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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젊은 날의 결정
문 창 재
통신혁명-언론의 신세계
^“시론 원고 제39행 ‘보아더라도’를 ‘보더라도’로 잡아주세요.”
^“네, 알았습니다.”
^최근 내일신문 정세용 주필과 카톡으로 통신한 내용이다. 간밤에 보낸 원고의 오자가 이것으로 교정되었다. 사실인식이나 팩트 상의 오류가 있어 원고를 정정할 필요가 생기면 문장을 통째로 고쳐야 할 일도 생긴다. 그것도 몇 분이면 손 볼 수 있다. 고쳐 쓴 원고를 재전송하면 그만이다.
^만일 육필원고 시대였다면 어떨까. 우선 재택근무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간단한 오자라도 수정을 하려면 신문사까지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감 시간이 지나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편리한 세상을 나는 살고 있다. 언론매체에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통신혁명의 시대는 아날로그 시대에 상상하지도 못 한 신세계다. 아마도 지식정보 유통산업 종사자들에게 최근 30여 년간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역사상 어느 세대보다 급격하지 않을까? 이런 시대의 혜택이 큰 행운이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다.
^원고 수정뿐이 아니다. 자료 찾기나 취득도 마찬가지다. 현장취재 메모, 조사부나 도서관에 비치된 스크랩북과 도서류에 의존하였던 그 옛날에는 꿈도 꾸지 못 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정부 부처나 각 기관 단체 업체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개인 SNS에 접속하면 기본적인 자료는 누구나 얻을 수 있다. 출입기자들에게만 배포되던 보도자료 참고자료 같은 것도 그렇고, 지난날의 자료도 손쉽게 얻어 볼 수 있다. 인터넷과 방송의 발달로 중요한 사건 사고의 현장, 정치 경제 문화계 뉴스 해설, 국제뉴스의 현장이나 결정적인 순간의 영상도 볼 수 있다. 방송을 놓쳐도 얼마든지 다시 찾아 볼 수 있다.
^제일 편하게 된 것은 원고작성과 송고다. PC로 문서를 작성하여 전자메일을 이용하는 송고는 시간과 장소, 원고분량과 종류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육필원고를 들고 가거나 우편으로 전하고, 교정도 거기서 보아야 하던 시대를 생각하면 가히 천지개벽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퇴직 후 사우회 회보를 창간하고 7년 넘게 편집 일을 하면서, 보조원과 사무실 없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메일로 원고를 받아 모아 면별로 분량에 맞추어 편집자에게 보내주면 예쁘게 편집된 회보가 나왔다.
^책을 낼 때도 그 편리함을 온몸으로 경험하였다. 200자 원고지 1000장 안팎 분량의 원고와 사진들을 출판사 편집부로 보내는 일이 책상머리에서 엔터 한 번 때리기로 끝났다. 신문에 연재한 것을 출간할 때는 머리말 정도만 보내는 것으로 끝이었다. 만일 활판인쇄 시대였다면 원고작성과 퇴고에 얼마나 많은 공력을 쏟아 부었겠는가.
^원고교정과 교열도 마찬가지다. 출판사에서 메일로 보내온 가 편집 PDF 문서를 모니터에 띄워 집에서 편안하게 교정과 퇴고를 마쳤다. 노트북이나 태블릿 PC의 발달은 그런 일의 시간과 장소 제약마저도 없애버렸다. 휴가 중에도, 여행 중에도, 원고작성과 송고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진 세상이다.
^그렇게 생산한 글을 정규독자 이외의 독자들에게 보내고 의사를 소통하는 일도 전에 없었던 일이다.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보내고 의견을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전 국민의 통신망이 된 카톡은 잠시의 휴식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 심부름을 해준다.
^아날로그 시대가 일방통신 시대였다면 지금은 기자와 독자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쌍방통신 시대다. 그래서 전 국민의 기자화 시대, 가짜뉴스 범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편리함과 효율성 때문에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은 쓰지 않아도 좋은 자유다. 국가비상사태, 위수령, 계엄령, 긴급조치 1~9호, 계엄령 전국 확대, 비상계엄령 같은 억압의 시대에 그런 자유를 갈구하면서 부대끼고 갈등해온 7080 시대를 돌이켜 볼 때마다, 나는 그 때 이 직업을 팽개쳐 내버리지 않은 결정을 다행으로 여긴다.
^2004년 정년으로 신문사를 떠난 나는 아직 언론계 일우에 한 자리를 갖고 있다. 마음먹은 대로 쓰고, 써서는 안 될 것을 쓰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기레기’라는 비칭을 갖게 된 언론자유의 역설에 다친 마음의 상처가 쓰리다. 언론인이 무관의 제왕이라던 시대의 ‘棄自’라는 비칭과 오욕의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붓을 들었다.
뭣 하러들 왔어?
^“다 끝났는데 뭣 하러들 왔어?”
^1972년 1월 17일, 지금은 없어진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번지 한국일보사 3층 편집국에 처음 출근한 수습기자 13명을 보고 선배들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푹 찔리었다.
‘이제 별 볼일 없어진 신문기자를 해보겠다는 후배들이 가여워 보이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나는 축하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인가···.’ 얼굴은 웃는 빛이었지만 자조적인 어투로 보아 축하의 뜻이 담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 말뜻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해 1월 1일부터 시작된 프레스카드 제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정부가 발행하는 프레스카드라는 신분증을 갖지 않은 기자는 언론활동을 할 수 없게 하는 제도 앞에 어떤 언론인이 정상적인 심리상태이겠는가. 그 제도는 1987년 6월 항쟁 때까지 ‘개패’라고 불리며 언론계에 가지가지 오욕을 안겨주었다.
^박정희 정부가 그런 제도를 무기로 언론을 억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71년 대선과 총선에서 크게 고전한 박정희대통령은 언론의 비판적인 보도로 인한 민심의 이탈을 그 원인의 하나로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시절 시국사건에 눈을 뜨게 된 이래 언론계에는 참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일회담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3·24 데모를 시작으로, 학원가는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 저항을 계엄령으로 틀어막으려 한 6·3 사태 다음날, 계엄당국이 동아일보 자회사였던 동아방송 시사 프로그램을 문제 삼아 방송국 간부와 PD, 동아일보 외신부장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 조사한 사건을 필두로, 신문기자 연행과 구속 사태가 빈번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치러진 1971년 4월 대선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크게 고전하였다. 그 때는 아직 군 복무 중이었지만, 계엄군이 언론인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고려대에 진입한 군인들이 시위학생들에게 한 일을 전해 듣고 분기를 참지 못 하였던 기억이 어제 일 같다. 나는 ‘군기의 전당’이라던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부대 제대병장 신분이었다. (그 연유로 나는 입사 후 사회부 안봉환 형을 붙잡아다 매질을 한 수경사 ‘악질헌병’이라는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때마침 학원가에서 일어난 교련반대 투쟁과 부패척결 요구를 빌미로 박정희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을 날치기로 제정, 그해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그 6개 비상조치 가운데 하나가 언론통제였다. 통제라는 것은 ‘자율정화’ 형식으로 언론계를 찍어 누르는 장치였다.
^1972년 1월 새날이 밝자마자 프레스카드 제도 시행, 신문사 지사·지국 설치 제한, 지방주재기자 배치 제한, 신문윤리강령 준수 등이 시행되었다. 그 요체는 걸리적거리는 기자는 없애고, 모든 기자를 정부에 협조하는 관변언론인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민간기업인 언론 종사자의 자격을 정부가 규제하겠다는 군국주의적 발상이었다.
^지사·지국 설치 제한조치로 서울의 일간종합지들은 부산과 도청소재지에만 지사를 둘 수 있고, 시 지역에만 지국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방 주재기자는 도시지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취재의 발이 묶였다. 프레스카드는 문화공보부 장관 명의의 신분증이 없는 기자는 모든 관공서에의 취재활동을 할 수 없도록 취재를 제한한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우리 입사동기생 13명은 입사하자마자 이 제도의 대상자가 되었다. 수습기간이 끝나고 사건기자가 되었을 때, “출입처 요구에 협조하지 않으면 프레스카드가 회수될 수 있다더라”는 선배들의 취중한탄에 알게 모르게 옥조임을 느끼던 기억이 새롭다.
^유례없는 압박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수습기자 훈련에 들어갔다. 한국일보 자매지였던 코리아타임스를 지원한 2명을 제외한 우리 11명은 6개월 동안 사회부와 편집부 교정부에 차례로 배치되어 일을 배웠다. 선배들 등 너머로 보고 익힌다고 일본에서는 견습(見習)기자라 부르는 훈련과정이었다.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이탈자가 나왔다. “앞날이 노랗다”는 말을 남기고 동기생 한 사람이 퇴사한 뒤를 이어,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4명이 회사를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살의 길을 택하였다. 명문여고 명문대학 출신의 그 여자 동기생 자살동기가 무엇인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당시의 언론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외국유학을 떠났고,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유학을 간 두 사람 중 하나는 뒷날 유명한 경제학 교수로 이름을 날려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도 몇 차례 들썩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언론이 ‘사회의 목탁’ 되기는 틀렸구나 싶었던 게 첫 째 이유다. 입사하던 해의 ‘10월 유신’ 때 축축한 신문대장을 들고 서울시청 언론검열단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느낀 모멸감이 실의의 단초였다.
^인쇄 직전상태의 정판을 젖은 종이에 찍어낸 가 편집 지면을 읽어보고 “이 기사는 빼라” “이 기사는 단수를 줄여라” 하고 물 연필로 돼지꼬리를 치는 검열단원들이 너무 미웠다. 물 연필로 대장을 보며 제목을 고치고 OK 사인을 놓는 것은 편집국장이나 부장 같은 대선배들이 최종결재를 내는 권위의 몸짓이다. 새파란 영관급 장교들이 200여명 기자들의 정열과 땀이 밴 지면을 난도질하듯 물 연필을 휘두르는 것은 정말 보아줄 수 없었다.
^톱기사나 세컨드 톱 같은 큰 기사를 통째로 드러내면 데스크들이 지면을 메꾸느라 난리가 났다. 빼라는 기사가 많거나 검열이 늦어지면 강판시간도 늦어져 지방판 신문 인쇄가 늦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때 기분으로는 중요기사가 빠진 자리를 채우지 않고 그대로 발행했으면 싶었다. 독자들에게 검열의 증거를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부산 대구 광주 같은 지방도시에 보내는 신문은 서울역 출발시간이 정해진 열차편을 이용했는데, 신문발행이 늦어지면 트럭에 싣고 밤새도록 달려가는 일이 잦았다.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령부 같은 정보기관 요원들이 신문사 간부들 방을 들락거리며 기자들 거동을 캐묻고, ‘협조’라는 이름으로 지면제작을 제약·감시하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사장실이나 편집국장실 같은 데를 드나들며 눈에 안 띄게 정보수집 활동을 하더니, 나중에는 부·차장들을 접촉하고 중요 출입처 기자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는 것을 보고부터는 정말 희망이 없구나 싶었다.
^또 하나 때려치우기를 부추긴 것은 처우였다. 수습기간의 월급으로는 두 식구 생계비에도 모자랐다. 나는 입사시험을 치른 뒤 합격을 전제로 결혼을 했다. 단간셋방에서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시작한 때였는데, 그런 살림에도 턱없이 모자라 집안의 원조를 받아야 하였다.
^수습기간이 지나도 처우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 당시 첫 월급의 최저기준은 쌀 세 가마 값이었다. 월급투쟁을 할 때면 “쌀 세 가마 값도 안 되는 월급에 퇴근시간도 없는 일을 시키다니!”이런 푸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쌀값은 한 가마에 1만 원 정도로 기억된다.
^“나가서 배추장사나 하자. 젊은 힘 두었다가 어디에 쓰겠나!”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대기업 월급은 우리의 배도 넘는대. 대학 나온 사람들에게 이게 뭐야?”
^이런 푸념잔치가 지나가면 한 두 사람씩 편집국에서 모습이 사라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내 엉덩이도 들썩거렸다. ‘나가서 소설공부나 계속할까’ ‘학원 강사는 어떨까’ ‘출판사 편집부에는 갈 수 있겠지’,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끝내 용기를 내지 못 하고 말았다.
^첫째는 당장의 생계문제였다. 입사 이듬해 첫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더욱 족쇄가 되었다. 문과 출신의 전직기자가 갈 곳은 없는 시대였다.
^둘째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에 빠져들었던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글 쓰는 일에 종사하고 싶은 희망을 품었다. 동료들이 유일한 밥자리준비라고 매달리는 교직과목 이수조차 포기하였다. 교직과목을 이수한 대학동기들은 2급 정교사 자격을 얻어 대부분 교사가 되었는데, 나는 아무 보장도 없이 막연히 글 쓰는 직업에 대한 동경심만 키웠었다.
^또 한 가지는 언젠가 사정이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였다. “박정희가 천년만년 해먹겠어?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좀 기다려 보자.” 울분에 찬 술자리에서 나오는 이런 말에 나는 기대를 걸고 싶었다. 어렵게 신문기자가 되었는데 눈앞의 현실만 가지고 일생 후회할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최장수 사건기자 기록
^1972년 7월, 수습기간 6개월이 지나 처음 배치된 부서가 사회부였다. 내가 오래 동경해온 사건기자 꿈이 실현된 기분이었다. 처음 주어진 출입처는 서대문경찰서 2진이었다. 서대문경찰서는 서울을 동서로 나눈 서쪽 지역 중심 경찰서다. 관내에 큰 대학과 중요한 병원이 많고, 서대문교도소가 있어 중요한 출입처로 인식되는 곳이었다.
^사건기자 생활은 재미있었다. 내가 취재하여 쓴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그 기사가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보람도 느꼈다. 조간신문이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둘뿐이던 시대라 신문의 영향력이 컸다. 신문 구독률이 높았던 때라서 무서울 정도로 반응이 빨랐다.
^타고난 DNA 탓이었을까. 경찰서에서 형사들을 사귀어 남이 모르는 사건을 알아내는 쾌감도 느껴보았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쉬지 않고 6년 반 동안 그 짓을 하였겠는가.
^그 시대에 6년이 넘도록 경찰서만 출입한 사람은 없었다. 요즈음은 사건기자가 3D업종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출근과 퇴근에 따로 정해진 시간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일이 많은 보직인 탓이겠지만, 근로시간 제약으로 그렇게 일을 시킬 수도 없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사건 전문기자를 ‘사쓰마와리’(察巡)라고 불렀다. 경찰서를 순회하며 기사거리를 찾는다는 뜻의 일본어가 그때로 쓰였다. 우리끼리는 ‘사슴 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나의 사쓰마와리 사부는 고 채의석 형이었다. 입사동기 한 사람과 같이 찾아간 서대문경찰서 기자실에서 우리를 맞아준 그는 경쾌한 헤어스타일에 운동화 점퍼 차림이었다. 사건기자에게 점퍼야 이상할 것 없지만 운동화는 좀 의외였다.
^“신문기자는 언제나 빨리 움직일 수 있어야 해. 운동화가 취재에 편해.” 와이셔츠에 넥타이, 구두를 갖추어 신고 말끔히 빗은 머리로 빠르게 기동하기 불편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의논 끝에 나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이가 몇 달 후 외가에서 돌아와 낯을 가리는 것을 보고 서운해 하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마포경찰서, 동기생 이정원은 서부경찰서를 맡게 되었다. 마포경찰서에서 경찰서장과 수사과장 형사계장 등 중요간부를 소개시키더니 의석 형은 취재차에 이정원을 태우고 휑하니 경찰서를 떠났다. 그 때부터 나는 한 몫을 담당한 사건기자가 되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취재해야 할지 모르는 햇병아리 기자의 첫발자국을 그렇게 내딛었다.
^그해 마포경찰서 관할지역에서는 두 건의 큰 사고와 사건이 터져 나는 제대로 사건기자 노릇을 감당해 보았다. 첫 사고는 7·19 수해, 두 번째는 이정수 사건이었다. 며칠을 두고 내린 폭우로 서울 곳곳에서 물난리가 났는데, 한강 하류지역 저지대인 마포구에 피해가 집중되었다. 특히 망원동에서는 한강 둑이 터져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서대문경찰서 관할지역인 평창동에서는 계곡물 범람과 산사태로 수십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 햇병아리 기자였던 나와 이정원은 제대로 트레이닝을 받았다. 인명피해가 큰 산사태 현장이 많아 사망자 수가 몇 안 되는 현장에는 사진기자를 불러도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았다.
^그 다음은 우리나라 첫 ‘갱사건’으로 분류된 이정수 사건이었다. 9월 12일 마포구 아현동 국민은행 지점에서 돈을 찾아 나오던 고추상인 이정수가 경찰 전투복 차림의 괴한 둘에게 납치되었다. 범인들은 은행 앞에 세워놓았던 코티나 승용차에 강제로 피해자를 태우고 자취를 감추었다. 5분 뒤 승용차가 공덕동 로터리를 지날 때 총성 5발이 울렸고, 차 뒷좌석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 같은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신고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이듬해 8월 구로공단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던 일본계 투자회사 호쿠리쿠(北陸) 경리직원을 개머리판 없는 카빈총으로 쏘고 돈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범행수법으로 보아 아현동 사건과 동일범으로 단정되었다. 1년 후 고속도로에서 검문에 걸려 경찰의 추적을 받던 한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진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 집으로 가서 경찰과 대치하다 어린 두 아들을 쏘아 죽이고 자진한 이종대 문도석 사건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나는 세 사건의 주임기자였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 기자’ 소리를 들은 계기였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사흘 밤낮 무휴불면의 취재경험이 아니라, 그런 사건이 보도관제에 결려 제때 보도되지 못 하였던 시대상이다.
^국민은행 아현동지점 사건이 일어난 날은 공교롭게도 북한 적십자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온 날이었다. 북한대표단이 서울에 와 있으니 범죄천국으로 비추어질 그런 사건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보도 관제를 당하였다. 긴급조치 시대이긴 하였으나 계엄 상황도 아니었는데 그게 통하던 시대였다.
^북한 대표단이 서울을 떠난 뒤 관제가 풀려 기사를 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닷새나 묵은 사건을 어떻게 크게 보도하겠는가. 연일 밤새워 취재를 하고도 제대로 보도하지 못 한 희한한 경험이었다. 정치기사에 제약이 많았던 당시는 사회부가 생산하는 기사가 뉴스지면의 80%를 차지하던 시대였다. 교통사고나 연탄가스 중독으로 둘만 죽어도, 중요뉴스가 되었다.
^그 사건이 나기 2개월여 전인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극비리에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 서로 평화롭게 살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남북 적십자 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렸는데, 북측 대표단이 서울에 머물 때는 그런 관제가 통하였다.
^그 흥분과 기대의 여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분위기는 한 순간 급전되었다. 10월 유신! 같은 사람이 계속 집권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유신한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적십자병원에서 ‘희대의 화제 거리’라고 흥분하며 취재한 기사를 작성하려고 일찍 회사에 들어갔다. 인생을 꽃피워보지도 못 하고 죽은 청춘남녀의 영혼결혼식 기사였다. 막 원고지를 메꾸기 시작하는데 선배 한 사람이 “괜스레 헛고생 말라” 하였다. 유신 계엄령이 떨어졌는데 그런 기사가 어떻게 검열을 통과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분위기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선배기자들이 여기저기 모여앉아 수군대는 가운데, 간부들 발걸음이 빨라지고 편집국 복도에 낯모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당장 그 순간부터 검열을 거쳐야 지면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계엄령으로 중앙정부 부처와 중요기관을 제외한 많은 출입처 기자실이 폐쇄되었다. 경찰서 기자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건기자라는 업을 폐하지 않는 한 우리가 갈 곳은 경찰서뿐인데 들어가 앉을 방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길 잃은 철새처럼 둥지 주위만 맴돌다가 경찰서 가까운 곳에 여관방을 잡아 낮 손님처럼 들어앉았다. ‘취재지령실’인 서울시경찰국(시경) 기자실과 연락을 주고받을 전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관집 전화를 통해서도 정신없이 발령되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붙잡혀 오는 사람들을 취재하라는 지시가 수시로 떨어졌다.
범인 회유용 가짜신문
^지금 돌이켜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다. 인질범을 속여 사건을 해결하려고 가짜신문까지 만들었으니, 세계 언론사에 남을 일 아닌가. 경찰의 범인검거 작전에 협조하기 위해 찍은 한정판인데 뭐 어떠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윤전기에서 인쇄되어 나오는 순간부터 독자에게 무한책임을 져야하는 공공문서로서의 소임을 생각하면 떳떳한 일은 아니다. 상대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거짓을 진실로 꾸민 것은 옳지 않다.
^1974년 5월 20일 오전이었다. 무장 탈영병이 명동 한가운데 유네스코 빌딩 지하다방에서 손님 30여명을 인질로 잡아 놓고 군경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총을 들고 탈영한 이등병 한 사람이 동료 둘과 함께 원주-서울 고속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들어오다, 검문경찰관을 사살하고 명동에 들어와 다방을 점거하였다. 쇼핑객들이 모여드는 오전 10시의 일이다.
^범인은 “소대장이 걸핏하면 부대원들에게 돈을 걷어 달래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면서, 세상을 향해 원망을 쏟아냈다. 간헐적으로 총성이 터져 나와 서울 도심은 공포 분위기로 얼어붙었다.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것 같았다.
^가족들이 달려와 눈물로 설득하자 마음이 약해진 범인들은 총 맞은 경찰관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주 물었다. 경찰은 “그 사람 죽지 않았으니 안심하라. 자수하면 용서받을 수도 있다.”고 설득하였다. 범인들은 “경찰의 말은 못 믿겠느니 그 기사가 난 신문을 넣어 달라” 하였다.
^이런 경위로 경찰이 한국일보에 가짜 신문 제작을 요청한 것이다. 시경 캡을 통해 경찰의 요구에 접한 본사에서는 즉시 가짜신문 제작에 동의하였다. 범인들에게만 읽힌다는 조건이었다. 총 맞은 경찰관이 다쳐 입원했다는 가짜 기사로 즉각 지면이 제작되어 경찰에 넘겨졌다.
^그 신문이 다방 안에 투입된 시간은 자정 가까워서였다. 범인들은 그 신문을 보고도 자수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군경 수사진이 전화를 걸어도 잠잠하였다.
^상황이 종료된 것은 20시간만인 다음 날 오전 6시 무렵이었다. 극도의 긴장 속에 대치상황을 유지해 가던 그들도 졸음만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총을 잡은 채 졸던 범인을 용감한 인질 두 사람이 덮쳐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였다. 그 순간 수많은 인질시민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범인들과 육탄전이 벌어졌고, 같은 순간 군경 특수대원이 들이닥쳤다. 총 없는 군인은 맥없이 진압되어 상황이 무혈종료 되었다.
^이 사건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가 빼놓지 않고 입에 담는 이야기 거리가 있다. 지금은 유명작가가 된 김 훈 기자 결혼식 이야기다. 다음 날이 결혼식이었던 김 기자는 자정이 가까워 올 때까지 현장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사건기자 전원이 투입된 총력취재 체제 아래 개인적인 사정을 말할 분위기가 아님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군대조직처럼 엄격한 상하관계 속에 수습기자가 어떻게 선배들에게 “나 내일 장가가니 일찍 들어가겠소.” 하겠는가. 우연히 내가 그 사정을 알았다. 현장에 배치되었던 그의 동기생 하나가 그 사실을 ‘누설’한 모양이었다.
^이건 아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도 이럴 수는 없다 싶었다. 나는 김 기자에게 사실인지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즉시 현장 캡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목욕은 하고 식장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니냐는 말에 고개를 저을 사람이 있겠는가.
경쟁대상이 아닌 시국기사
^엄혹한 취재여건 속에서도 우리는 ‘사회의 목탁’이라는 신문의 소임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버텼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긴급조치의 강압 속에서 민주화 세상을 갈망하는 대학생들과 종교계 학계 문화계 등 각계의 민주화 운동을 빠짐없이 보도하자고, 일종의 취재 카르텔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민주화 투쟁 기사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한 신문 한 방송에라도 더 보도되는 것이 좋다는 암묵적 합의의 결실이었다. 경쟁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취재결과를 나누는 ‘미담’의 탄생이었다.
^지금은 혜화경찰서로 이름이 바뀐 동대문경찰서 관할지역인 종로5가 기독교회관은 시국관련 기독교계 움직임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망원경이고 현미경이었다. 각 종파별 단체와 신도회 같은 조직들이 한 건물에 들어 있어, 시국 관련기사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출근이 빠른 석간 기자들은 이른 아침 상황을 조간기자들에게 풀해 주었고, 늦은 오후의 일은 조간 팀에 의해 석간 팀에게 풀 되었다. 그렇게 취재된 기사들은 경쟁적으로 보도되었다. 기사 크기에 제한이 있던 때여서 대개는 1단, 중요한 기사는 2단, 가장 중요하다 여겨져도 3단을 넘지 못 하였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통제와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기사 크기보다는 게재여부가 큰 관심사여서, 우리는 그런 기사의 숫자로 사회부장의 배포와 그릇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 때 독자들은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톱기사나 화려하게 편집된 기사보다 1단짜리 시국기사의 중요성을 알았다. 작은 기사의 행간을 읽어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스크랩북에 저장되어 있는 그 때 지면 한 페이지를 훑어본다. 73년 12월 어느 날 한국일보 사회면은 20개 가까운 1단짜리 시국관련 기사로 도배되어 있다. 제목만 일별해 보면 이대생 2천여 명 경찰과 대치, 인권선언 발표 각계인사 30여명 참석, 성대생 500여명 가두데모, 새문안교회 학생회 연좌, 어제 서강대 숭전대 조기방학, 건대생 시국선언, 한양대생들 기말시험 거부, 고대생 40여명 단식농성 시작, 중앙대생 교내시위, 장로회신대 기말고사 거부, 연세대신학대학원생 구국기도회···.
^이런 기사가 어느 신문에 어떻게 났느냐, 이것이 대학생들 관심사의 하나였다. 기사가 빠졌거나 제대로 소화되지 않는 신문의 기자에게는 취재를 보이콧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학생회사무실 앞 게시판에는 ‘OO신문 기자, XX방송 기자 출입금지’ 벽보가 늘 나붙고, 행정처 직원들도 그 기자들을 백안시하였다. 학생들은 기자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한다는 뜻으로 기자를 ‘棄自’라고 비하하는 만화를 대학신문에 싣기도 하였다.
^그런 지면을 대할 때마다 석간에 난 기사까지 챙겨가면서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소화해 준 고 김창열 사회부장(뒷날 한국일보 사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역임)에 대한 존경의 염을 금할 수 없다.
^데스크와 일선기자의 그런 노력도 허사가 되기 다반사였다. 시국기사에 민감한 당국이 단속의 고삐를 당기면 아무리 중요한 기사라도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에서 일어난 일조차 보도할 수 없게 된 데 대한 우리의 저항과 반발은 한국 언론계 자유언론 수호투쟁의 밑밥이 되었다.
^74년 10월 22일의 일이다. 경찰서에서 귀사해 보니 편집국이 크게 술렁거렸다. 김경환 편집국장이 남산(중앙정보부 6국)에 불려갔는데 아직 풀려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행이유는 22일 아침신문 3면 ‘국제초점’란에 실린 홍순일 특파원 기사라 하였다. 동남아 9개국 순회특파원으로 활동 중이던 홍순일 논설위원의 월남정국 분석 기사였다.
^기자들은 퇴근을 포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잡혀간 국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국가안보와 아무 관련이 없는 기사를 트집 잡아 백주에 편집 책임자를 영장도 없이 잡아간 일을 어떻게 보아 넘길 수 있느냐고 다들 흥분하였다.
^한국일보 기자단체 ‘제2화요회’는 편집국장 연행사실을 보도해 달라고 야간 편집진에 요청했다. 국장을 대신하여 순번제로 야간편집을 책임지던 야간국장(부장)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재량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23일 장강재 회장과 이상우 종합편집부장이 연행되었다.
^격앙된 기자들은 철야농성 속에 우리의 요구사항까지 기사화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지면제작 책임을 가진 야간국장이 결단을 내리지 못 하자, 기자들은 제작거부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기사가 실리지지 못 하는 지면 제작을 막자고 우리는 공무국으로 몰려 내려가 실력으로 윤전기 가동을 중지시켰다. 뜻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제2화요회 기자총회가 또 소집되었다.
^인쇄공장 농성으로 밤잠을 설친 기자들은 부수수한 얼굴로 편집국에 모였다. 우리의 요구는 편집국장과 회장 연행에 대한 항의를 넘어, 언론자유 수호투쟁으로 변하였다. 사태를 1면에 3단 이상 게재하지 않으면 무기한 제작거부에 들어간다는 공식결의가 통과되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와 CBS 방송, 일본 NHK 방송과 후지 TV 등 외신 특파원들이 한국일보사로 모여들었다. 그 사이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나 귀사한 장강재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기자들 요구를 들어주라는 회장 지시로 사태는 사흘 만에 진정되었다. 민주언론 수호 결의와 행동지침 4개항에 들어 있는 정보기관원 출입거부 조항은 우리나라 언론자유 투쟁에 큰 획을 그은 선언이었다.
^사흘간 철야농성의 성과로 한국일보 1면에 3단 크기로 실린 기사 제목은 ‘한국일보 기자일동 민주언론 수호 결의’였다. 기사 본문 말미에 첨부된 결의사항은
^1, 22일 23일 발행인·편집국장·편집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출두해 조사받은 사태를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단정한다.
^2, 우리 사회의 종교인 지식인 학생 등이 주장하는 사실을 외부간섭 없이 자유롭게 보도할 것과 자유언론에 대한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3, 앞으로 신문제작에 관련되어 언론인 누구라도 부당하게 연행 구금될 경우 이를 사실대로 보도함은 물론 그들이 귀사할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리며 투쟁한다.
^4,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기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일절 거부한다.
^이상 4개항이다. 이 선언은 즉시 신문사 현관에 벽보로 게시되어 한 때 효력이 발생하였다. 기관원들이 이를 보고 한동안 출입을 중지하였던 것이다.
^문제가 된 기사는 지금 읽어보아도 박 정권이 왜 그리 민감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사 요지는 베트남 종교계와 언론계의 반정부 운동으로 곤경에 처한 월남 티우 대통령이 강온 양면작전을 펴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합편집부장이 잡혀간 것으로 보아 제목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크게 자극적인 제목도 아니었다. 주 제목은 ‘디엠정권 교훈 수습 자신’, 부제는 ‘보좌관 부패는 티우의 부패’ ‘광범한 개혁요구에 체제위협 우려’였다. 부패니 체제위협이니 하는 말에 제 발이 저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 우리의 추측이었다.
^이 일을 온라인 글방에 썼더니 장본인 이상우 선배가 해명해 주어 진상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 문제 삼은 것은 홍순일 특파원 기사였지만, 사실은 전날 석간에 난 데모기사를 크게 다룬 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것이다. 서울대생들 데모기사가 전날 석간에는 1단으로 났는데 한국일보가 사회면 세컨드 톱으로 다룬 것이다. 즉각 “석간 수준으로 줄여 달라”는 전화가 왔지만 이 선배가 이 요구를 묵살해버렸다는 것이다. 모두가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았다는 증거다.
^“당시 사회부장은 고 이문희 선배였고, 연행에서 풀려나 편집국에 돌아왔을 때 고 채의석 기자가 울면서 당국의 횡포를 성토하고 있었다.”는 부언이 있었다.
^한국일보에서 농성이 시작된 다음 날인 10월 23일 동아일보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사회면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가 문제가 되었다. 한국일보 사건의 판박이였다. 중앙정부부에 연행된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난 동아 기자들도 한국일보처럼 밀고 당기기 끝에 자유언론 실천선언의 기사화에 성공하였다. 두 경쟁 신문사 사태에 자극받은 조선일보에서도 비슷한 선언이 있었다.
^이 투쟁은 끝내 동아일보 광고탄압, 동아·조선 기자 대량해직 사태로 이어졌다. 당국이 반항적인 젊은 기자들 손보기에 나선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더니, 12월 어느 날 동아일보가 광고 없는 신문을 발행하였다. 1면부터 전 지면 하단이 백지인 신문을 그 때 처음 보았다.
^경찰서 기자실에 나온 동아일보 기자들에 따르면, 정부가 중요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광고를 게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광고주들이 신문사 맡겨놓았던 인쇄용 광고동판을 수거해 가버려 중단사태가 언제까지 갈지도 모른다 하였다. 압력은 중소 광고주들에게까지 퍼져 광고재개 전망도 어두워졌다. 신문사 경영을 걱정하는 민주화운동 단체와 독자들의 지지·격려광고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 내가 출입하던 동대문경찰서 기자들도 주머니를 털어 모아 격려광고를 냈다. 광고주 이름은 ‘동대문경찰서 출입기자단 일동’이었다.
^사단은 동아일보가 자유언론 투쟁에 연루된 편집국 기자, 방송 PD, 아나운서 등 113명을 한꺼번에 해직시킨 일이었다. 부당하게 해고된 기자들이 매일 출근투쟁을 이어가자, 3월 어느 날 회사 측에 고용된 폭력배들이 기자들을 강제로 편집국에서 끌어내 거리로 내몰았다. 조선일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해직자 수는 30명이 좀 넘었다. 그러나 한국일보에서는 해직사태가 없었다. 우리는 안도 속에서도 양사 해직자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 부채감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다.
파출소 지나니 경찰서?
^좋지 않은 일의 연속을 비유할 때 ‘파출소 지나니 경찰서’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전근대적 경찰국가 제도였던 야간 통행금지 시절, 자정을 넘긴 취객이 파출소 앞을 용케 피하고 나니 경찰서 앞이라던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시대가 바로 그런 세월이었다. 언론계로서는 더 고약한 세상이 된 것이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종언을 고한 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신군부는 즉시 마각을 드러냈다. 모든 신문과 방송 보도의 철저한 사전검열 제도가 앞날의 일진광풍 예고편이었다.
^유신독재자와 긴급조치가 없어져 곧 민주주의 나라가 될 것 같았던 ‘서울의 봄’ 당시, 대학가는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로 날이 밝고 해가 졌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챈 학생대표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시위를 자제하기로 결정한 5월 17일, 신군부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세 정치지도자를 필두로, 모든 정치인들의 활동을 중지시켰다.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한 제2의 쿠데타였다.
^야당 정치인과 민주인사들, 학생운동 리더 들이 계엄당국에 연행되고 수배되는 사태로 전국의 대학가는 숨을 죽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18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서 일어난 특전사의 과잉진압은 전 광주 시민의 분노를 촉발, 시민이 학생시위대에 합류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진압은 더욱 폭압으로 치달아 인명피해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검열의 벽에 막혀 그 사실은 국내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못 하였다.
^그 때 나는 법조출입 기자였다. 시국이 어수선해 내근을 돕다가, 4월에 발생한 강원도 정선군 사북탄광 소요사태 취재에 동원되었다. 사북에서 돌아와 김재규 상고심 취재를 마친지 며칠 안 되어, 광주 출장자들과 교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5·18 유혈사태가 시작된 지 아흐레째였다. 법조출입이었지만 사건취재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 불평할 게제가 아니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한 27일 열차 편으로 송정리역에 내렸으나 아직 대중교통 운행이 재개되지 않아 시내로 들어갈 길이 없었다. 갖은 임기응변과 재주를 부린 끝에 가까스로 광주진입에 성공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이 임시 시체안치소였다. 전남도청 앞 상무관 안에 들어서자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엉성한 관에 구겨 넣듯이 수습한 수많은 시체가 유도장 마루에 방치되어 부패해 가는 냄새였다. 처참하였던 시위현장과 희생자 합동 장례식까지 열심히 취재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말할 것이 없다.
^수많은 기사를 써 보냈다. 그러나 지금 내 스크랩북에 남은 기사는 없다. 검열에 만신창이가 되어 누가 무엇을 말하려고 쓴 것인지도 모를 기사들로 메워진 지면이었다.
^이런 지독한 검열이 또 일을 만들었다. 5월 16일 한국기자협회가 검열거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군부는 이를 빌미로 폭압적인 언론탄압에 착수하였다. 광주에 취재 갔던 기자들에게 ‘악성유언비어를 유포시킨’ 혐의를 걸어 동아의 심송무 기자 등 몇 사람이 구속되었다. 평소 눈에 난 기자들과 간부들까지 이유 없이 연행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 신군부 언론도륙의 서막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언론계 자율정화 결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세워 명분도 근거도 없는 난도질이 시작되었다. 언론사 통폐합, 기자 해고 및 처벌, 지방주재기자 제도 철폐 같은 철퇴가 언론계에 가해졌다. 한국일보사는 최고의 경제지 명성을 떨치던 자매지 서울경제 폐간조치로 막대한 재산손실을 당하였다.
^그 때 폐간·폐사된 언론사에는 중앙매스컴의 동양방송(TBC)과 중앙종합지 신아일보가 포함되어 큰 파장이 일어났다. 양대 통신사인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하나로 통폐합되어 연합통신(지금의 연합뉴스)이 되었고, 내외경제신문은 코리아헤럴드에 통합되었다.
^군국주의 시대 일본의 언론정책을 본받은 지방지 강제통폐합도 뒤따랐다. 부산의 경우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대구의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광주의 전남일보와 전남매일 등이 그 피해자였다.
^정기간행물로는 기자협회보, 뿌리 깊은 나무, 창작과 비평 같은 비판적인 매체들이 주류였다. 당국이 각사에 명단을 통보한 강제해직자가 300명에, 제도 폐지로 실업자가 된 주재기자가 그보다 조금 많았다. 각 사별 정리해고자를 포함해 1980년 한 해 언론계 해직자는 1200명을 넘었다.
^사전검열과 관련하여 꼭 밝혀둘 일은 기자협회의 검열거부 파동과 후배 김주언 기자의 보도지침 사건이다. 10·26 이후 계엄 상황에서 7개월째 검열이 계속되던 80년 5월 16일 한국기자협회는 언론검열 전면거부 성명을 발표하였다. 서울의 봄 당시 뜨거운 민주화 열기 속에 대학생들이 계엄철폐를 요구하고 언론계의 검열저항이 표면화하자, 신군부는 다음 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쿠데타적 조치로 맞섰다. 노골적인 정권찬탈 작전의 시작이었다.
^그 때 기자협회는 회장 김태홍(국회의원 역임·작고)을 비롯해 회장단 다수가 한국일보 선배들이었다. 17일 이른 아침부터 검거선풍이 휘몰아 쳤다. 기자협회를 이끌던 선배들이 잡혀가거나 수배되어 한국일보는 오랜 기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잡혀간 선배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 수배된 선배들 안부 걱정 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안봉환 형은 오래지 않아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배령이 떨어져 급히 몸을 숨긴 선배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김해도 사회부장이 잘릴 위기에 처하였다. 회사 측은 그를 논설위원실로 보내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지만, 신군부 당국은 용허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끝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보도지침 파동은 86년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기관지 월간 ‘말’지에 실린 김주언 기자의 문화공보부 보도지침 전문이 계기였다. 계엄령이 끝난 시대에도 신문사와 방송사에는 그날그날의 보도와 관련한 문공부 보도지침이 내려왔다. 이 기사와 사진은 된다, 안 된다, 이 기사 제목은 이렇게 달아 달라, 이 기사 크기는 1단 또는 2~3단으로 제한한다, 이 사건 용어는 이렇게 해 달라, 이 기사는 반드시 톱으로 해야 한다, 이 기사는 1면에 실어라···. 게재여부를 떠나 기사크기와 지면까지 지정하고 사건 명칭까지 정해주는 전대미문의 언론탄압이고 조작이었다.
^편집국 고위간부 한 사람이 아침마다 문공부가 전화로 불러주는 보도지침을 받아 적은 노트가 김 기자 손에 들어갔다. 그는 역사에 이 사실을 기록하겠다고 ‘말’지 편집진에 원고를 제공하였다. 85년 10월 19일부터 86년 8월 8일까지 10개월 동안 내려온 청와대와 보안사 안기부 등의 보도지침 688건 전문이었다. 즉각 구속된 그가 오래 고초를 겪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부끄러운 일은 언론탄압의 선봉에 나선 이들이 대부분 언론계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위로는 장·차관에서 관련 실·국장, 아래로는 각 언론사 담당자들 대다수가 언론계에서 정부 각 부처 대변인 또는 해외공보관 요원으로 자리를 옮겨간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일보와 업무제휴 관계인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특파원이 네 차례나 추방령을 당하여 낯이 뜨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특파원 사무실이 우리 신문사 안에 있어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첫 사건은 입사한 1972년 9월이었다. 주간요미우리가 발행한 특집 ‘주체의 나라 조선’이 문제가 되었다. 북한을 살기 좋은 나라로 보도한 것이 입맛에 맞지 않았겠지만, “남의 나라 일에 서울지국 폐쇄란 심하지 않으냐”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그 때 추방된 특파원은 일제 때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까지 여기서 다닌 사람이었다. 고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의 고등학교 선배라고 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이다.
^두 번째는 이듬해 김대중 보도와 관련된 기사였는데, 그때부터 박정희가 김대중을 가장 큰 정적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김대중은 전두환 시대에도 한동안 신문에서 이름이 망각된 정치인이었다. 그가 관련된 기사에서 그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동교동’이었다. 동네이름이 사람의 대명사사 된 희한한 사례다. 1979년 여름 가발회사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을 계기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하여 단식투쟁을 할 때도 ‘특정사안’이란 말로 지칭되던 세월이었다.
^1977년에 일어난 세 번째 사건은 요미우리 편집국장의 북한방문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남의 나라 신문이 북한을 무어라 보도하건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그때마다 외교문제가 되었던 지국폐쇄 조치는 오래 가지 못 하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건 인터벌이 1년이 못 된 사실이 말해주듯, 오래지 않아 해소되었다. 그때마다 쫓겨 갔던 특파원이 되돌아오곤 하여, 그는 붙박이 서울특파원 소리를 들었다. 뒷날 도쿄근무 시절 그의 모교라는 용산 삼광초등학교 졸업동기회 모임에 한국인 동창들이 참여하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사를 써준 답례로 저녁식사를 대접받은 일이 생각난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유신정권에게 외국인 목사나 신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사법살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혁당 사건’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유가족 인권을 위해 투쟁하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는 1974년 12월 추방되는 비행기 안에서 “하느님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나도 그렇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가 서교동 자택을 떠나는 순간까지 기관원이 현장을 감시하는 현장을 보았다. 참 지독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역시 인혁당 사건 관련자 구명과 긴급조치에 분개했던 미국인 제임스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는 이듬해 4월에 추방되었다.
^길고 긴 겨울공화국의 언론통제 속에 법조를 출입하던 나는 좌절감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10·26의 주인공 김재규 일행이 형 확정 나흘 만에 사형을 당하고, 김재규 사형판결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냈다고 대법관들이 밉보인 근로자처럼 쫓겨나는 나라에 어떻게 더 이상 희망을 걸겠는가.
^육군본부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열린 1,2 군사재판에서 관련자 거의 전원이 사형선고를 받고 상고한 10·26 사건 상고심 재판은 1980년 4월 대법관 14명 전원합의체로 넘겨져 속성재판 끝에 5월 20일 8대 6으로 상고기각 판결이 확정되었다. 내란음모 살인죄가 인정된 것이다.
^그날의 초 속성재판을 나는 잊지 못 한다. 오전 10시가 좀 넘어 재판부가 대법정에 착석한 직후 개정이 선언되었다. 피고인이 입정하지 않은 이상한 재판이었다. 잠시 보도진을 위한 사진촬영 시간이 지난 뒤 이영섭 대법원장이 아홉 가지 상고이유를 요약설명한 다음 “김재규 피고인 등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는 주문을 낭독하고, 쫓기듯 재판정을 떠나갔다. 개정 13분만이었다.
^하급심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긴 김재규는 형 확정 나흘 만인 5월 24일 서울구치소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광주가 피로 물들어 가던 시기여서 온 신경이 남쪽에만 쏠려 있던 날이다.
^김재규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뒷날 이영섭 대법원장 퇴임사를 통해 그 분위기가 잘 전해졌다. “오늘 과거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회한과 오욕’이란 말 한 마디가 그 사건 때문에 겪은 마음의 고초를 짐작케 한다. 정년을 몇 해나 남겨두고 쫓겨난 이 대법원장은 재임 중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인사를 갔다가 전두환에게서 “재판이 늦어져 광주가 저렇게 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내란음모 살인죄를 인정할 수 없어 소수의견을 냈던 양병호 대법관은 “보안사의 ‘2인자’라는 사람이 몇 번이나 사무실로 찾아와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하자고 졸라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 그러면서 “언제나 그의 양복 상의가 불룩해 보였는데 아마도 권총을 차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하였다. ‘육사 위에 보안사, 보안사 위에 이(李)여사’라는 그 때의 유행어를 입증하듯,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그런 것 아닐까 싶었다. 그의 상사인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으러 갈 때도 권총을 차고 간 일로 유명했다.
^권총을 차고 사무실에 나타난 보안사 요원의 ‘협조요청’과 협박에 시달린 대법관이 그 뿐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을 입을 다물어 실상을 알기 어렵지만,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다수라는 것은 상식이었다. 김재규에게 내란음모 살인죄를 씌우려는 전두환 일당의 공작은 체포와 조사, 1,2심 군사재판에서 다 드러난 사실이다.
^피고인들이 조사과정에서 입에 담지 못 할 고문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재판이란 도청과 쪽지에 의해 ‘조종된 절차’였다.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은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라는 저서에 1,2심 군사재판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쪽지가 수시로 재판관에게 전달된 ‘쪽지재판’이었다고 썼다. 보안사 요원이 재판정에 미리 설치한 도청장치로 별실에서 재판경과를 지켜보다가, 수시로 쪽지를 생산하여 재판관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리모트 컨트롤 센터에는 준장 급 보안사 간부, 군 법무감실 간부, 합동수사본부 파견검사 등이 있었다 한다.
^양 대법관은 3류 주간지 불륜기사 같은 날조된 이야기를 퍼트리는 보안사의 사퇴압력에도 그는 꿈쩍 않았다. 그러나 며칠간 집으로 찾아다니며 가족을 괴롭히는데 격분해 항의하다가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JP도 여기서 조사받았습니다. 다섯 사람 다 사표를 썼으니 이제 그만 쓰시지요.” 하고 노골적으로 강요당하여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소수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이 모두 사퇴압력을 견뎌내지 못 하고 물러난 것이다.
^시중에서는 결과가 빤한 재판보다는 김재규 상고이유서가 화제가 되었다.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관한 것이었는데, 당시 궁정동 안가의 대소 연회에 불려갔던 유명한 배우 탤런트 가수 모델 등 200명이 넘었다고 상고이유서에 기록되었다. 채홍사 역할을 했던 박선호 피고인 진술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 문서 내용은 물론 보도되지 못 하였지만, 입에서 입을 타고 널리 회자되었다.
^써서는 안 될 기사, 쓰고 싶지 않은 기사를 쓰지 않을 자유도 없었다. 보호감호 제도를 도입하는 사회보호법 제정 당시 나는 그 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해설기사를 썼다.
^법 제정에 관한 일이니까 법조 출입자로서 당연히 써야 하는 것이지만, 중범죄자들을 출소 후 감호소에 보내는 이중처벌이 필요하다는 해설기사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배포된 보도 자료를 무시할 용기는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당국이 그렇게 강조한다는 식으로 자료를 베껴 해설기사 시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980년 8월 18일 전두환이 체육관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날부터 관변매체를 중심으로 전두환 찬양 일색의 ‘전비어천가’가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일보는 8월 23일 전두환 전역식을 계기로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이라는 컷으로, 육사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의 일화를 중심으로 그의 인간성과 통솔력을 찬양하는 상중하 시리즈를 내보냈다. 필력이 좋은 기자까지 문공부에서 지정되어 내려왔다는 소문이었다. ‘황강에서 한강까지’ 류의 전두환 찬양 시리즈는 어느 매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쓰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쓰지 않으려면 안 쓸 수는 있다. 다만 ‘모가지’가 보장되지 않을 뿐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런 것을 쓴 사람들 누구나 그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잘 참아낸 보너스··· 일본연수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무력감을 견디기 어려웠다. 희망도, 기대도, 비벼댈 언덕도 없어 술의 힘에 의지하던 나에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너스가 돌아왔다. 일본연수 1년의 기회였다. 당시 한국일보사에는 국내 언론사로는 유일하게 일본과 미국에 연간 2명씩 4명을 연수시키는 자체 연수 프로그램이 있었다. 넘볼 생각도 품지 못 하던 그 행운이 어느 날 나에게 돌아왔다.
^법조 출입 1년을 꽉 채운 1981년 3월 2일, 나는 홀몸으로 나리타(成田) 국제공항에 내렸다. 게이오(慶應)대학 신문연구소 방문연구원 신분으로 1년간 ‘도피생활’을 즐긴 것은 내 인생의 한 전기가 되었다.
^일본을 공부한 경험이 도쿄특파원이 된 계기였고, 그것이 경력이 되어 언론인 후반생을 일본담당 논설위원으로 살았다. 그 경력 때문에 퇴직 후에도 내일신문에 일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제주대와 부경대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일본문학과 일본역사 담당이 되었으니 말이다.
^일본연수 1년은 놀라움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일본이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이야 모를 사람이 있으랴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평 기자에 불과한 사람에게 대학이 연구실을 내주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국 때 우선 6개월 비자를 받아 갔는데, 1년 비자로 자격이 규정된 외국인 등록을 창구직원 재량으로 즉석에서 해결한 것도 놀라움이었다. 하숙집 할머니와 대학 신문연구소 직원들의 친절, 강의실에서 만나는 신문연구소 학생들의 각별한 배려, 일상에서 겪는 일 하나하나가 한국과 비교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주말 고속도로의 교통체증이었다. 주말에 도쿄에서 가까운 하코네 닛코 같은 경승지에 놀러갔다가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고속도로 체증이 일어났다. 나들이 차량으로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듬해 귀국해 나도 곧 차를 갖게 되었고, 우리나라 고속도로도 명철 체증을 겪게 되었지만, 처음 당한 고속도로 체증은 실로 놀라운 충격이었다.
^도쿄에서 돌아와 나는 또 사회부 일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10년! 끝없는 심야근무와 야근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도쿄특파원 발령이 났다. 그 인사도 큰 보너스였다. 일본연수 경험자라 하지만, 전임자가 5기 선배여서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특파원이란 알아서 일하는 보직이다. 급한 뉴스를 전하는 일은 기본이고, 일이 없을 때 일이 생기기를 기다려서는 제몫을 다 할 수 없다. 일을 찾아내서 하는 자리가 특파원 보직이다.
^3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두 권의 책을 냈다. 하나는 ‘동경특파원 보고서’, 또 하나는 ‘나는 전범이 아니다’였다. 전자는 3년간 한국일보와 주간한국 등 잡지에 썼던 기획물을 모은 것이고, 후자는 태평양전쟁 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처벌받은 조선인 포로감시원 출신들의 법정투쟁 심층취재기다.
^돌아와서 받은 보직은 기획취재부장, 사회부장, 정치2부장이었다. 특파원 부임 전 외신부장(직무대리)을 합쳐 중요 4개부서장을 경험하였다. 연수경험과 특파원 보직 경험자로서 누린 특혜요 보너스일 것이다.
^무엇보다 ‘45정 시대’로 불리던 IMF 경제주권 식민지 시기, 극심한 재정난으로 회사가 휘청거리던 시기에 정년을 채울 수 있었던 행운을 나는 감사한다. 마지막 8년 가까이 논설위원으로서 동료들과 위 아랫사람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무사히 정년을 맞은 것은 어떤 보직, 어떤 성취보다 큰 행운이었다.
^퇴직 후에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된 기회와 행운에도 감사한다.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법이 성립될 수 없듯이, 인생 역정에도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한 때의 좌절에 뜻을 꺾지 않고 일이관지(一以貫之)한 덕분에 오늘이 있는 것이므로, 그 선택이 그르지 않았음에 나는 감사한다. (131매)
< 약력 >
▲고려대 국문학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업
▲일본 게이오대 신무연구소 수료
▲한국일보 편집국 국차장, 논설위원실장 역임
▲관훈클럽 서기, 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감사 역임
▲현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저서에 <동경특파원보고서> <역사는 하늘보다 무섭다> <나는 전범이 아니다> <6·25 전쟁비 화-증언> 등 다수
첫댓글 관훈저널 청탁으로 젊은날 언론인생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겪어온 공통의 경험이지만, 남겨둘 만하다는 생각으로 쓴 글입니다.
파란만장 + 무류 + 순리의 삶
개인의 역사 곧 언론의 역사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