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천(李蕆)이 졸(卒)하였다. 이천은 예안(禮安) 사람으로 군부 판서(軍簿判書) 이송(李竦)의 아들이다. 계유년에 비로소 별장(別將)에 보직(補職)되고, 임오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경인년에 또 무과 중시(武科重試)에 급제하고, 여러 번 옮기어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다가, 〈외방으로〉 나가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가 되었고, 들어와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배명(拜命)되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전임되었다
. 병진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나가서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平安道兵馬都節制使)가 되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여 공로가 있으므로 특별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배명(拜命)되었고, 그대로 도절제사를 겸직하였다.
뒤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으나, 세종이 승하(升遐)하자 기복(起復)하여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어 산릉(山陵)의 역사(役事)를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천이 전(箋)을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이어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하고 예에 의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6세였다. 2일간 철조(輟朝)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치루었다. 시호(諡號)를 익양(翼襄)이라 하니, 사려(思慮)가 깊고 먼 것을 익(翼)이라 하고, 갑주(甲胄)의 공로가 있음을 양(襄)이라 한다. 천성이 정교(精巧)하여 화포(火砲)ㆍ종경(鍾磬)ㆍ규표(圭表)ㆍ간의(簡儀)ㆍ혼의(渾儀)ㆍ주자(鑄字)와 같은 따위를 모두 그가 감독하고 관장하였다. 또 무략(武略)이 있어서 드디어 대배(大拜)하기에 이르렀으나, 탐오(貪汚)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그 어미 염씨(廉氏)는 염흥방(廉興邦)의 누이동생이었으므로, 무진년에 이송이 염씨의 난으로 죽었다. 이천이 일찍이 오랫동안 상의원(尙衣院)의 제조(提調)가 되어 모든 역자(譯者)가 북경(北京)으로 갈 때 으레 상의원의 포목(布木)으로써 〈중국〉 채단(綵段) 등의 물건을 바꾸었는데, 이천은 반드시 사물(私物)을 가지고 역자에게 부탁하여 바꾸어 오게 하였다. 그 바꾸어 온 물건이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상의원에 바꾸어 온 물건을 바칠 때를 당하여 비록 품질이 좋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억눌렀기 때문에 역자가 이천의 집에 바친 물건은 그 정교하고 좋은 것이 반드시 그 값보다 갑절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그를 비루(鄙陋)하게 여기었는데, 어떤 비평하는 자가 이르기를,
“어찌하여 무진년의 난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하였다. 아들 이효로(李孝老)와 이충로(李忠老)는 모두 먼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