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 장흥군수산업협동조합 00주년"에 즈음하여
장흥군수산업협동조합은
지금으로 부터 딱 100년 전인
1917년 11월 5일
현재 회진 초등학교가 위치한
회진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탕게쪽 언덕에 자리하여
장흥군수산조합으로 태동 되었다.
회진면지에 수록된 그 역사를 간추리면
1923.11.11 장흥군해태조합으로 개편
1938.12.13 관산출장소 개설
1946. 5. 1 장흥어업조합으로 개칭
1950. 6.25 사변으로 본소 건물 전소
1953. 회진초등학교에서 현 위치로 이전
1962. 4. 1 관산어업협동조합 분할 발족
1977. 4. 1 장흥수협조합으로 개칭
1982.10.23 본소 장흥읍으로 이전
1994. 3.29 어업인 복지회관 준공
2004. 6.21 본소를 회진 현 위치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장흥군수협 창립 100주년
우리는 100이란 숫자에
좋은 의미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첫번째로 치른 행사가
100일 잔치이다.
이는 100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날을 기념하면서
앞으로도 건강히 잘 살아 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희망을 담아
보편적으로 성대하게 치른다.
또한 돈이 아주 많은 부자를
백만장자라고 하는데
100이란 숫자는
기쁨과 완성, 희망 등
여러 좋은 의미와 메세지가 있는것 같다.
부부가 함께 오래도록 살다가 같이 죽는다는 백년해로라는 말도 있는데
장흥군수협이 우리 지역 어민들과 같이
무려 백 년을 함께 동고동락 해왔다는 것은
우리 장흥군수협과 지역 어민들의
자랑이요 축복이며 경사이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100년의 역사를 가진 협동조합은
우리 장흥군수협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장흥군수협의 창립 100주년을
지역민과 더불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지난 100년의 세월동안 나이드신
어르신들의 기억에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주요 업적들을
자료와 함께 몇 까지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번째로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이다.
소화 11(1937)년 11월 11일에
현재 회진초등학교가 있는 자리에서
전국 해태 생산량 1위로
조합 창설 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를 축하하고 공로자에게 표창도 하면서
창립 20주년 기념비를 세우고
전 조합원의 축제 속에 성대하게 치루었다.
♧장흥군해태어업조합 창립20주년 기념비 (1937.11.11) 현재 장흥군 수협 본소앞에 있음
♧장흥군 해태어업조합 창립20주년 기념사진
-현재 회진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당시 수협건물
해태 생산량이 전국 1위가 되기까지는
회진면 대리 김도선씨(김정태 조부)의
공로가 많이 있었다.
해태는17세기 중엽에 광양 태인도에서
양식기술 성공으로 시작되었는데
대나무나 참나무 가지를 뻘바닥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은 물에 세워서
김을 이 가지에 붙어 자라게 한 양식방법이였는데 1929년 부흥발이 고안되어
해태 양식업에 혁신적인 영향을 주었다.
1928년 조선총독부 국립수산시험장
죽도해태연구소가 설치되어
당시 연구소 기사였던 김도선씨가
렴홍발의 결함을 보완하여
대나무를 새끼줄로 엮어 옆으로 눕인 뜬 발형식인
부홍식 양식기술을 새롭게 개발하여
특허까지 내어 우리 지역에 보급하면서
김의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1936년에는 전국생산량 1위로써
140만속 생산에 80여만원 소득으로
조합설립 20주년 기념비를 조합광장에 세우고
2,500여 어민들이 성대한 축제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해태 다수확 공로자 표창을 수상한
대리 김도선씨가 받은 은컵 부상품
(자료제공:김정태)
♧당시 해태 생산 전경 (자료제공 :김정태)
◼두번째 일제 강점기때
태평양전쟁(1941.12.8개전)당시
장흥군수협이 대덕, 회진, 관산 어민들이
해태를 팔아 모금한 성금으로
전투기 한 대를 구입하여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에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흥군수협이
전국에서 제일 부강한 조합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한다.
♧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대덕,회진,관산 주민들이 해태를 팔아
성금을 모금하여 제작된 함상 전투기인
전남장흥호 ○국-763
◼세번째 현재 대덕중학교가 있는 자리에
장흥군수협이
지역민들의 병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했다는 사실이다.
의료시설이 열악한 시대에도
지역 어민들의 건강까지 생각하면서
수협이 병원까지 운영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에도 말 두 필을 기르면서
조합장이나 직원들 출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지도선 두 척을 보유하여
어민들의 삶의 현장인 바다에서
현지 지도를 하면서
어민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1950~60년대 보릿고개 시대에
쌀밥을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에도
수협직원들 집에가면 꾸정물 통에서도
쌀밥을 구경할 수 있었으며,
수협 운동장에는 테니스장 시설을 갖추고 있어 휴식시간이나 휴일에는 테니스 운동을 하면서
여가 시간을 보냈기에
장흥군수협 직원들은
지역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1970년대까지 이 지역 젊은이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었던 곳은
공무원도 아니고 삼성`현대 대기업도 아닌
장흥군수협 직원이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일 뿐이다.
◼장흥군 수협의 현재 와 미래
그런데 1970년대를 지나 산업화로
1980년대~90년대 들어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농을 시작하면서
농어촌의 인구가 점차 감소 되어가고
수협도 더불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쇠퇴기에 접어들고 만다.
2000년대 들어
정부의 경영개선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2008년 경에 부실조합으로 낙인 찍혀지더니 2017년 현재까지 부실조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흥군수협 창립 100주년 기념식 행사도
조촐하게 준비할 수 밖에 없단다.
이런 안타가운 현실에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게운치 못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이 느끼는 비애가 아닐 것이다.
지난 100년이란 세월동안
우리 대덕,회진,관산, 안양 지역 어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장흥군수협은
앞으로도 100년 이상을 또 함께
동고동락 해야 될 우리들의 수협이다.
하루라도 빨리 장흥군수협이
건전조합으로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이번 11월 5일에 간소하게 치루어질
창립 10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만이라도
100년 전 창립 당시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계기의 장을 마련하는
기념식이 되었으며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장흥군수협 창립 100주년을
진심으로 거듭 축하 드립니다.
2017. 10.
♡회진을 사랑하는 사람 이 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