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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창 9:8-17) / 정용섭 목사
2011년 3월11일 오후 일본의 동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 그리고 원전 사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재앙 앞에서 그 일을 당한 일본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확인된 사망자와 실종자가 5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아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 오랜 병마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을 겁니다. 온갖 사연이 다 담긴 이들이 이렇게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장애를 입은 이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삶의 짐이 얼마나 무거울지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걸 다 안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발언은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에게서 벌써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면서 심리적으로 도착적인 증세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경솔하고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발언을 마다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교 백인들은 유색인종들을 뭔가 부족한 종족으로 여겼습니다. 민간요법으로 치료행위를 하던 미망인들을 마녀로 몰아갔습니다.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은 미국은 선이고, 별로 없는 중국이나 일본은 악입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으로 타종교를 무시하는 발언과 행동을 서슴없이 쏟아냅니다. 이들은 일본이 당한 참화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40일 동안 비가 쏟아져서 땅의 모든 것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 가족과 짐승들만 예외입니다. 성서의 설명에 따르면 노아 가족이 살아난 이유는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아 가족 이외에는 모두가 악하다는 것인가요? 그래서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 이전에 상식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우리의 처지와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진과 해일의 지질학적 현상을 상당히 분석할 수 있습니다. 예측도 하고 예보도 하고,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도 쓰나미가 덮치는 장면은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장면을 3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번에 3.11 대지진의 최대 현안인 후쿠시마 제1원전 소동과 비슷합니다. 목숨을 담보하고 원전의 최악 폭발만은 막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대원들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20km, 또는 80km 멀리 떠나야 합니다. 외국인들은 아예 일본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대재앙은 과거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어떤 재앙을 만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빙하기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적도 부근에만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큰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지구의 판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용암이 지구표면을 덮을 것입니다. 외계인이 출몰해서 지구를 공격하는 일도 없으란 법은 없습니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대재앙만이 아닙니다. 개인은 곧 죽음이라는 대재앙을 맞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모두 쓸어가는 지진이요 해일입니다. 절체절명의 대재앙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인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종족 멸절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무지개 이야기 노아홍수 이야기는 두려움만을 전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람이 대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이 인류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공포 가운데서도 바로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런 영적 시각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창 9:8절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대홍수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노아에게 앞으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증표는 무지개였습니다.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활은 고대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또는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무기였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생물을 살리는 증표였습니다.
구약성서의 사람들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기억했겠지요. 그 약속에 근거해서 개인과 민족에게 밀려드는 대재앙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을 겁니다. 이는 곧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삶의 흔적이 바로 성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유일한 토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인간은 실제로 태양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우리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입니다. 성서는 이를 가리켜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종이 한 장만 눈을 가려도 세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주파수가 너무 높거나 낮은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시간과 공간으로 결합된 세상 안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은 그 세상 너머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45억 개 조각으로 만들어진 퍼줄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어린아이와 비슷합니다. 퍼즐을 만든 존재만이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약속에 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구원의이니셔티브(주도권)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홍수로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창조사건과 비슷한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이나 요구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독자적인 의지로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노아와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앞으로 인간의 행동을 보고 당신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고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다른 것들은 우리 자신을 성취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입니다. 자신 연민이고, 자기 의입니다. 저의 예를 들자면, 교회를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는 욕구와 제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욕구들이 바로 저의 영적 시각을 막는 다른 것들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것들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뜨겁게 기도하거나 성경을 백독한다고 해서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어떤 왕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평생 감수해야 할 영적인 숙제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도, 즉 지구에 생태적 대재앙이 임하는 순간에서도, 또한 개인적인 죽음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출처: 오늘도 감사함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무화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