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라
빌립보서 4:1-4
2023.9.3 주일낮 11시
인도 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교회 진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1 KRV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부분에서 언급한 내용을 이어주는 말이다. 앞부분에서 바울이 말한 내용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3장의 결론 부분 20-21절이다.
신자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신자는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린다. 즉 우리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주님 재림시에 우리 몸을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입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즉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주님 재림 때에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갖게 될 것이므로,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이여 주안에 서기 바랍니다."고 권면한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신자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1:8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를 사모한다고 말한다. 그 사모하는 바울의 마음의 진정성에 대해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한다.
'형제들' 즉 '(헬)아델포이'라는 호칭은 그들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바울이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동등한 지위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랑하는' 즉 '(헬)아가페토이'는 1절에 두번 반복해서 쓰인 단어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바울의 사랑의 대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를 겸손하면서 더욱 강렬하게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하는'이라고 강조했다(Gerald F. Hawthorne, Philipians, Texas:Word books, 1983, 177).
'사모하는' 즉 '(헬)에피포쎄토이'는 영어로 'lo ged for'이다. 이 단어는 바울이 느끼는 분리의 고통 즉 '향수애(homesick tenderness)'의 정서를 강조한다. 신약에서 여기에만 쓰였다.
'기쁨' '(헬)카라'는 빌립보서에 특별히 자주 쓰인단어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본 정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주목할 점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기쁨이라는 것은, 그들이 바울의 기쁨의 원천이요 이유라는 것이다.
이 기쁨은 바울이 감옥(로마)에 갇혀있다는 속박의 상황을 초월한다. 믿음안에서 친구들과 영적 자녀들이 바울 내면에 기쁨을 솓구치게 한다.
"면류관", "(헬)스테파노스"는 왕이 쓰는 왕관(헬, 디아데마, 계 19:12)이 아니다. 혹은 순교자의 면류관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잔치에 참여한 손님의 머리에 씌우는 화관 혹은 올림픽 게임에서 승리자에게 심판이 수여하는 승리자의 화환 혹은 이와 동등한 것이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인들은 축제 자리에서 화관을 쓰고 누리는 기쁨의 원인과 같다. 바울에게 그들은 큰 명예를 안겨주는 사람들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자랑이요 즐거움이요 명예이다. 그들은 바울의 면류관이다(Gerald F. Hawthorne, Philipians, Texas:Word books, 1983, 178).
그들을 향한 자신의 강렬한 애정을 표현한 후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굳게 서라"(헬, 스테케테)고 요청한다. 이 단어를 통해 그는 그들을 군인들로 묘사한다.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말고 그들의 자리를 지키라고 권면한다. 복음의 경주자들은 그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철저하게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이다(1:27).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4:2 KRV
신자들 간에 일치를 이루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필수 요소이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님 안에서 일치에 이르라"고 호소한다. 그의 호소의 간절함은 동사 '헬, 파라칼레인' 즉 '호소하다, 촉구하다, 권하다'에서 드러난다. 바울이 그 동사를 두번 반복하여 사용한다. 양측에 동일하게 사도적 권고를 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 권고는 그리스도의 주재권 즉 주님되심 아래서 함께 조화롭게 살라는 것이다(Gerald F. Hawthorne, Philipians, Texas:Word books, 1983, 178).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비문들, 즉 묘비명 등에서 항상 여성형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그들을 3절에서 다시 여성형 대명사들, '헬, 아우타이스, 아이티네스'로 언급한다.
이 여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또 그 여인들 즉 여신도들의 싸움의 내용도 알 수 없다. 두 여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루디아'일 가능성이 있다. 루디아는 "리디안" 즉 소아시아에서 온 여인이라는 뜻이다. "유오디아" 혹은 "순두게"가 루디아의 본명일 수 있다.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데 루디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추측은 개연성이 있다.
어느 경우든 이 두 여성도는 빌립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둘다 여집사들이었거나
그들 각자의 가정에서 별도 회중이 예배를 위해 모였을 수 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을 세우는데 여인들이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였다(사도행전 16:12 KRV).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사도행전 16:14 KRV).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나가게 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이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았다.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갔다(사도행전 16:40 KRV).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들은 자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사도행전 17:4 KRV).
베뢰아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했다. 이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다(사도행전 17:12 KRV).
그러므로 교회 회중이 많아지고 영향력있는 두 여인들 간에 다툼이 커져서, 교회 공동체의 조화를 깰 가능성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마음을 갖도록 호소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1-5 KRV
자기 위주의 자기 본능적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과 섬김의 태도를 가지라고 호소했다(같은책, 179).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4:3 KRV
3절은 갑자기 제 삼자 즉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에게 호소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서로 두사람 힘 만으로 화해가 어려우니 바울이 삼자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 삼자 즉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바울의 아내인 루디아 였다(바울은 독신으로 알려져 있다).
유오디아 혹은 순두게의 남편 혹은 오라버니 였다.
에바브로디도였다.
디모데였다.
실라였다.
누가였다.
빌립보 주교였다.
그리스도였다.
'수주고'라는 사람이었다.
등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호돈에 의하면 빌립보 교회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보아서 즉 한 개인으로 보아서 바울 사도의 짐을 나누는 자로 보아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이 호소하는 것이다(Gerald F. Hawthorne, Philipians, Texas:Word books, 1983, 180). 필자는 디모데로 추측한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가 달라도 주님안에 있는 자는 모두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출애굽기 32:33 KRV).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도 회개하면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주신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누가복음 10:20 KRV).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형제와 자매들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KRV).
고난을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KRV).
외적으로 물질적 궁핍을 초월하여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즐겁고 기쁘다고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2 KRV).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3-4 KRV).
쇠붙이는 불을 통과해야 제 기능을 한다. 사람은 시험과 연단과 훈련을 통해 온전해진다. 그래서 시험을 기쁘게 받으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2-16 KRV).
요즘 사람들은 힘든 일, 어려운 일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마에 땀이 흘러야 사람이 변화를 얻게 된다. 주식투자 같은 금융 역시 공부하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
신자는 인내하고 기다리고 공부하고 연단받고 그런 모든 과정 속에 기뻐하는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재림과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과 자녀들과 자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