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피우미치노(Fiumicino)공항의 셔틀 열차.
4년 만에 다시 찾은 로마였다.
여기저기 이태리어가 씌인 표지판들을 보니 감격스럽고 반가웠지만, 사실 예전의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2003년 여름, 첫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나던 길에 그저 '타이 항공'의 스탑 오버 장소로 지나쳐갔던 공항 아니었던가. 그때 죠셉과 나는 인천에서 출발하여 타이페이와 방콕을 거쳐 마드리드로 곧장 가지 않고 로마에 착륙하는 비행기에 경악하고 말았었다. 목적지에 가는데 비행기를 네 번 타야 하다니(티켓을 살때 참고하는 인터넷의 항공기 여정표에는 타이페이와 로마가 제외되어 있다).

하여간 우리는 지쳐가는 몸을 어느 벤치에 기대고 앉아있었을 터였다. 더군다나 죠셉은 전 기착지인 방콕의 돈무앙 공항에서 그의 지갑을 잃어버리는 대형사고를 겪었고, 그로 인해 비행기 티켓, 여행자 수표, 유레일패스까지 모조리 분실하고 말았었다.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은 그런 '나쁜 기억'으로 인해 뇌리에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다.

로마 피우미치노(Fiumicino)공항과 테르미니 역을 연결하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의 모습.
다만 당시 로마 테르미니 민박에 묵으면서 테르미니 인근 지리는 자신이 있었던 터라, 나는 여행전부터 우리가 예약한 호텔을 손쉽게 찾을 거라 자신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단 한차례도 헤매지 않고 정확한 방향으로 테르미니 역사를 빠져나와 호텔들이 밀집되어 있는 골목길에 들어설때까지만 계속되었다. 출력해온 지도와 현실의 길이 잘 매칭이 되지 않자 가슴속에서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속에서 지도와 실제의 길을 계속 대입해보지만 버퍼링만 계속 일어날 뿐... 우두커니 골목길에 서있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인근의 호텔로 뛰어들어가서 길을 물었다. 깍쟁이같은 50대 후반의 매니저는 예의 깍쟁이같은 말투로 또박또박 호텔 위치를 알려주었다. 바로 대각선으로 길 건너였다.
우리가 묵을 예스호텔이 찾기 어려웠던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바깥쪽으로 향한 돌출간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리창등에 아직 보호 테이프 등이 그대로 남아있고, 바닥에 널빤지가 그대로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막 새롭게 단장한 호텔임을 알수가 있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직원이 새롭게 문을 열어서 아직 간판을 못달았다며 겸연쩍어했다. 그래도 새 호텔이라니까 좀 전에 호텔을 찾느라 고생한 사실이 조금은 용서가 되었다. 구닥다리같은 호텔이 널린 로마에서 그 점은 분명 메리트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체크인 후 '작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려 '좁디 좁은' 복도를 따라 끝까지 들어가니 우리 방이 있었다. 웃기는 점은 '복도 제일 끝의 3면'에 각각 방문 손잡이가 하나씩 물려있었다는 것이다(실제로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어느 문 손잡이를 당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좁은 복도를 통해 방을 안내한 직원은 우리 둘과 트렁크 두개가 막고 있는 '좁디 좁은 복도'를 간신히 통과하여 리셉션으로 복귀했다.

호텔방 창문을 열자 로마의 뒷골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라한 이런 모습도 여행자들에게는 흥미로운 피사체가 되곤 한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깔끔한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비장의 무기 '햇반과 컵라면'을 섭취하기로 했다. 문제는 뜨거운 물이었다. 방에 커피포트가 비치가 되어있지 않아서 뜨거운 물을 전화로 주문해야 했다. 햇반도 원래는 커피포트로 데우는데 이번에는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뎁혀야 했다. 커피포트같은 기본적인 물품이 비치가 되어있지 않다니, 아직 준비가 미흡한 호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을 떠난지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이상하게도 꿀맛같은 컵라면을 햇반을 말아 국물까지 싹 비우고 말았다.

호텔 내부.

화장실
...
로마에서의 우리의 최대 화제는 짐줄이기였다. 다음 목적지 포지타노에서 시칠리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저가 항공을 예약했는데 짐의 한계중량이 15kg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예약번호가 적힌 프린트물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판단을 해본 결과, 그들은 절대 중량초과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뜩이나 비행기 티켓이 싼데 짐중량에서라도 요금을 더 뽑으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에 날아올 당시 이미 중량초과(둘이 합쳐 41.8kg)였던 짐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오버차지를 물게 될거라는 압박감에 사로 잡혔다. 우리는 당장 짐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우리가 가져온 짐은 우리의 옷가지와 카메라 등 각종 전자기기, 그리고 햇반 등 식료품 이외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시칠리에 살고 있는 지인인 '코코벨라'님을 위한 각종 선물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마린이 아쿠아라는 여행 사이트에서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마린이 그곳에 너무너무 놀러가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꺼낸 것이 진담이 되어 실제로 그녀의 집에 묵으며 하는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마린에게 몇번이나, "우리 진짜 이렇게 찾아가도 되는거야?"라고 묻곤 했었다. 정말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그 집에 묵는 것이 쉽지 않을 일인데, 그저 온라인 상에서 '키보드 우정', '쪽지 만남'으로 친분을 쌓아 온 사이에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모든 일정을 확정하고 시칠리로 넘어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21세기의 만남과 여행은 이렇게 디지털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칠리의 코코벨라를 위한 고등어 통조림 몇개와 소주 8팩 외에도 그녀가 가져다주기를 바랬던 메추리알 장조림, 당면, 팥빙수 재료(팥앙금, 미니떡, 미니젤리, 연유), 떡볶이용 떡까지... 우리의 트렁크는 마치 작은 수퍼마켓같았다. 나는 이 많은 음식재료들을 다 가지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몇 개를 버리자고 해보았지만 마린은 막무가내였다. 코코벨라는 분명히 위에 나열한 식재료들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따라서 그녀의 부탁을 단지 '중량 초과'라는 구실로 져버릴 수는 없다는 거였다. 사실 나로서도 멀쩡한 물건을 그냥 내버리고 간다는 게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나는 '소포'를 이용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었다.
처음에 마린은 선물을 자신이 들고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내켜하지 않았지만 다시금 엄청날 '오버차지'를 각성시키며 설득하자 일단 반은 넘어온 상태였다. 로마 우체국의 우편물 분실률이 무척 높고, 문방구에서 박스와 포장지를 모두 구입해야 한다는 점이 무척 짜증스러웠지만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마린은 어렵게 코코벨라님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받는 전화도 비싼 요금을 무는 로밍폰 통화를 20분 가까이 하면서 '소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
"무슨 소포가 미국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대니?"
"그러게. 보안상의 이유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네. 시일은 보통 2주 정도가 걸린대."
코코벨라님의 남편은 미군에서 복무를 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녀도 미군의 사택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소포 배송도 여의치 않다는 거였다. 우리는 코코벨라님의 집이 미국의 우편번호를 부여받아 미국하고 똑같이 인터넷 쇼핑을 하고, 미국 영토 취급받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태리에서 보내는 물건마저 본국을 거쳐 다시 이태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그들에게 이태리 주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더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최대한 음식을 많이 소비하고, 핸드캐리를 많이 하는 수밖에...
나는 짐을 무겁게 싸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거의 하루에 한벌씩 입을 수 있도록 가져온 티셔츠와 나의 업소용 거대한 헤어드라이어를 후회했다. 또한 마린은 자신의 거대한 트렁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트렁크 무게만 10kg은 나가겠다며(귀국 후 실제로 재보니 7kg). 귀국하면 새로운 트렁크부터 구입해야겠다고 별렀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당분간 먼 여행은 힘들텐데...
...
혼수상태에서 로마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원래는 로마에 짐을 풀자마자 트레비 분수를 보고 오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처음부터 계획이 수정되고 말았다. 이로서 로마를 돌아보는 것은 이번 여행에서는 더이상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관광의 양보다는 질, 계획의 이행보다는 합리적이고 유연성있는 변경을 더 중요시하는 여행자가 된 것일까?

유럽에서 보기 드문 현대식 엘리베이터.
우리는 츄리닝을 입고 돌아다니는 호텔리어같지 않은 호텔리어가 지키고 있는 식당에서 매우 불만족한 조식을 했다. 조식 메뉴라고 해봤자 시리얼 몇 알과 햄과 치즈 저민 것과 빵, 그리고 쥬스와 우유, 커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영업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테르미니에는 떠나는 사람들로 넘치는 곳이니까. 떠나는 사람들에게 성의를 다하지 않는 얄팍한 이탤리언들을 우리는 만난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예측했던것 처럼 로마를 떠나기 위해 테르미니 역으로 갔다.

테르미니 역 근처에 가득한 스쿠터와 오토바이

누구든 한번쯤은 먹어볼까 하는 유혹을 느끼는 테르미니 맥도날드.

시간이 있어서 여유롭게 아이 쇼핑도.

나이키 떼르미니. 고유명사화 하려는 테르미니의 브랜드 파워.

테르미니 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동 발권기. 가운데 상단의 영국 '유니온 잭' 모양을 누르고 티켓을 예매할 수 있다. 터치 스크린 방식이며 간단한 영어로서 누구든지 손쉽게 예매가 가능하다. 이제 더이상 길게 늘어선 매표소의 줄은 끝이다.





물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 'AQUA'.

우리의 목적지인 'Salerno'로 데려다 줄 'Reggio CL.'행 열차.

열차가 떠나기 십분전이었다. 나는 차분히 여행책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마린은 수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린이 '악'하고 소리를 지른다.
"오빠, 호텔에 다시 갔다오면 안돼?"
"왜, 무슨 일이야?"
"냉장고, 냉장고!!"
아뿔싸, 냉장고 안을 살피지 않고 호텔방을 나섰던 것이었다. 이일을 어떻게 한다지?
첫댓글 와....미군이셨군요...그 주소 시스템 참 독특하네요...호텔방에 놓여진 면세점 비닐가방을 보니 예전 여행에 잃어버리신 화장품이 불현듯 생각났구요...떼르미니의 모습을 다시보니 너무 반갑네요.저도 자동발권기 이용했었는데 훨씬 편리하더라구요....
와, 정말 눈썰미 대단하세요. 이번에는 화장품은 안 잃어버렸답니다. ^^
마지막 대반전 ㅋㅋ 로마 호텔은 저 정도면 좋아보이는데요? 제 경험에 의하면 이탈리아 호텔들은 대다수 배째라 컨셉이기때문에 (= 가격대비 서비스 부실하고 시설 후져도 어차피 올사람은 온다) -_-;;
ㅎㅎ 네, 구성을 반전형식으로 해봤어요. ^^ 반응이 좋으니 기분이 저도 좋네요.
흥미진진~! 냉장고의 소주 등등을 찾기 위해 도로 돌아가셨을지... 아님 그냥 가던 길을 가셨을지..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
하스킬 님, 맥을 제대로 짚으셨네요. 다음 편에 결과가 나온답니다. ^^
ㅋㅋㅋ 떼르미니역 근처 답지 않은 모던함하고 새로지어진데 끌려 159유로에 예약한 곳인데 걍 방하구 시설은 깨끗한데 좀 좁고 조식이 안습이더라구요~~~ 여행 초반부터 저 냉장고 사건땜에 넘 좌절했었어요...ㅠㅠ;;; ㅋㅋ 미아루이스님, 저도 면세점 비닐가방보니 올해엔 무사히 가져왔구나 다시한번 뿌듯 ㅋㅋㅋ
ㅎㅎㅎ 진짜 그넘의 중량초과의 스트레스란...마지막의 냉장고..크핫...마린아...널 어쩜좋으니..ㅋ 그나저나 저도 이태리 넘넘 가고파욧!!! 언제나 갈수 있을까욧...ㅜ.ㅜ
네, 중량초과 때문에 비행기 타기 싫을 정도라니까요.
호텔이 저 정도면 꽤 넓고 깔끔하니 좋네요.. 로마는 호텔이 정말 비싸더라구요. 유럽의 호텔들은 포트가 없어서 정말 불편해요. 전 그래서 이번에 작은 전기 포트를 아예 사가지고 가려고요. 저도 이제는 여행 다니면서 하루에 한끼는 한식을 꼭 먹어야겠더라구요^^ 매번 엠티때마다 들고오시는 업소용 헤어드라이어 ㅋㅋ 크긴 크던데 ~ 생생한 테르미니이 사진 넘 반갑네요.. 저도 한 달 후면 저기서 바짝 긴장한체 캐리어 끌며 종종걸음 치겠지요 ^^ 잘 읽었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휴대용 포트. 공구라도 한번 할까요? 커피포트, 유니버셜 플러그... 또 없나? 목 베개..
마린의 몸을 보니 홀몸 아닌데 무거운 짐 이고지고 여행다니기 힘들었을거 같아요~그래도 그런 모든게 다 여행의 추억이죠..마지막에 다음 목적지 포지타노로 가는 기차사진을 보니 제가 더 신나네요..어여어여 시칠리아 포지타노 사진을 공개해주세요^^
가장 여행기에 몰입을 잘하는 돼지고양이님. ㅋㅋ 알겠습니다~ ~
앗.. 또다시 반전 드라마 ㅎㅎ 뒷편이 너무너무 궁금해요~ 그리구 마린언니가 들어가서 구경하고 있는 sia 가 이태리 브랜드였나봐요.. 까사미아 매장이랑 같이 있는 sia 맞죠? 코코벨라님 저도 아쿠아에서 보구 너무너무 반갑더라구요~ 제생각엔 소년님 호텔에 뛰어갔다 오셨을거 같은데.. 궁금해요!!!
ㅎㅎ 다음 편을 기다려 주세요. 어서 올려드려야 하는데 시간 끌어 죄송하네요.
저렇게 고생을 하고 가져다 주신 맛있는 한국음식으로 남편과 저는 살이 오동통하게 올랐답니다.^^ 너무너무 흥미로운 여행기에요! 다음편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아~~~
ㅋㅋ 말씀만으로 고맙습니다. 선물은 하는 사람에게도 큰 기쁨이라는 걸 코코벨라 님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
다음 편이 무지 기대되는 여행기로군요. ^^ 저기, 소년님. 혹시 기분 상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바랬던'은 틀린 표현이랍니다. '바랐던'이 맞는 표현이고요. 참고로 '바램'도 틀린 표현이지요. 기본형이 '바라다'라서 파생된 표현입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틀린 말만 보면 바로 지적하는 못된 습관이 있지요. 기분 상하셨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네. 지적 감사드리구요, 저도 아는 거였는데 얼결에 쓰다보니 저렇게 되었네요. 완벽한 여행기가 되어야죠. ^^
육아전쟁으로 소년님의 여행기도 그간 몇편이나 스킵했는데 오늘 날잡아 다 읽으렵니다!! 마린이의 물건두고 다니기와 길 헤매기 증후군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아마 출산후에는 더 심해질텐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