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29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펜촉의 반란’]
펜촉의 반란
엄지가 툴툴거린다
펜을 달래기란 힘든 일이다
먼지 낀 서가 일우(一隅), 곰팡내 그윽한
어느 곳에서 몰아쉬는 골안개 닮은 숨소리
오늘도 펜이 뱉어내는 나직한 소릴 들었다
네 생각이 바뀌고, 세상이 꿈틀대면
내가 먼저 일어나리라
언젠가 저문 들녘에서 콩잎을 세고 있을 때
날아가던 검은 새, 하얀 석양빛이 보였다
젖은 주마등에 남빛 파노라마 물결
안구도 졸아들고
운기(運氣)도 희미한데, 문득 펜촉이
버들잎을 물고서 항문을 벌려 보였다
빙그레 웃으며 이죽대길
내가 휘면 네가 사는 거야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펜촉의 반란」은 글을 쓰는 행위 이면에 숨겨진 창작자와 필기구(펜) 사이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 그리고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을 생생하고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단순한 수동적 도구에 불과해야 할 '펜'이 스스로 생명력과 의지를 얻어 오히려 작가를 압도하고 조롱하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글쓰기의 본질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시의 주요 의미망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해 드립니다.
1. 주체를 압도하는 도구의 능동성 (1~2연)
시의 첫 문장인 "엄지가 툴툴거린다 / 펜을 달래기란 힘든 일이다"는 글을 쓰려는 자(육체)와 쓰이는 도구(펜) 사이의 물리적, 정신적 마찰을 보여줍니다.
⚫창작 공간의 묘사 : "먼지 낀 서가 일우", "곰팡내 그윽한" 곳은 오랜 시간 고뇌하며 글을 써온 낡고 정체된 작가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펜의 의인화 : 이곳에서 펜은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라 "골안개 닮은 숨소리"를 내고 "나직한 소리"를 뱉어내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묘사됩니다.
⚫주도권의 역전 : 특히 "네 생각이 바뀌고, 세상이 꿈틀대면 / 내가 먼저 일어나리라"라는 펜의 선언은 놀랍습니다. 작가의 사유가 깨어나면 도구가 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구가 먼저 기립하여 사유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주체적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작가의 쇠락과 펜촉의 기괴한 생동감 (3연)
3연에서는 창작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화자의 내면 풍경과, 극도로 육체화된 펜촉의 생명력이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자아의 소진 : "저문 들녘", "날아가던 검은 새", "하얀 석양빛" 등의 시각적 심상은 황혼기에 접어든 혹은 창작의 고통으로 지쳐버린 화자의 쓸쓸한 내면을 비춥니다. 결국 "안구도 졸아들고 / 운기(運氣)도 희미한" 육체적 한계 상태에 다다릅니다.
⚫그로테스크한 생명력 : 화자의 에너지가 바닥난 바로 그 순간, 펜촉은 "버들잎을 물고서 항문을 벌려" 보인다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이미지를 연출합니다. 여기서 '항문'은 잉크를 토해내는 펜촉의 갈라진 틈(slit)에 대한 파격적인 은유입니다. 작가의 생명력이 소진될수록 오히려 글을 뱉어내려는 펜촉의 원초적 배설 욕구는 징그러울 만큼 극대화되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3. 굴복과 생존의 아이러니 (4연)
이 시의 백미이자 핵심 주제가 집약된 결구입니다. "내가 휘면 네가 사는 거야"라는 펜촉의 조롱은 서늘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종이 위에서 펜촉이 강하게 눌려 '휘어지는' 물리적 훼손과 고통의 순간에 비로소 잉크가 흘러나와 글이 써집니다.
즉, 펜이라는 도구가 스스로를 굽히는(휘는) 희생과 타협을 통해서만 작가('너')의 사유가 문장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도구가 주인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이죽거리는" 이 장면은, 위대한 문장이라는 것이 결국 작가가 도구의 물성에 철저히 굴복하고 매달린 끝에 얻어지는 처절한 결과물임을 암시합니다.
⛹ 총 평
한기홍 시인의 「펜촉의 반란」은 창작이란 자아의 일방적인 발현이 아니라, 매체(펜)와의 치열한 길항 작용이자 피학적인 투쟁임을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펜촉의 물리적 형태를 기괴한 신체 기관으로 치환한 상상력이 돋보이며, 글을 쓴다는 것의 고단함과 그 속에서 탄생하는 언어의 끈질긴 생명력을 '반란'이라는 메타포로 훌륭하게 형상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