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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 [ 四聖諦 ]
십이인연과 연관하여 고·집·멸·도로 구성된 불교교리
[내용] 사제(四諦)라고도 함.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후 자기 자신의 자내증(自內證)을 고찰하여 설한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면, 사제설은 이 인연설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십이연기설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사제설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으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사제설을 고안하였다. 그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처음 설법한 것이 사제의 가르침이다.
사제의 첫째는 고제(苦諦)이다.
고제는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 고(苦)는 구체적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의 네 가지를 합한 8고로 하고 있다.
이 중 애별리고와 원증회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 그리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고뇌의 원인이 된다. 특히 자기 중심적인 애증(愛憎)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뇌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구부득고는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앞의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들이다.
오온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것으로, 오온(五蘊 : 一切法)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집착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둘째는 집제(集諦)이다.
집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므로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으로서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無明)과 갈애를 고뇌의 원인으로 함께 보고 있다.
그러나 갈애는 무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속에 무명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갈애는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욕애(欲愛)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을 말한다.
유애(有愛)는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도 자기 중심적인 욕구이며, 천국 등도 윤회계(輪廻界)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무유애(無有愛)의 무유는 비존재, 즉 허무를 말한다. 어떠한 존재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을 무유애라 하는데, 무유애 또한 자기 중심적인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무아(無我)나 현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갈애는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탐욕을 일으키고, 맞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며,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멸제(滅諦)이다.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음을 말한다.
넷째는 도제(道諦)이다.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이는 또 유(有)에도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수행법으로서 원시불교의 근본교의를 이루고 있다.
사제 중의 고는 생사과(生死果)이고, 집은 생사인(生死因)이며, 멸은 열반과(涅槃果)이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두 가지는 생사유전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과 도의 두 가지는 유전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열반과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의 수행법을 말한다.
그러나 후기의 학자들은 성문(聲聞)이 고집하는 사제의 견해를 파(破)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집·멸·도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집착을 깨뜨려서 사제의 진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사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집제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멸제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도제라고 하였다. 즉 사제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성제 [四聖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사성제 2[ 四聖諦 ]|작성자 수연화
사성제 [ 四聖諦 ]
[개요]
불교 중심교리의 하나. 네 가지 가장 훌륭한 진리라는 뜻으로, 줄여서 ‘사제’라고도 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와 그 해결 방법에 대한 네 가지의 근본 진리를 의미한다. 제(諦)는 진리, 진실이란 뜻이며, 그러한 진리가 신성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 또는 사진제(四眞諦)라 한다. 불교의 실천적 원리를 나타내는 불타 교설의 대강(大綱)으로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① 고제:
현실세계의 참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범부 중생의 현실세계는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ㆍ로ㆍ병ㆍ사의 사고(四苦)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고, 여기에다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고 구하는 것을 이루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陰盛苦) 등 팔고(八苦) 속에서 윤회 애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 집제:
현실세계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갈애(渴愛)ㆍ무명ㆍ번뇌의 애욕 집착 때문에 십이인연으로 한없이 윤회 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바깥에 있다고 보지 않고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특색이다.
③ 멸제:
온갖 괴로움을 멸하고 무명ㆍ번뇌를 멸하는 것으로 이가 곧 열반이요, 해탈이다. 열반과 해탈의 세계가 곧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理想)세계이다.
④ 도제:
괴로움과 무명ㆍ번뇌를 멸하고, 열반ㆍ해탈을 얻어 십이인연을 자유자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라 하는데, 곧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의 실천 수행을 말한다. 정견은 올바른 견해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 정어는 올바른 말, 정업은 올바른 행동, 정명은 올바른 생활, 정정진은 올바른 수행 정진, 정념은 마음을 바르게 통일하는 것, 정정은 올바른 선정(禪定)이다. 이 사제 중에서 고제와 집제는 유전(流轉)하는 인과세계이고, 멸제는 깨달을 목표 곧 이상을 말하며,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의 수단이라 한다. 이 사제는 석가모니불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 내용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사성제의 내용]
불교에서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사트야(satya)라는 말은 ‘제(諦)’로 읽는데, 사실(fact)ㆍ진실ㆍ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ㆍ집ㆍ멸ㆍ도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ā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7, 《상적유경(象跡喩經)》)라고 일컸는다.
① 고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ㆍ로ㆍ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② 집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곧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āga)’(《잡아함》 권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āvika) 희탐(喜貪, nandiā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ṛṣṇā)’(《잡아함》 권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이고, 수ㆍ상ㆍ행은 촉이, 식은 명색이 그 집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2).
괴로움의 집에 대해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일어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고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③ 멸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④ 도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정견(正見, samyag-ḍṛṣṭ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사유(samyag-saṃ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samyag-vāc)와 정업(samyag-karmā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과 신업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정명(samyag-ājī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samyag-vyāyā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samyag-smṛ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정정(samyag-samā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사의 괴로움도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일어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정사유-정념)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도록 집중(정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ādhi)과 혜(慧, prajñā)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 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임을 알 수 있다.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써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불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성제 [四聖諦] (원불교대사전)
[출처] 사성제[ 四聖諦 ]|작성자 수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