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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11월 1일 토요정례법회 ○
♧ 정산종사법어 [6. 경의편] 으로 단법회가 있었습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은 경의편 공부하실텐데요, 각 단에서 경의편 함께 공부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주에 원불교100년 안암교당 비전선언문 같이 기도식 올리시고, 표식으로써 기록도 하시고 도장도 찍으시고...
한 주일 간 가져간 명함같은 기도문을 집에서 심고 올리실 때 활용하셨나요?
어떤 교도님이 전화가 왔어요.
나이가 70이 넘으신 분인데,
“제가 아침에 비전서원문 독경을 하다가 원기100년까지 우리 교당이 이것이것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원문 독경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그 분은 아침에 3번 읽으신대요.
참 감사한 마음이 들고 이런 분만 있으면 교무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몰라서 아직 못 하신 분들도 앞으로 잘 활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교당에서는 아침에 좌선 끝나고 독경할 때 같이 넣어서 하고 있고,
앞으로 단회할 때도 심고하고 독경할 때는 꼭 같이 해주시고, 법회할 때도 꼭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색하지 않으시죠?
오늘 첫째 주인데 사람들이 별로 안 왔네요. 11월 달은 대충 살기로 했는가? 시험이 끝났을 텐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밥 먹듯이 하는 것이 법회고 기도고, 똥 싸듯이 하는 것이 법회고 기도고 마음공부입니다.
무슨 말이냐? 악세사리가 아니다.
법회 보는 것은 기도하는 것은 어쩌다 한 번 생각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요, 밥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법문에 나오는 것 같이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집니다.
희안하죠? 잡으면 분명히 있는데 놓으면 없어요.
즉 챙기지 않으면 마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나태 원망 거친 마음으로 흘러가고, 자기가 자기를 속은 줄도 모르고 속습니다.
살면서 청년들이 언제 가장 옳은 소리를 하느냐 했더니, 훈련하고 감상담할 때 법문을 토해냅니다.
금요일날 저녁에 500배를 하는데, 200배 하고 잠깐 쉬고 200배하고 잠깐 쉬고 100배 하고 염불하고 입정을 하고 회화를 하는데,
그 때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얼굴도 볼그작작 하니 예쁘다. 화장 안 해도 다 예쁘다.
그리고 하는 말을 보니까 다 참회의 마음 수행의 마음을 쏟아낸다.
그런데 언젠가 술집에서 어느 놈을 봤더니 엄한 소리만 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가 있는데 교당에 잘 안 나왔어. 그러다 나와서 하는 소리를 들어봤더니 엄한 소리만 하고 있다.
그 아이가 훈련 났을 땐 안 그랬거든. 우리의 마음이 그렇다. 챙기면 있어지는데 놓으면 없어진다.
그런데 놓은 줄도 모르게 놓아버린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했던 소리도 나중에 자기가 자기에게 속임을 당한다.
묘하죠?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저기 뒤에 써 있는 것을 보니 어떤 분은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안암교당에서 나와야겠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그 다음에 이 안암교당에서 국가 세계에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냥 여기서 일주일 동안 지은 죄 한 번씩 참회하고 다시 죄 짓고 살다가 영혼을 달래주는 교당이 아니고, 인런 신앙이 아니라
정말로 대종사님의 교법을 통해서 자기 일생에 희망을 발견하고 자기 일생을 새롭게 발견해서 꿋꿋한 신념과 열정으로
자기를 최대한 업그레이드 해서 정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박수쳐 줄 수 있는.
“야~ 저 친구가 말이죠. 장관이 됐는데 옛날에 같이 공부한 청년이었어”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해야지,
“교도소에 있는 걔가 옛날에..” 이러면 안 되겠죠?
참 웃겨요. 집안에 한 명만 검사가 되었다, 교무님이 되었다, 외국에서 박사를 땃다 하면 동네 잔치를 하면서
“누구누구가 나랑 인연이 있는데..” 등등 좋은 소식이 있으면 고향이 같고 동문이고 이렇게 나가잖아요..
저기에 여러분들이 기록하신 꿈 희망 여러분들의 의지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서 ‘될까나~’하면 ‘될까나~’하고 메아리친다.
믿은만큼 메아리 친다. ‘된다!’하면 ‘된다!’하고 메아리친다.
이것이 대종사님의 마음공부이다. ‘안 될 것이여~’ 그러면 ‘그래. 안 될 것이여어어어어..’하고 나올 것이다.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 안 들어요?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입에 뭐 달고 와서 영어를 잘 하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배터리를 달고 와서 공부를 잘 합니까?
수심결에서 공부했듯이 우리는 누구에게나 마음 가운데 밝은 지혜광명이 누구나 갖추어져있다.
그런데 내 자신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을거여?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얘기여?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누구를 용서할 것이냐? 내 자신을 알뜰하게 가꾸지 않고 어디에 누구를 가꿀것이냐?
여러분들이 이 안암교당을 다닌 20대 30대의 시간들이 정말로 ‘옛 추억이었어..’ 하면 안 된다.
‘그 때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터닝 포인트의 계기가 바로 그 때였다. 생각만 해도 고맙고 감사한 시기다.’
그런 계기가 서로 동지간에 대종사님의 법을 통해서 해야한다.
제가 저를 가만히 둘러봤더니 제가 몇 가지가 터닝 포인트의 계기가 있었다.
첫째가 대학에 다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 휴학을 했다.
집에 있으니까 당구치자고 매일 불렀다. 아니면 예비군 훈련 대신 가 달라고 하고 매점 좀 대신 봐 달라고 하고.. 할 일이 없는거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익산 총부에 상주선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한 번 가봐라~”하셨다. 느닷없이 그랬어요.
그래서 ‘뭐 할 것도 없고, 아버지가 가라는데 나를 무슨 구렁텅이에 넣으시겠느냐’고 생각하고 갔다.
갔는데 느닷없는 생활이죠. 예비전무출신이나 교무님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새벽 5시, 여름에는 4시 반에 일어나서 좌선을 하고 간단한 요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줘. 잠깐 쉬라고 하더니 계속 강의가 있다.
대종경 강의도 해주시고 정전 강의도 해주시고 불조요경 강의도 해주시고..
점심 먹고는 오후에 작업 한다고 하고.. 제가 군대 가기 전이라 얼마나 탱탱했겠어요.
상주선원 교무님이 젊은 놈이 오니까 책을 막 갖다 주셨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전무출신하라고 꼬실려고.. 그런데 그 때는 몰랐다.
그리고 저녁 때는 염불을 하는데 대종사님이 계셨던 구조실에서 했다. 그 때는 그 앞이 상주선원이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쓰던 방원이 나이가 50대정도 됐었는데 그 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분이 어떤 사람이냐면 절을 2개나 지으신 분이다. 어려서 절에 들어가서 주역공부를 하고 머리가 어느 정도 열렸다.
시청 뒤에서 주로 부인이나 국회의원 부인들의 사주를 봐줬다.
잘 맞추니까 돈이 엄청나게 들어와서 절을 2개나 지었다.
그 양반이 우연히 헌책방에 갔다가 불법연구회 불교정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양반이 그것을 보고 ‘아~ 이거다!’하고 총부에 왔다.
그 당시에 상주선원에 1년 있으면 포교사 자격증을 줬었다.
그 분이 ‘나는 이 생에 자식도 다 키웠고 돈도 많이 벌어 봤고, 이제는 시골에서 혼자 사는 남자 교무님 혼자 교화하기 어려우니까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그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니까 왔다.’고 하시며 같이 생활을 하셨다.
그 분이 저를 또 막 봐줬다. ‘자네는 붓글씨를 좀 써 보소.’ ‘자네는 전무출신하면 참 좋겠소.’ 그러셨다.
그러면 저는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했다.
그런데 그 양반이 선을 많이 하신 분이다.
단전이 툭 튀어나오고 눈이 반짝반짝 했다.
‘어이~ 내가 선을 좀 알려줄게.’ '예 알려주세요.' 그렇게 방원에게 선을 배웠다. 그
양반은 선을 많이 하셔서 영통을 어느 정도 하신 분이었어요.
상주선원에 한 20일 있다가 영장이 나와서 나갔거든요.
그 중 한 보름쯤 됐을 때 저녁에 염불을 하고 잠깐 입정을 하는데 진경에 들어버렸네. 제가 없어져버렸어요.
어메. 좋던거..‘ 내가 없어졌으니 좋은 줄도 몰랐지. 그런데 진행자가 시간 됐다고 죽비를 탁 치니 죽비소리가 얼마나 얄밉던지..
얼른 방으로 와서 다시 앉았다.
그때 든 생각이 ’야~이런 재미가 있으니까 수행을 하고 아침에 산 속에서 스님들이 선을 하는 구나.'
그러면서 느낀 생각이 이렇게 좋은데 내가 이것은 일생에 꼭 놓지 않겠다.
원불교에 출가하면 이런 거 날마다 하는건가. 괜찮겠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저도 제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었지 않겠습니까.
인생 목표라 해봤자 겨우 시험에 합격해서 또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좋은 여자 만나서 토끼 같은 자식들 낳고 좋은 집 장만해서
그리고 부모, 형제 내가 잘 모시고 도와주면서 세계여행도 좀 하고 어려운 사람도 도와주면서
그리고 원불교가 좋은 줄 알았으니 내가 재가교도로서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교화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계속 마음 속에 고민과 갈등은 있었죠.
그런데 제가 군대를 가서 전서를 6번을 보게 됐어요. 그 틈을 타서 우리 아버지는 편지를 넣기 시작합니다.
나 너 출가하도록 천일기도 시작했다. 원광대학교 편입해라.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거랑 달라요, 같아요?
제가 독한 생각을 했나요? 아마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저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고 또는 지금 그것을 했었던 생각의 변화가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면 모르는 소리 밖에 못한다. 알면 달라진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가 말하는 것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여러분들이 제 말을 얼마나 확실하게 받아 들였는가 몰라. 제가 마음 먹은 대로 다 됐어요. 거의 다 됐어요.
그런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냐. 천만의 말씀. 원불교를 만나서 내가 하면 될 수 있구나 하는 신념을 발견했습니다.
저도 아까 적당히 취업하고, 적당히 가정생활 하고 저는 학교 다닐 때 1등을 안했습니다.
하지도 못했지만. 항상 번호도 2번. 성적도 최대한 1등도 안하고 적당히.
적당히 살자는 가치관이었죠.
우리 명선이는 1등을 도맡아 하고 이번에 서울 의대도 사실 거의 수석으로 들어갔더라고.
저런 사람이 있는 가운데 저는 절대 수석을 하면 안된다.
능력도 없지만 역량도 없어서 그렇고 앞서 나가기 힘들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어요.
그런데 대종사님 법을 만나고 공부를 해보니깐 어리석은 생각이었구나.
최대한 내 능력을 키우고 최대한 배우고 내가 알만큼 세상을 보는 관점, 안목이 달라지고.
하다못해 어디 가서 책을 하나 봐도, 여행을 해도, 음악을 들어도, 누굴 만나서 얘기를 해도 소득이 완전 달라요.
나의 안목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진다.
똑같이 내가 태국에 놀러가서 보아도 다른 사람들은 다 마사지 하고 내기 골프하고 있더라.
나는 태국 가서 무엇을 했느냐. 불교 유적이 북쪽에 가면 엄청 많아요. 내가 기절할 뻔 했어요.
똑같은 관광을 가더라도 다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원불교 공부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확신을 갖고 하느냐에 따라
여러분들의 숨겨진 잠재 능력이랄까요.
숨은 보물을 반드시 스스로 발견해서 ‘아따, 내가 이 좋은 보물을 모르고 살 뻔 했구나.’ 그것을 아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이 생각한 본인의 역량과 꿈. 이것이 원불교라는 대종사님의 가치관을 만나서 훨씬 더 커지고,
단순히 내가 점수 1등 나고 문제가 아니라.
영어 공부 하라고 했더니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 영어 싫어. 영어는 내 취미 아니야. 영어 기초가 부족해.
적당히 점수 나오면 되지. 시험 보려고 하는 겅 아냐? 좀 알면 좋겠지. 아냐, 영어 글로벌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겠구나.
즉 학생이 영어를 시험보기 위해서 공부하느냐 아니면 내 인생에 앞으로 글로벌 시대에 영어가 필요 하겠구나 누가 잘 알겠어요.
자기가 공부해 본 사람이 알고, 외국에 다녀 온 사람은 안다.
그런데 자기의 조금만 사고에 의해서 나 한국에 살건데 뭐 이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영어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법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일주일에 머리 한 번 식히러 왔다 이 정도하면 아직 너무 많이 모른다.
오죽 했으면 나는 전서 6번 보고 혼자 보다가 미친 사람처럼 울기도 하고 춤도 추고 그랬겠어요.
여러분들 나같이 하라고 안하잖아. 출가하라고 안 해.
얼마나 좋으면 나는 여기에 내 인생을 다 바쳐버리고, 이생 뿐 아니라 내생에도 이 길을 가겠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왜, 여러분들이 느끼는 기쁨의 세계. 대종사님 법을 바라보는 눈과 제가 바라보는 눈의 차이다. 그것 뿐이겠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목표의 길이는 몇 년 입니까?
대종사님은 몇 만년을 목표로 세우셨다. 원불교를 다니는 사람은 초보자라도 최소한 다음 생 계획까지는 나와야 한다.
그것이 삼세를 바라보는 불생불멸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의 목표지 않는가.
겨우 이 생에 아니면 한 주 머리를 식히러 오고 이 정도의 시간 공간 관념을 가진 사람은 아직은 너무나 멀다.
여러 가지 기쁨이 있어요. 술 먹어도 재밌고, 맛있는 거 먹어도 재밌고, 구경해도 재밌고 좋아요.
예쁜 여자와 같이 정말 사랑을 속삭여도 좋아요. 근데,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아까 느꼈던 염불, 좌선의 재미. 이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말로 들은 게 아니라 내가 느껴보고 체험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 대종사님 법에 나는 얼마나 재미를 느껴봤느냐.
제가 이거 처음 읽고 느낀 소감이 ‘좋은 말 많이 써 져 있구나’ 이게 첫 소감이다.
그런데 원불교를 만나서 3,4,5년이 됐는데 최소한 2-3번은 봐야겠죠.
나는 군대에서 6번 봤다니까. 그때 출가한 거 아니여.
여러분들 제가 켈른 성당에 가봤어. 독일에. 미국 가서도 기가 막힌 성당 다 가봤어. 다른 교당 가보세요. 전셋집에..
재미를 최대한 많이 느끼도록 도와줘야한다.
봉사하는 재미도 있고 동지들간의 나누는 회화, 참회, 헌배하는 재미, 염불, 요가.
윤호가 그러데요. 요가 재밌어요
해보시면 알겠지만 요가라는 게 아픈 듯 하면서도 시원하거든요.
그 단식 같은거 호흡이 삭 깊어지면서 재미가 있거든요.
붓끝과 내가 하나 되는 기쁨. 지금 종법사님은 내내 글씨만 써도 좋겠다 하셨다.
세상을 보는 눈. 스스로가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눈.
신앙을 통해서 느끼는 재미 얼마나 아느냐
겨우 마음 착한 사람이 일생 봉사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 봉사도 일원상 자리를 알고 하는 봉사와 모르고 하는 봉사는 다르다.
나라는 존재를 알고 열심히 사는 것과
정신과 육신이 단순히 나 인줄 알고 사는 사람.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참 실체가 무엇인가어디서부터 어디가지가 나의 실체인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같겠는가.
작은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판단으로 창공과 대지를 바라보지 못하고 겨우 내가 생각한 것만 다행이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냥 일생 살다 죽는거다.
모를때는 괜찮아.
알면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다. 지금 제가 교무니까 아니면 어디 다단계같이 끌어드리기 위해 교화하는 거예요?
내가 그럴 거 같아요, 내 성질에? 절대 그렇지 않다.
나같이 인과를 불신한 사람도 드물었다.
모르면 모르는 소리한다. 중생은 중생 소리 합니다.
헌배만 해도 법문 쏟아 내는데 새로운 자신감이 충천할 것이다. 신념이 서고, 자기가 자기한테 감동이 온다.
자기가 자기에게 감동이 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 진리에게 감동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감동을 주게 되어있다.
저 일원상 자리는 결국 나다.
중생은 작은 나를 생각하지만 큰 나를 다 포함한 나다.
경의편의 경의라는 것은 대종사님이나 스승님이 말씀한 것 중에 모르는 분야가 있는데 그 뜻을 해석해 주셨다.
경전을 보면서 의심을 해놨던 사람은 재밌으실 것이다. 평상시 경전을 본 적이 없다면 그렇구나 좋은 말 써 졌구나 그럽니다.
자, 소중한 단회 열심히 하셨음 좋겠습니다.
▷ 질문과 답변
Q. 박윤호 교우님
살면서 대종사님 하지 말라는 일인지 그냥 느낌 없이 아무 것도 모르고 길을 들어가거나
어, 아닌데 이런 느낌 있어도 그냥 다른 것도 잘 모르니 그냥 들어가요.
어 이거 아니다. 다시 선순환으로 다시 터닝 포인트로 돌아서 갈 수 있는 방법이 교무님 같은 경우는 내면에서
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도 있었고, 바깥으로 인연이 있어 끌어 주는 인연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보통의 경우는 설령 바꾸려 해도 잘 안되거든요.
A. 교무님
네, 좋은 질문입니다
원불교를 만난 자체가 환경적으로는 터닝 포인트 환경을 만난 거예요.
그런데 원불교 만났다고 다 되는 게아니라 내 안에 정말로 신분의성이 들어가야 한다.
믿음이 탁 들어서서 마음이 ‘야 이거 한번 이 법으로 하면 괜찮겠다. 나는 이 생에는 이 법을 떠나지 않겠다.’
나는 출가할 때 그 생각 했어요. 만일 원불교에서 나를 쫓아내면 나는 총부 앞에 텐트치고
‘너희들이 나를 쫓아? 너희들이 손해 볼 걸’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 교사시간에 구인 선진님들이 대종사님이 자결하라 하셨죠.
창생을 위해서 너희들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자기 처자식 다 있는데도 다 죽겠다고 하죠.
저희 원불교 학과 다닐 때 교사시간에 물었어요.
“너희들 대종사님이 여기 와서 창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 있냐. 죽을 수 있어?”
그래서 내가 “네.” 그랬다.
왜, 나는 이미 이 법에 확신이 있었고 내가 죽어도 죽은 바가 없었다.
나는 이미 죽지도 않고 살아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과감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게 믿음이다.
그 다음 분발심이다.
나태와 반대말이다. 나태하지 않는 것이다.
원불교를 만났어도 내 생활이 나태하면 만나 것 뿐이지.
그 다음 의심이요. 까닭.
원리를 볼 수 있는 눈이예요.
본의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끝까지 내 것화 하려는 과정이요. 그냥 생각 없이 한다. 이건 나중에 직장 가서도 안된다.
의심 까닭이 있어야지 수학 문제를 풀고 원리를 알아서 새로운 문제가 와도 원리를 대입해 풀죠.
조금만 바꿔버리니 헤맨다. 사색의 과정이 없었다.
거기다 정성이다.
정성이란 것은 기분 좋을 때 정성이 아니다
정말로 하기 싫을 때, 곤란할 때, 정말 놔버리고 싶을 때 그때도 끊임이 없이 놓지 않는 정성의 마음.
그 때 누가 감동하는 지 아세요? 내가 나한테 감동한다.
옛날 같으면 내가 놔버리고, 옛날 같으면 내가 자빠져 버렸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일어설 수 있구나. 내가 하는구나. 내가 나한테 감동하는 정성이다.
그런데 말이죠. 신과 분과 의와 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엄청나게 도움 줍니다.
정성이 끊어리려해도 신분의가 있으면 정성이 살아난다.
그런데 거기에 원불교를 터닝포인트 환경을 만났지만 과거와 같이 불신. 학신이 없어. 긴가민가해.
원기 100년도에 안암교당이 저렇게 되겠어? 한번 지켜볼란가. 이건 불신이다.
안암교당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불신이다.
자기 불신이다.
그 다음 탐욕이다. 오른손 왼손 다 쥐려한다.
다 주던가요?
아무리 잘 풀린 집안도 말 못할 아픔이 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말 못할 아픔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다 있다.
과거에 또 여러가지 인연 관계가 그렇고 업력 관계가 그렇다.
그 속에서 불신 탐욕 나태가 있고, 나태가 말이죠 나태하면서 자기가 밉다.
거기서 분발심을 가져보세요. 겁나게 내가 예뻐진다.
오늘 새벽에 월초기도 하고 나서는 교도들 봤다.
막, 우주를 다 가진 사람처럼 기분 좋게, “교무님 갈게요!‘ 한다.
자기가 기도하고 새벽에 나갈 때 그 기쁨은 얼마나 좋은데요.
그런데 나는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방바닥에 꿀 발라져 있는지.
그러다 자행자지죠. 자기 감정에 쏠려서 사는 거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고.
그래서 우치를 가만히 놓고 자세히 봤더니 합리화의 달인들이다.
이래서 어쩌고, 저래서 어쩌고.
구체적으로 다 말해줄까? 내가 더 많이 알아. 몇 배를 더 쏟아낼 수 있다.
교무님, 다리가 아파서 못가겠어요. 엄마가 올라왔네요. 내일 시험이예요.
그것이 우치다.
신으로 딱 박아버리면 하는거다. 그냥 하는 거다.
하다보면 그 속에 묘한 조화가 있어진다.
자기가 먼저 안다. 가까운 사람, 스승 진리가 다 알게 되어있다.
정말이다.
나는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을 보면서 인물도 별로고, 목소리도 별로다.
우리 남궁부보다 인물이 좋아 목소리가 좋아. 남궁부가 훨씬 낫다.
그 분은 원불교를 만나 것도 아니다. 그 양반보다 더 잘될 수 있다.
왜, 원불교 만났지. 인물 좋지, 목소리 좋지, 지혜가 부족한가. 대종사님 법 만났지.
문제는 뭐냐, 신분의성으로 하느냐. 아니면 불신탐욕나우로 하느냐 여기에 달렸다.
자기가 자기한테 대화를 많이 해봐야한다.
그리고 목표를 딱 잡아서 혼자 잡고 있지 마세요.
나는 5시 일어나야지 혼자 다짐해요. 그러지 말고 단장한테 보고 하세요.
까페에 올리세요. 유무념으로 잡으세요. 시계를 몇 개 더 사세요.
그래서 타력을 입으세요.
단장님, 전화 좀 해주세요. 단장님 자? 그런 단장 없다.
혼자 다짐하면 혼자 사라져요.
그래서 서원이다. 서원은 외서내원이다.
밖으로 내가 간절히 스승과 진리 전에 맹세를 올린다. 그리고 내 안으로 간절히 원한다.
그런데 자기 혼자 속으로만 원한다.
이런 사람은 안된다.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기록화 해야 한다. 책상에 탁 적어놓아야 한다.
겸손하게 나중에 실적으로 보여 드릴게요 그래요?
겸손해서? 자신 없으니까? 어리석은 겸손이지.
대종사님은 학교도 안 나온 사람 다 가르쳐 교무 다 내보내셨다.
원불교 법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차근차근 키워서 내가 커야지. 그게 아니다.
상황 따라 내가 그릇이 아닌데도 먼저 채울 수 있다.
돈을 벌어서 사업을 키울 수도 있지만 먼저 돈을 차입을 해서 나중에 갚아가면서 하는 방법도 있다. 그와 같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내가 어떤 목표를 잡거나 상황에 따라서 지금 똑같다.
이제 내년 임원 선출 중인데 저는 못해요,
왜, 조건이 많지. 나는 바빠요. 나는 능력이 없어요. 온 지 얼마 안됐어요. 여자예요.
그럼 이중에 다 갖춘 사람 누가 있는가.
머리도 좋지, 직장도 좋지, 애인도 있고, 결혼 날짜도 잡고, 견성 다한 사람. 어딨는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나중에 채워서 하겠다. 그런 사고방식이 구시대 방식이다.
때로는 내가 역량이 안되는데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면 채워버리는 것이다. 채우면 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