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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순방(巡房)
박 완 서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어. 사람들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잘살게 되거든. 젠장, 우리만 빼놓고 말야.”
신문을 읽다 말고 밥을 먹다 말고 아침에 눈을 뜨고 멀뚱히 천장을 쳐다보다 말고 남편은 밑도끝도없이 이런 말을 뇌까리기를 잘했다. 특히 “젠장, 우리만 빼놓고 말야” 소리늠 어찌나 영탄조로 구슬프게 하는지 나는 들을 적마다 가슴이 찐했다. 그리고 우리만 만날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게 꼭 내 탓만 같아 저절로 기가 죽고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기죽을 펴고 곰곰 생각해보면 실상 내 탓일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정말 억울했다. 월급봉투를 요 핑계 조 핑계로 야금야금 축내오는 것도 남편이었고, 학비를 도와 달라느니 비룟값을 보내달라느니 해서 일 년에 몇 차례씩은 꼭 적지 않은 목돈을 뜯어가고야 마는 것도 시집 식구들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결혼하고 오 년 동안에 첫딸 영아를 낳느라고 병원에 사흘 동안 입원한 것 외에는 감기 고뿔 한번 앓은 적도 없거니와 버젓하게 옷 한 가지 맞춰 입어본 적도, 내 입에 넣자고 계란 프라이 한번 부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소리가 꼭 나를 원망하는 소리로 들렸고, 실제로 남편은 나를 원망하다 못해 요즈음 들어서는 경멸까지 하고 있었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남편 친구들은 동창이건 회사 동료건 하나같이 그렇게 처덕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처덕 ― 그 처덕이란 걸 남편이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는지는 그가 처덕이란 소리를 얼마나 미묘하고 감칠맛 있게 발음하나만 봐서도 알 수가 있었다.
누구는 자기하고 같은 월급쟁인데도 아내의 살림 솜씨가 어찌나 짭짤한지 결혼 삼 년 만에 벌써 집 장만을 했다든가, 누구는 아예 아내가 시집올 때 시민 아파트를 하나 가지고 와서 그걸 요리조리 잘 요령 있게 굴려 지금은 한강변의 삼십육 평짜리 맨션 아파트 주인이라든가, 누구는 아내가 계 오야 노릇을 해서 목돈을 만들어 변두리에 사놓은 땅이 껑충 뛰어, 그걸 팔아 싼 땅을 사면 또 껑충 뛰고, 사는 족족 이렇게 뛰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고 나더니 이젠 으리으리한 양옥집 주인에다가 변두리에 땅도 몇백 평 갖고 있는 알부자라든가, 뭐 이런 얘기를 어디서 잘도 알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얘기를 모욕으로 알아듣고 발끈하는 대신 그냥 가슴이 찐해하기만 했다.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다만 셋방살이를 지긋지긋해하고 있을 뿐이란 걸. 나도 지긋지긋했다. 더군다나 문간방 살림은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안집은 주인 내외가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상을 하고 아이들도 다 커서 낮에는 집에 식모 계집 애 혼자 남게 마련이었지만 이 계집애가 여간 맹랑하지가 않았다. 못 하나를 박으려도 문간방 아저씨, 김칫독 하나를 옮기려도 문간방 아저씨, 연탄불이 꺼져도 문간방 아줌마, 쓰레기차가 와도 문간방 아줌마―마치 심한 상전이 행랑아범 어멈 부려먹듯이 우리 내외를 마구 대했다. 밤에 제가끔 제멋대로 들어오는 안집 그 여러 식구의 대문 시중도 이 계집앤 나에게 떠말기고 모른 척했다.
통금 직전에 들어오는 일이 잦은 안집 맏아들 때문에 우리 부부의 사랑의 행위까지 훼방당하는 일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후닥닥 남편을 밀치고, 허둥지둥 잠옷을 수습하고 그 위에 뭐라도 하나 더 걸치고, 방금 곤한 잠에서 깬 듯 찌뿌드드한 얼굴을 하고 대문을 연다. 그러면 능구렁이가 다 된 노총각인 맏아들은 흥,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징그러운 시선으로 나를 핥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 동안 남편은 골이 잔뜩 나 돌아누워 있다. 나는 별수 없이 남편의 등에라도 안기려 든다. 그럴수록 남편의 등은 나를 거부하고 나의 반대쪽으로 꽁꽁 오그라든다. 등이란 밖으로 굽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대체 남편 등에 매달린 아내의 꼴처럼 비참한 꼴이 또 있을까.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나의 영문 모를 오랜 잘못을 씻고 떳떳해질 수 있는 때가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삼 년 동안이나 먹을 것 입을 것을 이를 악물고 줄여서 부은 적금 오십만 원을 타게 된 것이다. 이 문간방의 전셋돈이 사십만원이니 우리 재산이 별안간 배 이상으로 불어난 셈이 된 것이다. 십만원이 모자라는 백만원이 생긴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남편이 희색이 만면해지길 바랐고, 아주 처덕이 없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남편은 좋아하기에 매우 인색했다. 그 동안 하도 안달을 하면서 살길래 행여 큰 계나 몇 구찌 든 줄 알았더니 겨우 고지식하게 은행 적금 하나 들었더냐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총재산 구십만원의 씀씀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안 맞았다. 나는 어디 변두리에 나가서 우선 땅이나 몇십 평 사놓고 보자고 했다.
내 땅이 있고 보면 거기다가 비바람이나 가릴 움막부터 시작해서 다달이 블록도 좀 사고 시멘트도 좀 사서 조금씩 집 모양을 엉궈갈 수 있을 게 아니냐고 했다. 남편은 내 이런 소견을 기특해하기는커녕 매정하게 얕잡고 비웃었다.
“아니 뭐라고? 남들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자꾸 잘살게 돼가는데 우린 예서 더 못살자구, 이 문간방도 모자라 움막부터 시작하자구? 대관절 남편 체면을 뭘로 알고 하는 소리야.”
남편은 아담한 독채 전셋집을 원했다. 독채면 남 보기에 내 집같이 보일 수도 있고 그까짓 거 훗날 돈 벌어서 아주 사버리면 될 게 아니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 생각이 내 생각보다는 더 앞날을 내다본 생각 같았다. 남편은 또 전셋집에 들었다가 그집을 그냥 늘러 사버린 예를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전셋집을 얻으러 다닌다는 일이 조금도 섭섭하지가 않았다. 처음엔 그냥 내 집인 척만 하다가 나중에 정말 내 집을 만들어버리는 일이 마치 빌려본 책을 차일피일 돌려줄 날짜를 미루다가 슬금슬쩍 멍셔버리는 일만큼이나 쉽게 느껴졌다.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져 나는 곧 독채 전세를 얻으러 나섰다.
제3한강교 건너 영동 신시가지란 곳엔 참 예쁘게 생긴 집도 많았다. 모양이 어찌나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고 색스러운지, 집 같지가 않고 고급 양과점 진열장 속의 데코레이젼 케이크 같았다. 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이런 예쁜 집들 사이의 잘 포장된 골목길을 걸었다. 차츰 설렘이 가라앉더니 나중에는 울적해지고 말았다. 나는 이 예쁜 집들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와 무관한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울적하게 했다.
그런데 이 동네엔 가도가도 그 흔한 복덕방이란 게 안 보였다. 하긴 이만저만 염치가 없지 않고서야 이 빤빤한 동네 어디다가 그 후줄근한 현수막을 늘어뜨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저 예쁜 집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복 많은 이들은 맨 처음 무엇을 저 예쁜 집을 열 최초의 열쇠로 삼았을까. 궁금증이 체증처럼 내 뱃속에 충만했다. 이런 걸 물어보려면 구멍가게가 제격인데 이놈의 동네엔 그 흔한 구멍가게조차 없었다. 나는 빙빙 돌고 돌아서 결국은 내가 처음 버스를 내렸던 큰길로 돌쳐오고 말았다.
그리고 큰길가 양쪽에 즐비한 빌딩의 아래층이 모조리 부동산 소개소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한신 부동산이니 강남 부동산이니가 바로 복덕방을 의미한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도 나는 그 앞에서 주저했다.
그 앞엔 재벌회사의 주차장보다 더 많은 고급 승용차가 대기해 있었고 아무리 내부를 기웃대도 복덕방 영감 비슷한 늙은이도 눈에 안 띄었다. 젊고 민첩하고 영리해 뵈는 젊은 신사들과 교양도 돈도 있어 뵈는 귀부인들이 꽉 차게 들어앉은 사무실 속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열기와 생기가 함께 넘치고 있었다. 나는 괜히 겁이 났다. 그래서 기웃대기만 하고 그대로 지나치기만을 되풀이하다가 겨우 늙수그레한 신사가 혼자 하품을 하고 있는 한가한 사무실을 한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도 늙었다는 점 하나만 빼고는 내가 알고 있는 복덕방 영감다운 특징을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늙었다는 것만도 반가워 나는 이 노인에게 빌붙기로 작정했다.
우선 나는 응접세트 옆 등근 보조의자에 궁둥이를 어설프게 붙이고는 영아를 앞으로 돌려안고 젖을 물렸다. 그리고는 비로소 구십만원짜리 독채 전세 얘기를 꺼냈다. 노인이 깜짝 놀랄 만큼 크고 탁한 소리로 웃었다.
“아니, 작은 것 한 장도 못 되는 돈 갖고 이 바닥에서 독채 전세를 얻겠다고?”
그러더니 다시 한바탕 해소라도 발작한 것같이 급하게 웃었다. 거금 구십만원을 작은 것 한 장도 안 된다니, 이 노인이 귀가 좀 어두운가 해서 나는 다시 목청을 돋우어 구십만원을 강조했다.
그래도 노인은 탁하고 급한 웃음을 멎을 척도 안 했다. 사무실 앞에 승용차가 나란히 두 대가 멎더니 부인들과 신사들이 섞인 한 떼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곳도 결코 파리 날리는 한가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모님, 지금 보신 그 땅 눈 꽉 감고 잡아놓으십시다. 글쎄 문제없다니까요. 중도금 치르기 전에 평당 오천원 띠기는 누워서 떡 먹기라니까요.”
젊은 신사들이 부인들을 꾀고 노인도 합세했다.
“우리하고 손잡고 이 바닥에서 큰돈 잡은 사모님네들 숱합니다, 숱해.”
나는 그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영아 기저귀를 갈아주고 다시 업고 나올 때까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이 아름다운 신흥 주택가에 앙심을 품고 떠났다.
그 다음날은 수유리 쪽으로, 그 다음날은 망우리 쪽으로, 그 다음날은 갈현동 쪽으로 다녀봤지만 어디서고 구십만원짜리 독채 전세는 구경도 못 하고 다만 구십만원의 가치를 좀더 분명히 알아온 데 불과했다.
결국 우린 의논을 다시 해서 독채는 아니더라도 안집으로부터 뚝 떨어진 부엌도 따로 있고 출입문도 따로 있어 독립된 오붓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전세방을 구하기로 합의했다. 어차피 전셋집도 못 되는 전세방을 구할 바에야 구태여 교통이 불편한 변두리로 갈 게 뭐냐고 도심에 가까운 주택가를 돌기 시작했다. 구십만 원짜리 전세방을 구한단 소리에 복덕방 영감의 반응은 괜찮았다. 사뭇 굽실대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나도 좀 배짱을 부렸다. 방이 깨끗하고 널찍해야 된다느니, 부엌에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져야 한다느니, 그리고 남편이 하던 소리도 했다. 정원이 있는 양옥집이어야 하고 주인집에 전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남편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했을 때 그 철딱서니 없음이 딱하고 한심해 대꾸도 안 했었는데 거드름을 부리고 싶은 나머지 그 소리까지 했다.
그런데 재수 나쁘게도 첫번째 본 집에서 등에 업힌 영아를 트집잡았다. 아무리 뚝 떨어진 방이지만 갓난애가 딸린 집은 싫다는 거였다. 주인여자는 외눈 하나 까딱 안 하고 그런 소리를 하며 우리 영아를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 나는 그 여자의 시선에 못된 주술이라도 걸려 있어 우리 영아가 곧 어떻게 되는 것 같아 허둥지둥 그 집을 뛰쳐나왔다. 세상에, 겨우 생후 일 년밖에 안 된 천사 같은 것을 그런 독사 같은 눈으로 노려보다니, 정 말 재수 음 붙은 날이었다.
애는 무조건 싫다니, 그럼 셋방살이 신세가 무슨 대역죄라고 단종수술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러나 그 다음에 본 집도, 또 그 다음에 본 집도 아이를 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당에 기저귀 널어놓는 것 보기 싫다는 둥, 걸음마 타면 잔디를 망쳐놀 거라는 둥, 꽃을 딸 거라는 둥, 멋대로 트집들을 찹았다. 어떤 점잖은 중년 부인은
“쯧쯧, 미련도 하지. 아이는 집 장만부터 하고 낳아야지 어쩌자고 아이부터 낳았수?”
그 여자 말을 들으니 집 장만하기 전에 아기를 낳는다는 일이 사생아를 낳는 일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나는 수치심으로 온몸이 불화르처럼 달아올랐다. 이런 나에게 복덕방 영감이 넌지시 귀띔을 했다.
“아주머니, 애 업고 다니시면 방 얻기가 영 어렵습니다. 내일은 누구한테 좀 맡기고 나오세요.”
“그럼 있는 애를 없는 것처럼 속이란 말씀이세요?”
“뭐 아주 속이시라는 게 아니라요, 어름어름 방만 얻어놓고 보시란 말이죠. 이사 갈 때 데리고 들어가면 제까짓 것들이 어쩔 겁니까? 계약서에 아이가 달렸다고 해약하라는 조항은 없으니까요.”
나는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울기부터 했다. 그리고 낮에 당한 수모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남편은 내일이 공일이니 같이 집을 보러 가자면서 나를 달래려 들었다. 나는 싫다고 몸부림치며 땅을 사서 움막부터 시작하자는 소리를 또 꺼냈다. 남편은 또 발칵 화를 냈다.
“방정맞게 움막 움막·…·그 움막 소리 좀 작작해. 여편네가 무슨 악담을 못 해 노상 움막 푸념 이야.”
나는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내 몸을 둥글게 오그려 아주 따습고 평안한 둥우리처럼 만들어갖고, 그 속에 영아를 꼭 품고 잤다.
다음날은 남편이 먼저 능쳐 말도 시키고, 아아, 기분좋다…… 하며 보건체조 흉내도 몇 번 냈다. 그리고 집을 보러 가자고 나섰다. 별수 없이 나도 따라나섰다. 내가 아직도 좀 토라져 있건 말건 소풍 가는 국민학생처럼 혼자 기분을 내고 있던 남편은 느닷없이 고깃간에 들러 쇠고기를 한 근 샀다.
“여보, 이왕 동부인해 나선 김이니 처갓집 좀 들러 갑시다. 당신도 친정에 다녀온 지 오래됐지. 그 동안 우리 장모님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그리고 참, 이왕 들른 김에 영아를 장모님께 좀 맡기고 집 보러 다닙시다. 벌써 며칠째 당신 등에 업혀 다녔으니, 우리 귀한 장래 미스 코리아 감이 안짱다리가 안 됐나 모르겠어.”
영아를 친정에 맡기고 방을 얻으러 다니자는 남편의 속셈이 무엇인가를 빤히 알면서도 나는 남편이 하자는 대로 했다. 어제 다니던 동네와는 딴 동네를 택했다. 복덕방 영감은 식구부터 물었다. 남편이 먼저 나서서 천연덕스럽게 보면 모르냐고 두 식구라고 했다. 어째 아직 아기가 없느냐고 복덕방 영감이 수상쩍어 하니까 남편은 집 장만하고 아이는 낳으면 되지 뭐가 급하냐고 했다.
영감이 껑충껑충 앞장섰다. 몇 집을 볼 때까지 남편은 쓰다 달다 말이 없이 시종 무표정했다. 그럴수록 복덕방 영감은 서툴게 알랑을 떨었다.
“오늘 새로 나온 방을 보여드릴갑쇼? 주인아주머니가 까다로워 함부로 아무나 방 뵈기가 싫다고 우리한테만 내놓은 방이 하나 있는데, 보아하니 점잖은 내외분 같아서 믿고 보여드리는 거니 그런 줄이나 알고 계십쇼.”
아름다운 집이었다. 살고 싶은 집이었다. 담장은 낮고 마당의 초하의 푸름이 눈부셨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문 양쪽 인조 대리석 기둥 한쪽앤 인터폰이 있고, 다른 한쪽엔 차임벨의 버튼이 달려 있다.
“이 인터폰은 주인댁 전용이고, 이 차임벨은 셋방 전용이랍니다. 주인아주머니가 어찌나 깔끔하고 자상한지.”
복덕방 영감은 괜히 자꾸 으스댔다. 대단치 않은 거지만 남편이 벌써 감격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제 몫의 차임벨을 누르고 이 아름다운 집 대문을 들어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의 허영심이 동할 만했다. 나도 싫을 건 없었다. 얼마나 지겨운 문간방에서의 대문 시중이었던가.
주인여자는 젊고 예뻤다. 공주같이 예쁘고 공주같이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어린 계집애가 둘이나 엄마의 화사하고 풍부한 홈웨어 자락에 휘감긴 채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마당의 잔디는 잘 손질돼 있고 디딤돌은 현관으로 한 줄, 뒤란으로 한 줄, 두 줄이 나 있었다. 뒤란으로 난 디딤돌이 셋방으로 통하는 디딤돌이었다.
“잔디 밟지 마세요.” 주인여자가 맑고 차가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고 먼저 현관으로 들어가더니 뒤란으로 난 셋방의 부엌문을 안에서 열어주었다. 부엌도 방도 넓고 정결하고 밝았다. 방의 벽지도 고급이었고 부엌의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여자가 다시 식구를 물었다. 남편이 냉큼 두 내외뿐이라고 하자
여자는,
“젊은 두 내외 믿을 수 있나요. 언제 애가 생길지. 그렇지만 어린애가 생기면 방은 당장 옮기실 각오하셔야 돼요.”
하고 못을 박았다. 나는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하는 걸 느꼈다. 영아도 영아였지만 나는 지금 몸에 이상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해몽에 의하면 아들이 틀림없다는 용꿈까지 꾼 뒤였고, 나도 낳는 김에 아주 아들 하나 더 낳고 그만둘 셈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남의 배까지 흘끔흘끔 보며 이런 야박한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대한 정나미까지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남편은 이 집을 얻기를 고집했고, 언제나 그렇듯이 일은 남편 고집대로 되고 말았다.
“영아는 이사 가는 날 내가 당당히 안고 들어갈 테니 당신은 조금도 걱정 말라구. 제년이 어쩔 거야, 내 새끼 내가 끼고 들어가는데.”
이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고는 정작 이사 가는 날은 딴소리를 했다.
“여보, 장모님 기력도 예전 같으시잖은데 이삿짐 거들어주십사기도 뭣하니, 여보, 집에서 편히 영아나 좀 봐주십사고 합시다.”
이삿짐을 대충 정리하고 밤에 영아를 데리러 나서려는데 남편은 또 딴소리를 했다.
“여보, 이 다음 공일까지만 영아를 외할머니한테 두어둡시다. 이 기회에 아주 젖을 떼게. 돌이 넘도록 젖을 빨린다는 건 무식하고 야만적이야. 더군다나 임신 초기에 젖을 그대로 빨린다는 건 애에게도 해롭고 모체에게도 해롭고 태아에게도 해롭고 그야 말로 백해무익이라는 거야.”
고대하던 다음 일요일, 나는 일찍부터 친정 나들이를 서둘렀다. 남편도 순순히 따라나섰다. 집을 비우려면 뒤란으로 난 부엌문을 안에서 잠그고 주인집 마루를 지나 현관으로 나가야 한다.
주인여자가 괜히 샐쭉하며 동부인해서 정답게 어디를 가느냐고 했다.
“네, 이 사람 외식도 좀 시키고 쇼핑도 좀 하려구요.”
“어머머, 재미가 깨가 쏟아지셔.”
“그럼요, 아이 없을 때 실컷 재미 봐야지 언제 봅니까.”
오늘은 꼭 영아를 데려오고야 말겠다던 남편의 수작이 이랬다. 나는 가슴이 막히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일 주일 동안에 영아는 많이 여위었다.
목이 상큼하고 눈은 더 크고 슬퍼 보였다. 어머니도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았다. 올케의 기색도 안 좋았다.
“아니, 작은아씬 가사시간에 육아를 어떻게 배웠길래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애 젖을 떼려고 그래요. 그러다간 애 어른 다 잡겠어요.”
그런 핀잔이야 골백번 들어도 싸지만 영아의 변모가 슬펐다. 그 동안 엄마 아빠를 잊어버린 것처럼 반가워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낯을 가려 울지도 않았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말을 너무 잘 듣고 아이답지 않게 풀이 없는 게 꼭 딴 애 같았다. 맑고 큰 눈이 어른처럼 사려와 눈치가 있어 뵈는 것도 슬펐다. 나는 이런 영아를 다시는 안 놓칠 듯이 꼬옥 껴안고 볼을 비비며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뛰뛰빵 타고 아빠랑 엄마랑 집에 가자”를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피나는 마음으로 하는 소린데도 이상하리만큼 공허하게 들렸다. 나는 내 말이 빈말이 되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또 딴소리를 했다.
“장모님, 이왕 고생하신 김에 며칠만 좀더 봐주십시오. 이 사람이 영아 설 때는 안 그렇더니만 이번엔 어떻게 심하게 입덧을 하는지 옆에서 애처로워서 볼 수가 없다니까요. 누가 아들 아니랄까봐 미리 엄포를 놓을 셈인가봐요. 아무것도 못 먹고 온종일 헛구역질만 해싸니, 그래도 아는 병이니까 저만하지 그렇지 않으면 벌써 몸져누웠을 겝니다. 이 판에 영아까지 휘감기면 에민들 견디겠습니까.”
얼마나 내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착한 사위인가. 어머니는 며느리 눈치 볼 새노 없이 “그러게, 그러게” 하는 것이었다. 영아를 떼어놓고 집에 오면서 남편은 내내 나에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굴었다. 우리는 일요일날 외식과 쇼핑을 즐긴 행복한 한 쌍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에선 안집 두 내외가 어린 딸을 하나씩 무릎에 앉히고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날 온종일 거의 아무것도 입에 넣은 게 없었다. 영아 일로 가슴이 메어 식욕도 없었거니와 남편 말대로 심한 입덧을 하는 척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를 맡자 별안간 내 빈속으로부터 힘찬 구역질이 치솟았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마루로 면한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웩웩” 아무것도 토해지지 않은 채 뱃속에선 폭풍이 인 듯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왈칵왈칵 넘쳤다. 남편이 허둥지둥,
“이거 식사하시는데 미안합니다. 낮에 불고길 하도 맛있게 먹더라니 ―”
나는 계속 웩웩하며 그때마다 출렁이는 컵에서 물이 넘치듯이 눈에서 눈물이 넘쳤다. 남편은 건성건성 내 등을 두드리며, “불고길 너무 과식하더니만―” 소리를 주절주절 되풀이했다.
나는 계속 웩웩 토했다. 아니 웩웩 울었다. 엉엉 울 줄도 몰라 웩웩 울었다. 저런 더러운 남자가 내 남편이란 설움을 그렇게 울음 울 수밖에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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