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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병정신선양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
예천이 낳은 조선의 명재상 약포 정탁.이순신을 구하다~!!
5조판서,3정승을 역임하다.(이조판서 3번)
약포는 관향이 청주(淸州)이다.청주정씨는 서원(西原)정씨라고도 한다.시조는 고려 중기에 별장을 지낸 정극경인데 정탁에게는 14대조가 된다.약포 정탁의 가계는 선대가 고려 개성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으나 조선개국할때 위기가 닥치자 안동김씨로서 유명한 대장군 김방경의 사위인 정오와 외손인 정침이 안동으로 낙향하여 입향조가 된이래 후손들은 안동인근에서 세거하였다.
부친은 이충이며 모친은 평산한씨로서 종걸의 따님이다.외조부는 진사 한종걸인데 본래 상주에 살다가 예천으로이거하여 금당곡 삼구동에 살았다고한다.정탁은 금당실(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버들밭) 외가에서 태어났다가 잠시 안동 본가에서 살았고 다시 예천 고평동으로 돌아가 거주했다.
23세가 되던해 거제 반씨(巨濟潘氏) 충(沖,1508~1584,自號 觀物堂,달계서원과 충효사에 배향)와 성주이씨 사이에서 난 따님에게 장가들엇다.외가인 한씨 집안에 후사가 없자 외손으로 봉사했고 ,외가에서 분급 받은 전토에 기반하여 본향인 안동을 떠나 예천 고평동에 기반을 잡았고 게다가 처향에서도 분급받은 전장(田莊)도 적지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탁은 부인 거제 반씨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안동에 거주할때 평생의 지기인 백담 구봉령과 친했고 17세에 퇴계 이황에게 나아가 배웠다.
나중에 진주교수로 가서 남명 조식선생의 문도들(김우옹,오건)과 교류도 했고....시문집등에 자료가 남아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분의 선생으로 부터 배운 문도중 유일하게 정승에 오른 딱 한분이군요.(퇴계,남명의 두분 모두에게 배운 분을 말합니다)
약포 정탁 년보(년표)
1526- 출생
1546- 부친상
1558-식년문과 병과 급제
1559-교서관
1561-진주교수(향교직책)로 부임하여 조식을 찾아뵙고 폐백을 갖추고서 그의 제자가 됨.조식의 기상을 배우고 존숭함.정탁이 내직으로 갈때 하직인사를 하러왔을 때 '소를 끌고 가라'한 조식의 말이 오래도록 문도들 사이에 회자됨.=뜻은 정탁의 말과 얼굴이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은 넘어 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있으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네)
남명 조식 선생에게 많이 배웠는 듯....햐~~
1565-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예조 정랑,헌납(언관일때 당시의 권신 윤원형을 탄핵=간이 배 밖에 나옴=안동정신=선비정신)
1568-경연관으로 있을 때 이정과 조식이 관련된 진주 유생의 옥사가 논의 됐는데 여기서 변론을 편다=조선 변호사회 등록,기대승은 남의 집을 헌 유생(남명의 제자들)들의 소행은 무뢰배와 같은 것이므로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남명집에 등장하는 약포에게 쓴 편지참조,약포책 p191,'진주 음부사건' )
1570-홍문관 수찬.퇴계 부고가 이르자 동문들과 학봉의관사에서 영위를 만들어 애통해함.어명으로 사제문(판중추 이황 사제문)을 대필하고 직접 장례식에 참가함.
1572-이조좌랑
1574-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1580-대사헌
1582-이조참판1582-진하사로 명에 감,이듬해 귀국
1583-공조판서
1583-이조판서1587-내의원 제조
1588(63세)-형조판서-이조판서-병조판서-
1589-좌참찬(정2품)에서 종1품 숭정으로 품계를 더하고 사은사로 차출되어 명으로 향하다(황윤길,김성일,허성등이 왜국으로 향하다)
1590-예조판서-의정부 좌찬성과 우찬성으로
1591-예조판서
1592(67세)-임진왜란 발발,정탁이 평안도로 몽진 갈것을 강력하게 주장(다른 분들은 함경도로 피난가자고 함),약방 부제조로서 윤두수와 함께 선조의 진찰을 청함
세자이사(世子貳師,세자시강원의 종1품 벼슬)로서 분조를 이끌다.
1594-좌찬성-곽재우,김덕령,유정(사명당),한백겸,박명신등 출중한 인재를 추천함
1595=우의정-중추부지사,황욱과 황혁을 삼사가 국문할때 정탁이 힘써 변론하였다,(조선변호사회 명변호사의 명함을 뿌림)
'기축옥사'의 억울함을 논하다.기축옥사로 인해 남인이던 호남의 선비들 1천명이 도륙됨.
1596-행 지중추부사.(원균과 이순신의 다툼을 선조와 상의하며 화해시켜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아룀,판중추부사 윤두수가 파천계획을 논의할때 내전은 강화로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형세를 보아 강화로 가야 하삼도=下三道를 유지할수있고 아산창의 양곡도 취할 수 있다고 아뢰며 윤두수의 의견에 찬성함)
김덕령을 신구하여 석방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김덕령 변호)그러나 아쉽게도 장독이 올라 곧 사망하였다.김덕령의 시호는 충장공인데....광주 충장로는 김덕령의 시호를 딴 것이다.
1597-윤두수가 이순신을 체직(替職)시키자고 주장하자 약포 정탁은 "참으로 죄가 있으나 위급할 때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했다.=조선의 명변호사~~짠짠~~!!!
1598년 -임진왜란 종료.
1599-기로소에 듦,4월에 동궁을 모시고 수안군(황해도지역인가?)에 가서 중궁전에 문안하였다.윤4월에 동궁을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9월에 부모님의 묘소를 둘러보러 휴가를 청해서 귀성하기를 청하였는데 윤허를 받아서 당일로 서울을 떠났다.오음 윤두수와 '지봉 이수광'이 한강에서 이별시를 지어 전송하다.(동서분당이 되었지만,약포 정탁은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일조한 오음 윤두수와 당색에 상관없이 교류한 것 같다).예천 고평동으로 낙향,선조가 임금을 버리고 도망친 무리들의 성명을 기록하여 '조당'에다 내걸게 하자 정탁이 변호하여 폐지시키다=명변호사의 변호...대단하시다.
11월에 병때문에 기한내에 상경할 수 없다고 면직시켜달라고 청하다.(노인이 잔꾀를 부리는 군요...ㅎ).백유함의 죄를 변호하다.
1600-좌의정.이때 지평 윤홍이란 사람이 약포를 탄핵하자 선조가 한 말이다(정탁의 우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말은 반드시 천리마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정탁 또한 재상이 될만한 사람이다라고 한다....선조도 제정신일 때가 있긴 있군요).
1601-예천 고평동 향약계문을 완성하다.'읍호정'과 망호제를 완성하다.
1602-2월에 좌의정으로 승차되었고 사직을 청하고 다시 4월에 사직을 청하다.(향리 예천에서 올린 글이겠지요)
1603-柚子 2매와 감귤 20매를 하사받다.(1매의 단위가 어떻게 될까?--이것은 하성군님이 숙제로..).부모님 묘소에 올라가지 못해 성묘를 못함을 슬퍼함(다리힘이 없음).노인네가 문경 쌍용-용유계곡을 유람합니다.동유록을 지었군요..아니 나이가 얼만데?(지금으로 보면 거의 95세이상 나이 아닌가요?),아마도 한세대 전에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이 쌍용구곡과 선유구곡을 방문해서 9개월을 머무른 것을 알고서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던 것 같다.(개털의 추측)
1604-서원부원군,호성공신 3등.(서애 류성룡은 공신책봉을 거부했고,화사도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안동 '충효당'에 가면 공신 영정이 없다)
1605 9.19 -예천에서 임종
1613-위성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1635-인조가 '청백하게 절개를 지켰으며 덕을 쌓음에 게으르지 않다’는 의미의 정간(貞簡)의 시호를 내림
1724 -도정서원 향사
요기 까지는 '약포 정탁'- 책(박근노 지음)을 보고 제가 썼구요(12시간동안 정리한 자료)....아고...자료가 너무 많고....방대하여...아래 부분은 그냥 복사붙임합니다....헥헥~~
마침 인터넷에 좋은 자료가 있군요
책을 보다 보니...이런 저런 여러가지 일들이 보이는군요....류성룡을 탄핵한 것은 주전론을 내세웠던 북인의 공격이었고...
같은 퇴계문도 중에서 월천 조목이 명군의 의견에 동조하여 화친(대국적인 견지에서)을 주장했던 류성룡을 논박한다든지...문도들간의 여러가지 일들도 있군요....이것참...죽을 때까지...공부를 해야겠군요....고구마는 안나오고..자꾸 뿌리만 나오고....아휴 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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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은 퇴계로부터 심학(心學)의 요체와 도학의 참된 뜻을 배우고 익혀 큰선비로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2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는 슬픔을 당했지만 그는 성현의 길을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만은 확고부동하여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기론(理氣論) 중심의 정통성리학 뿐 아니라 경학(經學) 지리(地理) 병서(兵書) 상수(象數) 등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는 고금의 팔진육화등법(八陣六花等法)을 깊이 연구한 덕분에 병학분야에 탁견을 가졌다.
공은 1526(중종 21)10월 무오일 출생이다.155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떳떳이 맞서는 높은 기개와 강직성을 갖고 있었지만 일상생활 등 세속적인 것에는 초연했다. 한마디로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붕당의 와중 속에서 동인에 속했던 그는 서인의 영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 보물 제494-2호, 광해군(光海君) 5년(1613) |
정탁은 처음 교서관에 배속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불우함을 동정 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이때 수렴청정으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당당했던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는데 사용하기 위해 교서관의 향을 가져오게 하였다. 마침 향실의 숙직을 담당하고 있던 말단직의 정탁은 (교서관의 향은 종묘사직의 제사에 쓰일 뿐 궁외로 가져 갈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노발대발한 문정왕후는 형조에 명을 내려 정탁을 엄하게 다스렸으나 이일로 오히려 그는 강직한 선비로 이름이 높아져 뒷날 요직을 역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번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 두복야(나중에 귀화하여 대구에 터전을 마련하는 두사충,나중에 두사충이 대구에 사는 동네가 大明洞이 되고 하루 1천석을 수확하는 터전이 된다=삼성 이병철 대구상회와 코오롱 이원만 고택등-개털기사)가 실수하여 죄를 짓자 이여송이가 그를 참수하려했다. 마침 정탁이 이 사실을 알고 이여송에게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고 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 두복야는 은혜를 갚기 위하여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지방의 명당10곳을 적어 정탁에게 주었다. 이 소문은 알게 모르게 퍼져 전국의 내노라하는 풍수가들이 두복야가 선정했다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예천지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지금까지 한군데만 밝혀지고 나머지 9곳은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두복야(두사충)의 명당자리를 찾으러 이배사 회원님들 안동과 예천 땅 한번 오셔야 할 듯합니다.
(才) 학(學) 식(識)의 삼장재(三長才)를 갖춰야 될 수 있다는 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정탁은 유현보다는 명신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정탁은 퇴계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동시에 사사(師事) 한 많은 사람 가운데 정승의 자리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황의 문인 중 류성룡, 이산해 등이 정승을 역임했으나 조식과 인연이 없었고 조식의 문인중 정인홍이 정승직을 누렸으나 이황과 사우관계를 못 맺었다. 그의 족제(族弟) 정구가 영남좌도의 퇴계학과 영남우도의 남명학을 통합성취한 대현이었는가 하면 정탁은 영남 좌, 우도의 학통을 바탕하여 경세제민의 훌륭한 치적을 쌓은 정치가였다. 그는 이황으로부터 심오한 학문과 인(仁)의 요체를 바로 배운 탓으로 사생활등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언제나 너그러웠다.
선조 22년 일본사신 현소가 와서 화의를 청하자 당시 병조판서이던 정탁은 “섬나라 일본은 본래 교활한 민족이온데 이제 새삼 화친을 구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변란이 있을 징조이니, 조정은 화친론을 물리치고 국방강화에 진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이었으니 그의 뛰어난 안목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예견대로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칠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왕과 세자의 피난길을 따르며 국란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난리 북새통 속에서도 조정대신들의 논의가 분분하자 그는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마음을 합쳐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어찌하여 당파로 갈려 한결같이 서로 헐뜯느냐]며 대갈 하였다. 그는 풍부한 경륜을 쌓은 노신답게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고 국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대의에 맞게 했다.
>>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보물 제494-5호 ⓒ문화재청 제공 |
69세에 우의정이 된 그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유정(惟政), 한백겸(韓伯謙), 박명현(朴名賢) 등 출중한 인재를 추천하여 대란극복의 일익을 담당토록 하였다. 또 그는 이러한 인재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이를 시기한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위기 때마다 변호에 앞장섰다. 호남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덕령이 사소한 실수로 체포되자 명장을 죽이면 막대한 국가의 손실이라며 그를 구해냈다.
김덕령이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아 다시 구속되자 이때도 정탁은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치열한 당쟁의 결과이므로 수포로 돌아갔다.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1차 국문(鞠問)을 견뎌내고 2차 국문을 받게 되는 운명에 놓이자 정탁은 저 유명한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를 올렸다.
조선조 국문은 너무 잔인 하여 한번으로 죽거나 병신이 되는 것이 통례인데 항우 같은 천하장사도 2번의 국문은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순신은 참으로 장수의 재질을 가졌고 해전과 육전의 재주를 겸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지 못 할 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크고 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이옵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해서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하여 공과 허물을 서로 비겨볼만한 점도 묻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만한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또 그간 사정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면 공있는 자와 능력있는 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해 더 애쓰지 않을 것 입니다”
이 글은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의 일부분으로 정탁이 국가장래를 위하여 얼마나 인재를 아꼈는가를 알 수 있다. 한편 그는 왕세자를 보필하면서 피난길의 상황과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고 환송한 일 또 그들과 주고받은 문서 등을 기록한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을 지어 선조에게 바쳤다. 이 책은 당시의 군사, 정치, 외교,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이와 별도로 후일 그는 용사일기(龍蛇日記)를 저술했다. 용사일기의 내용은 용만문견록을 바탕으로 재편집한듯하다. 용사일기의 원본은 약포유물각에 비장되어있는데 이것이 가지는 사학적가치가 풍부할 뿐 아니라 국어학적 가치와 서도사적 가치도 아주 높다는 평이다.
>> 약포선생문집 ⓒ유교넷 제공 |
국어학적 가치는 이두문체(吏讀文體)의 기록이 많아서 이두어휘가 풍부하므로 중한 자료이다. 용사일기를 필사한 사람은 정탁의 셋째아들 윤목(允穆)이었다. 정탁은 73세에 기로사(耆老社)에 드는 영예를 얻었으나 이내 중앙정계를 떠나 향리 예천으로 돌아와 고평동에 터를 잡았다.
이때 그의 심정을 읊은 퇴거시를 남겼다.
어려울 때를 구제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이 풍진세상을 분주히 돌아 다닌지 그 몇 해던고/
7년 대란을 만나 한가지의 좋은 계책도 없이/
백발이 된 몸으로 고향을 찾으니 부끄러움만 남네
산촌벽지에서 몸을 일으켜 80평생을 진충보국에 최선을 다한 노신의 심정이 잘 나타난 것 같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고평동계(향약)를 만들어 주민을 교도하고 고평들을 개간하여 복지증진에도 힘썼다. 만년에 조용한 시간을 얻은 그는 성리학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리할 각오로 초록주서(抄錄朱書)와 소학연의(小學衍義)를 집필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관직생활 때문에 그의 문하에는 황여일(黃汝一), 황지(黃遲) 등 극소수의 제자만 있다. 숙종 26년 향내 사람이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 도정서원을 세워 정탁. 윤목 부자를 향사 고종 때 훼철령을 받았으나 신기하게도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았다.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그의 영정. 용사일기. 기로연도. 용사잡록. 교지 등 많은 유품은 지난 80년에 고평동에 세워진 약포유물각에 잘 보존돼있다.
>> 예천청주정씨재실, 정탁을 기리고 제사지내는 곳. 시도유형문화재 제315호 (예천군) ⓒ문화재청 제공 |
[출처] 약포(藥圃) 정탁(鄭琢) - 김성규 객원기자 | 안동넷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
박근노 저자한테 억지로 '약포 정탁' 책한권을 얻은 것이...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에 가입했을 무렵이다....밀린 숙제...인제 완성했다.
그동안 밀린 사진 자료들 포스팅해올리고....답사다니느라...마음만 바빴다....
박근노씨는 예천군청 공무원인데 서문에 쓰기를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경북서예대전 대상도 받았고..심사위원도 한 분인데 ,늦깍이로 안동대 한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은 재원이다.서예 선생에게서 자료(체본)를 받아서 수백번을 써도 서도인(書道人)이 아닌 단순한 페인트 공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우쳤고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는데....한문학에 대한 기초가 없어서...한참 힘들었다고한다...형설지공(螢雪之功)을 하셧는데....이 지면을 빌어서 수고하심에 경의를 표하며 ...자료(책)을 주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