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시들한 내 삶에 선사하는 찬란하고 짜릿한 축제- 저자
- 손미나
프롤로그 중에서
‘결혼생활의 실패’라는 파도와의 사투. 그 공포의 터널을 지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외출을 거부한 채 스스로 세상과 격리되었다.
커튼을 꼭꼭 닫아 암흑이 깔린 방에 시체처럼 누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며칠 밤낮이었는지 모른다.
겨우 일어나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샤워를 하다, 수프를 끓이다, 혹은 텔레비전 퀴즈쇼를 보다가도
난데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요가를 시작하고 펀치 볼과 권투 글러브를 사들였다.
요가는 내 영혼에 평화를 되찾아주었고,
권투는 남은 울분을 털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운동하는 것 이외의 모든 에너지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데 쏟아 부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발코니에 나가 햇살을 즐기며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수년 전부터 미뤄왔던 번역 일까지 실행에 옮길 용기를 냈다.
악몽 같은 시간을 그렇게 온몸으로 버텼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힘이 빠져버리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다.
서핑을 하다 깊은 물에 빠졌던 소년이 보드 위에 올라 중심을 잡고 고래처럼 큰 파도를 즐기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 그럴까.
300페이지가 넘는 장편 번역을 끝내고 아르헨티나 여행을 마친 2009년 봄,
그때가 바로 내가 파도 위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힘겨운 고비를 이겨내자 그제야 두려움이 사라졌다.
삶에 대한 공포는 정말로 위험에 처한 사람이 아니라, 정면대결을 피하는 자들의 몫임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근사하게 파도를 타기 위해 새로운 바다로 옮겨가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더 거칠고 높은 물결이 일겠지만 지금껏 보지 못한 풍경과 바다 속 세상 역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그러던 어느 날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꽃나무의 바짝 마른 가지에 여리디여린 녹색의 새순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나는 모습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여 년 전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구해준 마술의 도시 '파리'로 가야 할 때가 기어이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무인도에 가서도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는데,
내가 왜 망설이고 있었나.
본문 중에서 인용
사실 마땅히 이삿짐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얼마 안 되는 옷가지와 읽고 싶은 책들에 불과했으니.
인생의 한 고비를 넘는 동안 배운 것이 있었다.
많이 버릴수록 삶은 가벼워지고 자유는 커진다는 것.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8p
《들어가는 말》 중에서
뜻대로 암기가 잘 안 될 때면 변덕스런 날씨와 매일 한 번씩 가슴에 비수를 꽂는 불친절한 웨이터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죄 없는 6천만 프랑스 사람들을 성격 파탄자로 몰아가는 혼잣말을 내뱉곤 했다. 당장 때려쳐 버릴까? 대체 이 나이에 뭘 어쩌겠다고 다시 이런 공부를 시작한 걸까? 까짓 불어 좀 못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는데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41p 《실비안의 프랑스어 연극 수업》 중에서
자유 연애와 동거가 문화적, 법률적으로 허용되고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의 성이 개방되어 있는 프랑스 사회를 두고 혹자들은 문란하다 손가락질을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다만 사랑 역시 세상만사처럼 끝이 있고 변할 수 있으며,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사랑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언제든 끝날 수 있기에, 언제든 내 애인이 변심할 수 있기에 더욱 열렬히, 현재 진행형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53p 《오세안, 그 드거운 프랑스식 사랑》
파리는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예쁘기만 한 도시가 아니며 왠지 무서운 인상의 아프리카인, 아랍인들이 백인보다 더 많은 곳이다. 냄새나고 낡아빠진 지하철,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노숙자와 미친 사람들, 쨍하고 해가 뜨는 날보다 어둡고 스산한 날이 더 많은 도시, 게다가 마땅히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 삼십대 중반을 넘겨버린 벙어리에 가까운 아시아 여자가 혼자 살면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63p 《에펠탑을 코앞에 두고 산다는 것》 중에서
새로운 인생을 위해 찾아온 파리는 처음부터 나를 다정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이 도시 곳곳에 배어 있는 깊은 음울함이 얼마나 사람을 고독하게 하는지 잠시 다녀간 여행자는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 쓸쓸함이, 그 어둠의 그림자가 어떻게 사람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지.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다 보면 비로소 찾아오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바로 그 밤, 마치 파리라는 도시가 프랑수아즈의 입을 빌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리와 내가 드디어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