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의 병〉
미인을 밝히는 남자
그는 늘 아름다움을 찾았다.
꽃잎이 열릴 때의 떨림, 여인의 눈동자에 스치는 빛, 그 부드러운 곡선 속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시선’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 시선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는 것’에 중독된 욕망,
스스로의 결핍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타인을 들여다보는 도피의 눈이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대상화한다.”
그는 타인을 본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타인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라캉이 말한 ‘응시의 반사(反射)’처럼,
그의 욕망은 타인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헛된 탐색이었다.
진정한 미는 보는 데 있지 않다.
미는 존중하는 거리,
가까이 가고 싶지만 닿지 않음으로써 피어나는 절제의 빛이다.
보는 자가 대상에게 침묵을 허락할 때,
그때서야 아름다움은 그 고유한 숨결을 드러낸다.
그는 결국 알았다.
‘미인을 밝힌다’는 것은 여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두운 심연을 밝히는 일임을.
첫댓글 예술과 성(性)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예술가들이 성적인 에너지에 끌리는 이유는 성욕이 곧 생명 에너지이자 창조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리비도(libido)*라고 불렀고, 칼 융은 모든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확장 설명했다.
성(性)은 탄생과 생성을 일으키는 힘
예술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힘
→ 두 힘의 뿌리는 같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종종 성적인 열정을 창작의 불꽃으로 전환한다.
예술가가 성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에너지와 욕망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예술가가 관음증인 게 아니라 진실을 보기 위해 깊이 응시하는 존재다.
많은 창작물에서 성적 상징이 반복되는 이유는 생명, 존재, 탄생, 고독, 집착, 사랑이라는 근원적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강력한 언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