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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의 개혁이 한국교회 개혁의 열쇠이다]
- 김중락 교수
1. 노회가 교회의 단위이다
다시 노회 시즌이다. 가을을 맞이하여 각 교단마다 총회와 노회를 열고 있다. ‘노회’(presbytery)라는 이름은 ‘장로회’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장로교’란 말은 ‘장로회 교회’를 의미한다. 즉 장로회, 즉 노회를 가진 교회가 바로 ‘장로회 교회’인 것이다. 이 말은 노회가 장로회 교회의 핵심이고, 기본 단위임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든 『장로회 교회정부』는 노회를 교회의 단위로 규정하고 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나 에베소서 교회가 하나의 교회였고 그 교회 아래에 많은 회중, 즉 개별 교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하나의 예배모임, 즉 회중이 교회가 아니라 많은 회중들로 구성된 노회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 회중들이 하나의 교회정부인 노회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장로회 교회의 혼란은 바로 노회의 기능이 바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장로회 교회의 개혁은 노회의 개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회개혁 어떻게 해야만 하나? 하나씩 풀어보자.
17세기 중반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총회에서 가장 큰 쟁점은 장로회파와 독립파 사이에 일어난 교회론이다. 총회의 독립파 목회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담은 An Apologeticall Narration을 출판하였다. 같은 경건한 청교도였지만 독립파는 교구교회(개별교회 또는 회중)가 교회의 단위라고 보았고, 노회를 상급기구로 인정했지만 교회의 최종적인 결정권은 노회가 아니라 개별교회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총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장로회파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개별 교회에 최종적인 결정권을 허락하면 국가적으로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교회의 분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독립파 역시 피리미드 구조의 회의체 즉 당회, 노회, 총회의 구조를 반대하지 않았고, 국가 교회 조직 내에 남아있길 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청교도 목사인 존 바스트윅(John Bastwick)은 독랍파를 '독립적인 장로파'(the Presbyterians Independent)’, 장로파를 '의존적 장로파'(Presbyterians Dependent)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독립파는 개별 교회의 의견이 총회나 노회와 다를 때 이를 거부할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장로회주의자로서 독립파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비난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 역시 존경받는 청교도였으니. 문제는 한국 장로회 교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 장로회 교회는 장로회의 간판을 달고 있으나 실상은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장로회파와 대립했던 독립파가 추구한 교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노회를 인정하지만 모든 것은 교구교회에서 결정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노회는 시찰을 멈추었고, 개별교회가 어떠한 교리를 가르치던, 종교개혁의 이전의 성례를 행하던, 돈을 어떻게 사용하던 관여하지 않는다. 시찰회 모임은 친목회로, 노회는 노조로 발전한 지 오래이다. 현재 한국의 장로회 교회는 이 같은 모습을 바꾸지 않으려면 ‘장로회’의 간판을 떼고 ‘독립’의 간판을 달아야 마땅할 것이다. 노회는 개별 교회에 대한 감독권을 회복해야 한다. 이는 노회가 교회의 단위임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2. 누가 노회의 회원인가?
“목사 회원, 장로 대의원 여러분!” 노회를 갈 때마다 듣는 참으로 이상한 소리이다. 장로회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당회, 노회, 총회로 구성되는 회의체(치리회) 조직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노회가 핵심이다. 스코틀랜드의 『제2 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는 회의체를 ‘장로회’( eldership)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제2 치리서』는 앤드류 멜빌에 의해 만들어진 장로회 정치의 기본을 담고 있는 책이다. 오늘날 장로회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회 정치』와 함께 장로회교회의 헌법을 구성하는 기본 문서이다. 그러면 『제2 치리서』는 왜 치리회를 ‘장로회’라고 부르는 것일까?
『제2 치리서』는 장로회가 “목사, 박사,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장로라고 부르는 이들”로 구성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사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니 오늘날의 신학교수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제2 치리서』는 장로가 “하나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고, “목사와 마찬가지로 영적 기능(function spiritual)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제2 치리서』는 “때때로 목사와 박사도 장로라고 불린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2 치리서』는 목사, 박사, 장로를 모두 장로로 보기 때문에 이들의 모임을 ‘장로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회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회 정치』는 “노회는 말씀 사역자(ministers of the Word)와 교회 치리자church-governors)로 구성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목사와 장로를 구성원으로 여기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장로회는 장로들로 구성되는 회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는 모두 개별교회 회중의 동의(선출)을 통해 노회에 의해 세워진다. 장로 역시 노회의 허락 하에 선출되고 노회의 심사를 통해 세워진다. 그러니 노회에 의해 세워진 목사, 장로 모두가 노회의 당연직 회원이라 할 것이다. 물론 나라마다 상황에 따라서 장로 회원이 너무 많은 경우 이를 줄이기 위해 대의원 제도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회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북미의 대부분 장로교회가 모든 목사와 장로를 다 노회원으로 여기고 회의 참석을 의무화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회원이 참여하는 노회가 원칙이다. 장로의 수가 너무 많아 노회의 모임이 어렵다면 작금의 노회를 세분할 필요가 있다. 실상 한국 장로교의 노회는 너무 않은 교회를 관리하고 있으며 이는 노회의 실제적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부분이다. 만에 하나 노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세력 대결을 우려하여 장로들의 노회 참석을 제한한다면 이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자들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북미의 장로교회들이 모든 장로와 목사의 노회출석을 의무화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사역지를 떠난 직분은 없다. 어느 장로회 교단이나 마찬가지로 은퇴한 목사들이 노회에 참석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어느 교단에는 은퇴한 목사들이 발언권과 의결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하니 그 불만을 이해할 만도 하다. 은퇴한 목회자들이 후배 노회원들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가르쳐야겠다는 의협심(?)이 없지 않겠지만 이는 분명 잘못된 관습이다.
목사와 장로는 계급장이나 자격증이 아니다. 그들의 직분은 항상 구체적 사역과 관련이 있다. ‘ㅇㅇ교회 목사’는 있지만 그냥 목사는 없다. ‘oo교회 장로’는 있지만 그냥 장로는 없다. 목사와 장로는 특정 사역지에 맡겨진 직분이다. 노회가 그냥 목사로 세운 것이 아니라 ‘oo교회 목사 또는 장로’로 세운 것이다. 장로가 섬기는 교회를 떠나면 장로가 아니듯이 목사도 섬기는 교회를 떠나면 목사가 아니다. 엄격히 말해 은퇴한 사람은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우리가 호칭상 그렇게 불러도 이는 기술적인 의미를 담은 말이 아닌 것이다. 무임목사도 마찬가지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회 정치』는 “목사 안수는 개별 회중을 위해 고안된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회 정치』는 “개별 회중이 반대하는 이를 목사로 안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역시 회중이 없는 자는 목사가 아님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장로회 정치』는 개별 회중에 해당하는 특수목회 사역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노회가 그 사역을 위해 그를 맡기는 경우만 목사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노회는 필요한 경우 경륜이 깊은 은퇴 목사, 장로의 지혜를 빌릴 수도 있고, 또 그리해야 한다. 그러나 조언은 조언으로 끝나야 아름다울 것이다.
노회 회원이 누구냐의 문제는 노회와 당회의 바른 운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이 노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자들이라고 여길 때 책임져야 할 곳이 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장로 역시 노회의 당연직 회원이라는 인식은 그들에게 노회의 운영에 대한 더 강한 의무감과 자부심을 부여할 것이고, 사역자간의 평등이라는 장로회의 또 다른 원칙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노회가 교권 모리배들의 정치(politics)가 아니라 교회의 바른 운영, 즉 정치(polity)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려면 이러한 혼란은 즉시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 위 글의 마지막 부분은 많은 분들을 섭섭하게 만들 듯 해서 오랫동안 망설이다 한 말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많은 분들이 생각나네요. 장로회의 질서를 위해 한 주장이니 이해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3. 시찰(visitation)을 해야 노회이다.
종교개혁 초기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노회는 법정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시찰이었다. 『제2치리서』에 따르면 모든 치리회는 교회와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교회의 평안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사법권 아래 있는 교구 교회나 회의체(당회)에 시찰(visitation)을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회가 교회의 단위이고 개별 회중(교구교회)을 감독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면 노회의 정기적 시찰은 가장 중요한 노회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시찰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노회는 2명 이상의 시찰단을 조직하거나, 전 노회원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개별 교회에 대한 시찰을 시행하였다. 대개의 경우 특정한 교회의 시찰에 앞서 노회는 시찰일과 설교자를 정하였으며, 시찰일에는 해당 교구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금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 후 시찰단은 방문한 교회에서 목사를 제외한 당회원들과 모임을 갖고 목회자에 대해 감사를 행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에는 목사와의 면담을 통해 장로들의 문제에 대해서 비슷한 조사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당회의 기록과 교회당의 상태와 재정문제 등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감행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시찰은 하루 종일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시찰은 감시, 감독, 감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교우들간에 교제이고 노회와 개별 교회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노력이다.
한국의 대부분 장로회 교회는 그 산하에 시찰회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노회보다 더 작은 그룹으로 이웃 교회 간에 좀 더 편리하게 시찰을 시행하라는 의미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찰회가 그 기능을 행하지 못하고 이웃 교회 목회자들간의 친목회로 전락한 지는 오래이다. 교회 시찰보다는 관광지 시찰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노회가 시찰회에 시찰을 독려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 노회나 시찰회나 누구도 시찰에 관심이 없다.
시찰이 사라진 한국 장로회 교회의 모습은 처참하다. 어느 교회는 교인이 수천 명이 되어도 장로는 10명이 되지 않는다니 장로회 교회의 모습을 포기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노회는 간섭하지 않는다. 적어도 노회비는 잘 내고 있으니. 기분이 나쁠까봐 재정기록을 보자고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개별교회의 설교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금기 중에 금기다. 나도 당할 수 있으니. 같은 단위 교회로서 관심은 없고, 그저 남의 교회이고 이웃 교회일 뿐이다. 교인들도 이러한 상황에 편리함을 느낀다. 정당한 노회의 관심은 간섭으로만 보인다. 시찰을 통해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사전에 예방하기보다는 문제가 발생 후 전권위원을 보내보았자 아름다운 해결은 쉽지않다.
지금이라도 진정한 시찰이 이루어지도록 특별 시찰단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교회를 시찰하고, 개별교회의 문제를 바로 잡는다면 노회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다. 노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시찰이 없으면 노회의 존재이유도 없다.
4. 사역자의 사례, 노회의 책임이다.
한국 장로회 교회의 반장로회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노회 회원목사들 간의 사례 불평등이다. 대부분 대형교회나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구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사례가 상상 이상이다. 높은 월사례금은 물론이고, 사례금 못지않은 보너스도 있고, 고급사택과 고급자가용도 제공된다. 자녀교육비, 그리고 퇴직적립금, 사택관리비, 각종 휴가비 등도 있다. 영수증 요구도 없는 도서비와 목회 활동비도 있으며, 숨겨진 소득도 없지 않다.
반면 같은 노회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열악한 재정 때문에 굶주리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최저 생계비 이하의 삶을 유지하는 분들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 분들의 경우 적절한 사례가 주어지지 않으니 목회자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는 고사하고, 자녀교육도 어렵고 생활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다. 한 마디로 비참하다. 이는 목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배가 고픈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제2치리서』는 개별 교회 내의 재정을 크게 4가지 사용처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목회자들의 생활과 접대를 위하여, 둘째는 장로와 집사 그리고 다른 사역자들을 위하여, 셋째는 병자와 방랑자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회내의 다른 일과 긴급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재정의 분배를 말씀대로 하는 것은 집사들의 역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재정의 분배는 개별 교회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대부분 장로회 교회에서 재정을 개별 교회별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회마다 교인의 구성이 다르고, 지역에 따라서 사회경제적 상황이 다르니 교회별 지출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회내 목회자들간의 사례 불평등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목회자 개인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 그에 따라 차등 있게 사례를 받은 것이 용인되어야 하는 것일까? 앞의 글에서 노회가 교회의 단위임을 살펴보았다. 노회 회원들은 같은 교회의 구성원이니 서로 형제인 셈이다. 그리고 앞의 글에서 우리는 개별 교회의 목회자는 노회가 파견한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는 파견된 목회자의 상황에 대해 노회에 책임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회는 회원이 파견된 개별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노회 내 형제들 간에 이같이 큰 빈부격차를 보고 있는 것이다. 장로회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사역자간의 평등이 아니던가? 사역자간의 평등이 어찌 노회내 투표권의 문제만으로 국한될 수 있을까? 경제적 평등이 없으면 진정한 평등은 불가능하다.
노회가 진정으로 한 교회이고 한 형제라면 이제라도 노회는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할 것이다. 노회는 회중의 수나 재정 규모와는 관계없이 적절한 사례 범주를 정하고, 그 범주 내에서 개별 교회의 사례가 지출되도록 지도해야 하며,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노회가 이를 거두어 최저 금액에 미달하는 목회자의 사례를 보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도가 지니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소명이 없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일부는 무임승차를 하려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다른 방도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사례의 평등을 거부하는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던가?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라고.
5. 신학생의 선정, 교육, 그리고 사역지 배분도 노회의 책임이다.
“당신은 안됩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다.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장로회 교단에서 목회의 길을 원하는 사람은 노회의 추천을 받고,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아 목회자가 된다. 노회의 추천을 받는 과정은 식은 죽 먹기이다. 나는 아직 노회의 추천을 받지 못해 목회의 길을 포기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외국의 경우는 있었지만. 노회가 목회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NO”를 외치지 못해 한국교회의 타락을 가져왔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지난 세기 중후반 한국교회는 오늘날과 너무나 달랐다. 목회의 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 없이는 나서기 어려웠다. 목회자는 모자랐다. 이 상황에서 양극단의 속한 이들이 목회자로 유입되었다. 정말 헌신되고 유능한 이들로 어려운 길을 자초한 아들이 한 그룹이고, 여러 가지 경쟁에서 실패하고, 목회 외에는 다른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이 또 다른 그룹이다. 연령상 이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최고지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각 교단 노회는 목회의 길을 원하는 이들을 스크린하는 장치가 있었지만 이는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난맥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목회자는 교회의 지도자이다. 이들에게는 소명이 있어야 하고, 교회를 이끌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제1 치리서』는 “경건하고 학식있는 자”를 목회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회 교회정부』는 목회자가 되려는 이에게 “삶의 거룩”, “학식”, 그리고 “소명”을 강조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제2 치리서』는 목회자를 “말씀봉사”와 회중에 대한 “감독”이라는 두가지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에서 중요한 이들이 목회자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지도자를 세워왔는지, 그리고 세우고 있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장로회 교회는 좋은 목회후보자를 찾아내는 정말 좋은 제도를 가지고 있다. 신학을 원하는 이는 소속 교회의 당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당회원들은 그를 잘 아는 이들이니 그가 적합하다고 판단하면 노회로 이관한다. 노회는 노회내 필요한 인원을 고려하여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고 그의 훈련을 교단의 신학교에 위탁한다. 신학교 재학 중 노회는 그의 학업에 대해 감독하고 재정을 지원한다. 그리고 학업이 끝나면 노회는 그를 다시 검증하고, 노회소속 목회자로 장립한다. 좋은 목회자를 만들기 위해 삼중 사중의 거름 장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회 교회에서 이러한 제도는 유명무실하다. 한 단계에서도 제대로 지켜지는 곳이 없다. 당회 차원에서는 지원자와의 안면 때문에, 또는 교회를 떠날까봐 우려하여 거의 100% 추천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노회의 검증도 형식적이다. 노회는 지원자가 당회의 추천을 받았다는 핑계를 대고 신학교에 추천서를 보낸다. 노회의 목회자 수급에 대한 계획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추천한 신학생에 대한 장학금은 커녕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신학교도 문제투성이다. 각 교단의 신학교는 노회의 추천을 받지 않는 학생들을 입학시키기도 하며, 심지어 사후 추천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생을 모집하는 경우도 있다. 교단 신학교는 교단의 목회자를 기르는 고백공동체이다. 엄격히 말해 노회가 위탁하는 학생만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학점이나 학위관리도 엄격히 지켜지는지 의문이다. 수년을 가르친 제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을 것이다. 목사고시 역시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많은 검증과정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정말 좋은 우리의 제도를 정상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회의 역할이다. 노회는 기간별로 노회 내 목회자 수급상황을 점검하고 그에 맞는 인원을 추천해야 한다. 지금처럼 젊은 후보자들이 사역지가 없어 내몰리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후보자 검증을 통해 소명이 있는 자를, 그리고 해당 노회에 필요한 이를 신학교에 추천해야 할 것이다. 추천한 신학생에 대해 재정지원을 해서 걱정없이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다수 신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교회에 일자리를 찾고 있다. 이는 결국 그들의 학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신학생의 성적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태만한 신학생에 대해서는 추천을 철회하여야 할 것이다.
『장로회 교회정부』는 노회가 주관하는 목사고시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노회는 대학에서의 전공과 성적도 파악해야 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라틴어도 일부 알고 있는지를 조사해야만 했다. 어떤 신학 저서를 읽었는지, 정통교리를 알고 있는지, 성경의 장소나 연대기 그리고 교회사도 알아야만 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옛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지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정신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교회개척, 노회가 결정하고, 노회가 책임져야 한다.
기독교인 수는 감소하는데 교회 수는 증가한다.
2018년 한국교회의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교회 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다면 이를 한국교회의 성장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비약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사역지를 찾지 못한 이들이 교회개척을 통해서라도 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는 기존의 교회에 실망하여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보자는 동기에서 개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사역지를 찾지 못해서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숭고한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일자리 때문에 교회개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신학교 배출인원이 너무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너무 쉽게 개척을 시작 할 수 있는 우리의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개척교회가 많은 것이 무슨 문제냐고 혹자는 물을 것이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개척교회 성공율이 1%도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70%이상이 미자립 교회라고 한다. 쉽게 생겼다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대부분의 경우 개척교회는 목회자 본인이 단독으로 주도하여 시작한다. 목회자 본인이 목돈을 구해, 조그만 공간을 빌리고 교회간판을 달고 가족예배로 시작한다. 헌금이 없으니 사례를 받을 방법이 없다. 어느 공적 기관으로부터도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혹 찾아오는 이들도 너무나 적은 예배인원에 부담을 느끼고 합류를 포기한다. 어느 순간 목회자도 인내의 한계점에 이르고 실패를 선언한다. 유산된 것이다. 너무나 많은 개척교회가 이러한 절차를 거친다. 이러다 보니 불신자들의 눈에는 동네 구멍가게 하나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는 교회는 영리집단,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복음에 장애가 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경우 개척의 의지를 꺽어버리는 기제로 작동한다.
종교개혁 직후 존 녹스에 의해 초안된 제1 치리서는 ‘시찰감독’(Superintendents)의 자리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요 임무는 교회가 없는 곳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제1 치리서가 규정한 시찰감독의 기능을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당분간(for this time) 이 나라에 있은 모든 경건하고 학식있는 이들 가운데 12명 또는 10명(우리가 전국을 구분한 지역만큼)을 선택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지금 목회자가 없는 곳에 목회자를 세우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이 사랑과 돌봄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도 백성들에게 빚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단순하고 무지한 이들(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이 지식을 갖게 되고, 그 지식으로 미신과 무지로 죽었던 자들이 경건의 느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과 참된 종교와 예배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구하도록 자극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백성들을 내버려두면 그들은 불평할 뿐 아니라 장님의 상태와 그들이 익숙한 우상숭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은 교회가 필요한 곳, 즉 말씀이 필요한 곳을 위해 시찰감독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일자리가 없는 곳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한 곳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노회가 나서야 한다. 노회는 현재처럼 형식적 승인만 해주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아무리 노회원이라 하더라도 노회의 승인을 받지 아니한 자가, 노회가 승인하지 않는 곳에 교회개척을 시작한다면 노회는 이를 적극 금해야 할 것이다. 노회는 노회의 관할 영역(boundary)내에 교회가 없는 곳이나 필요한 곳이 있는가를 바로 살피고, 교회설립이 필요하다면 교회개척을 주도해야 한다. 노회 내 개척을 지원하는 위원회가 있다면 시찰감독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노회는 이곳에 사역할 사역자를 세우야 한다. 사역자 세움에는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적절한 공간과 사택을 마련해주고, 자립시까지 모든 사례와 교회 운영에 필요한 경비 등 모든 경제적 지원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회는 가능하다면 인근 교회가 의논하여 일정기간 동역할 수 있는 인력도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국은 노회가 교회의 단위가 아니던가?
총회나 노회는 교회수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상황은 대형교회를 분립시키고 원자교회(micro kirk)들을 통폐합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노회는 필요한 곳에 교회를 세우기도 해야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대형교회의 분립과 난립된 원자교회를 거리나 필요에 따라 통폐합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불신자들로부터 교회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단지 교회수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필자가 섬기는 교회도 위의 절차를 통해 개척된 교회가 아님을 밝혀둔다. 노회가 위 절차를 적용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았다는 측면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잘못이었음을 인정한다.
7. 노회장, 목사청빙, 상회비, 분립개척 등.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의 노회가 교회의 단위이며, 노회회원은 목사와 장로 구성되며, 시찰이 노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며, 노회가 소속 회원의 사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노회가 신학생의 선정과 교육 그리고 지원에 책임이 있으며, 교회개척은 노회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몇 가지 문제를 같이 살펴보고 마무리를 지어야할 단계이다.
*노회장은 사회자일 뿐이다.
장로회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회의체에 의한 교회조직”(governments by assemblies)과 “사역자간의 평등”(parity between ministers)이다. 전자는 이미 언급한 부분이므로 후자를 살펴보자. 감독제에서와는 달리 치리회인 노회나 총회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회 교회에서 총회장이나 노회장의 경우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다. 이는 감독제 하에서 교황이나 주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엄격히 말해 총회장이나 노회장은 총회나 노회를 진행하는 사회자(moderator)일 뿐이다. 총회나 노회가 열리는 기간에만 존재하는 직책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총회장’ 또는 ‘노회장’이라 부른다. 이러한 용어들은 매우 오도적이며, 한국 교회를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치리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도 그를 교단 또는 노회의 총책임자로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총회기간 밖에서도 교단의 실권을 장악하게 만드는 한 그들의 선출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총회장’ 또는 ‘노회장’이 되기 위해 온갖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진정한 장로회 교회를 하고자 한다면 ‘총회장’과 ‘노회장’이란 용어를 버려야 한다. 지금이라도 원래 의미인 ‘총회의장’과 ‘노회의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총회나 노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도 ‘회의체 조직’이라는 장로회 교회의 특징을 살려 위원회를 구성해서 일하는 것이 옳다. ‘장’이 있는 한 권력이 존재하고, 권력이 있는 한 부패할 수밖에 없다.
*총회 총대의 선출, 정치적 영향을 없애야 한다.
노회는 노회회원중 상회인 총회에 참석할 대의원을 선출하는 기능을 가진다. 16세기 후반의 스코틀랜드 교회도 완벽한 장로교 제도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교회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왕 제임스 6세는 때때로 여러 노회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원하는 이들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이 총대로 선출되기 원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간혹 노회에 엄청난 하사금이 주어진 적도 있었다. 물론 총대를 사기 위한 것이었다. 국왕은 자신에게 순종적인 자들로 총회를 구성하고, 총회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교회정책을 지지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오늘날 노회에 대한 외부의 정치적 강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회 내부로부터의 정치가 문제이다. 많은 경우 노회의 총대 선출은 high politics이다. 총대가 역량 때문이 아니라 패거리 정치에 의해 선출되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총회의 기능이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것”인 만큼 노회는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회원을 선출해야할 의무가 있다.
*목사청빙, 노회가 감독해야 한다.
『제1 치리서』나 『제2 치리서』 모두 목회자의 청빙에 있어서 교구교회의 동의를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역자 청빙은 교구교회에만 맡겨두지 않았다. 노회도 적절히 김독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1 치리서는 목회자 청빙에 있어서 선정(Election), 심사(Examination) 그리고 위임(Admission)의 3단계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먼저 선정의 몫은 개별 회중에게 주어 졌다. 만일 회중이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시찰 감독(Superintendent)이 태도 그리고 교리와 지식에서 적합한 인물을 천거할 수 있었다. 목회자가 선정되면 그다음 그는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제2 치리서』는 사역자는 “장로회의 판단과 회중의 동의로 임명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청빙문제는 전적으로 교구교회에 주어져 있다. 노회는 형식적 절차만 지켜지고 있는지를 살핀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교구교회의 청빙이 노회나 교단의 다른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 유능하다고 소문나면 큰 교회가 이를 빼앗아 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연쇄적 반응을 유도한다. 그리고 성실하게 목회하는 사역자들을 유혹한다. 노회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독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노회내 부교역자중에서 청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신학교에서 성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많은 젊은 사역자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목회자가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고 있어야 함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장로회 교회정부』는 노회가 사역자의 대학전공과 성적도 파악해야 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라틴어도 일부 알고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부분은 개별교회의 청빙위원회가 성적증명을 요구하는 것이 매우 정당함을 말해준다. 그리고 청빙위원회가 노회의 도움으로 후보자의 지적 능력을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신학대학에서 공부에 열중하지 않은 자가 강단에 서는 것은 정말로 안 될 일이다.
*상회비는 누진적이어야 한다.
노회가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노회는 회원들의 사례불균등을 해소해야하고, 개척교회를 지원해야 하고, 신학생을 지원해야 한다. 모두가 돈이 필요한 일이다. 노회가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구교회의 수입에 대해 누진적으로 상회비를 거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연 수입이 5천만 원까지는 상회비 면제, 5천만원부터 1억원 부분에지는 1%, 1억부터 2억 부분에 대해서는 10% 등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방법이다. 최고 30% 구간도 있어야 할 것이다. 전기세나 소득세와 같은 원리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노회는 재정을 크게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노회가 하나의 교회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교회분립, 노회가 강제해야 한다.
오늘날 개별교회가 아무리 비대해져도 노회는 먼 산에 불구경하고 있는 모습이다. 교회가 어느 정도 되면 교회의 기능이 상실되고 수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많은 부교역자들을 데리고 있으니 노회의 표결을 왜곡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그리고 제왕적 담임목사의 권한을 지속시키기 위해 당회의 회원수를 줄이기도 한다. 1만 명 넘는 교인에 장로가 10명되지 않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수족같은 부목사가 수십 명인데 당회든 노회든 맘대로 못하겠는가? 이러한 권력을 가진 목회자가 어찌 타락하지 않겠는가? 이 아까운 자리를 어찌 남에게 물려주겠는가? 명성교회를 보라.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부 왕립석좌교수를 역임한 Lord Acton의 말이다. 이러한 부패를 막기위해서는 노회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노회는 일정 교인수가 되면 강제로 분립하도록 규정해야 하고, 이를 어기면 가차없이 그를 징계해야 한다. 노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법정이다. 단호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큰 교회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썩은 부분은 도려내어야 나머지가 온전할 것이다.
8. 내사랑 장로회교회.
노회개혁에 대한 얘기가 어찌 왜 이뿐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장로회교회를 자칭하려면 최소한의 부분은 지켜야 한다. 노회는 장로회의 꽃이다. 노회가 바로 작동해야 장로회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한국 장로회교회는 이름만 장로회이지 실제에서는 독립교회이다. 노회는 개별교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장로회교회에서 노회가 그 기능을 상실하면 이는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노회의 교회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로회교회는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고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 한국 장로회교회가 개혁교회의 기치를 붙들기 원한다면 먼저 스스로를 개혁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개혁교회의 기치를 들고 세상을 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장로회주의자이다. 그리고 개척교회의 협동장로이다. 어릴적 장로회교회가 무엇인지 모를때는 개별교회 운영이 장로 중심이어서 장로회 교회인 줄 알았다. 그리고 교인으로서 노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나의 신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대학시절 교회 장로들을 보면서 오히려 “저들이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이구나!”라는 느낌을 가진적도 적지 않았다. 누구도 장로교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솔직한 인상은 누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장로회교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왜 스코틀랜드 교회가 스스로 “가장 잘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church)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장로회교회는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제도일 뿐 아니라 국가단위의 제도교회를 위해서도 적절한 교회조직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상향이론(ascending theory)과 하향이론(descending theory)가 조화를 이룬 민주적 교회조직이다. 교회의 직분자 즉 지도자들(officers)을 회중이 선출하고, 선출된 이들이 대의체를 구성하고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구조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치적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선출하고 그들이 결정한 법과 세금에 우리가 묶이는 구조이다. 당회, 노회, 총회는 대의체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중심에는 노회가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원칙대로 운영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장로회교회는 국제적으로 볼 때 소수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최대의 교파이다. 장로회교회의 탄생지인 스코틀랜드 교회보다 더 큰 교세를 자랑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는 한국교회에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고 사명이다. 지금까지 세계교회사에서 한국교회는 빚쟁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복음을 받았고, 그들로부터 제도를 받았고, 그들로부터 신학을 받았다. 이제 우리가 나누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우리의 사명은 진정한 장로회교회를 나누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의 혼란을 끝내고 장로회교회를 바로 정립한다면 후일 기록될 세계교회사에서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제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 장로회교회이지만 여전히 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