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광
박후기
아버지, 검은 입 벌린 채 눈 감았다
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진달래꽃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 다리가 녹슨 레일처럼 구부러지지 않게 두 팔로 힘껏 무릎을 눌렀다
막장은 벽만 있을 뿐, 바닥이 없었다
발밑을 파내려가도 눈앞엔 검은 벽, 바닥은 어느새 궁륭이 되었다
아버지는 앞만 보고 살았지만, 언제나 뒤가 무너졌다
나는 페치카 옆의 카나리아, 연탄가스를 마시며 놀았다
구멍보다 틈이 무섭다는 것을 나는 안다
죽음의 生家가 텅 비어있다
아버지의 밥그릇
안효희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치즈 굴리기 대회
정다운
여기저기 배다른 자식들을 뿌려두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들은 서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한데 모여든 자식들은 자잘한 레밍쥐 떼 같아서, 삼사 년에 한 번씩 무진장 불어나 바다로 간다는 그들처럼 줄지어 물속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내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은 모여서 묘지를 샀다 바다 위에 노랗고 둥근 달 두 개 내 할머니는 결국 봉분 하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지만 모르지, 어떤 딸들은 제 엄마의 불사른 뼈를 어느 밤 몰래 큰 봉분 아래 파묻을지도 등을 구부린 채 밤새 달을 지키는 아버지는 발가락이 물에 젖는지 가끔 어깨를 떨고
할아버지의 하관은, 치즈 한 덩이 굴러내려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와르르 엎어졌고 평생 온전히 불려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 아버지, 끝도 없이 무덤 속으로 굴러내려갔다 영국의 쿠퍼 언덕에서처럼 잔디가 햇볕에 반짝이는 오후 여자고 남자고 정신없이 뛰어내려가 언덕을 구르는 그 유쾌하고 미련한 축제- 바다로 풍덩 풍덩 지친 그들, 그러나 레밍쥐와 달랐던 것은 얼굴의 짠 물 털고 언덕을 다시 기어 올라간다는,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그저 골절된다는 그것
<2005년 문예중앙신인상 당선작>
아버지는 종묘상에 가셨네
조말선
아버지는 종묘상에 가셨네
동생들을 사러 가셨네
아버지는 자식 욕심이 많다네
혈기왕성하다네
어머니의 배는 비닐하우스처럼 불룩하였네
나는 동생들을 업고 걸리고
하루종일 마을을 배회하네
정관수술을 받은 아버지
정자은행에 가셨네
일년 내내 씨를 뿌리시는 아버지
어머니는 일년 내내 만삭이라네
종묘상인은 마침내
다수확 품종을 구해오네
종묘상 미닫이를 밀 때마다
아버지는 발기한다네
시집 <매우 가벼운 담론> 2002년 문학세계사
포도나무 아버지
유홍준
얘야 올해는 가뭄 때문에 포도넝쿨이 엉망이구나 아버지 팔뚝 위의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자아, 받아라 어서 이 불멸의 포도넝쿨을 이제 너에게 넘겨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아버지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굵은 당신의 팔뚝에서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굵은 당신의 팔뚝에서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한사코 내밀고 계신다 아버지의 핏줄을 받는다 나는 포도넝쿨처럼 지문이 얽히고 설킨 두 손바닥을 내밀어 아버지의 포도나무 묘목을 받는다 깊이, 구덩이를 파고 아버지의 핏줄을 포도밭에 옮겨 심는다 넝쿨마다 아버지의 심장이 주렁주렁 달리는 포도나무 가지마다 넓적한 아버지의 손바닥 이파리가 돋아나는 포도나무를 옮겨 심는다 아버지의 포도를 딴다 나는 상자마다 크고 검붉은 아버지의 포도를 따서 담는다 상자마다 가득가득 아버지의 벌렁거리는 심장을 담아 트럭에 싣고 시장에 내다 판다 얘야 내 포도를 네가 먹으니 즐겁구나 내 포도를 네가 팔아 새 옷을 사 입으니 보기 좋구나 아버지 껍질눈이 나를 바라보며 웃으신다 알맹이 발라먹고 뱉은, 아버지 껍질눈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계신다 생전의 할아버지 깊디깊은 눈 속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어린것들이 달라붙어 포도를 먹는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할아버지 포도를 먹어치운다 알맹이만 발라먹고 뱉어버린 아버지 껍질눈이 여전히 웃고 계신다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심보선
이 방의 천장은 낮다, 점프
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속되냐
섀시 창문 밖으로 천장의 유혹을 간직하고
구름은 지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가방을 열어
가방 모양의 공기를 마루 위에 쏟아내곤 했다
이야, 놀라워라 어린 자식들의 조건 없는 탄성이여
가끔씩 옛집을 생각하면
피융, 하고 양쪽 뺨을 스치며 앞뒤로 지나가는
기억과 망각의 총탄이여
이 집 안방에는 그러고 보니 깊은 절벽이 숨어 있다.
저 밑에는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바닥
돌아보면 누이는 저만치 뒤에 있고 어머니는 더 뒤에 있고
더 뒤에는 무한의 더 뒤가 있고
더더더 뒤에는 그냥 장롱벽
거기 기대어 아버지
좌탈입망, 돌아가셨다
아버지 왼손에 쥐어진
위성TV 리모컨
감자조림 미끼로 낚시질 가시던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시던
소싯적에 거 참 잘생기셨던
아버지, 망부 청송심씨후인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
아버지, 어찌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옛집의 지하실
도망갈 수 있는 곳, 다시는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나는 낮은 천장 아래 홀로
소파 뒤에 바짝 등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몰려오는 미래를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가족들은 이 집 어딘가에서 소식도 없이
각자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지를 위한 얼렁뚱땅 요리법
최금진
아버지는 나를 생쌀처럼 씹어먹고 싶어 했지만 내 특기는 매운탕
그러나 극진한 음식 수발이 나는 수줍어
붕어들을 믹서에 갈아서 즙을 내면 아휴! 흙냄새,
진흙 바닥에 배창자를 내놓고 기어다니는 오래 묵은 시체들에
양파와 무와 파를 썰어놓고 매운탕을 끓이면 아주 커다란 저수지 매운탕
우리 아버지가 제일 놀라실 걸?
이런 호로자식 같은 놈, 아직도 너는 세상 사는 맛을 몰라,
이것이 아비에 대한 예의냐?
얼렁뚱땅 음식 조리법에 가부장적 질서가 어디 있어요?
가서 네 어미와 네 식구들을 모두 잡아다 넣고 끓여라,
그게 맛있는 웃음이지, 그게 맛있는 족보지!
뭘 모르시네요, 아버진 할아버지가 이미 다 뜯어먹은 뼈다귀에요
국물을 팍팍 우려내야 맛있는 우리 집 가계
작년에 가라앉은 시체들이 겨울 개구리처럼 팔 다리를 쫙 펴고 떠오르면
장유유서, 아버지 먼저 드세요,
넌, 하는 말마다 말대꾸야, 네 에미가 그렇게 가르치던?
아버지 제삿상이 다 식겠어요
아버지 손자들이 먼저 후루룩 아버지 눈알을 건져 먹잖아요
얼렁뚱땅 요리법에 격식이 어디 있어요,
아까 끊어다 넣은 제 모가지는 남겨 둘 테니 맘껏 뜯어먹고 가세요,
저수지 밑바닥, 단양군 매포읍 도담삼봉, 그 컴컴한 물 밑으로
시커먼 메기들이 수염을 휘날리며 쏘다니지요
랄랄라, 오늘은 즐거운 아버지 제삿날, 우리 집에선 죽음이 별미에요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 봄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2008 진주가을문예 당선작 >
달 속의 아버지
박미산
잔솔 타는 연기가 새벽안개가 떨어지지 않아요 약사발을 든 어머니, 얼굴이 없어요 하얀 치맛자락이 약사발을 들고 안방 문지방을 넘네요 풍성한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여자, 눈에서 피가 흐르네요
어머니의 버선발이 사라져요 안방에서 구르던 울음이 어머니의 부엌으로 따라 와요 아궁이에서 타는 불섶도 뒤척이며 울고,
구름처럼 떠다니는 아버지는 둥근 것들을 부화시켰어요 어머니의 둥근 배, 작은어머니의 둥근 배도 탐스럽지요 바람을 흔들며 아버지는 또다시 다른 달을 찾아가고,
미처 자라지 않은 아이는 작은 어머니의 배에서 굴러 떨어지고, 무정한 시간에 구름보다 무거운 아이 하늘을 덮으며 다시 태어나네요, 화장터의 굴뚝에서 연기를 피우며 구름보다 무거운 아이는 하늘을 덮으며 다시 태어나네요
가마솥에서 미역국은 설설 끓고 있고,
어머니의 부엌에서 연기를 먹으며 아이는 자라고,
아버지는 구름을 잡고 달 속을 여전히 들락거리고,
아버지의 수레바퀴
안상학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점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아들 딸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퀴를 찾을 무렵
아버지의 바퀴는 오토바이 두 대째로 굴렀다.
아들 딸들이 자동차 바퀴에 인생을 실었을 무렵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끝났다.
뺑소니 자동차 바퀴가 오토바이 바퀴를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마지막 바퀴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그때의 택시바퀴였다.
석 달 긴 끝에 깨어난 뒤
바퀴 읺은 아버지의 인생은 지팡이였다.
걸음 앞에 꾹꾹 점을 찍는 아버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하나 남은 바퀴는 죽어서 저기 갈 때,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의 노동은
오토바이 바퀴가 찌그러지면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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