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구례 산동이 훤하게 보일 정도로 날은 쾌청하고 산위의 바람은 시원하다.
준비하면서 들었던 걱정과 불안은 간 데 없고, 걸을 생각에 어린아이마냥 신나고 부푼 가슴이 되었다.
성삼재에서 시작을 알리는 고천제를 하고 노고단 마고 할머니께 절을 올리고 길을 나섰다.
이제부터 3기 청소년 순례단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구례 산천을 두발로 걸어서 만나보러 가는 것이다.
성삼재에서 천은사까지 9.5km를 걸어서 내려왔다.
고산지대 특유의 적당한 청량감에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딱 이정도 선선한 날씨로 계속 걸어가면 좋으련만...
성삼재 도로에서 지나가는 뱀을 피하느라 씩씩하게 걷던 앞줄이 잠시 멈췄다.
더 많은 야생동물들이 본디 그들이 살았던 산에서 깃들어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은사에서 점심 공양하고 자연스럽게 낮잠을 청했다.
이후 김광철 목사님의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천은사 다리를 지나 오후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광의면 지나 산동으로 넘어가는 직선거리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가자니 재미가 덜하다.
무더운 날씨에 걷다보니 솔이가 머리가 어지럽다며 자꾸 주저앉기까지 한다
한계치를 뛰어넘어보라고 웃으며 다독이니 솔이는 어이없어하더니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걸음을 계속 이어간다.
산동 내온마을에서 첫 번째 저녁동냥을 하다
저녁에 농사일하러 나가 있는 시간이라 마을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밥들을 넉넉하게 해놓지
않아 밥을 얻지 못하고 돌아나와야 했다.
허나 이대로 물러설 순 없지 않는가!
고단함과 배고픔을 안고 저녁 숙소가 있는 산동공소로 가서 인근 상가에서 2차 저녁 동냥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어렵게 동냥을 해서 먹어보는 밥이다!
구걸하는 자는 뜻을 전달하며 자신을 낮출 수 있어서 좋고, 보시하는 자는 연민을 일으켜 선행을 할 수 있어 좋으니
이 얼마나 독특하고 오래된 문화를 경험해 보는 것인가.
둘째날
박홍기 신부님과 박두규 시인과 함께 걷다
죽정마을 근처에서 시원한 수박을 얻어먹었고 생명과 같은 물을 사진영상과 차량지원을 맡은 민종덕 선생님께서
보충해주셨다. 너무 더운 날씨를 고려해서 용방면에서부터 이어지는 오후 걸음을 오후 4시부터 걸어갔다.
서시천변길 따라 구례읍까지 쉬엄쉬엄 가다보니 원불교 구례교당에 늦게 도착.
모든 인원이 다 씻고 밥먹고 (거기에다 특별간식까지) 하다보니 이야기 나눌 저녁 시간이 짧아지긴 했지만
박두규 시인과 함께 절명상과 탁발의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셋째날
인자하신 동네 할아버지 같은 한성수 목사님 그리고 섬진강 생태에 관한 전반적인 얘기를 구수한 사투리로 풀어 준
정태연 선생님과 함께 (달빛 아래 걸으면 더 좋을 듯한) 섬진강 둑방길을 걸었다.
이날도 폭염주의보가 내렸지만, 어찌하랴!
모두 씩씩하게 섬진강가를 걸었고 오후에 하사마을 청년회분들이 래프팅 하는데 합류를 해 주셨다.
래프팅 장소에 먼저 도착한 진우는 뒤에 오는 일행에게 아이스크림을 전하러 둑방길 풀섶을 헤쳐서 걸어 올라오는
감동을 보였다. 무더위를 날리듯 녀석들은 신나게 래프팅하며 물놀이를 즐겼고 인솔하는 샘들은 구명조끼에 의지해
섬진강물에 두둥실 몸을 맡기고 평화로운 여유를 만끽하는 행운을 누렸다.
저녁 절명상 시간에 돌아가며 기도문을 만들어 절을 하니 마음에 더 와 닿았고 하나됨을 느낄 수 있었다.
넷째날
화엄사 스님 두분과 생명평화 걷기를 기획한 흐물과 함께 토지 외곡교회에서부터 동방천다리 지나 상사마을
지리산둘레길을 걸어갔다.
토지면 지나가다 신발을 바꾸러 집에 잠깐 다녀 온 동언이의 표정이 더 밝다.
오미리에서 점심 동냥을 하려니 이곳에 살고 있는 진우, 재송, 휘윤 세 명의 의기가 더욱 양양하다.
오미 마을을 다니며 얻어 온 음식에다 진우 어머님이 특별히 해 주신 스파게티까지 더해져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오후 오르막으로 계속 이어지는 산길을 걸으며 얼마나 더 가야 되냐고 아이들이 힘들어 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줬다.
그동안 자연스럽게 터득한 비법(?)이 생겼는지 희선이는 쉬어가는 마을 어귀나 가게에서 틈틈이 물이나 음료를
얻어오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저녁에 화엄사에서 행장을 풀고 흐물과 함께 생명평화결사 로고를 그리며 농사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섯째날
아이들이 안내하고 인솔을 하며 황전삼거리를 지나 매천사당으로 초록색이 싱그런 논밭길을 걸어갔다.
오후에는 부모님, 가족들, 청소년걷기를 후원해주고 지원해 준 어른들이 중간중간 나타나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격려해 주셨다.
서시천변 잔디밭에서 100배 생명평화기도로 4박 5일 동안의 구례 땅 걷기를 마무리했다.
염천 더위를 뚫고 장장 85km를 자랑스럽게 걸은 주인공들에게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함태식 선생님께서
완주증을 수여해 주셨다.
편리함과 속도, 물질문명에 길들어진 이 시대에 불편하지만 천천히 마을길을 걸어가며 풍광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인정을 만나고 자신 안에 나 있는 길을 만났다.
힘든 고행을 통해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느끼며 온 몸으로 배울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