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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백이(伯夷) 열전 p 9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기원전 1100 년 경]. [이들의 아버지인] 고죽군은 [둘 중] 아우인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매 숙제가 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장자인 백이가"아버지의 명령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도피하였다. 숙제도 또한 임금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고 도피하였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가운데 아들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에 백이, 숙제는"들으니 서백 창[주나라의 문왕]은 늙은이를 잘 부양한다고 한다. 우리 어찌 그에게 가지 않겠는가?"하고 서백에게로 갔다. 가보니 서백은 돌아가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신주를 수레에 싣고 문왕(文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고서 동쪽으로 은나라의 주(紂)왕을 치려 하고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였다."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장사도 지내지 않고 이에 전쟁을 일으키려 하니 효도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인 제후로서 임금인 천자를 시해(弑害)하려고 하니 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왕의 좌우에 있던 군사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태공망 여상[임주(任註); 강태공]이"이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다."하고 보내게 하였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매 온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백이, 숙제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의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지냈다. 굶어서 죽게 되었을 때에 노래를 지었으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저 산에 올라가고사리를 캐네.무왕은 포악한 방법으로 주왕의 포악함에 교대하였건만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신농, 요순, 하우의 도가 홀연히 사라졌으니내 어디로 가서 몸을 의탁할 것인가.... [임성삼의 주(註); 공자의 논어(論語)에서는 중국의 가장 완벽한 왕으로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들고 있으며, 무왕도 거의 완벽한 왕으로 평가한다. 동일한 책에서 백이와 숙제도 완벽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던 양쪽을 모두 다 옳은 사람들로 평가하였다는 것은 그 시대의 성숙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즉 무왕, 백이, 숙제가 다 옳은 것이다.]
[주 周 백과사전에서 고대 중국의 왕조. 주(周)는 서주시대(西周時代, BC 11세기∼BC 771)와 동주시대(東周時代, BC771∼BC249)로 나누어지며, 동주시대는 대략 춘추전국시대에 해당된다.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의 시조는 요(堯)임금을 섬겼던 후직(后稷)이라고 한다. 그 뒤 주족(周族)은 융적(戎狄) 사이에 섞여 살았고 공류(公劉) 때에는 빈(山西 또는 陝西省)에서 살았으며 고공단보(古公亶父;太王)에 이르러서 산시성〔陜西省〕의 지산〔岐山〕 땅(周原)에 도읍을 옮겼다. 이때부터 다음 왕인 계력(季歷;王季) 때에 걸쳐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고 발전하여 문왕(文王) 때에는 서백(西伯)이라 칭하여 새 도읍을 풍(豊;陝西省西安)에 세우고 은왕조(殷王朝)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다음의 무왕(武王)은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여상(呂尙, 강태공) 등 제후를 거느리고 주왕을 쳐서 나라를 멸망시키고 호경(鎬京;陝西省西安)을 도읍으로 정해 주(周)왕조를 세웠다.]
p 10어떤 이는 말한다. [주; 아래는 저자 사마천의 말이다.]"하늘의 도는 친(親)하고 소원함이 없어, 항상 선인(善人)의 편에 있다"고.백이와 숙제같은 이는 선인(善人)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어짊을 쌓고 행동을 깨끗하게 함이 이와 같았건만 그러고도 그들이 굶어죽다니!
또 공자는 70 명의 제자 가운데서 "안연(안회)은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회는 자주 끼니를 굶었으며 술 지게미나 겨밥 같은 악식(惡食)도 실컷 먹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찍 죽었다.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베풀어줌이 그 어찌 그러한가?
도척(주; 그 시대의 유명한 강도)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었다. 포악하고 패려하고 방자하여,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가지고 천하를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나, 마침내 장수하여 목숨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런 것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고 명백한 것일 뿐이다. 근세의 사례를 살펴본다면 행동이 절제가 없어서 오로지 남이 꺼리고 싫어하는 악행(惡行)만을 일삼는데도 일평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며 부귀(富貴)가 여러 대를 두고 끊어지지 않는 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혹 땅을 가려서 디디고 적합한 때를 기다려서 말을 하며, 큰길이 아니면 다니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분발하지 않는데도 화난(禍難)과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미혹(迷惑)하고 있다. 소위 천도(天道)라는 것은 정말로 이런 것인지, 아닌지를.[임성삼의 주(註); 천도 시야 비야(天道是也非也)라는 말의 원전이 이곳이다.]
제 2 관중, 안영 열전 관중(管仲; ?∼BC 645, [참고로 공자는 BC 552∼BC 479]) 이오(夷吾)는 영상 지방 사람이다. 젊었을 때에 항상 포숙아(鮑叔牙)와 사귀었으며, 포숙은 그가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관중이 빈곤하여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은 끝까지 잘 대우하고 그가 속이는 일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포숙은 제(齊; 중국의 우리나라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산동반도)나라의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 꼬을 규, 걷어 들이다)를 섬겼다. 소백이 임금이 되어 환공(桓公? ~BC 643)이 되고 공자 규는 죽었으며, 관중은 체포되어 갇힌 몸이 되었다. 포숙이 관중을 환공에게 추천하였다. 관중이 등용되어 제나라의 정치를 맡았다. 환공이 패자(覇者)가 되어 제후들을 규합시키고 천하를 바로 잡은 것은 다 관중의 계책에 따른 것이다. 관중이 말하였다."내가 처음에 곤궁하였을 때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다.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많이 배당하였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탐욕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일을 도모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내가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운(時運)이란 유리한 때도 있고 불리한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벼슬을 하여 세 번 임금에게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불초(不肖)하여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때를 못 만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싸움에서 세 번 싸우다 세 번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老母)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싸움에서 패하니 같은 편 소홀은 거기에서 죽었으나 나는 붙잡혀 옥에 갇혀 치욕을 달게 받았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이 없는 사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소절(小節)을 굽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이 천하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임성삼의 주(註); 관중은 참으로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출세하였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이고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이미 관중을 환공에게 추천하고 자신을 그 아래 지위에 있었다. ... 천하의 사람들은 관중이 재주와 지혜 있음을 칭찬하기 보다는 포숙이 능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칭찬하였다.
관중은 정사를 맡아 제나라의 정승이 되자 보잘것없는 작은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음을 살리어 물화를 유통시키고 재물을 축적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세상 풍속과 같게 하였다.[임성삼 주(註);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국무총리로 손꼽는 사람이 관중이다. 그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바로 위의 것이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면 총리의 임무가 거의 충족되는 것이다. 덧붙이면 국민들과 같이 즐기면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저서 <관자>에서 말하였다."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게되고, 의식(衣食)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된다. 위에서 법도(法度)를 지켜야 육친(부, 모, 형, 제, 처, 자)도 친애 단결하게 되고, 사유(四維(밧줄 유); 예, 의, 염, 치)가 신장되지 않으면 나라는 드디어 멸망한다."
물이 근원에서 나와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민심에 순응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 이론은 평범하고 가까웠으며 실행하기는 쉬웠다.백성들의 풍속이 하고자 하는 것은 그대로 하게 해주었고, 백성들의 풍속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제거하였다.[임성삼의 주(註); 능력있는 사람이 시행하는 정치란 따르기에 어렵지 않은 것인가?]
그의 정치하는 방법은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켰다.... 환공이 북방의 산융(山戎)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에 관중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의] 연나라에 압력을 가하여 그 나라의 시조인 소공의 어진 정치를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환공이 (노나라 장수) 조말에게 (단도로 위협 당하여 제나라가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관중이 (환공에게 진언하여 땅을 돌려주어 모든 나라에) 믿음성을 보이게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제후들의 마음이 제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주는 것이 곧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요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관중은 부유하기가 공실(왕)에 비길 만하였으나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치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관중이 죽은 뒤에도 제나라는 그의 정치 방법을 따라 지켜서 항상 제후 중에서 강성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논어(論語)에도 관중의 이야기가 세 번 나온다.]
그 뒤 백여 년이 지나서 안자(晏子, 안평중 영; [임성삼 주(註); 공자와 같은 시대, 두 나라 임금이 서로 만났을 때 제나라의 대표는 안자였고, 노나라의 대표는 공자였다.])가 나타났다.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을 섬겼는데 절약하고 검소하며 힘써 실행하는 것으로 제나라에 중용(重用)되었다. 그가 이미 제나라의 정승이 된 뒤에도 반찬으로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집안 여자들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에 임금이 그와 말하게 되면 그의 말은 정당하고 정직하였으며, 임금이 그와 말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행동은 고결하고 올발랐다.
나라에 바른 도가 있을 때는 곧 명령에 순종하고, 나라에 바른 도가 없을 때엔 곧 명령이 바른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저울질하여 바른 것이면 좇고 바르지 않은 것이면 좇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3 대 동안 제후 사이에서 이름을 날렸다.[임성삼 주(註); 젊었을 때는 이것이 쉬운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특히 공무를 담당했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특히 어려운 것 같다.]
월석보(越石父 [임성삼 주(註); 여기의 '아비 부 父' 자는 사람의 이름에서는 보로 읽는다])는 현명한 사람인데 체포되어 묶이어 있었다. 안자가 길을 가다 만나게 되었다. 안자는 자기 수레의 완쪽 말을 풀어주고 그를 속죄시켰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수레에 태워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안자는 월석보에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에 월석보가 절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안자는 깜짝 놀라 의관을 정제하고 사과하며 말하기를,"제가 비록 어질지 못하나 그대를 어려움에서 구출하였는데 어찌 그대는 절교를 요구하는가?"하자 석보가 말했다."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뜻을 편다고 합니다. 내가 묶이어 있을 때에는 저 포졸들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느껴 깨달은 바가 있어서 나를 속죄하여 주었으니, 이것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알면서 무례하게 대한다면 진실로 묶이어 있을 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안자가 그를 맞아들여 상객(上客)으로 삼았다고 한다.
안자가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 외출하는데, 그의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그의 남편을 엿보았다. 자기의 남편은 정승의 말을 모는 사람이 되어 네 필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의기양양하여, 매우 스스로 만족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이혼하기를 청하였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는 이렇게 말하였다."안자는 키가 6 척도 못되지만 몸이 제나라의 정승이 되고 이름이 제후 사이에 드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의 외출하는 모습을 보니 뜻과 생각이 깊으며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추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키는 8 척이나 되나 남의 경마잡이 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떠나가고자 하는 겁니다."[임주(任註); 척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 때는 주나라의 척으로 약 20 cm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조척을 사용하고 있어 30.3 cm이다. 주척은 이 영조척으로 6 촌 6 푼이다(3.03 cm x 6.6 = 19.998 cm). 그러므로 안자의 키는 120 cm 였다.공자님의 키가 9 척 6 푼이라고 하였으니 192 cm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장인(長人)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그 뒤부터 그녀의 남편은 스스로 억제하여 겸손하게 되었다. 안자가 이상하게 여겨 그 사유를 물으니 사실대로 아뢰었다. 안자는 그를 추천하여 대부(大夫)로 삼았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관씨의 저서 <관자>에서 목민, 산고, 승마, 경중, 구부 등의 각 편과 안자의 저서인 <안자춘추>를 읽었다. 그 말한 것이 자세하였다. 가령 안자가 지금 살아있다면 나(사마천)는 비록 그를 위하여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도 즐겨 할 정도로 그를 흠모한다.[임성삼 주(註); 사마천이 이 정도로 존경하는 인물이 사기 전체에 걸쳐서 안자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 두 책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되어 있다. 후에 안자춘추를 소개할 것이다.]
제 3 노자(老子), 한비자 열전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와 이야기하였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군자는 성덕(盛德)이 있으나 그 용모는 우매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욕심 많음과 얼굴과 태도를 꾸미는 일고 산만한 뜻을 버리라. 그런 것은 그대의 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이것뿐이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잘 헤엄친다는 것도 안다.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믈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질할 수 있으며, 나는 것에게는 주살을 쏘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용에 대하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그는 용과 같은 존재이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아서, 그의 학문은 스스로 숨기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敎化)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게 하였다.[임주(任註); 도덕경은 짧으니 언제 한 번 소개하려 한다. 아주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더니 주나라의 덕이 쇠미하게 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가 말하였다."선생께서는 장차 숨으시려고 하시는데,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하여 글을 지어주십시오." 이에 도덕경 상하편 5천 언으로 도와 덕의 뜻을 말하고 가버렸는데, 그의 최후를 아는 사람이 없다.
장자[莊子 BC365?∼BC290?]의 이름은 주(周)이다. 그의 학문은 넓어서 엿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요점은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말에 귀결(歸結)한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10여만 언은 대체로 거의가 우화(寓話)이다.
당세의 노성(老成)한 학자라도 장자의 논리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 못하였다. 그의 말은 넓고 심원한데다 제멋대로 자적(自適)하였으므로 왕공, 대인으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인정받지 못하였다.[임주(任註); 장자는 시원하고 통쾌한 책이다. 10만 자가 넘어 분량이 많기는 하나(이 사기 전체는 52만 6천 5백 자) 상당히 재미있다. 통상적인 개념을 뛰어 넘는 생각이 대단히 많다. 남과 말을 하여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장자를 읽으면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러나 장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논어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역사적인 대결에서 항상 패배하였다. 말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실제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소개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의 경우 주역을 읽어 이해하는 정도보다는 훨씬 손쉽게 장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비 [韓非 BC280?∼BC233] 한비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의 한사람이다. 형명법술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 귀착점은 황제, 노자였다. 한비는 말더듬이여서 입으로는 잘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글은 잘 지었다. 이사[李斯 ?∼BC 208]와 함께 순경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기의 재주가 한비를 따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한비는 조국 한나라가 땅은 깎이고 국력은 쇠약하여 가는 것을 보고 자주 한왕에게 글을 올려 진언하였으나, 한왕은 그것을 채용하지 않았다. ...
한비는 남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세난(說難; 이 경우는 설을 세로 읽는다)>을 지었다. 그러나 한 비 자신을 마침내 진(秦)나라에서 비명(非命)에 죽게되어 스스로 그가 말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대체로 남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나의 지식으로 상대편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나의 말하는 능력이 나의 의사를 충분히 밝히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내가 자유롭게 말을 구사하여 하고자 하는 말을 남김없이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남을 설득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설득하려는 상대자의 심리(心理)를 완전히 파악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그 마음에 맞추어 하는 데에 있다.
설득하려는 상대자가 높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사람일 경우에 후한 이익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면, 상대자는 곧 나를 품위가 없는 속물(俗物)이라고 하여 비천하게 여겨 반드시 버리고 멀리할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자가 후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일 경우에 높은 명예를 위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상대자는 나를 생각이 없고 세상물정에 멀다고 하여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자가 실상은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면서 겉으로는 높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꾸미는 자일 경우에 [임주(任註); 이런 경우가 가장 많다고 본다.] 높은 명예를 위한 일을 이야기하면, 겉으로는 말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체하고 실지로는 멀리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에게 많은 이익을 위한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는 몰래 그의 말만은 채용하면서 드러내서는 그 사람을 버릴 것이다. 이런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임성삼 주(註); 이 후 여러 가지 논리적인 분석이 있다.]
대체로 용이라는 동물은 길들여서 가까이하여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 지름 한 척의 역린(逆鱗; 방향이 거꾸로 난 비늘)이 있다. 사람이 만일 그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 임금에게도 또한 역린이 있다. 설득하려는 자가 임금의 역린을 건드림이 없어야 거의 성공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임성삼 주(註); 결국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이것을 다 생각해서 하거나, 천성적으로 할 줄 아는 것일 수 있다. 대단한 재주이다. 대체로 보통의 재주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니 포기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이 좋을 지 모른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잘 분석한 한비도 군주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제 명에 죽지 못하지 않았는가?]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노자가 소중히 여기는 도는 허(虛)이고 무(無)이면서 자연에 따라 응하고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는 말이 현묘(玄妙)하고 오묘하여 알기가 어렵다.
장자는 도덕의 뜻을 부연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게 논한 것이다.
제 6 오자서 열전[임성삼 주(註); 중국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같다.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제 7 중니(仲尼) 제자 열전[임성삼 주(註); 공자 제자들에 대해 적었다. 논어(論語)를 읽기 위해서는 이 제자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간단히 세 사람만 소개한다.]
안회(顔回)는 노나라 사람으로 字는 자연(子淵)이다. 공자보다 30 세 아래이다. 공자는 말하였다."어질구나 안회는.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것으로 더러운 빈민굴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남들이면 견디지 못할 것인데 안회는 그 도를 계속 즐기는구나.""안회는 어리석은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사행활을 살펴보면 배운 것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임금이 등용하면 벼슬하여 도를 행하고, 임금이 버리면 숨어 살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로구나."[임주(任註); 공자의 3 천 제자 중에 숨어서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안회가 들어온 이후로 제자들과 더욱 친근하여 졌었다.""안회가 학문을 좋아했다. 그는 성내는 것을 남에게 옮기는 일이 없었으며, 과실을 두 번 다시 저지르는 일이 없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일찍 죽었으니, 지금은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없다."
...
중유(仲由)의 자(字)는 자로(子路)이다. 공자보다 9 세가 젊다. 자로는 성질이 거칠고 야비하고 용력(勇力)을 좋아하였으며, 뜻은 강직(剛直)하였다. 수탉의 깃으로 꾸민 갓을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띠고 다녔다. 공자를 업신여기고 포악한 짓을 하곤 하였다. 공자가 예를 베풀어 점진적으로 자로를 유도하였다. 자로가 뒤에는 유자의 옷차림을 하고 예물을 갖고 와서 공자의 문인(門人)을 통하여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자로가 물었다."군자도 용맹(勇猛)을 좋아합니까?""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을 좋아하고 의가 없으면 문란하여지고, 소인이 용맹을 좋아하면서 의가 없으면 도적이 된다."
자로는 한 가지 교훈을 듣고 아직 실천하기 전에는 새로운 교훈을 듣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한 마디의 말을 듣지 않고도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로일 것이다.""자로가 용기를 좋아함은 나를 앞서나 그것을 알맞게 사용할 줄 모른다.""자로 같은 사람은 제 명에 죽기 어렵다.""다 떨어진 헌 무명 도포를 입고 여우 가죽과 담비 가죽의 털 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자로이다."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반란이 일어났다. 자로는 성 밖에 있다가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성문에서 도망가는 공자의 제자 자고를 만났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했다."왕은 달아났으니 그대는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공연히 화를 받지 않게 하시오." 자로가 말하기를"그 사람의 밥을 먹은 사람은 그 사람의 화난(禍難)을 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하고 들어갔다. 자고는 도망갔다.반란자가 대(臺)에 올라가 있었다. 자로는 반란의 주모자를 죽이게 내 놓으라고 하였다. 듣지 않으니 대에 불을 놓으려고 하였다. 무사를 내려보내 자로를 공격하게 하였다. 자로는 여러 곳에 칼을 맞았으며 또한 자로의 갓 끈이 끊어졌다. 자로는"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매고 죽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슬프다, 자로가 죽겠구나.""자로를 내 제자로 얻은 뒤부터는 악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임주(任註); 유교에서는 죽을 때까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한다는 뜻으로 자로의 이 이야기를 자주 한다.]
단목사(端木賜)의 자는 자공(子貢)이다. 공자보다 31 세 어리다. 자공은 말재주가 좋았는데, 공자는 항상 그 말재주를 꾸짖어 경계하였다.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안회는 누가 더 나으냐고 물으니 자공의 대답이,"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뿐입니다." [임주(任註); 제나라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를 치려 하자 공자는 자공을 보내어 말리도록 하였다. 자공은 제나라를 비롯하여 연속적으로 다섯 나라를 방문하여 뛰어난 말재주로 전 중국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오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 이때 자공의 말솜씨 때문이었다. 이 자세한 내용이 책에 있다.]
[임주(任註); 이 이외에도 많은 제자의 이야기가 있으나 일단 위의 세 사람의 이름만을 기억하기 바란다.]
제 8 상군(商君) 열전 상군[?∼BC 338]은 위나라의 여러 서얼(庶孼) 공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름은 앙이고 성은 공손씨이다.
[상앙이 진(秦)나라에 가서 나라의 임금을 설복시키어 체제를 바꾸려 하자 진나라의 대신인]두지가 말하였다."이익이 백 배나 되지 않으면 법을 변경하지 않으며, 공이 10 배나 되지 않으면 그릇을 바꾸지 않는다. 과거의 법을 사용하면 큰 잘못이 없고, 예를 따르면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상앙이 말했다."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나라에 편리하고 이익이 있으면 법을 바꾸는 것이다."왕이 법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임성삼 주(註); 중국에서 몇 번 이렇게 완전히 나라의 법을 개혁한 일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개혁이 성공하여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 가혹한 법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15 년만에 진나라는 망했다. 한 고조 유방은 진(秦)나라를 점령하고 상앙의 이 복잡한 법을 폐하고 간략한 법 세 조목만을 발표하여 인심을 얻었다. 한 나라는 400 년을 지속하였다. 그 후 송(宋)나라 때 왕안석이 신법(新法)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려 하였으나 신법파와 구법파의 싸움으로 결국 송나라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조광조의 개혁도 결국 실패하였다. 흔히 개혁파는 정의로운 사람들이고, 반개혁파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기 이익만을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적으로 개혁을 시작하는 사람은 청렴하고 정의로우나 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개혁은 반드시 실패한다.
다시 원 줄거리로 돌아가 진(秦)나라가 국력을 길러 춘추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데 기여한 새로운 법을 살펴본다.]
백성으로 열 집, 또는 다섯 집으로 통, 반을 구성하여 서로 죄를 적발하게하며, 또한 죄에 연좌(連坐)하게 한다. 죄지은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준다. 고발한 자에게는 적의 머리를 베어온 자와 같은 상을 준다. 자기의 죄를 숨긴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준다(사형 - 가족까지). ... 상공업을 하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노예로 만든다. 모든 국민의 대우를 군공(軍功)에 따라 행한다. 농사를 잘 짓는 자를 우대한다. 사사로운 싸움은 엄금한다. ...
법령이 갖추어진 후 상앙은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 두려워 세 길 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의 남문 밖에 세워두고, 백성을 모아 이 나무를 북문에 옮겨 놓는 자에게 10 금[10 냥이면 400 만원?]을 주겠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의심스럽게 여기어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상금을 50 금으로 올렸다. 한 사람이 그것을 옮기자 즉석에서 50 금을 주어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새 법을 반포하고 시행하였다.[BC 359]
새 법을 시행한 후 한 해가 지나니 진(秦)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수 천명이나 법이 불평하다고 항의하였다. 이 때 태자(太子)가 법을 범하였다. 상앙은"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태자를 법대로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태자에게 형벌을 시행할 수 없으므로 그의 스승 중 한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다른 스승의 얼굴에 먹물로 문신을 하였다. 다음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법을 따랐다.
새 법을 시행한 후 10 년이 되자 진나라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지 않으며, 도둑이 없고, 집안은 넉넉하게 되었다. 백성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을 겁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새 법이 불편하다고 하던 자들이 이제 와서는 몰려와서 좋다고 말하였다. 상앙은 말하기를"이런 사람들이 교화(敎化)를 문란하게 하는 백성들이다."고 하고 모두 변방의 살기 힘든 고장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그 뒤로 백성은 감히 법령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이 후 진시황이 통일할 때[BC 221]까지 진나라는 전쟁에서 거의 진 적이 없다. 그 동안 장의, 저리자, 감무, 범수 등 여러 정승들이 있었으나 이 상앙의 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다. 법을 제정하여 모든 국민이 예외 없이 지키는 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부강하게 된다. 그리스, 로마의 예와 이 진(秦)나라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가혹한 법을 만든 상앙은 나중에 태자(太子)가 즉위한 후 정치적으로 약하게 되어 반항하다 잡혀 죽었다.]
제 9 장 소진[蘇秦; 풀이름 소, 벼이름 진]열전[임성삼의 주(註); 가난한 유세(遊說)객이었던 소진은 6 나라가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합종책을 내세워 6 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과거 동양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소진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말을 잘하는 법을 알고 싶으면 자세히 읽어 볼 것. 현대의 개념과는 다르나 중국의 웅변을 대표한다.]
태사공은 말한다. 소진 형제 세 사람은 다 제후(諸侯)를 유세하여 이름을 드러내었다. 그 술책은 권모, 변작(變作)에 능통하였다. ... 소진은 민간의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육국을 연결하여 종적인 맹약을 맺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蘇秦 ?∼BC317 백과사전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신. 제(齊)나라의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하였다. 처음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뒤에 연(燕)나라의 문후(文侯), 조(趙)나라의 숙후(肅侯), 한(韓)나라의 선혜왕(宣惠王), 위(魏)나라의 양왕(襄王), 제나라의 선왕(宣王),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을 각각 설득하여, 이 6국의 연합을 성공시켰다(合從). 6국이 세로로 나란히 결속하여 서쪽의 진나라에 대항하려는 것으로, 소진 스스로 종약(縱約)의 우두머리가 되어 6국의 상(相)을 겸하고, 종약의 서를 진나라에 보냄으로써 진나라는 수십 년간 동방진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 안되어 동서연형설(東西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때문에 합종이 깨져 제나라로 피신하였는데, 그 곳에서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제 10 장 장의(張儀)열전 장의는 위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鬼谷)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술(學術)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를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의는 다 배우고 나서 제후를 유세하였다. 초나라의 정승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초나라의 정승이 구슬을 잃어버렸다. 정승의 문하 사람들이 장의를 의심하고 말하였다."장의는 가난하고 행실이 좋지 않으니 반드시 이 사람이 구슬을 훔쳤을 것입니다."그리고는 장의를 잡아다가 수백 대의 매를 쳤다. 그래도 장의가 승복하지 않으니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다. 그의 아내가 말했다."가엾어라, 당신께서 글을 읽어서 유세(遊說)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욕된 일을 당하겠습니까?"장의가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나의 혀를 보아주게. 아직 있는지 없는지.""혀가 있습니다.""그러면 됐어"[임성삼의 주(註); 사람의 일생동안 자기의 잘못이 아니면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억울함만을 생각고 한을 품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만 남아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장의는 진(秦)나라를 위하여 외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소위 연횡책이다.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은 변설의 대가이나 인간적인 성품으로는 존중받지 못하였다.]
[張儀 ?∼BC 309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유세객(遊說客). 위(魏)나라 출신.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했다. 초(楚)나라에서 유세했을 때 초나라 정승의 옥을 훔쳤다는 혐의로 수백 대의 태장을 맞았기 때문에 아내가 유세를 중단하자고 권했지만 <내 혀만 있으면 걱정없다>고 했던 고사는 유명하다. 소진이 그의 합종책(合縱策)을 유지하기 위한 책략으로 장의를 진(秦)나라에 보내 혜왕(惠王)을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혜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고 진나라를 위하여 연(燕)·조(趙)·위·한(韓)·제(齊)·초 등 6개 나라에서 유세하여 각각 진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은 연형책(連衡策;서쪽의 진나라와 동쪽의 6개 나라가 횡으로 동맹한다는 뜻)을 성공시켜 합종책을 깼다. 혜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에게는 신임을 얻지 못했고 신하들로부터도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위나라로 도피하여 정승으로 있다가 1년 후에 죽었다. 소도진과 함께 제자백가(諸子百家) 종횡가(縱橫家)의 한 사람이다.]
제 11 저리자, 감무 열전[임성삼의 주(註); 두 사람 모두 진(秦)나라의 승상이었다. 이 두 사람보다 동양에서 흔히 언급(言及)되는 사람으로는 감무의 손자 감라가 있다.]
감라(甘羅; 달 감, 새그믈 라)는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가 죽은 후 감라는 나이 12 세에 진나라의 정승 여불위[임성삼의 주(註); 진시황의 실제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사람]를 섬겼다.[임성삼의 주(註); 전체 이야기가 길고, 여러 사람이 관계되는 것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있다. 그러나 12 세에 외교문제를 해결하여 상경(上卿)이 되었다.]
제 13 백기, 왕전 열전[임성삼의 주(註); 이 두 사람의 장군이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기는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전쟁을 잘하는 장수였다고 생각한다.]
백기[白起]는 용병을 잘했으며 진의 소왕을 섬겼다. 진 소왕 13 년에 장수로서 한나라의 신성을 쳤다. 그 다음 해 한(韓), 위(魏)나라의 군대를 이궐에서 공격하여 머리 24만을 베고 또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하였으며, 5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 다음 해에 위나라를 쳐서 공략시키고 크고 작은 성 61 개소를 탈취하였다.[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큰 나라가 70 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뒤에 조(趙)나라를 치고, 초(楚)나라를 취하였다.] 소왕 34 년에는 위나라를 쳐서 머리를 벤 것이 13 만이나 되었다. 조나라와 싸워 병사 2 만을 황하 속에 수몰(水沒)시켰다. 소왕 43 년에는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키고 머리를 벤 것이 5 만이었다. .... 조(趙)나라의 사졸(士卒) 40 만이 백기에게 항복하였는데 백기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나라의 사졸들은 마음이 잘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이들을 죄다 죽여버리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드디어 간사한 계책을 써서 그들을 죄다 구덩이에 생매장하여 죽이고, 어린아이 240 명만 남겨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전후 통산하여 조나라 군사의 머리를 벤 자와 포로로 한 자가 45만 명이었다. 조나라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백기는 자기의 공로를 믿다가 죄 없이 사형을 당했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 그에게 칼을 내려주면서 자결하게 하였다. 무안군이 칼을 끌어잡고 막 자결하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지경에 이르는가?"하고는 한참 뒤에 말하기를,"내 본래 죽어야 마땅할 것이다. 항복해 온 조나라 군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죄다 구덩이에 생매장해 죽였으니, 이것으로 죽기에 넉넉하다."고 하고 드디어 자살하였다. 그가 죽은 것은 진 소왕 50 년 11 월이다. 죽었으나 죽을 만한 죄가 아니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엽게 여겨 향읍(鄕邑)마다 그를 제사한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세속의 상말에 '자[척(尺)]도 짧은 곳이 있고, 치[촌(寸)]도 긴 곳이 있다'고 한다. 백기는 적을 잘 헤아리고 임기응변하여 기이(奇異)한 꾀를 냄이 무궁하며 명성은 천하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자기 몸에 미치는 화에서 스스로를 구출하지 못하였다.
왕전은 진시황 11 년에 장수가 되어 조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가장 강한 초나라를 치기 위해] 왕전은 군사 60 만의 장수가 되었으며 진시황은 몸소 패상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왕전은 가면서 진시황에게 좋은 농토와 집을 많이 주기를 여러 번 청하였다. 진시황이 말했다."장군은 가시오. 어찌 가난함을 근심하오."왕전이 말했다."대왕께서 저를 신임하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농토를 청하여 자손의 기업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진시황은 크게 웃고 말았다. 왕전이 국경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보내어 좋은 농토 주기를 청구한 것이 다섯 번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장군께서 임금에게 청하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왕전이 대답했다."그렇지 않다. 저 진왕[시황제]은 조포(粗暴)하여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라를 텅 비우면서 진나라의 모든 무장군인을 나에게 위임하였다. 내가 많은 토지를 청하여 자손의 기업을 삼아 자신의 신변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면 도리어 진왕은 나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임성삼의 주(註); 이같이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사람이 출전한 전쟁에 패할 리가 없다. 그러나 군자(君子)는 아니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하였으며, 이 후에도 왕전은 노성(老成)한 장수여서 진시왕이 그를 스승으로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을 보필하여 덕(德)을 세워서 그 근본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진시황의 뜻에 영합하여 자신이 용납되기를 꾀하여 몸이 다할 때까지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손자 왕리에 이르러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백기와 왕전은 각각 단소(短所)가 있었던 것이다.
제 14 맹자, 순경 열전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임성삼의 주(註); 위의 구절이 첫 부분에 나온 것은 열전 70 편 중 이 14 편이 유일하다. 그만큼 아래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양 혜왕이"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利)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 읽는 것을 그치고,"아아, 이(利)라는 것은 진실로 어지러워지는 시작이구나."하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임성삼의 주(註); 이 구절이 맹자의 시작이다.]
공자께서 이(利)를 말하는 일이 드물었던 것은 항상 (그 어지러워지는) 근원을 막기 위한 것이다.[임성삼의 주(註); 논어의 자한편에 '자한언리여명여인(子罕言利與命與仁; 공자님께서는 이익과 천명과 어짊에 대하여는 드믈게 말씀하셨다. 혹은 공자님께서는 이익에 대해 드믈게 말씀하셨다. 단지 천명과 어짊에 대해 말씀하셨을 뿐이다.)'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利)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고 하였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이(利)를 좋아하면 그 폐해를 말할 수 있겠는가?
맹가(孟軻)는 추(鄒)의 사람이다. 학업을 자사의 문인에게서 배웠다. 도가 이미 통하게 되었을 때에 제나라의 선왕에게 가서 섬기려 하였으나 선왕은 등용하지 않았다. 양(梁)나라에 갔으나 양 혜왕도 맹자가 말하는 바를 실행하지 않은데다 맹자를 보고 그의 말이 우원(迂遠)하고 실제 일에 서툴다고 생각하였다.
[임성삼의 주(註);양나라에서 양 혜왕과 이야기한 다음의 대화가 4 서 3 경 중 <맹자>의 시작부분에 있다. 양 혜왕이"노인께서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우리나라에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하자 맹자는"왜 하필 이익을 이야기하십니까?[何必曰利] 왕이 이익만 생각하면, 왕 아래의 귀족은 어떤 것이 내가 맡은 지역의 이익이 될까만을 생각하고, 그 아래 사람은 집안의 이익만 생각할 것이며, 그 아래 사람은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익이 아니라 단지 의(義)로움 만을 생각하십시오."
그 다음 왕이 질문하였다."나는 동쪽에 흉년이 들면 백성을 서쪽으로 옮기며, 곡식을 마차에 담아 서쪽으로 옮깁니다. 다른 나라 왕은 백성들을 위해 나처럼 노력하지 않는데 왜 우리나라 인구가 늘지 않으며, 이웃나라 인구가 줄지 않습니까? 다른나라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이사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장자가 대답하였다."왕이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어 북이 울린 후 접전이 있었습니다. 한 쪽이 패해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50 보를 도망한 후 앞을 보니 100 보를 도망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비겁하다고 나무랐습니다. 옳은 일입니까?" 왕이 대답했다."아닙니다. 50 보를 도망하였든, 100 보를 도망하였든 비겁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의 원전]"그것을 아신다면 이 나라에 백성이 늘어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다른나라의 왕도 그 정도는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였다. "어떤 군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군수를 소환하여 책임을 묻지요.""한 도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면요?""도지사를 바꾸어야지요?" 맹자가 다시 물었다."그러면 한 나라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으며, 나라에 기강이 서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왕은 엉뚱한 곳을 보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위의 것이 <맹자>의 첫 부분에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이런 문답이 있은 후 양혜왕이 맹자를 등용하였을 리가 없다. 참고로 위의 내용은 내 기억에 의한 것이다. 정확한 것은 곧 맹자를 소개할 때 나올 것이다.]
이때 진(秦)나라는 상앙을 임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력하게 하였으며, 초(楚)나라와 위(魏)나라는 장수 오기[임성삼의 주(註); 손자, 오자 병법의 오자]를 등용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적을 약화시켰다. 제(齊)나라의 위왕, 선왕은 손자[임성삼의 주(註); 손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손무와 그의 손자 손빈이 있다. 여기는 손빈을 말한다. 제 5 편의 손자 오기 열전을 참조하라.]와 전기의 무리를 채용하여 제후들을 소집하여 제나라에 조회(朝會)하게 하였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이냐 연횡이냐 하는 방법에 대하여 힘썼으며, 남을 잘 공격하여 정벌하는 것으로 현명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맹자는 요, 순 임금과 우임금의 덕(德)있는 정치를 논하였다. 그런 까닭에 어디를 가나 그의 학설은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물러나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 <서경>을 차례에 따라 서술하여 공자의 뜻을 이어 저술(著述)하고 <맹자> 7 편을 저작하였다.[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에는 덕(德)을 주장한 맹자나 공자가 실패한 듯 보인다. 그러나 위에 나온 상앙, 오기 등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일대(一代)에도 그들이 계속 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공자와 맹자의 사고(思考)는 그 후 동양의 2천 년 역사를 상당한 정도로 평화롭게 하였다.]
제 15 맹상군 열전 p 158 [孟嘗君 ?~BC 279? 백과사전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공족(公族). 성은 전(田), 이름은 문(文). 정곽군(靖郭君) 전영(田영)의 아들로서, 부친의 영지를 이어받고 문하(門下)에 식객(食客) 수천명을 거느렸으며,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사군(戰國四君)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은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식을 듣고, BC 299년 그를 재상(宰相)으로 삼기 위해 진나라로 불러들이고, 이어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식객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무사히 제나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유명한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故事)이다. 뒤에 이르러서 그는 제나라뿐만 아니라 위나라 재상에도 임명되었으나, BC 284년 이후로는 자립하여 제후(諸侯)가 되었고, 설(薛)에서 사망하었다.]
[맹상군이 어렸을 때] 한가한 틈을 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아들의 아들을 무엇이라고 합니까?""손자라고 한다.""손자의 손자를 무엇이라고 합니까?""현손(玄孫)이라고 한다.""현손의 현손을 무엇이라고 합니까?""알 수 없다.""아버님께서는 정권을 잡으시고 제나라의 정승으로 있은 후 임금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제나라의 영토가 더 넓어지지 않았으나, 아버지 집에는 수만(數萬) 금(金)이 쌓였습니다. 더구나 우리 집에 있는 부하 중에는 한 사람의 현자(賢者)도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들으니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정승의 가문에는 반드시 정승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버님의 후궁(後宮)은 비단옷을 밟고 다니지만, 우리 나라의 선비들은 짧은 잠방이도 얻어 입지 못합니다. 우리 집의 하인들은 쌀밥과 고기를 남기고 있으나, 선비들은 거친 밥도 싫도록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께서는 저장한 것이 남아 도나, 더욱 축적을 하고 계십니다. 결국 알지도 못하는 현손의 현손에게 남겨주고자 하여 국가의 일이 날로 손상되고 있는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을 괴이(怪異)하게 여깁니다."
이에 아버지는 맹상군이 집 일을 주재(主宰)하고 빈객(賓客)을 대접하게 하였다. 빈객이 날로 모여들어 명성이 제후(諸侯)에게 들렸다. 제후들이 모두 사자(使者)를 보내어 맹상군을 후계자로 하라고 청하니 그대로 되었다.[맹상군은 아버지의 40여 번째 아들이었고, 어머니도 신분이 낮았다.] 맹상군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도망한 사람, 죄지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모여들었다. 맹상군은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온 천하의 선비들이 거의 다 모여 식객(食客)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맹상군은 차별 없이 모두 자기와 같이 대우하였다. ... 맹상군이 손님과 같이 밥을 먹을 때 누군가 불빛을 가려 어둡게 하였다. 손님은 반찬이 같지 않다고 하여 성내며 먹지 않고 가려고 하였다. 맹상군이 일어나 자기 상을 들고 가서 동일한 것을 보였다. 손님은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맹상군은 손님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잘 대우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맹상군이 나에게 친밀하게 대해준다'고 생각하였다.
[이 후에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원전이 된 이야기가 이어진다.] ...
[맹상군이 풍환이라는 식객(食客)에게 돈을 받아오는 일을 시켰다. 풍환은 소를 잡아 빚진 사람들을 모아 대접한 후, 가난하여 갚을 수 없는 사람의 차용증을 불사르고 왔다. 풍환이 맹상군에게 설명했다.]" ... 받을 수 없는 빈 문서를 불살라버려 주군의 착한 명성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맹상군은 손뼉을 치며 잘했다고 치사(致謝)하였다.
맹상군이 제나라의 정승의 지위에서 파면되고 나자 그의 모든 식객(食客)은 다 떠나가 버렸다. [풍환만이 남아 국제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맹상군을 다시 복직시켰다.] 맹상군이 한숨을 쉬고 풍환에게 탄식하였다."내가 항상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손님을 대우하는 일에 감히 실수가 없었으며, 식객(食客)이 3천여 명이나 되었던 것은 선생님께서도 아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번 파면되는 것을 보고 그 많은 빈객들이 모두 저를 버리고 갔습니다. 저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선생의 힘을 입어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전의 빈객들이 무슨 면목이 있어 저를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다시 나에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보이겠습니다." ...풍환이 말하였다."군(君)께서 실언하셨습니다. 대체로 세상의 사물(事物)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있고, 본래부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어리석어서 하시는 말씀을 알지 못하겠습니다.""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사물(事物)이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일입니다.부귀(富貴)하면 선비가 많이 모여들고, 빈천(貧賤)하면 벗이 적은 것은 일이 본래부터 그러한 것입니다.
군(君)께서는 아침에 저자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른 아침에는 어깨를 서로 비비며 다투어 시장으로 갑니다. 해가 저문 뒤에는 시장의 옆을 지나는 사람이 시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아침에는 좋아하고, 저녁에는 미워하여서가 아닙니다. 저녁의 시장에는 기대하는 물건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君)께서 벼슬을 잃으니 손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원망하여 빈객이 오는 길을 끊기에는 부족합니다. 군께서는 빈객을 예전과 같이 대우하기를 원합니다."맹상군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공경하여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선생을 말씀을 듣고 감히 가르치심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 16 평원군 열전 p 160
[平原君 ?~BC 251중국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의 공자(公子). 무령왕(武靈王)의 아들로 이름은 승(勝)이다. 혜문왕(惠文王)·효성왕(孝成王) 때 재상을 지냈다. BC 257년 진(秦)나라 군사가 조나라 도읍을 포위하자 평소에 식객(食客)으로 대접한 모수(毛遂)의 헌책으로 초(楚)나라의 원군을 얻어 이를 물리쳤다. 제(齊)의 맹상군(孟祥君)·위(魏)의 신릉군(信陵君)·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더불어 4군(君)의 한 사람이다.]
[아래는 모수자천(毛遂自薦)의 원전]평원군이 모수에게 말하였다."선생께서 나의 문하에 있는 것이 오늘로 몇 해나 되었소?""3 년입니다.""현사(賢士)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도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요. 지금 선생이 나의 문하에 있은지 3 년이나 되었는데 좌우의 사람들이 아직 선생을 칭송하는 일이 없었소. 이것은 선생께서 가진 재능(才能)이 없다는 것이요.""저는 비로소 오늘 주머니 속에 있기를 청할 뿐입니다. 만약 저를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다면 곧 자루까지 주머니 속에서 벗어나왔을 것입니다. 어찌 그 끝만이 드러나 보이는 정도였겠습니까?"[그리고 같이 외국에 가서 모수의 힘만으로 성공을 거두고 왔다.]돌아온 후 평원군이 말하였다."나는 감히 다시는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선비를 골라 뽑음이 많으면 천 명, 적어도 백명 단위로 세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하의 선비를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모선생에게는 실패하였다. ... 모선생의 세 치의 혀는 백만의 군사보다 강하였다. 나는 다시는 선비에 대하여 아는 체 하지 않겠다."[임성삼의 주(註);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인재(人材)를 알아보아 발탁하는 것이다.]
제 17 위공자 열전[보통은 신릉군이라 부른다] 위공자 무기(無忌)는 위나라 소왕의 아들이다. ... 공자는 사람됨이 어질어 선비 앞에 자신을 낮추어, 선비의 어질거나 불초(不肖)하거나를 구별하지 않고 다 겸손한 태도로 그들과 예를 지켜 사귀었으며, 감히 자신이 부귀하다고 선비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들이 사방 수천 리에서 다투어 그에게로 모여드니, 식객(食客)이 3 천 명이나 되었다.
위나라에 은사(恩師)가 있었으니 후영이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당시에 천하의 여러 공자(公子)들도 또한 선비를 좋아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신릉군만이 산림에 숨어사는 현사(賢士)와 접촉하고 신분이 낮은 자와 사귀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름이 제후 중에 으뜸이었다는 사실은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한 고조는 여기를 지날 때마다 백성을 시켜 신릉군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한다.
제 18 춘신군 열전 p 191[임성삼의 주(註); 춘신군은 우리나라 신라 시대의 박제상과 동일한 방법으로 적국에 인질로 잡혀있는 자기나라 왕자를 구해내고 본인은 자기나라에 귀국한 후 재상이 되었다. 인질이 되는 왕자를 빼돌린 것이 발각되자 일본 정부는 박재상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으나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참고로 박제상의 일은 기원후 400 년 경이고 이 일은 기원전 200 년 경으로 적어도 600 년의 차이가 있다.)][인질을 잃은 나라인 진(秦)나라의 승상 응후(다음의 제 19 범수, 채택열전의 범수가 응후이다.)가 말하였다.]"춘신군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자기의 한 몸을 내던지어 그의 임금을 위하여 죽으려 하였습니다. [탈출한] 초나라의 태자가 임금이 되면 반드시 춘신군을 등용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주지 말고 그를 돌려보내어 초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진(秦)나라는 춘신군을 귀국시켰다.[임성삼의 주(註);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따른 것이지 진나라의 이익을 위해 진언(陳言)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자기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과 동일한 행동을 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을 지라도, 용기있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이런 지혜를 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지혜가 용기있는 행동을 창출(創出)하여 더욱 인간다운 행동을 많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春申君 ?∼BC238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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