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14회 20번째 모임
1. 날짜 : 19. 06. 8일 토요일 ~ 9일 일요일(1박 2일)
2. 장소 : 문경 새재 관문
3. 참석자 : 14명
o. 수도권 : 김순옥, 김시권, 김일순, 김진리, 김희규, 박주만, 박주학, 임종출, 황하순
o. 고향 : 권미자, 김점자, 김진란, 채순희, 채한주
1965년 2월에 졸업하고 벌써 많은 해가 흘러갔습니다.
고인이 되신 김진식 은사님의 회갑을 계기로 다시 만나
모임을 이어온 것이 벌써 22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두 번의 모임이 성사 되지 못했지만
오늘 모임이 벌써 20번째랍니다.
나이는 벌써 6~70대가 되었지만
아직도 서로 만나면 그 때 그 시절 동심으로 돌아가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수도권 친구들은
김시권 동기의 차량운전으로 송내에서 8시, 잠실에서 9시에 출발하였습니다.
치악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영월로 향했습니다.
<영월 장릉 부근 보리밥집에서>
배고프던 5~60년대에는 먹고 싶어도 없어서 먹지 못했던 보리밥
이제 별식이 되었습니다.
-. 밥집 화단의 예쁜 화초 앞에서
-. 막걸리 한 사발에 추억을 꺼내 봅니다.
<장릉에서>
단종의 슬픈 역사가 살아 숨쉬는 장릉에서
-. 장릉
-. 영천
-. 엄홍도 정여각
-. 장릉에 많이 날아 다니는 뿔나비랍니다.
<왕방연과 먹골배>
<왕방연(王邦衍)>
단종(1441 ~ 1457)의 유배와 사형을 집행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문종 때부터 벼슬을 하였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이후
1455년에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세조 3년인 1457년
강원도 영월에 유배 중인 노산군(魯山君: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질 때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다.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그날 밤,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마주 보는 강 언덕에서 비통하고 괴로운 심정을 읊은 시가 전한다.
구전돼오던 내용을 1617년 김지남이 한시로 지어 정착시켰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천만리 머나 먼길
美人難別秋(미인난별추) 고운 님 가을에 이별하고.
此心無所着(차심무소착) 이 마음 둘데 없어
下馬臨川流(하마림천류) 말에서 내려 냇가에 앉았네
流川亦如我(유천역여아) 저 물도 내안 같아서
鳴咽去不休(명열거불휴) 울어 밤길 예놋다.
<먹골배 유래>
먹골이라는 이름은 묵동의 옛 이름인 먹골에서 유래됐다. 먹골배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처음 배나무를 키운 사람은 15세기 문신 왕방연(王邦衍)으로
단종이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갈 때 호송을 책임졌던 왕방연은
갈증을 호소하던 단종에게 물 한 그릇 올리지 못한 게 한이 돼 관직을 그만두고
중랑천 옆 먹골에서 배나무를 재배하여 단종의 승하 날마다 자신이 가꾼 배나무의 배를 가득히 담아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고,
왕방연의 사후 후손에 의해 배나무가 이장 되었으나 그의 배나무는 사방으로 번식하여
지금의 먹골배가 되었고 이후 먹골배는 이 지역의 배를 통칭하게 됐다.
<사인암에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난 한 해 동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봅니다.
<나들이 시간>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