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감각들의 통역관[제2편]
시 쓰기는 말을 도구로 쓰는 일이 아니라 말을 갖고 노는 일이다. 말은 유희성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하다. 말을 부리면 말은 온전한 의미에서 어긋나간다. 시인은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을 일방으로 연모하는 자다. 좋은 시는 항상 말의 부재 속에서 나타난다. ‘얼음’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자. 그것은 어떻게 부재에 이르는가? 어떻게 부재 속에 시가 생겨나는가?
얼음이 녹는 건 슬픈 일
얼음이 녹지 않는 건 무서운 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남몰래
천천히 녹는다
-오은, 「야누스」 전문
얼음은 물의 결빙 상태를 지시하는 단어다. 물은 빙점에서 얼고, 기온이 빙점 이상으로 상승할 때 녹는다. 얼음은 녹으면서 다른 무엇으로 바뀐다. 우리가 얼음이란 단어/소리에 집중할 때 그 말이 지시하는 사물의 내면 형질이 바뀌면서 다른 무엇을 건너간다.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됩니까?/생물이 됩니다. 움직입니다.”(오은, 희망-간빙기) 녹는다는 건 존재의 변주, ‘얼음’에서 ‘생물’로, 얼음이 녹으면서 얼음이라는 말과 얼음 사이에서 움직인다.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을 사랑이라도 불러도 되는가? 녹아서 흘러간다는 점에서 사랑의 범례(凡例)다. 사랑은 흘러간다. 물은 생물이며 흘러가는 존재의 형질을 드러낸다. 그러니 혹자는 얼음이 녹아서 생긴 그것을 ‘물’이라고 부를 것이다. 진짜 물인가? 그것은 제가 얼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물이다. 시인이란 “사무쳐진” 존재다. “어느 날/나는 사무쳐진다”(오은, 「주도면밀」). 사무쳐진 존재에게 너무 많은 말들이 깃든다. 존재의 거푸집, 존재의 시뮬레이션, 우리에게 찾아와서 내면에 깃든 말들은 그런 것이다. “말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말이 되는 소리가,/말이 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너무 많은 말들이 두드러지고 있었습니다.”(오은, 「말이 되는 이야기」) 시인은 “너무 많은 말들”을 가진 자다. 항상 너무 많은 말들을 가진 존재만 뭔가를 쓴다.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 류경무, 「팬지」 전문
‘팬지’는 팬지일 뿐인가? 팬지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고, ‘나’는 그것의 아랫도리를 “쓰다듬”는다.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라는 말, 그리고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라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렸던 적이 있는 그 무엇이다. 몸뚱이, 쓰다듬다, 붙어살다, 벌리다 같은 어휘들은 팬지가 성애적 경험의 대상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풍긴다. 한 대상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을 진술하는 이 시가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만 팬지는 ‘나’를 떠나간다. ‘나’는 팬지와 함께했던 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팬지는 곁에 없다. 그러니까 원치 않는 이별이다. 팬지는 멀리 간다. 팬지는 멀리 감으로써 지금 여기 부재하는 대상이다. ‘나’는 팬지를 다시 심으면서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어한다. 그 욕망은 실패한다. 팬지가 떠났을 때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유에 죽은 사람/이미 이곳에 없는 사람”(류경무, 「데드맨」)이다. 죽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가장 멀리 떨어져나온 지금/그러니 거기 앉은 나여//이제는 제발/나를 부르지 말아다오”(류경무, 의자」)라는 구절이 그 대답을 들려준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나온 상태다. ‘나’는 나로부터 가장 멀리에서 소외된 채 떨어져나와 있다.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떠나온 자는 그 어떤 기쁨도 욕망도 실현할 수 없다. 그는 곧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시는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일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든다. 말의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 말의 제의(祭儀)로서의 시, 그 제의를 주재하는 집정관으로서의 시인. 좋은 시들은 가장 나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남음으로 이끈다. 환멸과 지리멸렬 속에서도 자진(自盡)하지 않고, 기어코 살도록 돕는다. 시인들이 항상 세계의 의미화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자주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볼링엔 행운이 뒤따랐는가?/담배는 승리만큼이나 중독적이었는가?/파업은 마침내 성공했는가?”(오은, 럭키 스트라이크」)라는 질문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가? 볼링, 흡연, 파업이 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가벼운 질문들은 아무 의미도 머금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다. 질문이 지리멸렬한 것은 이 세계가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이제 남겨진 것은/쥐 뜯어 먹은 것 같은 세상.”(오은, 「래트맨(Ratman)」) ‘쥐들’은 어디에서나 갉아먹고 뜯어먹는다. 우리는 ‘쥐’인가 아닌가? 이 탐욕스러운 무리에게 이 세계는 “창문을 열기 위해 창문을 닫은 사람/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창문을 여는 사람/소문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오은, 「인과율」)들의 집합체다. 차라리 이 무의미한 질문들은 무의미로써 세계의 무의미에 대응한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