. 곧 죽을 몸뚱이라는 말에 마음이 심란했던지 노인은 더 이상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 가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윤주 쪽으로 다가와 군고구마를 내밀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구해왔어요? 그거나 주세요.” “옴매, 한 번 입이 터징게 인자 술술 잘 씨부렁거리누만 잉. 어디 아- 해 보더라고. 자네 목구녘에 친 거미줄을 거둬내야 쓸 것잉게.” 노인은 옴죽한 입을 벌리고 여자에게서 받은 무렴을 금세 잊었는지 히히 거렸다. 그러더니 윤주가 원하는 사랑인지 사탕인지 갖고 왔으니 병실로 오라고 했다. 농담인 줄 알았다. 윤주는 그저 놀리려고 한말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인은 점심 식사 시간에 만나자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윤주는 자꾸 마음이 찜찜해졌다. 죽음의 문턱에 선 노인네를 괜히 놀렸다고 후회가 되었다. 한편 무엇을 주려는 걸까? 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오전 중 시간이 지루했다. 아침 식사 후 산책로를 다섯 바퀴나 돌았지만, 오전 10시 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드나들었을 노인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일도 별스러웠다. 무거운 침묵이 부담스러웠던지 뚱보노인이 윤주에게 말을 걸었다. “약혼자는 왜 오지 않남?” “바쁠 거예요. 내 몫까지 도맡아 해야 하니까요.” “뭐하는 사람인감?” “재단사예요.” 그를 만난 건 구포 섬유공장에서였다. 그는 재단사, 윤주는 미싱사로 십여 년을 같이 일하다보니 한 식구처럼 정이 들었다. 특별하게 가슴이 떨린다든가 필이 통하는 감정은 없었지만 같이 있으면 마음이 포근했다. 사랑이 별거냐? 싫지 않으면 됐지. 하며 이모는 둘 사이를 급히 묶어주었고, 둘은 순순히 약혼을 했다. 이모는 언제까지 남의 일만 하겠느냐며 그동안 모아 논 돈을 합쳐 공장을 차리게 했고, 윤주가 발병하기 전까지 그들은 유명메이커 브래지어의 모사품을 만들었다. 일반요양원보다 비싼 입원료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밤을 새우며 재봉틀 앞에 앉아 바닥이 내려앉을 것처럼 밟아대고 있을 것이다. 그때 통증이 윤주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바늘로 왼쪽 가슴을 사정없이 쪼아대는 아픔은 온몸이 비틀릴 정도로 심했다. 처음이었다. 참을 수 없어 얼굴이 심하게 우그러졌던가. 뚱보노인이 왜 그러남! 하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 한번으로 씻은 듯이 멈춘 통증은 몸 안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윤주에게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안에 있기 때문에 달아날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윤주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열망으로 윤주는 요양원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보고 싶다.’ 514호 병실은 조용했다. 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노크를 하지 않고 윤주는 살며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그런데 웬일인가?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병실 한가운데 내팽겨진 검은 비닐에서 흘러나온 물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야채를 담은 봉지는 찢겨져 안의 재료들을 게워낸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앞에, 노인은 고양이 앞에 쥐 마냥 움츠린 채 앉아있었다. 누굴까? 궁금하여 고개를 드밀다, 그때 마침 고개를 든 노인의 눈과 윤주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한줄기 눈물이 노인의 볼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렸다. 못 볼 것을 본 듯 윤주는 얼른 문을 닫았다. 병실로 돌아오자, 시선이 윤주에게 쏠렸다. 묻지는 않았지만, 노인이 가지고 왔다던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못 참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윤주는 고개를 저었다. “무시기? 그럼 그 노인네가 거짓뿌렁을 혔남!” 뚱보노인이 자기가 당한 것처럼 괜히 화를 냈다. “그게 아니라 손님이 와있어요.” “손님?” 그러자 뚱보노인은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일 게야. 기른 정도 남다를 텐데 혼자 자란 것처럼 어미를 손톱 밑에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잘난 검사 양반.” 윤주는 울고 있던 노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노인의 굴곡진 삶이 한줄기 눈물로 윤주의 가슴까지 다가왔기 때문에 가볍게 말해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암환자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혼자 남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혼자서 모든 짐을 지려고 하지 마라. 혼자서 암과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라. 그들은 당신의 생명과 같이 아주 소중한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데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젊은 의사는 차갑게 얼어버린 윤주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읽었는지 다른 이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세심하게 당부했다. 암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니 절대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암과 친구가 되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의사는 모르고 하는 말이다. 사귀는 방법을 몰라 주변에 속 털어놓을 친구하나 없이 산 윤주에 대해. 주변머리조차 없는 윤주에게 사람도 아닌 암과 친구를 하라니! 차라리 깨끗이 죽어버리라고 악담을 하지. 대상도 분명치 않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윤주는 참지 못하고 병실을 뛰쳐나왔다. 한달음에 해변까지 달렸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정신없이 뛰어가는 윤주의 발길은 매우 위태로웠다. 모래사장은 처녀림처럼 티끌하나 없는 은백색이었다. 헉헉거리며 윤주는 은백색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다. 회색빛 눈구름이 손을 뻗치면 금방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엄마-. 윤주는 하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검은 하늘 사이로 웃음기 남은 어머니의 얼굴이 살짝 엿보였다. 그때 오랜만에 휴대폰이 살아나 삐삐거렸다. 보낸 문자에 대한 회신이 왔다. ‘나도 보고 싶다. 주문 들어온 거 해결하면 곧장 달려갈게!’ 어머니의 얼굴을 보아서인지, 그이의 메시지를 받아서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설움과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돌아오는 길에 복도를 지나치다가 무심코 노인의 병실 문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쿵쿵 울렸다. 윤주는 벌컥 문을 열었다. 노인은 웅크린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구부리고 누워있는 노인의 체구가 한줌정도로 작았다. 짠한 마음이 울컥 목을 타고 올라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난장판인 바닥을 치우기 위하여 윤주는 몸을 구부렸다. 그때 자는 줄만 알았던 노인의 목쉰 소리가 들렸다. “내비 둬. 이게 모두 죄다짐잉게.” 윤주는 널려진 채소들을 주섬주섬 들어올렸다. 노인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윤주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씬 비린내를 풍기는 비닐봉지를 주워 올리며 윤주가 물었다. “이건 뭐예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봉지를 들춰보자, 얼었던 제 몸을 녹인 물로 질퍽해진 준치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이거 준치죠? 이것이 드시고 싶었어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윤주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생선을 그냥 두고 나올 수 없어 채소와 함께 들고 나왔다. 잠시 망설이다 환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으로 갔다. 때를 넘겨서인지 주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식사 도우미들도 보이지 않았다. 개수대에 생선을 넣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생선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이 준치라는 사실을 이모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랬지. 썩어도 준치라고. 그런데 그건 잘못 말한 속담이라 했지. ‘물어도 준치, 썩어도 생치’가 맞는다고 이모가 알려주었다. 어쨌든 생선 가운데 가장 맛있어, 진어라고도 불린다는 준치를 노인이 왜 사가지고 왔는지 윤주는 몹시 궁금했다. 생선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기 위하여 소쿠리에 건져 놓았다. 그리고 비닐 속에 뒤죽박죽 섞여있는 재료들을 꺼내어 씻기 시작했다. 고사리를 씻어 놓고 무 껍질을 벗겼다. 그런 다음 쑥갓을 씻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노인의 지청구가 들렸다. “고로코롬 막 문질러대면 남어 나것냐? 아를 다루듯 살살 흔들어 씻어야제.” 노인이 그릇을 채갔다. 사실 윤주는 찌개 한번 제대로 끓여 본 적이 없었다. 섬유공장은 삼교대였는데, 집에서 식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거의 공장안에서 해결했고 집에서는 항상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공장을 차린 후에도 마감까지 대주어야하는 일감으로 시간을 아끼느라 간편한 매식을 주로 했다. 그래서 잘 만드는 음식도 없었고, 부엌일은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음식 만드는 것을 피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편한 쪽으로만 생활해 왔다. 창피하고 민망함으로 벌겋게 달아있을 얼굴을 감추려고 윤주는 노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 봉지 속에 남아있는 것들을 꺼내어 조리대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파, 마늘, 생강, 그리고 청주 한 병이 나왔다. 간암엔 술이 독약이라던데?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상식은 있어 윤주는 속으로 놀랐으나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노인이 슬쩍 건너다보더니 준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놀랠 것 ?어. 나가 먹으려는 게 아니고, 저 놈아에게 멕일 거니까.” 죽어있는 생선에게 술을 먹인다는 노인의 말에 윤주는 픽 웃었다. “그려. 그렇게 웃으면서 살어. 시상엔 웃고 살 일도 하 많잖어. 젊디나 젊은 것이 시상 다 산 년 맨크롬 인상 쓰고 있으면 오던 복도 달아날 거고만.” 마늘을 잘게 저미고 강판에 생강을 갈아 즙을 낸 다음 청주에 섞더니, 아니나 다를까 준치가 들어있는 그릇에 아낌없이 들이부었다. 속 깊은 친구에게 정으로 술을 권하듯이. 노인의 빠른 손놀림을 윤주는 감탄하는 눈으로 보면서 은근슬쩍 떠보았다. “준치 찌개가 그렇게 맛있나요?”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노인의 등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었다. 손질한 준치의 머리와 뼈에 큼직하게 썬 무를 함께 담더니, 제법 많은 분량의 물을 부어 불에 올려놓고 노인이 윤주 앞에 앉았다. “증말 수술 안 헐라고? 나야 저승길이 코앞에 닥친 사람잉게 그냥저냥 저승사자 기다리고 있지만, 처자야 혈 수 있는 대꺼지 혀 보아야지. 안 그려? 까짓 젖퉁이 하나 없다고 싫다는 놈이면 보나마나 뻔한 인사 아니것어?” 그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정 짓듯 말하는 노인의 말에 윤주는 파르르 얼굴색이 변했다. 곧 죽을 노인네에게 괜한 관심을 보였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그래서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참에 그 기색을 읽었던지 아니면 눈치가 빨랐던지 노인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더러 어머니의 사랑인지 사탕인지 가져다 달라고 혔지? 그려서 준치를 사온 것여.” 도대체 무슨 소린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노인은 조리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냄비의 육수가 펄펄 끓어올랐다. 끓고 있는 물에 토막 낸 준치와 고사리를 넣자 부글거리던 육수가 스르르 잦아들었다. 뚜껑을 덮지 않고 그대로 불 위에 올려둔 채 노인은 물기 빠진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손질하며 말했다. “비린내를 없애려면 뚜껑을 연채 끓여야 혀.” 어쩌면 묻지도 않았는데 사람 마음을 그리 꿰뚫어 볼 수 있는지. 그러기에 나이를 그저 먹는 건 아니구나. 윤주는 생각했다. 향기로우면서 입맛을 당기게 하는 준치 특유한 냄새가 넓은 주방을 가득 채워갔다. “자네, 이 생선에 대해 전해오는 야그는 알고 있것제?” “…….” “처음에는 이 준치란 놈에 까시가 별로 없었대여. 그란디 괴기가 유난히 맛이 있응게 사람들이 자꾸 잡아먹어 씨가 마를 지경이 되자 용궁이 발칵 뒤집혔다는구먼. 그래서 낸 꾀가 뭐시냐 허면 다른 물고기들이 지몸의 까시 한개 씩을 뽑아 준치 몸에 박아 주었대여. 그 후로 준치는 유난히 까시가 많은 생선이 되었제.” 노인은 합죽한 입으로 침을 튀기며 얘기를 끝마치고는 자신이 한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혼자서 히히 웃었다. 웃고 있는 노인의 표정 뒤에 숨어있는 슬픔을 윤주는 언뜻 본 것 같았다. 마치 하회탈을 쓰고 춤추는 광대처럼, 노인은 본래 자신의 얼굴을 웃고 있는 탈 뒤에 숨겨놓고 있었다. 준치찌개가 냄비 속에서 거의 익어가고 있음을 냄새로 짐작했다. 노인은 냄비 속에 남은 재료를 넣었다. 파 채친 것을 한 쪽에, 마지막으로 쑥갓을 넣고, 그 위에 통깨와 빨간 고추 채를 예쁘게 올리더니 불을 껐다. “간은 볼 줄 아능가?” 노인은 한 수저 뜬 국물을 후 하고 불더니 윤주에게 내밀었다. “좀 삼삼허제?” 말없이 받아먹자 노인이 물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격해져 윤주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노인이 식탁 위에 냄비를 놓더니 옆자리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윤주는 수저와 젓가락을 노인 앞에 놓아주며 순순히 앉았다. 모처럼 솜씨를 부렸으니 맛있게 먹어달라고 노인이 말했다. 정말 맛이 있었다. 밥통에 남아있던 찬밥까지 들고 와 정신없이 먹는데 그런 윤주를 건너다보던 노인이 간절한 어조로 청했다. “시상에 공짜는 없응게 인자부터 나가 허는 말 들어줘야 혀! …… 똥구녁 찢어지게 가난헌 집에 태어난 여자가 있었대여. 어려서부터 가난이라면 진절머리를 냈는디, 나이가 차 성혼자리가 생겼는디, 그 집 또한 여자네 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든개벼. 여자는 팔자려니 하고 시집을 갔대여. 이년 쯤 살았던 개벼. 지지리도 복이 없었던지 머스마 하나 달랑 냄겨 놓고 남편은 저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는디. 없는 집인디 어쩔것여. 머스마만 셋이나 있는 재취자리가 나오자 아를 친정에 매끼고 새칠로 시집을 가지 않았것어? 이번에는 좀 있는 집이라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데야. 끄니 때마다 생선토막이 올라오는 집안이었응게. 그란디 말여. 그 괴기가 당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응게. 굶기를 밥 먹듯이 허고 있을 두고 온 자식이 자꼬 생각나서 말여.” 드문드문 남은 이 사이로 발음이 새어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는 어투로 마치 남의 얘기하듯 노인은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노인 자신의 이야기임을 윤주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고개를 끄덕여도 주고, 아! 그래서요? 하는 표정도 지었다. “그렁게 갸가 열 살 때 였을 거여. 배가 고파서였는지, 에미가 보고파서였는지, 그 먼 길을 걸어서 처음으로 찾아왔던 때가. 오월이었응게. 이십 리도 넘는 길을 걸어 왔응게 을매나 배가 고팠을 것여. 그란디 독한 년은 시집눈치 보느라 반기지도 못했응게. 사람들 보기 전에 어서 가라고만 혔으니. 어린 것이 그러드만! 엄니, 갈팅게 밥한 술만 주시요. 배가 고파 죽갔시요. 그때는 와 고러케 바보맨크롬 살았는지 몰러. 얼른 따순 밥 혀서 멕여 보냈으면 좋았을 틴디.……” 감정이 복받치는지 노인은 눈가를 비볐다. 한참 만에 노인이 말을 이었다. “얼능 보낼 생각으로 부뚜막에 남아있던 찬밥덩이에 김치 한보시기를 상에 얹어주었지. 야가 급히 먹더니 캑캑거리더라고. 말국 없는 밥이 넘어 가겄어? 아침참에 먹고 냄겼던 준치찌개가 생각나서 데워줬지. 냄비에는 잔까시와 국물만 쬐께 남어있었는디, 고것이 입맛을 쩝쩝 다셔가며 만나게 먹더니 이러지 않것어? 엄니, 이기 무슨 고기데여? 쇠괴기보다 더 맛나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다음해 정월 동네 논두렁에 쌓아둔 볏짚더미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던 아이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그날이 열나흘 날이라 저녁밥을 먹고 나온 동네아이들은 쥐불놀이에 신이 났다. 바람구멍이 숭숭 뚫린 빈 깡통에 솔방울을 잔뜩 넣고 빙빙 돌리면 벌겋게 달아오른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들은 팔이 아플 때까지 동심원을 그리다가 ‘망월이야’ 외치며 누가 멀리 던지나 내기하듯 던졌다. 떨어진 불똥은 밭두렁이나 논두렁에 남아있는 마른풀에 옮아붙어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뤘다. 그런데 그 불똥이 아이가 잠든 볏짚더미에 옮겨 붙었다고 했다. “을매나 뜨거웠쓰까! 잉.” 노인이 울먹였다. 윤주는 할 말을 잃은 채 들먹이는 노인의 어깨만 누르고 있었다. 해거름에 그이가 왔다. 반가웠다. 여자만 있는 병실이어서 신경이 쓰이는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산책길을 말없이 걸었다. 둘 다 말이 적은 편이라 대화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 속에 빠져있던 그가 견디기 힘들었던지 위로의 말이랍시고 불쑥 건네 왔다. “암을 수술하고도 오래 산 사람이 많대.” 그런 사실은 윤주가 그동안 인터넷에 접속하여 유방암에 대한 모든 정보를 샅샅이 뒤져 이미 알고 있었다. 연극인, 성악가, 화가 등 유방암으로 투병중인 그들이 남긴 글엔 희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산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애써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말이야, 지금 너를 위한 특별한 브래지어를 만들고 있는데…….” 윤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는 말끝을 흐렸다. ‘죽는 게 두렵진 않아. 조금 미련은 남지만. 그것은 그저 가을동안 누런빛을 다하다 누군가의 빗자루에 쓸려가는 은행잎 같은 그런 걸 거야.’ 투병중인 연극인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렇게 조용히 삶을 정리할 수 있는 나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윤주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착하기만 한 그에게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짐을 지워야 하는가? 윤주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윤주는 요양원 측에 하룻밤 외박을 신청했다. 병실에 있던 노인이 윤주의 뒤에 대고 파이팅이여! 파이팅하랑게! 라고 외쳤다. “모텔로 가.” 윤주는 차를 빼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잠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주는 일부러 불량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성인인데 무슨 문제야?” 그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윤주가 슬쩍 건너다보니 그는 몸과 표정이 모두 굳어있었다. 모텔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서도 한동안 분위기가 어색했다. 윤주는 샤워를 한 후, 알몸으로 그 앞에 섰다. 그는 읍,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윤주의 벗은 몸에서 시선을 돌렸다.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봐! 나 수술할 거야. 이 젖가슴을 도려낼 거라고! 그러니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몸을 가져 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이 젖가슴을 소유한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사실만 기억해주면 돼.” 암이 자라고 있는 윤주의 왼쪽 젖가슴에 손을 얹더니 그는 작은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 배가 아플 때 엄마 손이 약손이라고 문질러주던 어머니의 손길처럼. 자라고 있는 암을 녹여내기라도 할 듯이 그는 하염없이 작은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윤주는 눈을 감았다. 어떤 이는 어둠이 검정색이 아니라 푸른색이라고 했다. 윤주는 감싸고 있는 어둠을 보려고 눈을 다시 크게 떴다. 아무색도 보이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는 색을 붙잡으려고 기를 쓰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어둠의 색이 펼쳐졌다. 노란색, 빨강색, 파랑색이 눈앞을 지나갔다. 총천연색이었다. 바로 우리 마음에 보이는 색일 뿐, 어둠의 색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니 어둠의 색은 모든 색임을 윤주는 깨달았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머리맡에 깨알처럼 쓰인 쪽지하나만 달랑 남아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요양원으로 돌아오니,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병원응급차엔 시동이 걸려있고, 간병사가 바쁘게 움직였다. 급히 올라가니 병실 환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예요?” “그예 정신을 놓아버렸다네!” “누가요?” “누구긴. 514호 노인네지.” “언제부터 그래요?” “간호사가 아침에 들어가 보니 의식이 없었대. 엊저녁에도 이 병실에서 늦도록 놀다 갔는데…….” 노인은 앰뷸런스에 실려 시내 병원으로 떠났다. 윤주는 노인이 있던 병실로 갔다. 물건을 모두 챙겨간 빈방은 썰렁했다. 침대에 걸터앉으려고 하는데 모서리에 뭔가 보였다. 매트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꺼냈다. 손때로 반질반질해진 오래된 팽이였다. 누군가가 나무로 직접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팽이에 작은 총알이 박혀있었다. 윤주의 손에 든 팽이를 보더니 뚱보 노인이 울먹였다. “가슴에 묻은 아들이 남기고 간 유품이라며 손에서 놓질 않더니 죽을 때에 가져가지도 못하는구먼. 죽음 앞엔 아무것도 소용없지. 암! 소용없지비.” 윤주는 양손으로 팽이를 돌려보았다. 팽그르르 동심원이 만들어지면서 색색으로 칠해진 팽이의 윗면이 순간 투명한 흰빛으로 바뀌었다. 윤주는 팽이를 꼭 쥔 채 바다 쪽으로 향했다. 물결은 여느 때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글씨, 저게 뭔 바다여? 바다란 파도가 용트림하고 철썩대는 울음소리가 나야 허잖여! 저러코롬 잠자고 있응게 우리까장 수장당하는 것만 같당게!’ 혼잣말로 중얼대던 노인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윤주는 고요하고 푸른 물결위로 들고 있던 팽이를 힘껏 던졌다. 팽이가 떨어진 곳에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퍼지고 있었다. 저 바다 끝에서 노인은 팽이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윤주는 폴립을 열고 그에게 보내는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