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은 경제적으로 한국인에게만 가혹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1997년 1월 6일 OECD)
새해 벽두부터 나온 이 같은 보고서는 결국 위태로운 곡예행진을 계속 하던 1996년에 이미 우리 경제에 외환위기의 불길한 그림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강만수 前 재정경제원 차관은 “한국경제라는 호두는 1996년에 금이 갔고 다음해 외환위기가 왔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자금난 및 수익성 감소, 주력 수출품목의 단가 하락, 원화의 상대적 강세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등으로 한국경제는 매일같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이규성 한국과학기술원 금융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역시 “1997년 2~3월에 이미 외환위기를 맞았다”면서 “이는 강도가 낮은 일종의 미진(微震)이자 본격적인 위기를 알리는 예진(豫震)”이라고 말했다. 과연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1996년에 한국경제와 관련하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경제는 무너져 내리는데 잔치 분위기만
지난 1996년 겨울로 들어가는 초입. 연말 분위기로 흥청망청한 12월 12일 저녁 8시. 한국은 프랑스 외무부에 OECD가입서를 기탁, 정회원국 자격을 획득했다. 오인환 당시 공보처장관은 “우리 국민의 경제개발 성과와 민주화 성숙에 대한 국제사회의 높은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라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정부는 물론 국민들도 ‘선진국에 들어섰다’며 자아도취에 빠졌다.
하지만 해외의 평가는 싸늘했다. 이미 1996년 부즈 앨런 해밀턴 보고서는 “한강의 기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중국의 가격, 일본의 기술경쟁력에 낀 ‘넛 크래커(Nut Cracker)’ 속 호두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듬해 1월 6일 OECD와 IBRD도 “1997년은 경제적으로 한국인에게만 가혹한 한 해가 될 것 같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았다. 전세계 경제가 높은 성장세를 지속하겠지만 유독 한국만 성장률 저하와 수출둔화로 불황에 시달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었다.
사실 한국경제는 이미 1995년 하반기부터 하강 국면에 진입했고 1996년 한 해 경상수지 적자는 237억 달러에 달했다. 단기 외채가 전체 외채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56%에 이르면서 금융시장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에도 원화 상대적 강세
가장 큰 문제는 경상수지 적자였다. 경상수지는 1990년부터 21억8,000만 달러 적자로 반전되더니 1996년에는 적자 규모가 237억 달러에 이르렀다. 1994~1996년 3년간 경상수지 누적적자 규모는 372억 달러로 1996년 말 외환보유고 332억 달러를 초과해 사실상 국가부도상태였다. 한마디로 전체 국민들이 달러를 들여와 흥청망청 쓰는데 급급했다는 얘기다. 강만수 前 차관은 “한국경제의 특성상 국제수지가 나쁘면 다른 지표가 아무리 좋아도 병든 경제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원화의 상대적 강세와 ‘8% 단일관세율’이라는 최악의 정책조합이 결합했다는 점이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두면서 사치품이건, 원자재건 똑 같은 관세율을 적용한 것. 결국 사치품, 원자재 가릴 것 없이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원화강세와 관세인하라는 두 가지 무기를 등에 업은 수입산 사치품이 시장을 뒤흔들면서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국내 소비재산업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수출기업들도 고통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8% 단일관세율에 얽매여 꼭 필요한 원자재도 비싼 관세를 물고 수입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나기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부 악재가 몰아쳤다. 수출주력품목인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제품 등의 수출가격은 공급과잉으로 급격히 하락했다. 기업의 경쟁력도 크게 떨어졌다. 제조업의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은 0.99%에 불과했다. 차입금의 평균이자율은 14.3%에 달했다. 기업이 이익을 내서 이자를 지급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으로 몰렸다.
경상수지 적자행진에도 불구하고 달러에 대한 경쟁국 통화에 대한 원화의 상대적인 강세는 이어졌다. 원화는 1996년 8.2% 절하된 반면 600억 달러의 흑자를 낸 일본 엔화는 절하폭이 14.8%에 달했다. 원화가 엔화에 초강세를 유지하게 된 것. 그만큼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던 자동차, 전자, 조선, 철강 등 주력 수출품의 경쟁력이 떨어졌다.
제2금융권이 기업 등에 대한 돈놀이에 열중하면서 단기 외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원화의 상대적 강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기외채가 1990년 174억 달러에서 714억 달러로 늘어난 반면 단기외채는 같은 기간 143억 달러에서 930억 달러로 폭증하면서 때 아닌 달러 과잉 공급상황이 연출됐다. 경상수지적자 속에 원화가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평가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96년 사상 처음으로 단기외채규모가 장기외채규모를 추월하면서 전체 비중도 56.6%에 달했다. 이 때문에 1997년 종합금융사 등 민간부문에서 시작된 지불위기는 순식간에 국가부도사태로 이어졌다.
신뢰의 게임에서 패배
이처럼 국내외 경제환경이 어려웠다면 외환위기는 필연적인 수순이었을까. 이에 대해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미 터진 이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1996년 이전에 경제개혁에 나섰더라면 외환위기는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리더십과 신뢰였다. 국내외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정부는 잇따른 헛발질로 신뢰를 잃어갔다. 연초에는 성장률 7.5%, 물가 4.5%, 경상수지 적자 60억 달러 등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1996년 9월 23일“고비용∙저효율 구조를 타개하기 위해 경쟁력을 10% 높이는데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정치성 구호를 외쳐댔다. 바로 옆에서 불이 났는데 ‘불이 나지 않도록 화재시설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인한 대규모 사업 사태, 부실 금융기관 및 대기업의 구조조정 지연 등이 발생하면서 해외자본은 외채상환능력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규성 前 부총리는 “거시경제의 건전성이나 외채상환능력은 외환위기 발생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면서 “해외자본과의 신뢰의 게임에서 패배한 게 외환위기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특히 OECD가입으로 인한 선진국 환상은 말 그대로 독이 됐다. 김우석 당시 재경원 국제금융국장(現 자산관리공사 사장)은 경상수지 적자에도 정부가 원화절상을 용인한 이유에 대해 “지금 상황에서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 1996년 OECD에 가입한 뒤 규제완화가 큰 흐름이었는데 어떻게 외화차입을 규제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취약성과 대외적인 악재에다 정부의 총체적인 리더십 부재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1996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2.1997년 겨울, 아무도 몰랐다
이경식 前 한국은행 총재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고 판단한 때는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1997년 11월 3일 쯤으로 기억난다”고 말했다. 강경식 前 부총리도 “솔직히 11월에 가서야 IMF에 의지하지 않으면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YS정부는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7월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촉발된 동남아시아 금융위기가 무서운 속도로 북상을 계속 했던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경제의 책임자들은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을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이경식 前 총재는 “11월 3일부터 외국인의 국내 주식투자한도를 (26%로) 늘리는 조치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국자본이 무섭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도 “홍콩 증시 폭락 보름 만에 (급격한 외자유출로) IMF 지원까지 검토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될 지는 몰랐다. 국제금융자본의 비합리적이고 냉혹한 생리(리더가 이끄는 대로 이동하는 이른바 ‘기러기 효과’)를 몰랐다”고 말했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 역시 “솔직히 말해 외국자본은 생리상 국가경제의 펀더멘털을 보기 보다는 단기 수익에 더 집착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은 사실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해 10월 27일 모건스탠리 증권은 ‘아시아 지역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는 긴급 전문을 날렸고, 채 일주일도 안된 11월 5일 홍콩의 페레그린증권은 한국경제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Get out of Korea, Right Now(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보고서에서 이 증권사는 ‘이유 불문하고 당장 한국에서 빠져 나오라’는 보고서를 전세계에 타전한 상태였다.
연초 한보부도에 이어 7월에는 기아가 무너지고, 10월 한 달에만 1조원 이상의 외자가 한국을 빠져나갔지만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국내 관계자들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국제금융시장의 생리를 너무 몰랐고, 전문가들을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위기는 무지에서 비롯됐고, 뼈 속 깊이 병이 퍼져도 책임자들은 우왕좌왕했다. 1997년 하반기 들어 외신들이 우리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식으로 연일 급보를 띄우면서 사정이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는데, 강 前 부총리 등 핵심 관계자들은 그저 ‘무책임한 보도’ 정도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사실을 따져보면 우리의 무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문제가 됐던 것은 ‘가용 외환보유고’였는데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외신기자가 찾아와 외환보유고 사정을 취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기자는 놀랄 정도로 세밀한 부문까지 취재를 마치고 확인작업에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우리 기업이나 은행들이 해외에서 빌려준 돈도 외환보유고로 잡고 있었는데 외신 기자들이 생각하는 외환보유고란 몇 일 만에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달러 표시 자산이었다. 나머지는 무의미하다는 얘기였다. 솔직히 뜨끔했고 많이 놀랐다.”
국제금융 인맥은 없었다
“1997년 당시 우리의 국제금융인맥은 인도나 필리핀보다 형편없었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의 말이다. 김중수 경희대 교수(前 KDI원장)도 “국제금융 전문인력은 없었다. 내부만 봤다”고 인정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제금융인맥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보잘 것 없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경험하게 된 데는 이처럼 외자의 생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데다 인적자원도 거의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강 前 부총리는 국제금융계의 거물들을 만나며 돈을 끌어들이려 동분서주했지만, “갑자기 경제부총리가 되다 보니 국제무대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토로했다. 국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이른바 ‘안면 장사’는 필수였는데 당시 우리 금융 인맥으로는 그 같은 일을 담당할 만한 금융인력이 성장할 여지도 적었지만, 관료시스템 역시 국제금융의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조직으로 일관했다.
가령 정부는 OECD 가입에 따른 자본시장 개방으로 단기 외국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이 없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결과는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로 불릴 만큼 은행들의 무분별한 단기 외화 빌리기가 일어났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라인에 있었던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OECD 회원국이 되면 외국에서 돈을 빌려줄 때 대손충당금을 쌓는 규정이 없었던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단기 외채시장은 이미 1993~1995년에 개방이 된 상태”라며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한 대손충당금 미적립규정이 외국에서 우리 은행에 돈을 더 많이 꿔주게 했고, 그것이 재앙으로 이어진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재경원 탄생이 재앙
국제금융인맥이 자취를 감추게 된 주요 요인을 찾자면 1994년 12월에 단행된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통합(재정경제원으로 일원화)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 지시에 의해 재경원이라는 통합 조직이 만들어지는데 능력과 업무 등을 고려하지 않은 물리∙기계적 통합이 단행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통합작업에 참여했던 재경부 관계자는 ‘윗선 지시로 국∙과장은 (기획원과 재무부) 똑같이 배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과장 자리를 재무부, 기획원 동수로 무 자르듯이 잘랐다”고 회고했다.
때문에 업무 유관성과 전문성은 이리 저리 찢겨나가며 기이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국제금융국이라는 조직 자체가 아예 사라졌고, 국제금융업무는 증권과 합쳐지면서 이름도 긴 ‘국제금융증권심의관실’에서 처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제금융만 전문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과 직위가 사라진 것이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국제금융증권심의관실은 말이 국제금융이지 증권시장 보는데 급급했다. 1996~1997년 당시 외환보유고가 줄어든다든지 환율이 요동친다든지 하는 등의 긴급 현안은 제대로 취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차관으로 재직하면서 국제금융업무를 맡았던 강만수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재경원 탄생 당시 국제금융국을 없앤 것이 1997년 외환위기의 현실적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국제금융국이 없는 나라는 아무 데도 없다. 눈이 하나인 아라에 가면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병신이 되는 수 밖에 없다.”
외환위기 상황을 다룬 1998년 경제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들어있다.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경제주체가 등장했다. 바로 외국자본이다. 한마디로 1996년 OECD 가입과 더불어 자본시장을 개방했지만 정작 외국자본의 냉혹한 생리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당시 경제백서 작성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후 무엇이 잘못됐나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외국자본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고 착각한 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실토했다.
환란 다가오는데 금융개혁법안만 신경
1997년 11월 10일강경식 부총리와 이경식 한은 총재,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등 훗날 ‘환란의 주역’으로 지목된 3명은 서울 시내 모처에서 만나 ‘금융개혁법안’을 회기 내 통과시키는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했다. 이들이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분리한다”는 원칙만 지켜진다면 국회에서 수정도 가능하다는 선에서 최종 합의를 본 것으로 전해지자, 한은 직원들은 ‘총파업’을 선언하는 등 진통이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14일 오전 한은 직원 400여 명은 국회 재경위에 참석하려다 저지를 받고 경찰과 대치 중 176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연행됐으며 역대 한은 총재들이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금융개혁법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서서히 한국경제에 파고들고 있었지만 이를 인지해야 할 중앙은행은 1997년 한 해 동안 금융개혁법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 때문에 뒷날 감사원의 ‘외환 및 금융관리실태 특별감사결과’에서 정부가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에만 주력하다가 11월 14일 뒤늦게 IMF 금융지원요청이 불가피함을 보고, 범 정부차원에서 사태를 수습할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이후 IMF 이후 이행합의문에 물가안정을 주임무로 하는 한은 독립과 금융감독기구를 통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금융개혁법안이 담기며 일단락됐다. 이경식 前 총재가 지금까지도 건전성 감독 부분을 아쉬워하는 것도 한은과 금융감독원과의 갈등양상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감독권 이외에 통화정책에 대한 한은과 재경부간 갈등도 깊어졌다. 통화정책에 대해 법상 독립은 보장됐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금리결정과정에서 재경부의 물밑 간섭이 집요할 정도로 이어졌다.
3.독이 된 ‘3低 호황’
“우리가 외환위기에 빠진 이유는 1980년대부터 1997년 바로 그 때까지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이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1980년대 후반 대규모 경상수지가 흑자를 기록했지만 우리 자신의 실력보다는 ‘3低 호황’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컸다. 그걸 빼고 나면 (국내) 산업의 국제경쟁력은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조순 前 경제부총리는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미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정부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고 시장자율로 일이 진행되는 시대가 됐는데 우리 경제주체들이 제대로 적응을 못했다”고 덧붙였다.
외환위기가 있기 10년 전인 1986~1988년 한국경제는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3저 호황’,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집단들의 무분별한 과잉투자, 다시 말해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IMF 협상 수석대표, 산업자원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정덕구 열린우리당 의원은 “3저 호황은 기업집단이 급성장할 수 있는 호재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창호 기획예산처 재정전략실장(1987년 당시 경제기획원 자금계획과장)은 “해외에서 봇물 터지듯이 돈이 쏟아지면서 환율절상 압력이 커졌지만, 기업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부채를 갚기는커녕 인위적으로 환율을 막아달라고 떼를 썼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기업들이 넘치는 현금으로 세계화에 걸맞게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이다. 외환위기를 맞이하면서 기업집단들의 운명이 서로 엇갈리게 된 것은 ‘3저 호황’을 어떤 식으로 보냈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군 이래 최대라는 3저 호황의 명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3저 호황’은 자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닌 ‘신기루’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국제수지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서방 선진 7개국(G7)은 1985년 9월 소위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다. 핵심은 달러 절하 및 기타 통화절상이었는데 당시 미국에 엄청난 흑자를 거둬들이던 일본이 표적이었다. 결국 1달러당 240엔 대에 머물던 엔/달러 환율은 1년 만에 120엔대까지 급락했다. 달러화 약세로 인해 경기침체를 초래하게 된 일본, 서독 등 주요 통화강대국들은 1년 뒤부터 금리 동반인하를 유도해나갔다. 선진국들의 이 같은 합의로 원유수출국들은 수출수요 감소에 따른 감산에 시달렸다. 그러나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자 국제유가는 1985~1986년에 크게 떨어졌다.
‘3저 호황’의 반사이익은 한국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외채위기를 거론할 정도로 악화됐던 한국경제는 갑자기 경상수지 흑자대국으로 탈바꿈했다. 1986년 47억 달러, 1987년 100억 달러, 1988년 145억 달러 등 흑자행진은 도무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현대자동차의 ‘엑셀’이 미국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도 그 뿌리는 ‘3저 호황’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자 합의(1985년) 이후 3년간 국제유가와 국제금리, 엔/달러 환율은 각각 35%, 20%, 50% 정도 하락했으며, 3저 기간 동안 국내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2.8%, 수출증가율은 26.4%, 무역흑자는 60억 달러를 기록했다. 1987년말 525.11이던 종합주가지수는1989년 4월 1일 1,007.77에 이를 정도로 ‘버블’ 그 자체였다. 30대 기업집단의 계열사 수도 1974년 139개에서 1986년 276개로 급증했다.
‘3저 호황’으로 덩치가 커진 한국 기업들이 세계로 뻗어나가자, 미국 등 선진국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급성장하게 된 데는 이처럼 ‘3저 호황’의 덕이 컸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 탄생하다
‘3저 호황’이 막바지에 이르자 이제는 곳곳에서 방만한 투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재벌 그룹들은 ‘달콤한 유혹’에서 좀체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비단 설비투자에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주식과 부동산투기 등 ‘돈놀이’에도 서슴없이 투입됐다. 그러는 사이 ‘3저 호황’과의 밀월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덕구 의원은 “우리 기업들은 세계경제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국내 시장경쟁에 몰입하면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기업들이 경쟁력 강화보다는 문어발식 확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3저 호황’을 바탕으로 5공 말부터 불붙기 시작한 기업집단의 성장은 노태우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1980년 후반부터 석유화학,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업종에서 신규진입을 제한하던 각종 제도적 진입 장벽은 낮아졌으나 퇴출장벽은 가로막혀 있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이른바 구조조정 없는 ‘대마불사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정착되는 고비용∙저효율 구조
‘3저 호황’은 또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우리 경제체질을 어느새 ‘고비용∙저효율’이라는 부작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격화된 노사분규로 임금은 전산업에서 평균 21.2%(제조업은 25.1%)나 올라 1980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1988년 145억 달러였던 경상수지는 1989년 53억 달러로 3분의 1 토막이 나 버렸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실 실장은 1994년 이후부터 큰 폭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3저 호황’을 꼽았다. ‘고비용-저효율’ 경제구조가 심화된 가운데 정작 기술혁신이나 품질개선 노력은 소홀히 한 결과,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장석인 실장은 “되돌아보면 1990년까지가 제조업의 정점이었다”면서 “3저 호황에 따른 반사이익으로 구조조정을 하지 못하고 기업들이 방만하게 운영한 결과 크나큰 후유증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3저 호황’을 만끽하면서도 개혁을 뒷전에 미뤄놓았던 한국경제는 다시 한 번 경상수지 적자라는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4.무너진 ‘대마불사(大馬不死)’
“외환위기 때 삼성전자도 망할 뻔했다. 국제화 열기에 도취해 무분별하게 차입경영을 추진한 결과 1997년 삼성전자의 실질 자기자본은 제로가 됐다.”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조차 1997년은 혹독한 한 해였다. 1995년까지 이어진 반도체 신화는 재벌그룹들의 과잉투자에 기름을 부었다. 세계적인 공급과잉 조짐을 무시한 채 재벌그룹들은 자동차와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조선 등 ‘중후장대’형 설치산업에 경쟁하듯 돈을 쏟아 부었다. 이들 산업이 훗날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한국경제를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속으로 내몬 악역을 톡톡히 했다.
신규시장에의 기업의 진입은 차입경영을 통해 무한대의 자유를 누렸지만 퇴출은 막히는 이상한 산업구조가 남긴 결과는 너무나 혹독했다. 규모만 크면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는 1997년 1월 한보를 계기로 무너졌다. 이어 진로, 대농, 기아, 한라 등 내노라 하는 재벌그룹들이 한낮에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은 “국제화 열기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간 자회사가 40개, 손자회사까지 합할 경우 72개 법인이 갑작스레 삼성전자 아래로 편입됐다”면서 “그러나 인수한 이후에 제대로 된 관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부실이 마구잡이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무분별한 대기업 차입경영은 ‘금융기관 부실’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IMF 구제금융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업다각화의 함정
총자산 기준 재계서열 14위였던 한보철강은 비관련 다각화(Conglomerate Diversification)에 몰두한 나머지 4년 동안 제약업, 금융, 건설, 조선 등으로 영위업종을 넓혀 갔다. 기아차가 부도를 맞게 된 것도 무리한 투자로 기아특수강, 기산, 아시아자동차 등의 경영부실이 겹치면서 자금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삼성의 자동차, LG의 반도체 진출 등도 모두 비관련 다각화의 산물이다. 현대와 삼성의 경우 LG화학, SK㈜, 대림산업 등 선발주자들이 있는 유화업종에 막대한 설비투자를 통해 뛰어들었지만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부실기업 신세로 전락했다. 재벌기업들의 과잉투자 결과, 1996년 말 3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821개로 평균 27개 이상의 계열사를 보유했으며 영위업종도 평균 20개를 웃돌았다. 미국 500대 기업의 평균 영위업종 수가 10~11개였던 것을 감안할 때 한국 재벌기업들이 얼마나 업종다각화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수년간 쌓은 ‘모래성’ 순식간에 무너져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 채권금융기관회의가 소집된 제일은행 본점 회의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보철강의 ‘부도’를 선언했다. 1993년부터 4여 년 동안 상아제약, 삼화상호신용금고, 유원건설, 대동조선 등 특유의 로비력을 발휘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정태수 회장의 요행은 여기까지였다. 부도 당시 한보철강은 은행권 3조2,648억원, 제2금융권 대출과 사채발행까지 합쳐 5조원이 넘는 대출금을 남겼다. 한보 부도는 단순한 개별 기업의 몰락이 아닌 국가경제를 뒤흔드는 초대형 사건이었다.
한보사태가 터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계 은행들은 한보사태와 연루된 은행의 신용도를 문제 삼아 하루짜리 콜자금(오버나이트자금) 지원을 거절했다. 하루 결제자금의 60% 가까이를 콜자금에 의존하던 한국계 은행의 도쿄 지점들은 일제히 부도 직전에 몰렸다. IMF를 알리는 신호탄이 ‘한보’였다면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의 부도는 가히 결정타였다. 한보 사태 이후 삼시특수강과 유원건설이 차례로 무너진 3월말에서야 한국의 외환시장은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기아사태 처리가 3개월 이상 늦어지면서 우리 정부의 위기대처능력은 도마 위에 올랐으며, 기아의 공기업화 결정(10월 22일)은 S&P사의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을 야기시켰다.
진로, 대농, 한신공영, 쌍방울, 태일정밀, 해태, 뉴코아, 한라, 청구 등 내노라 하는 30대 그룹들이 1997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시장에서 과열기미가 있어 금리도 올리고 통화량을 줄여야 한다고 기업에게 말하면 좀 되려고 하는데 중앙은행이 재를 뿌린다고 난리를 쳤다”고 회고했다.
‘부채도 곧 자산’ 함정에 빠져
흥미로운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멸망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익보다는 매출액에만 관심을 두다가 쓰려졌다는 점이다. 1980년대까지의 쇠퇴한 기업들이 성장산업을 제대로 뒤따라가지 못한 원인이 컸다면, 1990년대 말부터는 기업들의 무조건적 확장경영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셈이다.
한 때 재계 1, 2위를 다투던 대우와 현대도 1997년은 무사히 넘겼지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IMF 체제로 들어선 뒤 부채비율 200%를 맞추지 못했던 대우그룹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현대그룹도 1999년을 정점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외상경영’이라는 자금조달기법을 애용한 대우그룹은 물론 청구, 보성과 함께 주택업계의 ‘대구 3인방’으로 알려진 우방그룹도 주택경기침체를 버텨내지 못하고 워크아웃에 이어 2000년 쓰러졌다.
‘부채도 곧 자산’이라는 김우중 회장의 말처럼, 당시 기업들이 주로 동원한 기법은 LBO(Leveraged Buy-Out). LBO란 인수할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마련한 뒤 그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 방법으로 이해되며, 국내 인수합병(M&A)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이용돼왔다. 문제는 기아사태 이후 국내은행들이 일제히 무장해제 당하며 자생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1997년 9월말 당시 25개 일반은행이 6개월 이상 이자를 한 푼도 받지 못한 무수익 여신은 무려 21조 5,000억원으로 전체 여신의 7%는 떼일 지경에 처해 있었다.
박영철 당시 금융연구원장(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은 “우리 기업들이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걸쳐 돈을 빌리는데 열을 올리면서 결과적으로 외국자본들의 표적이 됐다”면서 “외환위기를 구실로 삼아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재벌기업을 위시로 한 구조조정을 해야 된다는 명백한 목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IMF에 ‘경제주권’을 넘겨주기 직전까지 “한국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대기업의 연쇄부도는 국내 금융기관들을 모두 무장해제시켰지만 정부는 어설픈 시장논리만을 내세우며 손을 놓고 있었던 셈이다.
5.재벌 문어발식 확장의 두 얼굴
“한국 조선업이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비결은 3저 호황 당시 일본이 주춤한 틈을 타 초대형 도크를 신설했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 장석인 주력산업실 실장)
재벌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IMF 사태를 불러온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2000년 이후부터 성장동력의 발판이 되는 아이러니도 연출됐다.
장 실장의 말처럼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시장 점유율이 1%에 불과했던 조선업은 1980년대 중반부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결과, 수주 잔량(주문받은 물량)으로 평가하는 세계 조선소 순위에서 1위부터 5위까지 휩쓸고 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이 세계 조선소 순위 Top 5에 랭크돼 있으며 STX조선과 한진중공업도 10위권에 들어 있다.
지난 1995년까지 이어진 ‘반도체 신화’를 바탕으로 기업들은 세계적인 공급과잉조짐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조선 등 중후장대형 설치산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문제는 재벌그룹들이 성장전략의 일환으로 자신과 전혀 생소한 부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IMF 관리체제가 가동되면서 ‘빅딜’이라는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옥석이 가려지게 됐다. 삼성, 현대, LG그룹 등은 외환위기 직후 반도체, 항공, 철도차량, 발전설비 등 7대 업종에 대해 ‘빅딜’이라 불리는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오늘날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자동차에서는 기아차는 현대차를 새 주인으로 대우차는 GM의 품에 안겼다. 반도체의 경우 현대전자(하이닉스)가 LG반도체를 인수했다. 철강의 경우 현대제철(舊 INI스틸)은 강원산업을 합병, 세계 2위의 전기로 업체로 부상(이후 삼미특수강 인수)한데 이어 한국철강은 환영철강을 인수했다. POSCO는 신일본제철과 ‘포괄적 전략적 제휴’를 체결해 세계적 경쟁력을 다졌다. 그 결과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의 주력기간산업으로 재도약하며 산업발전의 토대가 됐다.
산업연구원 조사 결과 조선산업의 경우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이 30.8%에 달해 세계 1위의 위상을 확보했으며 전자∙반도체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를, 자동차산업은 세계 수출시장의 2.8%를 점유하며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석유화학과 일반기계도 세계 7, 8위의 위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기업들의 과잉투자는 외환위기를 몰고 오기도 했지만, 그 뒤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경제의 버팀목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6.100兆 넘는 부실채권 처리
“IMF의 도움으로 국가파산은 간신히 면했지만 정작 그 순간부터 100조원이 넘는 부실채권에 눌려 한국경제가 신음하기 시작했다. 부실채권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금융시장이 거덜났을 것이다.” (정재룡 前 자산관리공사(KAMCO) 사장)
외환위기 다음 해인 지난 1998년 말까지 국내 재벌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도산위기에 몰리고 중소기업의 연쇄부도가 이어지면서 금융권의 고정이하 여신인 부실채권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이나 채권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매각하는 ‘배드뱅크’가 필요했다. 그 역할은 1997년 4월 공사 내에 ‘부실채권전담기구’를 설치했던 KAMCO에 맡겨졌다. 정 사장은 “대규모 부실채권정리가 시작됐지만 ‘신속히 가능한 높은 가격에 처분한다’는 식의 원칙을 정할 정도로 전문가나 조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KAMCO는 직접매각과 함께 부실채권의 효율적인 정리를 위해 자산을 성격별로 분류하고 모아 큰 단위로 일괄 매각하거나 특정기업 채권별로 개별 매각하는 방식을 총동원했다. 지금은 흔한 개념이지만 부실채권으로부터 현재 또는 미래에 발생하게 될 현금흐름을 기초로 증권을 발행하는 ABS 발행방식을 통해 부실채권을 정리해 나갔다. 국내 최초의 부실채권을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증권 발행은 1999년 6월 3,007억원의 금융기관 환매조건부 특별채권이었다. 이를 담보로 발행한 선순위 만기 2, 3, 5, 7년 4종 2,950억원의 채권이 발행됐고, 10년 만기 후순위 채권이 250억원 발행됐다.
KAMCO는 2003년 말까지 국내외에서 총 17차례에 걸쳐 ABS를 발행했으며 총 대상자산은 일반 및 특별채권 8조4,000억원에 달했다. 2000년 7월 해외에서 발행된 자산유동화증권은 외화표시 특별채권을 담보로 한 것으로 아시아 국가 중 최초였다. 부동산의 경우 무조건 팔기보다는 자산가치를 높여 매각을 시도했다. 퇴출은행으로부터 인수한 은행 지점과 본점, 건물 등을 리모델링해 부가가치를 높여 비싼 값에 임대하거나 팔았고 테마빌딩으로 조성해 재분양 한 것. 이 같은 부실채권 처리과정에서 외국 기업과 자산관리회사(AMC)를 합작 설립하는 노하우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됐다. 당시 부실채권 입찰의 유일한 매입주체였던 외국투자자들은 우량자산만 찍어서 싸게 매입하는 이른바 ‘체리피킹’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1980년대 미국의 금융위기인 저축대부조합(S&L) 사태와 오일쇼크 때 부실채권 매입으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던 경험을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 경쟁업체의 반발로 2002년부터 중단된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도 당시로서는 특단의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란 회사채 만기가 집중적으로 도래해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에 대해 80% 금액만큼 사모(私募)사채를 발행해 산업은행이 이를 인수(신속인수)하면 그 대금으로 회사채를 상환하는 방식이다.
산업은행은 인수한 채권 중 70%를 채권담보부증권(프라이머리 CBO)이나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으로 편입시켜 채권형펀드 등에 매각하고 20%는 해당기업 채권은행에 인수시켜 10%만 보유함으로써 위험을 분산하게 된다. 단 회사채 신속인수대상기업들은 주채권은행과 자구이행계획약정을 체결하고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대주주 지분매각과 경영진 교체 등의 제재를 받게 된다. 2001년 도입된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통해 유동성위기에 빠졌던 하이닉스는 기사회생하는 계기가 됐다.
<< 부실채권 회수유형별 정리 현황 >>
[단위 : 조원, 2006년 12월말 현재]
구분
채권액
국제입찰
6.1
ABS발행
8.4
AMC∙CRC 매각
4.4
채권개별매각
3.5
법원경매
8.6
직접 회수 등
15.7
W/O에 따른 채무변제
10.1
환매∙해제
19.8
Total
76.6
[ 자료 : 자산관리공사 ]
7.너무 빨리 벗어 던진 IMF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환란(換亂)의 주범 3인방’이라는 말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상 초유의 고통을 견디는데 뭔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몇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린 결과 경제시스템 자체를 고치는 작업은 용두사미가 돼 버렸다.”
강만수 前 재경원 차관의 해석을 빌려보면 그의 말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된다. 강 前 차관은 “1997년 위기는 외환부족에 의한 유동성 위기라는 측면과 고비용∙저효율에 의한 구조적 위기라는 측면을 함께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때를 단순히 ‘환란’이라는 단어로 이해하곤 했는데 여기에는 ‘언어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일시적으로 소비를 많이 해 호주머니에 구멍이 났으니 한 1년 열심히 일해 ‘지불능력’을 키우면 된다는 식으로 1997년 위기를 간단하게 넘겨버렸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단순지불 위기론’이 그것이다.
1997년 상황은 한국경제의 총체적∙시스템적 위기, 다시 말해 ‘경제위기’였다는 해석을 애써 외면한 탓에 불과 2년 만인1999년 11월 19일김대중 대통령은 경남 창원에서 열린 바르게살기중앙협의회 전국대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선언을 내놓기에 이른다. 2000년 4월로 예정된 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5개월 여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외환위기가 ‘축복된 재앙’이건, ‘광복 이래 최대의 국난’이건 한국경제가 구조조정을 통해 질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면 과장된 표현이 될까.
1997년 이후 반복되는 경제 위기
DJ정부는 IMF극복을 선언하는 행위를 여러 차례 극적인 장면을 통해 활용했다. 정치적 포장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두 가지 장면을 지금도 기업하는 사람들이 많다.
#12001년 8월 23일오전 10시 30분.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IMF 차입금 가운데 잔액 1억4,000만 달러를 ‘최종’ 상환하는 서류에 결재를 했다.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서 조기 졸업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전 총재는 “구제금융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돌이켜보면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는 내용의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상환결재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 결재에 쓴 필기구와 서류를 화폐금융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2그보다 하루 전인 8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IMF 체제’를 촉발시킨 진원지인 기아자동차 광명 공장을 방문한 뒤 청와대에서 열린 IMF 조기졸업 기념 만찬을 열었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 38억 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현재 1,00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5대 외환보유국이 됐다”며 감회를 밝혔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활기는 없었다는 게 당시 현장에 있던 관료들의 증언이다. 2년 전 미리 ‘IMF 극복’을 선언했을 때보다 오히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바로 경제가 ‘IMF 조기졸업’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꾸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7∙8월의 산업생산증가율은 각각 전년 동월보다 각각 5.7%, 4.7%로 떨어졌다. 설비투자증가율은 무려 -10.4%, -19.0%를 기록했다. 수출증가율은 -20.5%, -20.1%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주식시장은 외국인의 이탈로 KOSPI지수가 500포인트 선을 겨우 유지한 상태였고, 9∙11 테러 직후에는 400선대로 떨어졌다.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은 “1997년 IMF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그 다음 시기는 2001년이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정부는 부랴부랴 내수진작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재정∙금융∙세제 등 거시정책수단과 규제완화∙건설투자∙설비투자∙고용안정 등 미시정책수단이 모두 망라됐다. 하지만 이 같은 단기부양책은 2002년 카드버블 사태로 이어져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 아직도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에는 주택시장의 거품과 가계부채급증이 새로운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철용 LG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앞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를 겪게 된다면 IMF 때처럼 특정 부문에서 일시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전분야에 걸쳐 만성적∙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환위기의 본질을 외면했다
현재 외환위기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외국자본의 음모론에서 한국경제의 근본적인 파열음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주력 산업의 과잉중복투자 및 전반적인 기업수익성 하락 등 ‘한국형 발전모델’이 한계에 봉착했음은 물론 경제가 항상 정치에 휘둘리는 고질적인 병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한국경제의 이 같은 모습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부연구위원은 “한국식 자본주의 성장모델의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급작스러운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부 악재에 대응하지 못한 게 외환위기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1997년 경제위기를 가져온 원인으로
ü부실기업구조에 대한 대책 미흡
ü부실금융산업의 구조조정 미흡
ü대규모 부실채권의 정리계획지연
ü효율적인 금융감독체계의 미비
ü기업경영의 투명성과 공시성 미흡
ü경제위기 해결을 위한 총체적 리더십 부재
등을 꼽고 있다.
DJ정부의 IMF 극복과정도 처음에는 30년 압축성장과정을 거치며 곪을 대로 곪은 경제구조를 뜯어고치자는 것이었다. 수술은 네 갈래로 진행됐다. 부실∙관치로 얼룩진 금융부문, 빚더미 위에 세워진 재벌, 거대 독과점 틀에 안주해 혈세를 낭비하던 공공부문, 제로섬(Zero Sum)의 극한 갈등을 연출하던 노사갈등을 개혁하겠다는 것.
성과는 컸다. 획기적인 체질개선 노력으로 ‘IMF 모범생’이라는 전세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DJ정부가 2000년 총선을 5개월 앞둔 1999년 11월 ‘IMF 졸업’을 선언하면서 도덕적 해이는 갑자기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1999년 이후 ‘외환위기’로만 규정해 정치적 성과와 연계하려 했던 것 같다”면서 “이는 경제 구조조정의 종료를 뜻했고 이후 경제개혁의 칼이 무뎌졌다”고 비판했다.
개혁실패에 대한 자성은 지난 2002년 12월 재경부가 외환위기 5주년을 맞아 내놓은 ‘무한한 잠재력, 약속된 미래-IMF 5년의 성과와 과제’란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마디로 “기업, 금융, 공공, 노동 등 4개 부문의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개혁을 반대하는 집단이기주의로 추진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IMF 구제금융은 비록 아픔이었지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면서 “한국경제가 일부 성과는 있었지만 질적인 도약에 실패하면서 신용대란, 부동산 버블 붕괴 및 가계부실화 등 또 다른 형식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8.미완의 기업 구조조정
지난1998년 6월 17일 외환위기로 부실판정대상에 오른 313개 기업 가운데 55개 기업의 퇴출이 결정됐다. 본격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시작에 불과하다”면서 구조조정을 실시하지 않으면 퇴출대상에서 빠진 기업도 생존이 어려울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16개 그룹이 몰락했고,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으면서 1998년 말 실업자는 180만 명에 달했다. 대가는 혹독했지만 “국가 부도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 묻혔다. 하지만 1999년부터 경기호전으로 위기상황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모럴 해저드’가 싹트기 시작했다. 정부와 은행권, 기업들의 이기주의로 구조조정은 지연됐고, 경제전체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 준비되지 않은 정부정책도 문제였다. 부채비율 200% 이하 축소 등 획일적인 가이드 라인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했고 구조조정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한 관련 제도는 정비되지 않았다. ‘어설픈 구조조정’은 결국 2000년 이후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 대구그룹의 공중분해, SK사태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경제를 반복적인 위기로 몰아넣었다.
정부주도의 구조조정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기업부실을 지목하고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 대로 기업구조개혁을 실시했다. 큰 그림은 이른바 ‘5+3’ 원칙이었다. 1998년 2월 경영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전문화 가속화, 경영책임강화 등 5개 핵심과제를 제시한 데 이어 1999년 8월에는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금융지배 차단, 변칙상속방지 등 3대 보완과제를 내놓았다.
부실기업의 처리는 크게 5개 방향으로 추진됐다. 회생불가기업은 퇴출시키는 한편 나머지는 빅딜(Big Deal, 대규모 사업교환), 재무구조 약정을 통한 자체 정상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법정관리 및 화의 등으로 살리는 방안이었다.
사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개입은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다. 성과도 컸다. 부채비율의 하락 등으로 기업재무구조가 개선됐고 부실기업의 상시정리체제 및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한 각종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고동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구조조정에 정부가 개입하긴 했지만 은행 스스로가 부실금융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기업관리를 철저히 하게 된 것은 성과”라고 평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도 2000년 5월 한국이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실시해 기업 재무구조, 신용등급 등에서 비슷한 시기 외환위기를 겪었던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보다 월등히 나은 성과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모럴 해저드의 늪
하지만 1998년 하반기 이후 저금리로 기업들의 금융비용이 줄고 자산매각 등을 통한 구조조정이 일부 성과를 거두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정부와 채권단, 기업 등 구조조정의 주체들이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구조조정을 등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999년 말 제조업 외감법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918개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금융비용도 충당하지 못했지만 퇴출은 지연됐다. 기업부채비율이 줄어든 것도 은행 빚을 줄였다기 보다는 유상증자나 재산재평가 등을 통한 자기자본확충 덕분이었다.
특히 회생이 불가능한 일부 대기업의 처리방향이 문제였다. 재벌들은 구조조정을 이행하는 시늉만 했고 정부도 실업증가와 부실채권확대 등을 우려해 퇴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화의법, 회사정리법, 파산법 등 복잡한 기업정리절차도 부실기업의 신속한 정리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문인력의 부족 등 객관적인 한계도 존재했다. 그 결과 1998~1999년 워크아웃 기업으로 지정된 83개 기업 중 2002년 2월 정상화된 기업은 47개 기업에 불과했다.
당시 구조개혁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기업 내부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바람에 1999년 이후 대우사태를 비롯해 쌍용차,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 대기업의 잇단 부도가 터졌다”면서 “2003년 SK사태도 뿌리를 찾아보면 수술을 받아야 했던 기업이 내과치료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기업들이 사업구조조정보다는 손쉬운 인력감축을 선호하면서 사회문제도 증폭됐다. 당시 빅딜대상이었던 9개 업종의 경우 과잉설비조정정도를 반영하는 유휴자산매각은 6.6%에 불과한 반면 인력은 14%나 줄었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면서 경제양극화가 심화됐고 소비감소로 인한 내수위축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1998년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이었던 이성규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은 “당시 워크아웃이 주로 사람 자르고, 자산 팔아먹고 하는데 중점을 뒀다”면서 “국부 관점에서 보면 총량이 늘어나기는커녕 유지되지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구조조정이 ‘제 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정부가 지난 2000년 말 2차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김용열 홍익대 상경대 교수는 “구조조정 초기 향후 발생할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희극이 된 ‘빅딜(Big Deal)’
어설픈 구조조정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5대 그룹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사업구조조정, 이른바 ‘빅딜’이다. “그나마 빅딜이 실패한 게 다행이었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빅딜 시도는 그 자체로 한국경제에 두고두고 큰 짐이 됐다.
‘빅딜(Big Deal)’은 미국 영어에서 ‘웃기고 있네’ 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비아냥거리는 표현이다. 처음부터 “웃기는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DJ는 과잉설비투자해소를 위해 밀어 부치면서 파장이 커졌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간 반도체 빅딜은 하이닉스 사태로 이어졌다. 부실기업 2개를 합병시켜 더 큰 부실기업만 탄생시킨 꼴이었다. 삼성차와 대우차간 빅딜 논의는 무산되고 삼성차가 법정관리로 가 한국 재계에 후유증만 남겼다.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 간에 수 년 동안 논의된 유화부문 빅딜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각 사 혹은 채권단 자율로 구조조정에 나서 성공한다.
물론 당시 DJ의 압력에 못 이겨 LG반도체를 넘겼던 LG그룹 내에서조차 “빅딜이 당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책 중 하나였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빅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이종우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빅딜은 그저 쇼에 불과했을 뿐 경제 체질강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됐다”고 말했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연구실장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새 산업이 만들어지고 퇴출된 근로자는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실직자와 단순 자영업자만 양산이 됐다”면서 “현재 서비스업 생산성이 낮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어설픈 구조조정이 씨앗을 뿌린 것”이라고 말했다.
<< 1차 퇴출기업 내역>>
1998년 6월 17일 현재
5대 그룹
20개사
현대
현대리바트, 현대중기사업, 선일상선, 현대알루미늄
삼성
삼성시계, 이천전기, 대도제약, 한일전선
대우
한국산업전자, 한국자동차연료, 오리온전기부품, 동우공영, 대창기업
LG
LG전자부품, 원전에너지, LG오웬스코닝, LG이엔씨
SK
마이TV, SK창고, 경진해운
쌍용
범아석유
6~64대 그룹
32개사
한화
오트론, 한화관광
동아건설
동아엔지니어링
효성
동광화성, 효성미디어, 효성원넘버
고합
고합아이티, 정밀호학, 텍스타일, FCN
해태
해태유통, 해태전자, 해태제과
신호
신호상사, 신호전자통신, 영진테크
뉴코아
시대축산, 시대유통, 뉴타운기획
거평
대한중석, 거평건설, 거평산업개발
한일
한일합섬, 진해화학, 남부개발, 신남개발
갑을
신한견직
동국무역
동국전자
통일
일화
우방
태성주택
한구합섬
이화상사
비계열 3개사
대한모방, 양영제지, 우정병원
9.현대와 대우, 엇갈린 운명
외환위기와 소용돌이 속에서 국내 대표기업들마저 생존의 기로에 섰던 1998년 6월. 글로벌 투자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CSFB)은 ‘한국 10대 재벌개혁’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1997년 말 기준으로 단기적인 현금흐름 등 전반적인 건전성을 평가해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에 대해 나란히 ‘1.7’의 점수를 매겼다. 시장은 메가톤급 충격을 받았다. 두 그룹이 받은 점수는 삼성그룹 4.3, LG그룹 3.0, SK그룹 4.3에 비해 크게 낮고, 자력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형선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8~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현대그룹은 하이닉스반도체, 현대건설 등 일부 기업만 채권단 손에 들어갔을 뿐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 등 3개 그룹으로 분화돼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대우그룹의 경우 김우중 회장이 오랜 해외 도피생활을 하다 중형을 선고받았고, 계열사는 산산조각 나 새 주인을 찾았거나 찾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두 그룹의 운명이 천지차이로 엇갈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떠오르는 건 시운(時運)이다. 대우는 국내외 감시의 눈이 서슬 퍼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초반 위기를 맞았다. 반면 현대는 구조조정의 칼날이 한결 무뎌진 2000년 후반 위기를 맞은 탓에 막대한 수혈을 받으며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룹 전체의 짐이 됐던 대북사업이 DJ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낸 아이러니도 작용했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시장의 신뢰’였다. 김 회장은 대우그룹에 암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 뒤에도 ‘고금리 차입’이라는 약물로 버티며 계열사를 오히려 더 늘리는 바람에 정부와 채권단, 나아가 국내외 투자자들과의 신뢰를 잃었다. 반면 현대는 ‘왕자의 난’이라는 형제간 싸움으로 원치 않았던 구조조정을 단행, 그룹 전체로 부실이 전이되기 전에 메스가 가해졌다.
1998년 9월 28일 청와대 경제특별회견. 김대중 대통령은 “대기업은 오늘의 경제위기에 책임이 크기 때문에 개혁해야 한다는데 추호의 변함도, 일보의 양보도 없다”고 못박았다. 대기업도 재무구조개선 등의 구조조정을 외면하면 퇴출시키겠다는 뜻을 또 한 번 강조한 것이었다.
이미 정부는 그 해 2월부터 분기 또는 월별로 정∙재계 간담회를 개최하며 5대 그룹의 구조조정을 독려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삼성, LG, SK, 현대그룹 등은 외자유치, 자산매각, 계열사정리 등을 통해 나름대로 성의표시를 하는데 안간힘을 기울였다. 4대 그룹 가운데 구조조정이 가장 더디다는 비판을 받았던 현대그룹마저 부채비율이 1997년 말 572%에서 1999년 말 181%로, 계열사는 같은 기간 62개에서 35개로 줄었다.
반면 대우만은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었다. 김 회장은 해외채권자로부터의 상환압력이 거세지고 국내에서도 돈을 빌리기 어려울수록 쌍용자동차 인수 등 ‘몸집 불리기’에 더욱 매달렸다. 1995년 138개이던 국내외 계열사는 1999년 289개로 불어났다.
주채권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의 최종욱 前 기업분석부장은 “엄청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근본적인 구조조정은 추진하지 않고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의 금융차입을 통한 기업확장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1997년 말 28조7,120억원이던 대우그룹의 총차입금 규모는 8개월만에 17조5,310억원이나 불어나 1998년 8월말 46조2,430억원을 기록했다.
시장의 신뢰를 잃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대우그룹은 1999년 7월 채권금융기관에 ‘SOS’를 쳤지만 신규지원액은 4조원에 불과했다. 사실상 파산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그해 8월 26일자로 대우의 워크아웃이 집행됐다.
물론 “현대를 살리기 위한 파격적 지원의 일부만 대우에 지원했다면 부도 처리되지 않았을 것”(이한구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장, 現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우 사태를 지켜봤던 채권단 관계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국내는 물론 유럽, 중남미 舊 소련 연방국가 등에 깔아놓은 부채 규모가 90조원인지, 100조원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면서 “40조원을 투입해도 살릴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김 회장이 대우자동차 등에 대한 경영권을 끝까지 고집한데다 GM으로부터 외자유치 약속도 공수표로 끝난 게 결정타를 날렸다. 결국 DJ와 관료들의 믿음마저 사라지면서 대우는 공중분해의 외길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전화위복이 된 ‘왕자의 난’
대우와 달리 현대그룹에게 ‘시운’은 절묘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몽헌 현대구릅 회장간의 경영권 싸움(2000년 1월) 이후 현대상선(3월), 현대건설(5월) 등 현대 주력 계열사들은 차례로 유동성 위기에 내몰렸다.
다급해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3부자 동시 퇴진’을 전격 선언했다. 경영권 분쟁이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정몽구 회장 측이 반기를 들면서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조차 신인도가 하락하자 채권단과 오너 일가는 서둘러 현대그룹에서 중공업, 자동차 등을 계열 분리했다.
이 와중에 가장 큰 골치덩어리였던 현대건설과 현대전자(現 하이닉스)가 정몽헌 회장 계열의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채권단 관리 하로 들어가는 행운 아닌 행운도 뒤따랐다. 현대로서는 억울하겠지만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뺏기지 않으면서 다른 계열사는 생존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이연수 당시 외환은행 부행장은 “코메르츠(외환은행 대주주)에서 대우에 대한 기존 여신은 모두 줄여나갔지만 현대는 펀더멘털을 좋게 평가했다”면서 “대우의 경우 그룹 전체의 부실이 엮여 있었지만 현대는 이미 분리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덕인지 하이닉스에 7조2,000억원, 현대건설에 2조9,000억원이라는 전폭적인 수혈이 감행됐다.
대북 지원의 후광도 한몫
금융시장불안을 야기했던 대우사태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이었을까. 대우와 달리 채권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다. 더구나 대우 때와 달리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칼날이 상당히 무뎌진 상태였다. IMF 조기졸업 선언을 앞두고 가시적인 성과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DJ의 부채의식이 현대그룹의 회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2000년 당시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에 대해 대북송금문제 때문에 정부가 살리려는 의지가 강력한 것으로 보였다”고 토로했다. 채권단이 대규모 지원 이후 때마침 건설과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는 요행도 뒤따랐다. 하이닉스와 현대건설이 부실기업에서 국내 기간산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매각에 대한 신중론이 본격화된 것도 이 때부터다.
10.혹독했던 금융구조조정
1998년 6월 29일 오전 금융감독위원회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새벽부터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였고 동향을 파악하려는 은행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27일부터 이틀간 야근에 들어갔던 금감위 구조개혁기획단도 초긴장 상태였고 상황실은 퇴출은행의 현황 파악에 진땀을 빼는 모습이었다. 이미 전날 저녁에 퇴출이 예정된 은행의 본점과 전산실 등에 인수팀을 보냈는데 해당 은행의 직원들이 열쇠를 갖고 잠적하거나 노조원들과 충돌을 빚는 바람에 대처 방안을 묻는 전화가 쇄도했기 때문이다.
퇴출은행의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결국 이날 오전 이헌재 금감위 위원장은 자기자본비율(BIS)이 8%에 밑도는 12개 은행 가운데 동화은행, 동남은행, 대동은행, 충청은행, 경기은행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공식 발표했다. 불사(不死)신화에 젖어있던 은행 퇴출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이른바 ‘6·29 은행 빅뱅’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공적 자금 다른 나라 2배 이상 투입
1997년 경제위기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한꺼번에 닥쳤다는 점에서 체감강도가 다른 나라의 외환위기보다 훨씬 강했다. 외환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과 1997년 말 기준 33개 은행과 9개 종금사가 해외에서 단기로 빌려 쓴 돈 240억 달러를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하지만 금융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정부는 회생가능한 금융기관을 고른 뒤 공적자금투입이라는 처방책을 내놓았다. 투입된 공적 자금은 무려 168조원. 선택받지 못한 5개 은행을 비롯해 16개 종합금융사, 6개 증권사 등이 1998년 9월말에 끝난 1차 금융구조조정을 통해 사라졌다.
국가가 긴급 수혈을 했던 만큼 구조조정은 필연적이었다. 상업-한일은행, 하나-보람은행, 국민-장기신용은행이 합병되고 제일은행, 서울은행은 해외매각이 추진됐다. 1인당 영업이익(1억5,000만원)을 외국은행 수준(2억6,000만원) 수준으로 맞추기 위한 인력구조조정도 병행됐다.
어렵사리 성공한 노사합의를 통해 당시 9개 은행은 32%의 인력을 감축하기로 했다. 9개 은행에서만 1만7,942명이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것. 혹독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금융구조조정으로 2,103개의 금융기관은 1,329개(2006년 2월)로 줄었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융구조조정을 통해 투입된 공적 자금을 재정비용에 견주어 볼 때 금융위기를 겪었던 국가에 비해 2배가 넘는다”면서 “한국의 금융위기는 그 강도와 비용이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뤄진 진단과 수술
‘비교적 성공적인 금융구조조정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지만 비판 역시 만만찮다. 문제는 속도였다. IMF가 제시한 마감시간에 쫓겨 너무 빨리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바람에 국내외 금융시장의 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종금사는 IMF와 공식협약(12월 4일)이 채 체결되기 전 퇴출리스크가 내려왔다. 1997년 12월 2일 청솔·경남·경일 등 9개 종금사가, 10일에는 나라·대한 등 5개 종금사가 영업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금융구조조정을 맡았던 정부의 한 관계자는 “IMF의 첫 제시안은 받아들일만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강도와 속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새벽 1시엔가 IMF로부터 퇴출 종금사 리스트를 받았고 불과 9시간 만인 아침 10시쯤 영업정지명령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특히 외형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바람에 부작용이 속출했다. 제일은행은 사모펀드인 뉴브릿지캐피탈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매각됐다. 은행간 합병도 업무간 연관성이 없어 비효율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과거 평화은행에 근무했던 금융권 관계자는 “퇴출된 5개 은행은 중소기업을 담당하며 산업성장의 동맥 역할을 해왔다”면서 “어느 날 갑자기 퇴출시키면서 하나, 국민 등 소매금융만 전담하는 은행에 하나씩 넘겨주는 이상한 구조조정을 했다”고 말했다. 이종우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도 “금융구조조정의 성과는 있었지만 실적에 집착한 쇼도 있었다”면서 “가장 대표적인 게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이라고 설명했다.
당시는 낯설었던 BIS비율 8%가 은행 부실의 판정 기준이 되면서 기업자금줄이 한꺼번에 막힌 것도 문제점이다. 은행들이 BIS비율을 맞추기 위해 기업여신을 연장하지 않은 사태가 곳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재경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당시에는 국제금융사회로부터 신뢰를 얻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할 판이었다”면서 “BIS비율도 IMF의 제시조건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은행 집중현상 등 부작용도
이 같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뒤 금융부문은 상당히 튼튼해졌다. 2006년 말 현재 국내은행의 BIS비율은 13.10%로 1997년 말 7.04%에 비해 크게 좋아졌다.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외형도 성장, 세계 100대 은행에 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 3곳이 포함됐다. 금융지주회사도 등장, 명실상부한 종합금융회사로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구조조정의 후유증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김 교수는 “M&A 등을 통한 대형 금융기관의 출현과 외국자본의 활발한 국내 진출로 금융산업의 효율성은 높아졌다”면서도 “한국경제의 위험이 특정 부문으로 집중되는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경제의 위험이 상호저축은행이나 가계대출 등 특정 부문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실제 상호저축은행은 1997년 말 231개에서 2006년 2월 현재 110개로 반토막이 났다. 신협협동조합도 역시 1.666개에서 1,045개로 감소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8조4,000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영구조는 개선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축은행의 영업이익은 2003년 123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뒤 2004년에는 3,489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은행의 가계대출 쏠림현상도 부작용 중 하나로 꼽힌다. 은행들이 단기 이익에 잡착해 기업금융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담보대출은 일반은행 총자산의 26.3%(2004년 말 현재)를 차지해 외환위기 당시(1997년 말 11.1%)의 2배를 크게 웃돌고 있다.
오완근 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형 은행의 등장으로 은행집중현상과 정보비대칭 문제가 심화되고 유망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접근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11.구조조정 첨병,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
‘구조조정 첨병에서 은행과 기업의 대주주 역할까지’
외환위기 이후 16개 종합금융회사 파산을 시작으로 5개 은행 퇴출과 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의 대량 파산으로 이어지며 한국의 금융시스템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황으로 내몰렸다. 금융기관들이 하루가 달리 부실화되면서 부실 금융회사의 경영정상화와 부실채권정리를 책임졌던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는 일약 구조조정의 첨병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1996년 6월 ‘예보’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예금보험업무는 중앙은행이 해오던 업무인데다 ‘설마 은행이 망하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금융 안전망’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리도 없었다. 이 때문에 삼성동 테헤란로에 4층 짜리 건물(태원빌딩)을 빌려 3개 부서 직원 43명으로 단출하게 출발했다. 사장과 전무만 있고 임원도 없을 정도였다.
금융기관이 예금을 내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때 예금자의 손실을 보전해주려면 은행에서 보험료를 받아야 하는데 예보 직원들은 찾아갈 때마다 보험회사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1년 6개월 뒤 외환위기가 터지자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98년 동화은행, 동남은행, 충청은행, 경기은행, 대동은행 등 5개 부실은행을 퇴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서울보증보험 출자, 제일은행 매각 등 금융권 인수합병(M&A) 업무를 주도해갔다.
2001년 3월 공적 자금 손실을 유발한 대우, 고합 등 부실채무기업에 대한 조사를 착수한 데 이어 서울은행, 대한생명, 조흥은행 등 1·2금융권 부실금융회사 구조조정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업무량이 폭주하자 수십 명에 불과하던 직원들도 한 때 755명으로 늘었다. 2006년 말까지 예보는 총 490개가 넘는 금융회사를 정리했고 700곳의 부실채무기업을 조사했으며 현재 우리금융지주의 대주주 역할을 하고 있다.
주로 부동산 처분 관리업무를 해오던 자산관리공사(당시 성업공사)가 구조조정 업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외호나위기 이후부터다. 당시 400여 명이던 직언 수는 금융기관으로부터 매입한 부실채권 관련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한 때 1,600명까지 급증했다. 당시 5개 퇴출은행원과 시중은행의 구조조정 인력 등 구조조정에 따른 고학력 실업자를 흡수하는데도 상당 부분 기여를 한 셈이다.
자산관리공사는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입찰, 자산담보부증권(ABS) 발행 등을 통해 부실채권을 정리하며 ‘배드뱅크’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자산관리공사는 외환위기 이후 39조7,000억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 110조9,000억원에 달하는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매입했다. 또 부실기업의 워크아웃을 주도한 결과 대우인터내셔널, 쌍용건설 등 많은 기업들이 과거의 부실을 털어내고 정상화되도록 했다.
한보철강, 대우종합기계 매각에 이어 2006년 말에는 대우건설 M&A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기업회생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시장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부실기업들의 부활에 힘입어 2006년 말 자산관리공사에 할당된 공적 자금은 100% 회수되었다.
12.뒷북치기 바쁜 금융감독기관
“금융감독기구들이 형식적인 감사로 카드 대란을 예방하지 못했다.” (2004년 7월 16일 감사원 발표)
지난 2002년 카드 사태는 김대중 정부의 인위적인 내수 부양이나 재경부의 정책 실패 등에도 원인이 있지만 금융감독시스템의 실패도 지적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외환위기의 책임은 부실한 금융감독시스템에 있다”는 금융감독원 발표(1999년 1월 20일)처럼 금융감독시스템의 미비는 1997년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더니 또 다시 400만 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양산의 주범으로 꼽힌 것이다.
한마디로 금융감독의 비효율성이 우리 경제를 반복적인 위기로 몰아넣는데 한몫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외환위기를 겪은 탓에 한국은 선진국 못지 않은 금융감독제도를 갖췄다. 금융산업의 겸업화∙복잡화 등으로 통합 금융감독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를 설립했고 1999년에는 은행감독원∙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 및 신용관리기금을 통합해 금감원을 설립했다. 이들 기관은 인가권이나 제재권 등 포괄적인 감독권을 보유,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금융계의 검찰’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외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실은 빈약한 형편이다. 사전적인 예방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금융위기 때 ‘뒷북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강동수 KDI 연구위원은 “금융감독시스템이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미리 포착해야 하는데도 새로운 충격에는 무방비 상태’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집값 폭등 및 가계부채 증가이다. 물론 이는 전세계적인 유동성 과잉에다 정부의 잇따른 실책 탓도 있지만 금융감독당국도 초기 주택담보대출 문제를 등한시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비켜나갈 수 없다. 더구나 뒤늦게 강도 높은 대출규제책을 잇따라 내놓다 보니 이제는 가계파산과 부동산시장 경착륙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예금은행이 해외에서 단기로 빌려온 외화가 주택담보대출 재원 등으로 운용되면서 부동산가격 급등을 부채질했다”면서 “금융통화당국이 뒤늦게 창구지도에 나섰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금융감독당국이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추지 못하면서도 조직이기주의에 매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실제 통합 금융감독기구가 출범했지만 금감원의 경우 과거 기관별 감독체제를 유지하면서 은감원∙증감원 등의 4개 기관의 출신별로 간부 인사가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방화∙글로벌화∙겸업화 등 급변하는 금융환경변화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금감원 간부들의 비리가 속출하면서 한국은행과 예금보험공사 등 관련 금융기관에 의한 적절한 협력과 견제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한국은행과 예금보험공사 등 관련 기관의 정보접근성을 높이고 공동공사, 부분적인 중복감독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강 연구위원은 “금융감독기관의 통합은 전세계적인 추세이며 여러 문제점도 법적 및 제도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 크다”면서도 “금융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는 금감원 내부나 관련 기관간의 업무협의나 정보공유도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LG카드에 대한 LG그룹의 출자, 외환은행의 매각 등에서도 보듯 관치금융이 여전하다는 비판도 있다. 권 수석연구원은 “당시에는 외환위기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 금융시스템의 안정성도 떨어져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13.용두사미로 끝난 공공개혁
지난1998년 1월 5일 오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일산 자택에서 김 당선자는 비상경제대책위원 6명을 물러 긴급경제현안을 논의하면서 정부조직개편위원회 출범을 지시했다. 개혁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설득하려면 청와대와 정부가 고통을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묻어있었다.
불과 이틀 뒤 가동에 들어간 정부조직개편위원회는 IMF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정부 부처의 덩치를 줄이고 효율성을 꾀하기 위해 ‘메스’를 가했다. 정개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기획예산위원회(現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은 이후 1년 여 동안 공무원 수를 20% 이상 줄이고 6개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정부조직개혁은 혁명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개혁의 칼날은 급속히 무뎌졌다. IMF 당시 기획예산위원장으로 공공개혁을 직접 주도했던 진념 前 경제부총리는 “영국의 성공은 대처수상의 개혁을 이후 정부에서도 이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그런데 (DJ정권의) 작고 효율성 있는 정부는 오간 데 없고 일자리까지 기업활성화에서 찾기보다는 공공부문에서 만들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 ‘작은 정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져 갔다. 공무원의 수는 오히려 늘었고, DJ정권 초기에 일었던 공공개혁은 끝내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이 때문에 기업, 금융, 노동, 공공 등 IMF의 4대 개혁 프로그램 가운데 공공부문이 가장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위기 극복 위해 ‘작은 정부’ 지향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뒤 정부나 공기업 등 공공부문도 구조조정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98년 2월 출범한 DJ정부는 총 3차례에 걸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해 1997년 말 정원(70만명, 교원∙경찰 제외)의 20%에 상당하는 14만1,000명의 공무원을 줄였다.
정부 조직 또한 전체 과단위 조직의 20% 가량인 1,300여 개 과를 감축했다. 초기에 실시된 1차 개혁에서 내무부와 총무처는 행정자치부로 통합됐으며 대통령의 국정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부총리제도 폐지했다. 공보처, 정무장관, 민주평통자문회의 사무처 폐지 등 정무직 장∙차관급을 100명에서 87명으로 감축하는 등 ‘작은 정부’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방만한 경영의 상징이던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도 단행됐다. 1998년 당시 24개 공기업 중에서 기업성이 강한 11개 공기업을 민영화 대상으로 꼽았다.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국정교과서, 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공사 등 6곳이 민영화됐으며 국민의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에 한국통신과 담배인삼공사의 정부지분이 매각됐다.
구조조정과 함께 공기업의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1개 부담금을 비롯한 준조세 정비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덩치가 가장 큰 한국전력, 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3곳의 민영화는 끝내 무산됐고 정부가 대주주인 국책은행의 민영화는 손조차 못 댔다.
1년 여 만에 빛 바랜 공공개혁
정권 초기의 서슬 퍼렇던 개혁의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돼갔다. 2, 3차 개혁에서 기획예산처, 국정홍보처, 여성부가 신설되고,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가 부활됐다. 그 결과 ‘17부 2처 16청’ 체제이던 중앙부처가 ‘18부 4처 16청’으로 오히려 더 확대됐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과 함께 ‘작은 정부’ 추진 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다.
정부가 ‘소프트웨어 개혁’을 주장하면서 목표관리제, 성과연봉제, 개방형직위제도, 책임운영기관(에이전시)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 때부터다. 보수적이고 무사안일한 공직사회에 경쟁 개념을 도입하겠다는 시도는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위기감이 사라진 개혁은 더 이상 개혁이 아니었다.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개혁의지가 출범 1년 여 만에 꺾인 것은 DJP연합, 요소야대 등 정치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DJ정권에서 2년 넘게 공공개혁을 주도했던 이계식 前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장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DJP연합정권이 위기극복이라는 명분으로 개혁안을 밀어붙였지만 국회에서 내용이 훼손되기 일쑤였다”면서 “특히 1999년 4월 보선을 앞두고 자민련은 민주당의 발목이 아닌 멱살을 잡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前 실장은 “정권 초기 정부 개혁을 수 차례 강조하던 DJ가 시간이 흐르면서 말과 행동이 차츰 달라졌다”면서 “어느 순간 보니 정부개혁의 우선순위가 7번째로 밀려나 있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들어 ‘공공개혁’ 물거품 돼
미완의 DJ정권의 공공개혁은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계획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목표로 했던 국민의 정부와는 달리 참여정부는 조직 통폐합 위주의 조직개편에서 벗어나 부처간 갈등∙중복기능 중심으로 개편하는 ‘일 잘하는 정부, 신뢰 받는 정부’를 어젠다로 내걸었다.
기획예산위원회에서 공공개혁을 담당했던 한 민간위원은 “참여정부 출범 당시 親 노조 성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노조에서 반대하는 공공개혁을 추진하는 일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혁신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지만 공무원 수는 되려 늘어났고 민간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정부가 떠안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참여정부 들어 공무원 수는 48,499명이나 증가했으며, 장∙차관급 정무직 공무원은 국민의 정부 때보다 28.3%나 늘어났다.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당시 감원된 인원을 모두 원상회복하면서 전체 공무원도 93만 명을 넘어서 공무원 100만 명 시대를 앞두고 있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대마불사, 은행불사의 각종 신화들은 깨졌지만 공무원 사회를 일컫는 ‘철밥통 불사’의 신화는 무너지기는커녕 철옹성으로 더욱 굳어진 셈이다.
14.노동시장도 양극화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및 정규직 노동자들은 ‘철밥통’으로 굳어진 반면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은 ‘지나친’ 노동유연성 때문에 고용불안이나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 유연성의 제도적 틀은 갖춰
지난1998년 2월 6일 노사정위원회는 출범 20여 일 만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내놓았다. 이른바 노사정 대타협안으로 정부와 재계, 노동계의 고통분담안을 담고 있었다. 기업 투명성 제고 및 구조조정 촉진, 물가안정, 실업대책 및 사회보장제도 확충, 수출 증대 및 국제수지 개선 등 합의 항목은 90개에 달했다.
하지만 핵심은 고용조정제와 근로자 파견제 도입 등 노동시장 유연성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해고의 길을 열어 놓아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개선하고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을 쉽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계는 총파업 운운하며 강력 반발했지만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와 “더 반발하면 떼놓고 가겠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엄포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 공동 기자회견 자리에서 노동계는 “정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원망스럽다”(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 “착잡한 심정”(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리)이라고 한 숨을 쉬었지만 이미 ‘떠나버린 배’였다.
배규식 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DJ정부 때 정리해고가 가능해지면서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 고용의 경직성이 상당 부분 완화됐다”면서 “대량실업에 대응해 고용보험 확대 등을 통한 사회 안전망을 어느 정도 갖춘 것도 성과”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과거의 ‘덩치불리기’식 경영에서 벗어나 수익성과 효율성을 중시한 것도 고용시장에 변화를 몰고 왔다. 성과급과 연봉제가 도입됐고 계약직 및 경력자 채용 등이 확산됐다.
실업자∙비정규직 양산으로 갈등 증폭
DJ정부가 짧은 시간 안에 재벌 및 금융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 등에 나선 데다 정리해고까지 쉬워지면서 실업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997년 末 56만 명이던 실업자 수는 1998년 7월 165만 명으로 늘었다. 불과 7개월 만에 100만 명 이상이 더 급증한 것이다. 실업률도 같은 기간 2.6%에서 7.6%로 5.0%p나 더 늘었다. 실업률은 1999년 2월 8.6%까지 치솟았다. 사회 안전망을 갖췄다지만 한 번 실업에 빠지면 재취업하기 어려운 한국적 현실 앞에 수많은 가장들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비정규직도 급증했다. 지난 1997년 末 상용직 비중은 54.1%에서 2000년 47.5%로 6.6%p나 감소했다. 반면 임시직은 같은 기간 31.6%에서 2.5%p 늘었고, 일용직도 14.3%에서 18.1%로 3.8p 증가했다.
대규모 실업사태와 고용불안이 현실화되면서 노동계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1998년 129건이던 노사분규 발생 건수는 1999년 198건, 2000년 250건으로 급증했다. 또 은행 및 부실기업 퇴출, 공기업 구조조정 등에 반발한 노조측이 탈퇴하면서 노사정위원회도 유명무실해졌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부 교수는 “DJ정부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인턴제, 계약직 등을 사실상 권장하면서 비정규직이 늘었다”면서 “반면 질 좋은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자 노동계의 반발을 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시장도 ‘빈익빈 부익부’ 심화
노동부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2006년 末 현재 545만7,000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35.5%에 이른다. 다른 경제협력개발기(OECD) 국가들에 비해서도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니다.
하지만 OECD 등 국제 기관들이 여전히 국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하위권으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정규직 근로자의 고용보호수준이 상대적으로 과도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배 본부장은 “대기업 근로자는 해고는 물론 전환배치 등 회사 내부의 기능적 유연화 정도도 떨어진다”면서 “반대로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은 지나치게 유연해 고용불안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일부 대기업 노조는 전투적 노동운동으로 산업 공동화, 수출차질, 외국인 투자 저해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2006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한국의 노동유연성은 전체 비교대상 61개국 가운데 46위를 차지해 선진국은 미국(6위), 일본(16위)은 물론 중국(38위), 대만(21위) 등 아시아 경쟁상대국보다도 훨씬 낮았다.
특히 노사간 갈등 정도를 반영하는 노사관계부문은 61위로 전체 국가 중 꼴찌를 차지했다. 실제 우리나라의 노사분규 강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92~2001년 동안 우리나라 모든 산업과 서비스업에서 근로자 1,000명 당 근로손실일수는 93.5일로 같은 기간 영국(21일), 미국(48일), 스웨덴(30일), 독일(9일), 일본(2일) 등 여타 선진국보다 크게 높았다.
나성린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노조파업일수가 최근 줄어들기는 했지만 불법 및 폭력 파업은 여전하다”면서 “노동유연성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다소 개선됐지만 노사관계는 여전히 경직돼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태원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도 “노사관계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점에서 극에 달했다가 2만 달러가 되면 안정국면에 들어간다”면서 한국노총은 물론 민주노총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할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자 내부 소득도 양극화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증가와 내수 침체, 대기업-중소기업간 양극화의 여파로 근로자 내부간의 소득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정규직이 강성노조를 앞세워 매년 높은 임금상승률을 기록한 반면 비정규직은 기업들의 인건비 절감 및 고용유연성 등의 충격을 그대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노동고용정책비서실이 발표한 ‘2006년 비정규직 통계 조사(통계청 표본조사)’에 따르면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9,590원인 반면 자발적 비정규직은 8,353원, 비자발적 비정규직은 5.172원에 그쳤다. 비자발적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의 54%, 자발적 비정규직의 62% 수준에 불과한 셈이다.
더구나 이들은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어 앞으로 근로빈곤층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우려된다. 사회보험가입률은 정규직 및 자발적 비정규직자의 1/3 밖에 안 됐고, 근로복지수혜율은 무려 6~7배 차이가 났다.
같은 정규직 내에서도 정규 임시∙일용직은 상용직은 물론 다른 비정규직보다 더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06년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평균 9,590원을 100%로 놓고 봤을 때 정규상용직은 122%(1만1,697원), 정규 임시∙일용직은 55.2%(5,291원), 비정규직은 71.0%(6,810원)으로 나타났다. 정규상용직과 정규 임시∙일용직의 임금 격차가 50%p 이상에 달한 것이다.
이 같은 근로자간 소득양극화는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OECD의 2002년 고용통계에 의하면 상용직 대비 임시직 임금의 비중은 독일이 83%, 벨기에 79%, 핀란드 77%, 영국 74%, 이탈리아 72% 등이었다.
소득양극화로 중산층이 감소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2004년 현재 한국의 ER지수(소득 5분위별, 전 가구 기준)는 0.0665로 미국(0.0833)보다는 낮았지만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영국(0.0653)이나 일본(0.0507)을 웃돌았다. 프랑스(0.0434), 독일(0.0474) 등 복지와 분배를 강조하는 유럽과 격차는 더 컸다. ER(Esteban & Ray)지수는 높을수록 계층간 소득양극화가 심하다는 뜻이다.
연구소는 “성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게 중산층을 복원하고 소득양극화를 막는 해법”이라면서 ‘저소득층의 빈곤 대물림을 막기 위해 공교육을 강화하고 재정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회복지지출 규모와 복지행정 인프라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15.외환위기가 배출한 ‘이헌재 사단’
1998년 6월 초 금융기관들이 자체적으로 집계해 회생불가로 판정한 기업은 14개 업체에 불과했다. 삼성, 현대, 대우, LG, SK 등 5대 그룹 계열사는 아예 제외됐다. 그랬던 퇴출기업 수가 보름 후 6월 17일 금융감독위원회가 기업부실판정을 내리던 날 당초의 4배 가량인 55개사로 늘어났다. 5대 그룹 계열사도 20개가 포함됐다. 이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이헌재 초대 금감위원장의 막강 파워를 모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1998년 IMF 위기극복과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은 이헌재 금감위원장을 주축으로 한 소위 ‘이헌재 사단’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헌재 위원장을 비롯한 그의 측들의 영향력은 한 기업의 생사를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무소불위’ 그 자체였다.
이헌재 사단을 탄생시킨 것은 외환위기였다. 1998년 재정경제부 차관이던 정덕구 現 열린우리당 의원은 “나라를 부도위기에서 구하라는 국민적 특명이 있었기에 이헌재 씨 등이 강력하게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을 밀어 부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DJ도 이헌재 위원장을 전적으로 신임하며 힘을 실어줬다.
기업구조조정은 이헌재 씨의 경기고 동문이며 지금은 고인이 된 오호근 前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이 이끌었고 한국신용평가 사장 시절 호흡을 맞췄던 서근우 現 하나은행 부행장과 이성규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이 실무국장급으로 행동대장 역을 했다. 경기고 후배인 김석동 現 금감위 부위원장은 재경부와 금감위를 오가며 측면 지원했다.
2000년 재경부 장관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이 위원장이 2004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 이헌재 사단은 지금도 한국 금융계를 주름잡고 있다. 이성남∙이덕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과 황영기 前 우리금융지주 회장, 박해춘 現 우리은행장,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 등이 헌재의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모두 학연과 지연, 직연으로 이 부총리와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 아울러 이헌재의 분신으로 불리는 김영재 前 금감위 대변인은 칸서스자산운용 회장으로, 죽마고우인 오호수 前 증권업협회장은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으로 현업에서 뛰고 있다.
그러나 ‘이헌재’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은 부작용도 초래했다. 이 前 부총리의 광주서중 후배로 이헌재 사단의 일원으로 꼽히는 이강원 前 외환은행장과 이헌재 펀드를 이어받아 보고펀드를 출범시킨 변양호 前 재경부 금융정책국장도 론스타에 대한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 검찰수사를 받다 구속됐다.
재정경제부의 한 간부는 “이헌재 前 부총리가 사적 인연에 많이 의존했고 이 前 부총리와 친한 인사들이 호가호위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이 前 부총리나 이헌재 사단이 외환위기 극복과 신용불량자 사태 처리에 있어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16.글로벌 스탠더드의 허와 실
“뉴브릿지에 제일은행을 매각한 것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2005년 1월 14일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첫 정례 브리핑 자리에서 이 前 부총리는 “외환위기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국제적인 신인도 등을 고려해 불가피했다”면서도 “당초 기대했던 선진금융기법 도입 등의 효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제일은행을 매각한 지 5년 만에 사실상 ‘과오’를 자인한 셈이었다.
이 같은 발언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대가로 한국에 요구했던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즉 영미식 금융자본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IMF에 의해 단기간에 강제 유입되면서 한국경제에 뼈아픈 손실을 끼쳤다는 얘기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뉴브릿지 같은 벌처펀드(Vulture Fund, 파산기업 등을 싼 값에 인수해 비싼 값에 되파는 자금)에 은행을 매각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면서 “미국 월스트리트 자본의 이해가 IMF 개혁 프로그램에 교묘하게 녹아 들어가면서 투기자본의 배만 불려준 꼴”이라고 말했다.
단기간에 강요된 글로벌 스탠더드
“아시아 경제위기의 결과 중 하나는 서방에서, 특히 미국에서 실행됐던 시장자본주의가 우월한 모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1998년 3월 3일 미국 상원청문회에서 그린스펀 前 美 FRB의장)
이처럼 미국은 아시아 경제위기를 전세계로 영미식 금융자본주의를 전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구제금융 조건은 IMF내 미국측 이사의 목소리와 의결권에 의해 정해졌다(美 싱크탱크인 랜드 연구소의 찰스 울프 선임연구원)”는 발언이 공공연할 정도였다.
실제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IMF 프로그램의 60% 이상이 금융 부문에 집중됐다. 이 같은 금융주도의 개혁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자기자본비율(BIS)이 지방은행까지 획일적으로 적용됐고, 부실은행은 해외자본에 매각됐다.
재벌에 대해서는 부채비율 축소, 상호지급보증 해소 등의 정책을 도입해 신속한 재무구조 개선을 강요했다.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450%대였던 부채비율을 2년 만에 200% 미만으로 떨어뜨리라고 했는데 엄청난 무리수였다. 일본은 500%에서 200%로 내려오는데 20년 걸렸다”고 비판했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큰 옷을 입히다 보니 문제가 여기저기서 불거졌다. 은행이 위험이 높은 기업금융을 외면하고 손쉬운 가계대출을 선호하면서 또 다른 위기요인으로 등장했다. 주요 시중은행과 기업들이 외국자본에 헐값에 매각됐고 상시적인 구조조정으로 고용불안을 부추겼다. 기업들은 단기 실적에 연연해 투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특유의 역동성이 떨어졌다.
윤 교수는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할 시스템이지만 영국과 미국처럼 국민소득 4만 달러에 맞는 모범답안이 너무 급하게 무비판적으로 들어온 게 문제였다”면서 “열탕에 있다가 갑자기 냉탕으로 들어가다 보니 심장에 무리를 준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발전모델이 해체되다
이 같은 IMF프로그램의 최종목적은 정부와 재벌이 동맹을 맺고 대형사업에 진출한 뒤 리스크는 금융부문이 부담하는 이른바 ‘정부-재벌-금융간 3각 체제’를 끊어 한국형 선단식 경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DJ정부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재벌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면서 “월스트리트 모델을 지지하는 정부 관료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교조적, 급진적으로 도입하면서 한국형 발전모델의 도전적 요소가 제거됐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재벌의 손발을 묶기 위한 정책도 잇따라 도입됐다. 대표적인 게 지난 2002년 부활한 출자총액제한제도다. 일본은 출총제의 모델이 된 ‘대규모 주식보유한도제’를 시행했지만 지난 2002년 기업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폐지한 바 있다. 기업투명성 강화 등을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면서도 투자 측면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격 도입으로 대기업들을 무장해제시킨 셈이었다.
특히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한 상태에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가능하도록 한 게 기업들의 보수적 경영을 부추겼다. 외국자본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기관투자자들이 자본시장의 권력기관으로 떠오르면서 이른바 ‘펀드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소버린자산운용의 SK공격, 칼 아이칸 연합의 KT&G 경영권 위협에 이어 ‘장하성 펀드’가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게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들은 기업 투명성 제고는 물론 자본시장 확충, 벤처 투자 등으로 금융산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긍정적 측면이 많다. 하지만 지나친 경영간섭이나 M&A위협으로 기업들이 단기 실적에 집착하게 하고 경영권 방어를 위한 현금 확보나 자사주 매입에 역량을 소진하면서 성장잠재력을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영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는 “IMF가 주도한 개혁은 세계화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개방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보완과 사회안전망 구축을 등한시했다”면서 “그 결과 한국경제가 외부환경 변화에 취약해지고 부동산시장의 거품, 양극화, 투자부진, 저성장 등의 문제점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성과가 더 커
하지만 이 같은 부작용에도 글로벌 스탠더드는 한국경제를 한 단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신속한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한국경제의 위상도 높아졌다. 기업회계의 투명성과 지배구조가 개선됐고 수익성 및 주주중심경영도 어느 정도 정착됐다. 금융기관도 관치금융에서 탈피해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췄다.
박재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 및 금융부문의 의식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면서 “우리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로서는 일부 손해는 안고 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나성린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한국적 특성을 가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가령 기업 투명성 제고는 필수적이지만 지배구조 등은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록 강요된 틀이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는 한국경제의 필수조건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박영철 교수는 “진척된 세계화를 감안할 때 뒤로 후퇴할 수는 없다”면서 “세계화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면 영미형 제도를 근간으로 세계화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혼합식 모형이 우리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의 틀”이라고 밝혔다.
17.반외자 정서 키운 투기자본 ‘먹튀’
지난1998년 1월 4일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일산 자택에서 있었던 만찬에는 김용환 비상경제대책위 대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재원장관 등 거물급 인사들이 한꺼번에 모여 경제위기 타개방안을 논의했다. 눈에 띄는 것은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참석했다는 점이었다.
DJ는 국제 금융계의 거물인 소로스가 투자하면 한국의 국제신인도도 올라갈 것으로 보고 협조를 요청했다. 1년 뒤인 1999년 1월 마침내 소로스 펀드는 서울증권을 인수, DJ에 화답했다. 하지만 소로스 펀드는 사옥매각 등으로 회사현금을 늘린 뒤순이익보다 많은 배당, 자사주 유상소각 등을 통해 ‘단물’을 빼먹고 결국 900억원의 투자이익을 남기고 지난 2005년 12월 철수했다.
이처럼 돈을 쫓아 움직이는 국제자본의 냉혹한 속성은 BIH의 브릿지증권 고배당 및 유상감자, JP모건의 만도 우선주 유상감자, 칼라일의 한미은행 매각, 골드만삭스의 진로 지분 처분, 론스타의 외환은행 임직원에 대한 대규모 감원 등에서 무차별적으로 드러났다. ‘외국자본 유치는 무조건 善’이라는 발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드러나면서 ‘반외자 정서’가 팽배해지는 순간이었다.
외국자본유치를 위해 자본시장을 열었지만 기업가치만 훼손시키는 투기자본만 들어왔다는 얘기다. 실제 한국은행에 따르면 자본이익을 노리는 기업사냥식 인수합병(M&A)형 외국인 투자자는 지난 1997년 10억1,000만 달러에서 지난 2005년 52억7,000만 달러로 7배 이상 늘었다. 반면 공장설립 및 고용창출 등을 동반하는 그린필드(Greenfield)형 외국인 직접투자는 같은 기간 62억1,000만 달러에서 63억 달러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서비스업에 대한 규제나 노사관계불안 등으로 공장건설형 외국인 투자가 저조한 틈을 타 ‘머니 게임’에 치중하는 투기자본만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 투기자본은 외환위기 여파로 국내 기업의 경영권이 취약한 틈을 타 고배당이나 자사주 매각 등을 요구, 기업의 잠재성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한 관계자는 “회사(삼성전자)가 살려고 우리 보스(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다. 외환위기 이후 유동성 마련을 위해 유상증자를 하는 바람에 이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율이 1998년 3.51%에서 1.91%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요구에 취약해지고 말았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외국자본의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우리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외국자본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자본의 투기성, 비공익성, 투자이익의 해외유출 등의 독소를 완화할 수 있도록 법적∙경제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일부 부작용 때문에 ‘반외자 정서’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재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시아 위기 당시 일본이 자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국제신용기관에 대해 역으로 신용평가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비웃음만 샀다”면서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며 제도개선방향도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18.외환위기가 남긴 교훈과 과제
외환위기는 6.25 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일컬어지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경제에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으로 ‘대마불사’의 신화는 깨졌고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 국내외 자본과 기술이 접목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모든 게 ‘미완(未完)’으로 끝나 지금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성장단계에서 당연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양극화에만 몰두하는 것도 시장경쟁을 저해시키는 요인이다. 노동의 유연성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정규직만 늘어 성장동력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과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본다.
미흡한 구조조정, 성장동력 떨어뜨려
외환위기를 1년 만에 극복한 나라는 세계에서 거의 없다. 보통 2년 6개월은 걸린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과의 합의에 따라 추진된 각 부분의 구조조정은 시장시스템을 경쟁체제로 전환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건전성 규제를 통해 주먹구구식이던 금융기관의 대출관행을 없앴고 부채비율 감축과 결합재무제표 도입 등으로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쟁력을 한 단계 높였다. 이 과정에서 부실은행과 기업들이 정리됐고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했던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공기업 민영화도 가속화됐고 외환자유화도 추진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투자적격으로 올라섰고 바닥이 드러났던 외환보유고도 1999년 6월말 600억 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추진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금융시장이 안정되기 시작한 1999년 하반기부터 청와대가 남북관계 개선에 더 관심을 보였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최흥식 원장은 “구조조정을 하다가 말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경제가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면서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퇴출될 기업까지도 지원해 성장력 저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도 “지금이라도 기업과 서비스 분야의 구조조정은 지속해야 한다”고 했다.
양극화 부각 복지에 주안점 둬선 곤란
외환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통계청의 조사에도 2006년 말 현재 우리나라 가구주의 45.2%는 하류계층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3년 전보다 2.8% 늘어난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 가구당 가처분소득증가율은 10.5%였으나 환란 이후에는 4%로 급락했다. 상위 20% 계층은 가처분소득증가율이 10.2%에서 4.5%로 떨어진 반면 하위 20% 계층은 10%에서 2.3%로 급락, 큰 차이를 보였다.
최흥식 원장은 “구조조정의 결과 소득격차는 더 벌어졌고 외환위기가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양극화 문제는 경제발전단계에서 늘 제기되는 과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양극화 문제를 부각시켜 복지에만 정책의 주안점을 줘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우리의 성장 규모에 비춰 복지가 크게 낙후됐기 때문에 복지정책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지만 성장이 우선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시장의 경쟁시스템을 강화하는데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배상근 박사는 “경제주체들간 신뢰와 결합력이 약해지면서 정부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면서 “창구지도나 주택담보대출 축소 등 과거와 같은 정책은 통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정책추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는 시장친화적 정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는 아직 성장에 배고픈 단계
LG경제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설비투자부진을 꼽았다. 유형자산증가율의 경우 외환위기 이전에는 15.4%였으나 최근에는 1.8%로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배상근 박사는 “우리 경제를 자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실 우리 경제는 아직도 성장에 배고픈 단계”라고 말했다.
이규성 前 재정경제부 장관은 ‘한국의 외환위기’라는 저서에서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면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유아보육과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