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팔균(申八均, 1882~1924)과 임수명(林壽命, 1894~1924)
독립군은 지청천(池靑天), 김경천(金擎天)과 함께 남만주를 호령했던 ‘삼천(三天)’ 중 한 분인 신팔균(이명; 申東天) 장군이며, 간호사는 그의 부인 임수명(林壽命) 여사이다.
신팔균은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육군 참위(參尉)를 거쳐 1903년에 시위대(侍衛隊)에 차출된다. 시위대의 임무는 황실 호위였다. 그렇기에 당대 최고의 정예병으로 구성했다. 집안의 영향이 없지 않았지만, 신팔균의 무예와 충의가 남달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907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황실 시위대도 허울뿐인 군사 조직으로 전락했다. 신팔균은 퇴역하고 낙향했다. 그리고 민족정신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를 목표로 보명학교(普明學校, 현 진천군 이월초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운동에 발을 들였다.
신팔균의 구국운동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에 신민회 소속 청년들이 신민회의 이념에 따라 국권 회복을 모색하고자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신팔균은 대동청년단의 젊은 회원들과 함께 신사상을 교류하며 구국의 힘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졌다. 대한청년단의 젊은 회원들은 해외로 나아가 항일투쟁을 모색했다. 조선총독부의 달콤한 유혹과 집요한 감시가 따랐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혼돈 속에서 신팔균은 만주로 향했다.
1922년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광한단(光韓團) 등이 요녕성 환인현를 거점으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했다. 개별 독립운동단체들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한 쾌거였다. 나아가 2개월 후에는 관전한교민단(寬甸韓僑民團), 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 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등이 가세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산하에는 민사, 교섭, 군사, 재무, 학무, 법무, 교통, 설업 등 부서를 두었다. 일종의 정부 형태였으며, 관할 지역은 환인현을 비롯하여 통화, 집안, 관전, 흥경, 유하, 임강, 장백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