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을 기억하며
-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장원태
노화현상으로 시력이 나빠지기 전까지 소설책을 놓지 않았다. 내가 사는 팍팍한 현실보다는 차라리 소설 속의 삶이 좋았다. 시공간을 맘대로 넘나들고 젊을 수도, 늙을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었다가 부자였다가. 내가 맘만 먹으면 맘대로 넘나드는 것이 좋다. 소설책은 언제나 넘쳐난다.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 있다. 내 곁에는 항상 소설 속 주인공이 같이 산다는 게 작은 행복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대리만족시켜 주었다. 그의 활약이 있었기에 내 인생도 즐거웠다. 무시로 내가 소설책을 읽지 않고 심취하지 않을 때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소설 속 주인공은 내 삶의 일부였다. 내가 불안하지 않고 행복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었다. 가슴안에 공존하는 나와 또 다른 나.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내가 있었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줄거리가 아주 단순한 구조다. 작중 화자인 경하와 친구인 인선, 그리고 인선의 엄마 이야기 중심이다. 같은 대학에 다녔고 한때 영화 작업을 같이 했던 인선이 제주도 한라산 밑 중산간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자기 집에 있는 애완 새 ‘아미’을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공방을 운영하던 자신이 다쳤으니 자기 집에 가서 ‘아미’에게 물을 줘서 아미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새는 사나흘 음식과 물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필 제주에 눈보라가 치는 날, 주인공은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새를 살리기 위해서 비행기에 오른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며 주인공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인선은 몇 차례 영화 관련 작업을 함께 했고 누구보다도 마음이 잘 통하는 단짝 친구였다.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영화 작업을 하려다 잠시 쉬고 있을 뿐인데 의도치 않은 사고가 난 것이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 몰아치는 길을 따라 한번 가 본 인선을 집을 찾는다. 눈이 쌓여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수로 건천에 빠진다.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인선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설 중반까지는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했고 이후는 인선이 들려줬던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몇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우선 대화 내용을 큰따옴표에 넣지 않고 서체를 변형시키고 기울기를 달리하여 표현했다. 기존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이다. 아마도 이 방식을 선택한 것은 제주도 방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제주 방안은 따라 읽기 힘들었다. 아마도 소설 읽기의 속도감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조절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숨바꼭질하듯 흔히 볼 수 없는 단어를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명, 우듬지, 무람없이 등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몇 차례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순우리말을 새로운 발견하는 묘미도 곁들였다.
인선이 모아 놓은 방대한 자료를 보면서, 그리고 인선 엄마의 시선으로 따라간 제주 4·3사건을 크게 클로즈업시킨다. 아무리 전쟁의 와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다. 그것마저 상실한 채, 마치 구제역 걸린 돼지 매몰하듯이 쓰러져간 인간 군상의 험로를 떠올리게 만든다. 대구교도소에 수용된 재소자, 혹은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보도연맹 가입자를 학살하는 장면은 끔찍하다 못해 험오스럽기까지 했다. 인선 엄마는 보도연맹에 끌려간 자신의 오빠를 찾는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을 요량으로 오빠의 인생을 따라가 보지만 좌절만이 그의 앞에 놓여 있다. 그 허망함이란 어떤 것일까? 경산 코발트 광산 갱도에 생매장되거나 학살된 사람이 삼천 명이 넘는다 하니 과히 어처구니없다. 죄인의 가족이라는 오명 때문에 쉽게 유해조차 발굴할 수 없었던 시대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아직도 유해 발굴이 진행형이라고 하니 소설 속 화자가 느끼는 것처럼 제주 공항 기초할 때 매몰된 유해에서 원혼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소설 속 주인공이 발을 헛디뎌 빠진 제주 건천이나 경산 코발트 광산이라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면 그곳에 가서 추모라도 하자. 이 소설을 읽고 제주의 아픔뿐만 아니라 역사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은 당연하리라. 소설 제목인 『작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하자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첫댓글 장원태 선생님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작가 '한 강'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면서 그의 행보에 축포를 터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