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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온 탕자와 나간 탕자
누가복음 15:22-32
탕자의 비유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낭비하고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대 환영을 받고 이웃과 더불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며 좋아 했습니다(23).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며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28). 이 말씀에서 집으로 돌아온 탕자와 집을 나간 탕자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뻔 했던 어려움에서 이겨냈던 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주셨다면서 감사를 합니다. 어떤 어려움도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감사를 느끼지 않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던 사람이 회복했을 때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병들지 않고 평범한 가운데 조용히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사고가 많은 오늘 하루도 아무른 사고도 없는 안녕과 평안이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동생은 극적인 변화를 가진 사람이고 형은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누가 더 문제의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형은 극적인 변화도 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아버지 집을 떠나므로 해서 배고픔을 당했을 때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 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고 완전히 중생하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복을 받았습니다.
형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집안일을 돌보며 평범하게 살아 왔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효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구제불능의 사람이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단순한 한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들의 문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종말론적인 교훈으로 하신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그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즐거워하며 집에 와서 벗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7).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여인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즐거워하였습니다(9).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며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달리 불평하며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 한 맏아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둘째와 맏아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18)라는 말씀과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니 아니’(28)란 말씀입니다.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아들과, 들어가자고 권해도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는 아들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실수가 과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자랑을 합니다.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치고 현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믿음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치고 현재의 그의 믿음은 뜨겁지 않습니다. 미지근합니다. 반대로 과거에 잘못한 사람의 현재의 믿음은 다소나마 겸손이 보입니다. 과거에 잘못을 깨닫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잘 해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는 아버지를 떠나 제 맘대로 살았습니다. 허랑방탕하다가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과거의 잘못을 깨달은 아들은 ‘지금부터는 아버지 집에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습니다. 종처럼 낮아졌습니다.
그런 반면에 맏아들은 과거를 자랑했습니다. 집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25). 여러 해를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했습니다(29). 그러나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었다’는 말은 대단히 위험한 저항이 깔려 있습니다. 부모님께 하는 말 중에 부모를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모의 말을 어긴 것이 없이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맏아들은 아버지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다’(29)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았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는 말은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말입니다. 고마움과 감사가 없는, 더 큰 것을 바라는 협박과 공격이 숨겨져 있는 말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율법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율법사는 ‘어릴 적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율법사에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그 율법사가 ‘율법을 누가 다 지킬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더라면 그래도 양심이라도 있는 정직한 율법사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는 율법사에게는 양심이 마비된 자기 의에 빠진 교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의 명을 어긴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은 자신의 불효를 모르는 아들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밭에 나가 일하는 것 역시 부모를 잘 섬기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적인 순종일 뿐이지 칭찬 받을 만큼의 순종하는 아들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부족함을 알고 죄인임을 알고 내적인 고민과 심각성이 있어야 함에도 그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교만에 빠진 위선자 일 뿐입니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나를 즐겁게 해 준 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나는 수고를 많이 했고 의롭게 살았는데 받은 것이 없다는 불만은 무서운 말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31)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불평하는 아들에게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도록 알려 주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규례에 따르면 부모가 죽은 후에 유산을 분배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둘이라면 형은 유산의 2/3을 갖고 동생은 1/3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동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미리 자기의 분깃을 요구해서 다 날려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맏아들의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것이지만 돌아가시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맏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불평은 아직 아버지의 재산이지만 장차 내 것이 될 재산 중에 송아지를 잡아 동생을 위해 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불만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하였다는 것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동생의 잘못을 무섭게 책망하고 쫓아내지 않고 반가이 맞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30)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라고 한 것은 마치 아버지의 전 재산을 탕진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부도덕한 면을 부각시켜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고 했습니다. 동생이 창녀와 함께 했다 것은 가장된 말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허랑방탕하여’(13)라는 말뿐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마치 동생을 더 이상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말하므로 해서 아버지로부터 책망을 듣고 쫓겨나야 할 것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의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하므로 동생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맏아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마음과 정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32)고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맏아들과 아버지와의 마음이 전혀 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맏아들은 ‘이 아들’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네 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다’고 말하므로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었던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의 잘못을 용서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한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탕자의 모든 잘못을 송아지를 잡음으로서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용서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동생이 집을 가난 것을 조금도 염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왜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동생의 죄를 용서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죄인으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하는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라고 하며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맏아들의 불만은 아버지가 동생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불만을 품은 맏아들에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고 말해 주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비유를 한 가정에서 일어나 단순한 사건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와 함께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구속사적인 교훈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백성들을 찾아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죄중에 버려진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한 영혼이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 하나가 용서함을 받았을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한 영혼을 잃었을 때 아파하시는 마음과 찾아 돌아왔을 때 기뻐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 형으로서 마음을 아파했더라면 아버지처럼 기뻐 즐거워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은 동생이 집을 가났을 때 아버지처럼 마음 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돌아왔지만 아버지처럼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공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란 아버지와 맏아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탕자는 집을 나가 고생하다 보니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무 탈 없이 살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평안하게 살았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탕자였던 동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늦게나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동생은 돌아온 탕자이지만 형은 집을 나간 탕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돌아온 탕자가 있는가 하면, 집을 나간 탕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탕자입니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 돌아온 탕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줄 모르면 집을 나간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권면을 듣고 집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5장에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결론은 7절과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것이나,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것이나, 잃었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가 없을 때 집을 나간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므로 돌아온 탕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나와 여러분이 됩시다.
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