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를 정리한뒤 이곳에 올리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
망설였습니다만 혹시 울트라를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같아 올립니다.
하지만 너무 길어서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달리는 게 무언지도 모르고 트레드밀에 처음 오른지 3년,
그리고 마라톤이라고 할만한 달리기에 빠진지 2년 6개월만에
100km 울트라에 도전했다.
그동안 참가한 대회가 모두 26차례.
나름대로 주변사람들로부터 “나이생각을 하라”는 말을 들어가며
참가한 실적이니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는 횟수다.
그러나 정말 내가 이렇게 100km를 달리겠다고 할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풀코스도 정신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아닌가?
그러나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작년 가을에 저지를 뻔 했던 일을 발가락 부상으로 6개월 정도 늦췄을 뿐이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보고 싶은 것이다.
마누라의 걱정을 뒤로 하고 이제 결승점까지 달리는 일만 남았다.
새벽 5시 경기 시작 시간에 여유있게 임하기 위해
전날 저녁 8시쯤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 2시 30분
알람이 울리자마자 일어났다.
컨디션은 괜찮은 것 같았다.
찌뿌드드한 기분도, 특별히 불편한 곳도 없는 것같은 느낌이다.
2주전부터 이상신호를 보내온 왼쪽 무릎도 그런대로
큰 말썽을 부릴 것 같지는 않은 상태다.
잠시 이곳저곳을 움직여본 결과 전반적인 판정은 ‘양호‘.
근육을 푼다는 의미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하고
마누라가 일찍 일어나 준비한 우동으로 아침식사를 한뒤
옷을 입으면서도 계속 ‘꿀떡’을 먹으며 배를 채웠다.
바나나도 한개. 물도 여러 컵을 마셨다.
중무장이 필요한 날이다.
어제까지 준비해놓은 짐들을 챙기고 “잘 뛰라”는 마누라의 인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맞으려는지 하늘은 어둡고 바람은 선선하다.
그러나 춥다는 느낌은 전혀 없어서 민소매를 입고 뛰면 딱 좋을 것같은 날씨다.
차를 몰고 여의도에 도착하니 새벽 4시를 막 넘은 시각.
유람선 선착장 앞에 차를 대고 대회장으로 가 배번을 받는 곳에서
제비마의 이석우씨와 이은세 회장을 만났다.
제비마에서 혼자 참가한 송주석씨 응원을 나온 것이다.
참 대단한 열성이다.
이 시간에 자기는 참가하지도 않는 대회에 동료를 챙겨주러 나타나는 정성은
누구도 따르지 못할 수준이다.
거기다 전복죽과 커피까지 거의 강제로 들이대며 먹는 것을 확인한다.
덕분에 나도 다시 에너지를 보충했다.
불빛속에 참가자들이 여기저기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격려하며 웅성거리고 있다.
탈의실로 가 상의 2개에 배번을 달고 본부에 맡길 짐과
80km 지점에 보낼 물건들을 대충 정리하면서 바셀린을 바르는 등
무장을 마치는데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출발차림은 한마동의 민소매 상의와 반 타이즈에 하얀색 모자로 정하고,
땀손수건, 면장갑, 선글래스, 레이스벨트 등을 챙긴뒤
화장실에 한번 더 나녀오고 나니 출발 5분전.
미처 생각을 못했던 회사 동료 백종호가 다가와 인사를 하기에
서로 잘 뛰자는 각오를 다지고 출발을 기다린다.
대회장 아치에 걸린 대형시계가 0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5, 4, 3, 2, 1, 0 드디어 출발이다. 새벽 5시---날은 아직 어둡다.
♦0~10km (55분 13초)
출발선을 지날 때의 설렘과 흥분은 항상 가슴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 나 이제 간다. 기다려라”라고 혼자 인사말을 하며
달려나가면 가슴이 뭉클해온다.
어둠속에서도 참가자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응원도
가슴에 와닿았다.
한강을 왼쪽으로 끼고 내달리며 어둠속에 우뚝 선 63빌딩을 바라본다.
오늘 몇 번을 보아야 할까? 아마 그 앞을 4번은 지나가게 되겠지.
마지막 4번째는 완주를 눈앞에 두고 모든 고통을 잊으며
눈물이라도 머금고 바라보게 될까?
그 전에 혹시 달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까?
이 길의 끝이 과연 있기는 있는걸까?
생각은 끝이 없고, 사방이 어두운 만큼 내가 가야할 길이 두렵고 불안하면서도
한편 직접 느껴봐야겠다는 호기심도 커진다.
목표는 대충 40km까지 km당 6분, 40-60km까지는 6분-6분30초,
60km 이후는 6분30초-7분으로 잡았다.
중간에 이럭저럭 휴식과 급식에 필요한 시간을 총 30분으로 잡아도
이렇게 하면 대략 11시간 30분 안에 골인할 수 있을 것같다는 계산이다.
출발과 동시에 쏜살같이 앞서 나가는 선두그룹과 그 뒤의 중간 그룹,
그리고 누가 뭐래도 자기 페이스를 지키겠다는 마지막 그룹까지
대충 3개 정도의 무리로 나뉘었다.
나는 중간그룹의 꽁무니에 붙어가다가 페이스가 빠른 것같아
약간 뒤로 쳐졌다.
맞바람이 만만치 않았지만 아직 초반이라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상황이다.
바람속에서 강물과 봄꽃과 그리고 이슬 먹은 풀들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늦봄의 새벽 냄새다.
살아있다는 느낌, 바로 그거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 힘차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10~20km (55분 9초) (누적 1시간 50분 22초)
두 번째 급수대인 10km 지점에서 자봉을 하는 중앙마라톤 이우성 고문과 허범수씨를 만났다.
이 고문의 ‘화이팅’ 소리가 반갑고 고맙다.
비록 지금은 함께 훈련하지 않지만 달리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소박하고 애정어린 배려다.
한남대교를 지나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성수대교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이 보인다.
동이 트는 것이다.
옅은 구름에 가렸지만 서서히 붉은 색을 더하며 솟아오르는 강한 빛이
한강물에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눈이 부시다. 대지위로 솟구치는 해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달리는 내 몸속으로
태양의 붉은 기운이 가득차는 느낌이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몸이 둥둥 뜬다. 러너스 하이다.
한반도 동쪽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다.
청담대교 근처 15km 지점 못미친 곳에 이르니 벌써 반환점을 돌아오는
선두가 지나간다.
옆을 스치며 내닫는 발자국소리가 마치 하프코스 선두그룹의 그것처럼 크고 경쾌하다.
내가 전력질주하는 속도보다 빠르고 보폭도 훨씬 큰 것같다.
저 페이스로 100km를 달린다는 말인가?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역시 당초 계획했던 km당 6분의 속도보다 빠르지만
당분간 이 페이스를 유지해보기로 마음먹는다.
♦20~30km (55분 6초) (누적 2시간 45분 29초)
천호대교 근처 20km 반환점 직전에 카보샷 1개를 먹고
급수대에서 물만 한잔 마신뒤 계속 페이스 유지.
이제부터 뒷바람이어서 바람 때문에 애를 먹는 일은 없을 꺼라는 생각이 위안이 된다.
아직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가끔 왼쪽 무릎이 이상신호를 보내다 마는 정도다.
어찌 생각하면 2주전부터 통증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다보니
지금도 당연히 통증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자위해본다.
어차피 시작한 길인데 지금 무릎이 난리를 피운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냥 ‘고’다. 무릎에 대해서는 이제 생각도 말자.
아침 햇볕이 생각보다 뜨겁다.
25km 지점 급수대에서 자봉을 하고 있는 중앙마라톤의 최봉언 고문과 신정기씨가
날씨 걱정을 해준다. 아무래도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무척 고전할 것같다.
게다가 자전거 타는 사람들과 인라인스케이터들이 부지런하게도 벌써부터
‘좋은 날씨’를 만끽하러 나오는 바람에 주로가 붐비기 시작한다.
달리는 내 몸도 몸이려니와 이들과의 싸움도 만만치 않을 것같은 예감.
그러나 천만다행하게도 27km 지점쯤에서부터 구름이 짙어지면서 해를 가려
무더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상황으로 바뀌었다.
♦30~40km (1시간 4분 27초) (누적 3시간 49분 57초)(40km 3분 휴식 포함)
성수대교를 지나면서 달리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벌써 8시가 다돼오는 시각.
대신 당초부터 많지 않아보였던 울트라 참가자(113명)들은
100m 구간에 1-2명씩 보일 정도로 흩어진 상태다.
LSD를 하는 듯 줄을 지어 달리던 무리가 ‘울트라 힘’을 외쳐준다.
확실히 그냥 ‘힘’하고 소리치는 것보다 ‘울트라 힘’하는 소리를 들으니 더 힘이 난다.
내가 정말 울트라라는 힘든 경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준다는 생각에서일까?
하여튼 그 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마주치면서 외쳐준 ‘울트라 힘’은 꽤 도움이 됐다.
"울트라 힘" 한번에 100m 정도는 그냥 가는 듯한 느낌이다.
멀리 63빌딩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다.
아직도 두 번이 더 남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든다.
될 수록 맥 빠지는 생각은 하지 말자.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파워음료를 몇잔 마시고, 오렌지를 몇조각 먹으니 기분이 괜찮아진다.
자봉팀들을 향해 “그만 뛰고 싶다”고 엄살을 떠니 그들이 웃으며
“쌩쌩한데 뭘...”하고 응수한다. 한바탕 웃고 다시 출발이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40~50km (55분 24초) (누적 4시간 45분 21초)
막 야외음악당 앞을 출발해 서쪽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선두주자가 벌써 가양대교를 반환해 들어오고 있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와는 이제 20km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역시 수사마 유니폼을 입고 발자국 소리가 요란했던 그 선수다.
놀라움을 넘어 존경스러운 수준이다.
그 뒤 얼마 차이를 두지 않고 2위가 오고, 한참뒤 3위가 지나가고 나서는
4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꽤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컨디션은 아직 괜찮은 것같은데도 머리는 이미 풀코스 거리를 지났다데에 놀라 겁을 먹는 모양이다.
“힘들 때도 됐지”라는 생각도 든다.
간혹 가다 걷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급수대에서 머무는 시간들도 길어지고 자봉들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50km 반환점에도 여러명이 몰려있다.
2-3명은 땅바닥에 누워 두발을 쳐들고 스트레칭에 열심이다.
또 몇 명은 강변둑에 앉아 강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애써 외면하고 바로 달린다.
잘못하면 전염될지도 모르니까.
♦50~60km (1시간 4분 56초) (누적 5시간 50분 18초)
다시 바람을 안고 동쪽으로 향한다.
태양열로 공기의 온도가 올라 기류변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인지
바람의 강도도 아침보다 훨씬 세다.
게다가 여의도 서쪽은 동쪽처럼 시설이 많지 않고 강폭이 넓어서
완전히 바닷바람 수준이다.
그러나 100km를 가는 길에 어찌 가시밭이 없기를 바랄 것인가?
지난 겨울 한마동 LSD때 맞바람과 싸우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에 비하면 약과”라고 최면을 걸어본다.
왼쪽 무릎의 불평이 커진다.
큰 이상이 있는 것같지는 않아도 무게중심을 낮춰 달리지 않고
조금만 무릎을 크게 들어 보폭을 넓히면 바깥쪽으로 통증이 느껴진다.
될 수록 몸을 낮추고 발을 지면에 닿듯이 끌며 신경을 쓴다.
무릎아 좀 참아라. 아직 멀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다른 곳은 이상이 없다.
55km 못미친 곳에서 3번째 카보샷을 먹으며 잠시 걸었다.
카보샷을 먹기 위해 걷는 거라고 거듭 자신을 설득하면서.
그러나 피곤한 근육은 자꾸 마음을 유혹하고 있었다. 좀더 걸어도 괜찮다고...
안양천 입구에서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백종호가 이제 반환점을 향해 가며 ‘힘’을 외친다.
응답은 했지만 걱정스럽다.
이제 겨우 50km지점을 향해 간다면 제한시간 12시간이 위험하지 않을까?
그의 힘든 표정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1차관문(60km). 휴식 + 옷갈아입기 (21분) (누적 6시간 11분 18초)
드디어 1차 관문이다.
전복죽과 오렌지를 먹고, 물과 이온음료를 마시며 풀밭에 주저앉아
운동화끈을 풀고 발을 쉬게 했다.
흠뻑 젖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으니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러나 여기서 누우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우리라.
마음을 다잡고 물품보관소에 맡겨둔 짐을 찾아 양말을 갈아신으며 잠시 망설였다.
운동화를 다른 것으로 갈아신을 것인가, 땀에 절은 옷은 어떻게 할 것인가?
레이스 벨트와 비상식량은?
결론은 ‘변화 최소화‘였다.
운동화는 지금까지 60km를 달렸는데도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그대로 신기로 했다.
비록 젖었지만 앞으로 40km에서도 별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것같았다.
레이스 벨트는 막판 갈증이 심해질 경우를 대비해 물통색으로 바꾸고
옷은 상의만 한마동 유니폼을 벗고 새 것으로 갈아입었다.
물통색에는 500ml짜리 물통과 카보샷 3개, 초코릿, 휴지와 바셀린 등을 담았다.
모자도 바꿔쓰고 무릎 통증 완화용으로 벨트(초팻)를 착용했다.
자주 쓸리는 곳에 바셀린도 더 발랐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아까워 스트레칭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벌써 20분 이상지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렀다. 출발이다.
이제 천호대교까지 한번만 다녀오면 끝이다.
그 순간 주로 옆에 아는 얼굴이 눈에 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틀림없이 왕언니 아닌가?
내가 언제 이곳을 통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타난 왕언니도
놀랍지만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서로 만났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힘!!!"
왕언니의 기를 받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60~70km (1시간 4분 25초) (누적 7시간 15분 43초)
1차 관문에서 너무 오래 쉬었다는 후회가 든다.
다리가 무겁고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근육이 뭉쳐버린 모양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택싱해야 하늘로 오르듯 한참 몸을 덥혀야 할 것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것같다.
페이스도 km당 7분도 더 되는 느낌이다.
65km 급수대를 지나자마자 제비마의 이성휴씨가 보인다.
아는 척을 하니 그러지 않아도 조금전 통과한 송주석씨를 응원하다가
“뒤에 오는 사람이 몸을 사리니 힘내게 해주라”는 얘기를 듣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정말 정이 철철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와 헤어진뒤 8km 표지판 근처 철탑 앞에서 200m쯤 걷고 말았다.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 없다는 순간적인 한계상황의 느낌이다.
앞뒤로 뛰다가 걷다가 하는 다른 참가자들의 모습도 ‘잠시 걷자’는 유혹에
별 거부감이 없게 만드는 상황이다.
갑자기 언젠가 들었던 울트라 참가자의 얘기가 생각난다.
“울트라는 계속 달리는 게 아니라 원래 뛰다가 걷다가 하는 거다”---정말일까?
맞는 말이라고 수긍하면서 나도 걷는다.
마음속으로는 “100m만”이라고 다짐하면서...
♦70~80km (1시간 14분 52초) (누적 8시간 30분 35초)
반포쯤에서 가랑비처럼 몇점 떨어지다가 만 빗방울이
한남대교를 지날 때쯤부터 굵어지더니 완전히 시원한 빗줄기로 쏟아진다.
맞바람을 의식해 거꾸로 썼던 모자를 바로 써 빗방울이 눈으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고도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다.
땀을 식혀 체온을 내려주는 시원함도 있지만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오한이 느껴지는 수준이다.
덕분에 계속 신경을 거스르며 오가던 자전거와 인라인은 없어지고
주로가 훤해졌지만 신발도 젖어간다.
이러다가 발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다행히 잠실로 접어들면서 비가 그쳤다.
달리기 괜찮은 날씨로 바뀐 것이다.
계속 내앞을 달리던 2인조가 지친 듯 걷다가 달리다가를 반복한다.
나도 그들 뒤를 따르다가 17km 표지판 부근(77km)에서
두 번째로 화장실을 다녀온뒤 카보샷을 먹으며 100여m를 걸었다.
웬지 비가 그친 조용한 하늘과 사람들이 사라진 한강공원의 모습이
한폭의 정물화같아 보였다.
동영상의 정지화면처럼 고요한 느낌이다.
그 속을 나 혼자 천천히 걷고 있다.
♦2차 관문(80km). 휴식 + 급식 (7분) (누적 8시간 37분 37초)
마지막 휴식처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2인조가 의자를 당겨앉으며 퍼질 기세다.
비가 개인 뒤라 여기저기 물기도 있고 풀밭에 앉기도 내키지 않는다.
선채로 전복죽을 먹고 오렌지를 집으며 빨리 떠날 생각을 하는데
배낭을 메고 우리와 다른 배번을 단 4명이 “조금 얻어먹어도 되겠냐”며 급식대로 다가온다.
가톨릭 성지순례 222km 울트라참가자란다.
금요일 밤에 출발했고 명동성당이 골인지라며 약간 아쉬운 듯
제한시간 40시간이 이미 넘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40시간 넘게 고통을 감내해온 것같지 않게 얼굴에는 활기가 있었다.
그게 울트라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나도 출발했다.
♦80~90km (1시간 6분 19초) (누적 9시간 43분 55초)
이제부터 최소한 오늘은 또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길옆의 꽃들도, 바닥의 거리표시도, 눈에 익은 한강다리들도
오늘은 이 몸뚱아리로 다시 지나가며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라는 생각 자체가
희망이요 기쁨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고관절의 피곤함도, 무릎의 통증도, 발바닥을 달구는 열기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심지어 어깨와 팔, 허리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좀 속도를 내자며 km당 6분30초 이내의 페이스를 목표로 잡아보았다.
실제로 그 페이스가 유지되는지 아닌지 몰라도 하여튼 나는 그렇게 믿고 달렸다.
탄천입구 부근 85km 지점 급수대에 오니 신정기씨가
“송주석씨가 발이 안좋다며 걸어서 지나간지 얼마 안된다”고 알려줬다.
드디어 문제가 커진 모양이다.
아까 80km 반환점에서 마주쳤을 때도 다리를 절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14km 표지판 근처에서 걷고 있는 그를 만났다.
“같이 가자”며 옆에서 걷는 내게 그는 “km당 45분 페이스로
걷다가 뛰다가 할테니 먼저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시계를 보니 조금 서두르면 11시간 안에 골인할 수 있을 것같았다.
내가 너무 야속한 거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 걷는 그를 뒤로 하고 혼자 달렸다.
♦90~골인 (1시간 7분 42초) (누적 10시간 51분 38초)
90km 급수대에는 지금까지 있던 이우성고문, 허범수씨 외에
곽창수 전회장과 윤석준총무까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오렌지를 먹으며 잠시 쉰뒤 출발했다.
드디어 골인 5km를 남긴 마지막 급수대---11시간까지 꼭 40분이 남았다.
이제부터 절대 걷지 말고 가는데까지 가보자고 다짐한뒤 정말 이를 악물고 달렸다.
10시간 50분 정도에 골인할 수 있을 것같았다.
2km 표지판을 지나 우뚝 서있는 63빌딩을 다시 올려다보며
새벽의 아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말 꿈만 같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63빌딩과의 4번째 만남인 것이다.
“무슨 일이든 끝은 있는 거구나”---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같지만
가고 또 가면 결국 끝이 있는 거라는 생각이 마치 오랜 수양끝의 위대한 깨우침처럼 떠올랐다.
마지막 1km.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에 눈앞이 아른거렸다.
잘못하다가 골인뒤 눈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트라를 하면서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지 않은가?
멀리 골인지점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170번 이광복 선수가 골인하고 있습니다”라는 멘트소리가 들려왔다.
그 앞으로 마누라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손을 부딪쳐 하이파이브를 하고 두손을 높이 쳐들며 결승테이프를 지났다.
테이프가 가슴에 닿는 순간 카메라 셔터소리가 몇 번 들렸고
눈에 익은 얼굴들이 달려와 자기일처럼 축하해주었다.
왕언니(이 때까지 여의도에 있었다니...), 이석우 부부, 이은세......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순간이지만 허탈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100km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남의 일같았던 울트라를 내가 완주한 것은 틀림없었다.
고통의 기억들이 100km 끝에서 한순간에 사라지고
성취감과 자신감만 남는다고 해도 지금까지 버텨준 내 몸과 마음에 대한 감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정말 더 이상 못견딜 극한상황이냐?”라는 내 질문에
고개를 흔들며 힘을 내고 이를 악문 나의 정신에도 감사해야 한다.
잠시 걷다가도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모진 다그침에
속도를 올려 달려주었던 내 몸도 이제 좀 쉬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도대체 인간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나는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또다시 울트라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하지만 이제 100km를 달린 내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풀코스를 처음 완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자신감이었다.
도우미들이 걸어주는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 타월을 어깨에 걸친뒤
의자에 앉아 이석우씨의 맛사지를 받으며 내가 말했다.
“징그럽다. 울트라 하는 사람들 다 미친 사람들이다. 나 이제 울트라 안한다.”
마누라가 좋아했다. 이번에도 얼마나 말렸던가?
이석우씨가 웃었고, 왕언니는 “울트라 달린 사람들은 곧바로 인터넷 들어가
다음 울트라 대회가 언제 어디에서 있는지 찾는다더라”며 못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100km를 달렸다는 성취감도 있는 반면 다른 한 구석에는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아프게 새겨져 있었다.
결코 별 것 아니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고통의 추억이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몇 번이나 자문을 했다.
울트라가 어떤 건지 한번만 해보자는 나의 약속이 지켜질까?
혹시 또 울트라를 하고 싶어 하지는 아닐까?
집이 가까워질수록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페이스를 보면 당초 km당 6분을 목표로 했던 40km까지
10분쯤 오버페이스였지만 이 속도가 내게 빠른 것은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후반 페이스가 지장을 받지도 않았다는 판단이어서
km당 5분 40초 정도의 이 페이스는 적당했다.
그후 60km까지는 거의 정확하게 km당 6분 페이스를 지킨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까지 별 문제가 없다.
그 다음 70km까지는 6분 30초 정도.
그 후로도 일부 구간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km당
평균 7분을 넘지는 않았다.
문제는 60km 1차 관문에서 20분을 넘게 쉬는 바람에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후 페이스 조절이 어려웠다는데 있다.
휴식시간을 5분 이내로 했어야 하고,
80km 지점에서도 7분씩이나 허비한 것이 잘 못된 것같다.
두곳에서만 20분 가량을 세이브하고,
그에 따라 페이스 저하가 덜 됐을 것으로 가정하면
급식이나 급수전후 조금씩 걸어도 10시간 30분 이내에
골인했어야 정상적이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20여분을 허비했다는 결론이다.
1차 관문에서 레이스벨트를 물통색으로 바꾼 것도
필요없는 일이었다는 판단.
서바이벌 울트라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스피드 울트라인 이번 대회는 주로의 급수대
에서 제공하는 물만으로도 충분했다.
레이스벨트에 파워젤과 바셀린 같은 비상용품
정도만 갖고 뛰는게 현명하다.
2년 전인가요, 춘마후기를 읽고 그 힘든 마라톤 여정에 마음아프기도 하고 광복씨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근데 딱 한번만 해보겠다던 울트라. - 왕언니 말대로- 벌써 다음 스케줄을 다 짜버렸더군요. 말리기도하고 협박(?)도 했지만 역부족입니다. 누가 저대신 좀 말려주세요. 사례는 톡톡히 할께요
첫댓글 회복 잘 하고 계시죠. 후기만 읽어도 감격스럽네요. 전 그날 돌아오면서 골인지점에서 두 분이 마주보며 달리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__"아!!! 정말 행복하겠다." 다른 건 않보이고 그 행복만이 너무 커 보이더라구요.
선배님..글 읽으면서...괜실히 제가슴이 뭉클함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정말로 장하십니다.....존경스럽습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회복 잘하시구요...
후기 읽는 것만으로도 지쳐오는군요...저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쉽게 맘먹을 수 있을 그런 것이 아니란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울트라...저에겐 그것보다 우선 내 자신의 욕심을 다스릴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합니다.
후기를 읽으며 제가 왜 눈시울이 붉어 오는지요.거쳐야 하는 통과의뢰 같은 마음도 있기에 제가 더 긴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기이~인 후기만큼이나 찬사와 존경를 표 합니다. 한마동 예비울트라의 길라잡이 아니 단체로 전염되지 않을까 우려 됩니다. 어디 백신 놀 사람 없소... 글구 왕언니 참 징하요!!
2년 전인가요, 춘마후기를 읽고 그 힘든 마라톤 여정에 마음아프기도 하고 광복씨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근데 딱 한번만 해보겠다던 울트라. - 왕언니 말대로- 벌써 다음 스케줄을 다 짜버렸더군요. 말리기도하고 협박(?)도 했지만 역부족입니다. 누가 저대신 좀 말려주세요. 사례는 톡톡히 할께요
여주에서 풀 뛰고 100km울트라 꿈 포기 했는데 무언가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것같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울트라, 광복형님 때문에 많이 느껴습니다. 만났을때 더 많은 느낌 부탁드립니다. 울트라 힘!
전 정말이지 선생님이 왜 그 힘든 울트라를 뛰셨느지 .그리고 우리 집의 큰 현씨도 하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이해 할수 없지만 선생님의 완주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는게 뭔지 말로만 듣던 잔인한 4월을 혹독하게 치르느라 오랫만에 들렀는데, 놀랍고 감동스러운 선배님의 울트라 완주가 있었군요. 정말 대단하고 감동스럽습니다. 후기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습니다. 회복 잘 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바랍니다.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후기도 울트라급입니다..다시 한번 100km 완주 축하드립니다.^^*
역사를 쓰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회복 잘 하시길 바랍니다.
ultraman 이광복님! 찬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마라톤에서 fullcourse를 뛰어도 인생관이 바뀐다던데 100km울트라를 뛰었다니 대단하시군요. 나는 마라톤에 입문한지 이광복님과 비슷하지만 아직도 full을 미지의 꿈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그지 없군요.
가장멋진 다큐 소설을 읽었습니다 . 빠른회복 기원합니다 축하합니다.
마치 한마동의 울트라 도전을 위한 선봉역활을 하신것 같습니다. 그 감동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거라 생각합니다.고통과 기쁨의 양면이 함께 하는 그순간.....대단한 도전에 뒤 늦게나마 존경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우와 우와,,,,,,,!! 너무 멋지십니다..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