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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안도현 시 모음
천장암 추천 0 조회 76 12.03.04 14: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 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가 우는 것이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살구나무 발전소                                                       

 

여름이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 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연애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게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 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양철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말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말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때 쓰러질 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 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열심히 산다는 것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 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하고

백 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 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 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일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분홍 지우개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 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어제도 나는 강가에 나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오시려나, 하고요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가슴으로

눌러 두고

당신 계시는 쪽 하늘 바라보며

혼자 울었습니다


강물도 제 울음소리를 들키지 않고

강가에 물자국만 남겨 놓고

흘러갔습니다


당신하고 떨어져 사는 동안

강둑에 철마다 꽃이 피었다가 져도

나는 이별 때문에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란도란 열매가 맺히는 것을

해마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별은 풀잎 끝에 앉았다가 가는

물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벼운 것임을

당신을 기다리며 알았습니다


물에 비친 산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던

그 뻐꾸기 소리가 당신이었던가요


내 발끝을 마구 간질이던

그 잔물결들이 당신이었던가요

 

당신을 사랑했으나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오늘은 강가에 나가 쌀을 씻으며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 밥 한그릇 맛있게 자시는 거 보려고요

숟가락 위에 자반 고등어 한 점

올려 드리려고요

거 참 잘 먹었네,

그 말씀 한 마디 들으려고요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오래된 우물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 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 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척 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 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단지에도 그날, 살이 올랐다네.

 


찬밥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쓸쓸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찬밥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낙엽이 지는 날

그대의 저녁 밥상 위에

나는

김 나는 뜨끈한 국밥이 되고 싶다

 

 

먼 산                                                     

 

저물녘

그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부를수록 멀어지는 서쪽 산이 되지요

그대가 나를 감싸는 노을로 오리라 믿으면서요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숨기고

그대의 먼 산 되지요

 

 

낭만주의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廢船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라?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印稅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詩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 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20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 왔던 거야

생각해 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 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 주었을 거

詩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絶交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詩人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낙동강(洛東江)                                   

-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저물녘 나는 洛東江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木船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서울로 가는 全琫準(전봉준)                         

-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당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 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혜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가을엔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가을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낡은 자전거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사진출처 내 영혼의 깊은 곳]


안도현 (1961. 12. 15 -    )                                                                      

경북 예천 출생. 
주요수상  제1회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1996), 제13회 소월시문학상(1998) 
    
1961년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서 아버지 안오성과 어머니 임홍교의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대구 아양국민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문예반 '태동기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홍승우·서정윤·박덕규·권태현·하응백·이정하 등의 선후배들을 알게 되었고, '학원문학상' 등 전국의 각종 백일장과 문예 현상공모에서 수십 차례 상을 받았다.

 

1980년 원광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고, 대구에서 발간되던 통신문학지 《국시》 동인으로 박기영·박상봉·장정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학 시절 최정주·최문수·권강주·정영길·김영춘·백학기·이진영·이요섭·이정하 등 선후배들을 알게 되어 이들과 '원광문학회'를 결성하였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었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989년 8월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이리중학교에서 해직당하였다. 이후 1994년 2월까지 전교조 이리익산지회에서 일하면서 김진경·도종환·배창환·조재도·정영상·조성순·조현설 등과 함께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하였다. 1994년 3월에 전라북도 장수 산서고등학교로 복직되어 일하다가 1997년 2월 교사직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5년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하고 김백겸·고형렬·양애경·김경미·고운기 등과 함께 '시힘' 동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에는 이광웅·정양·김용택·이병천·박남준 등과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9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전북지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96년 제1회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2002년 제1회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그리운 여우》(1997),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등의 시집과 《연어》(1996), 《관계》(1998), 《짜장면》(2000), 《증기기관차 미카》(2001) 등 어른들을 위한 동화, 그리고 산문집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1998), 《사람》(2002)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작가 이야기 
 
타인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과 고귀함, 그리고 훈훈한 인간미


언제나 천진난만한 미소를 잃지 않는 안도현은 이 시대의 몇 안 남은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자 시인이다. 그를 이렇게 명명하는 까닭은, 그의 시에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냉혈한 한기 속에서 끈덕지게 살아 남은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부를 만큼 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고귀함, 그리고 훈훈한 인간미에 대한 풍요로움이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 시를 보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


안도현은 이런 명령과 질문을 통해 우리들이 연탄재를 아무 생각 없이 발로 차듯, 얼마나 현실 속에서 무책임한 불평과 공격만을 일삼으며 살아왔으며, 또한 사랑과 헌신으로 타인을 감싸안는 대신에 자신의 이익과 보존을 위해 세계를 낚아채는 데만 급급해 왔는가를 반성하도록 만든다. 심신이 지친 식구들을 위한 저녁밥 한끼를 위해, 온돌방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온몸으로 불사르는 '뜨거운 희생'! 이타적 사랑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은 '뜨거운 산화'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차가운 응고'를 통해서도 실현된다. 누구나 한번쯤 고독을 즐기며 바라보았을 겨울 강가, 그 위에 내리는 눈발들, 그리고 강의 가장자리에서 번져 나가는 살얼음……. 안도현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강물 위에 내리는 눈발들, 물위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가녀린 흰꽃들이다.

 

오랜 '잠복기의 동굴'과 '묵상의 밀실'을 빠져 나와 이제 시인은 이렇게 속삭인다. '강물에 투신하는 어린 눈발들이 안타깝지 않은가. 수면에 안착하자마자 소멸되고 마는 어린 영혼들. 쯧쯧. 아마도 강물이 계속해서 뒤척이는 건 눈발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일 테지. 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눈에게 "내게로 오지 말라"고 외쳐 대는 소리인지도 몰라. 그래도 계속해서 철없이 내리는 눈발. 그래서 강은 용단을 내렸지. 자신을 희생해서 눈의 생명을 구해보려고. 눈을 온몸으로 받아 내려고 변신을 시도한 것이지.' 액체에서 고체로, 물에서 얼음으로.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응고의 고통'! 그리고 한편의 시가 탄생한다. "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겨울 강가에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그이 시를 지칭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다: "안도현이 거, 시 잘 쓰데." (류신/문학평론가)

 

 

 

 

 

http://www.ahndohyun.com

(안도현 시인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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