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신측(총회장 장상래 목사)이 2010년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경기도 평택 고덕중앙교회에서 개최한 제95회 총회에서 윤종하 씨(모리아출판사 도서의 저자)의 신학사상을 ‘읽거나 추종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합신측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최채운 목사)는 보고서에서 윤종하 씨의 신학이 △원죄로 인한 죄의 오염과 관련한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부정한다 △개혁파 구원론과 인간론에 대한 핵심적 요소를 부정하는 비개혁파 신학을 개진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이해와 관련하여 펠라기우스, 중세 후기 스콜라 유명론자들, 그리고 소시니안파 등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견해를 따른다고 비판했다.
합신측은 “윤종하의 신학은 개혁파 신학의 핵심적 요소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근간인 원죄론을 부정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와 이단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윤종하의 신학을 읽거나 추종하는 일이 없도록 결의해 주시기를 청원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란다”는 이대위의 보고를 그대로 받았다.
한편, 합신측은 경북노회장 황수경 목사와 중서울노회장 최채운 목사, 그리고 충남노회장 박정수 목사가 헌의한 소위 ‘관상기도’와 관련한 연구 의뢰 건을 신학위원회로 보내 연구결과를 내년 총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또한 최채운 목사와 박정수 목사가 헌의한 ‘가정교회’에 관한 연구 의뢰 건 역시 신학위원회에서 1년간 연구토록 결정했다.
‘가정교회운동’은 예장 합신뿐만 아니라 예장 고신, 백석, 고려 등 4개 교단에서 최근 몇 년 사이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운동으로, 지난 2007년 4개 교단이 함께 ‘가정교회운동과 관련한 신학적 일치를 모색하기 위한 세미나’를 개최해 주목을 끌었던 바 있다. 이중 합신측이 이번에 가장 먼저 총회의 연구안건으로 채택한 것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그리고 소위 ‘관상기도운동’에 대한 것 역시 합신측 경북노회가 올해 1월 초 ‘관상기도에 대한 찬반 포럼’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구가 진행 중이어서 향후 관상기도 도입에 대한 합신교단의 입장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다음은 윤종하 씨에 대한 합신측 연구 보고서 전문이다.
윤종하 신학 건전성 여부에 관한 연구 조사의 결과
* 참고 서적: 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모리아출판사, 2002년 1월 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모리아출판사, 2002년 3월 윤종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모리아출판사, 2002년 5월
1.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부정합니다. “왜 냐하면 그들이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가 박탈되었거나 이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타락) 되었다는 설명은 창세기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그들은 그 자유의지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합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18, 모리아출판사).
“아담의 범죄를 전적 타락으로 본다거나 원죄이론을 만들어 죄성이 그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고 전승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창세기 4장 이하에서 타당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21, 모리아출판사).
“다시 말하면 ‘원죄’라는 전통적인 해석은 본문을 충실하게 해석하지 않은 결과로 빚어진 잘못된 해석이며, 사실 성경에서는 ‘원죄’의 교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서 모든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따라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의인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이론과는 달리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23, 모리아출판사).
“다시 말하면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해 내려오거나 죄성이 유전되어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고, 아담은 대표자이므로 그의 죄 때문에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도 다 죄인으로 간주되어 죽음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70, 모리아출판사).
2.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개혁파의 이해와 달리합니다. “전통적인 설명에서는 엡 4:24과 연관지어서…타락하여…선을 행할 능력도 없고, 선을 찾고자 하는 자유의지도 없어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13, 모리아출판사).
“인간이 그렇게 할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다면 왜 이런 당부를 하겠습니까?”(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14, 모리아출판사).
“어 떤 이들은 인간이 선을 행할 의지나 자유도 없어졌고 악을 행할 의지와 자유만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악을 행할 의지만을 자유의지라고 하겠으며, 그런 의지만을 지닌 인간을 인격체라고 하겠습니까?”(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26, 모리아출판사).
“…인간이 범죄할 때 왜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까? …여전히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내 마음대로 악을 계획하고 저지르는 것을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유의지를 계속 주고 계시는 것일까요? 자우의지를 지닌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기 때문이며, 바로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28, 모리아출판사).
“그 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오늘 회복된 자유의지는 선만 선택하는 자유입니까? 악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까? 필시 둘 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고 대답하겠지요. 죄를 여전히 범하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인간들은 반쪽 자유의지를 가진 것입니까? 그것도 자유의지라고 해야 할까요?”(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29, 모리아출판사).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선악과로 시험하실 때 그가 따먹을 것을 내다볼 수 있으시면서도 일단 그 자유를 허용하시고 인간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내다보신다는 것은 어떻게 되도록 짜놓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에 맡기시되 그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과 결과들은 미리 보신다(예지, 미리 아심)는 것이라고 설명하여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아담이 과일을 따먹거나 사울이 불순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37, 모리아출판사).
3. 개혁파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부정합니다. “이 toledoth은 특이하게도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當世, 그 시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서두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죄이론이나 전적타락교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26, 모리아출판사).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 밖에서 행하는 선은 인본주의적 선이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이런 사람들의 행동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2:16)?”(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65, 모리아출판사).
“반대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죄만 짓는 것이 아니고 선도 행한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죄성 또는 죄에의 경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에의 경향성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72, 모리아출판사).
“노아나 다윗이나 욥이 하나님이 인정하신 ‘완전’의 수준에 이른 것은 사실입니다”(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p.123, 모리아출판사).
4. 그리스도의 대리속죄의 교리를 부정합니다. “십 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셨다는 일반화된 설명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벌 받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대표자로 오셔서 우리를 데리시고 함께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39, 모리아출판사).
“‘대신’이란 말을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대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 같이 형벌을 받고 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40, 모리아출판사).
“일 반적으로 믿음을 오해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담당하신 것을 믿으면(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말은 시험을 이기셨을 뿐 아니라 나를 능히 도우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범죄하지 않게 해주실 예수님을 믿고 나아와서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126, 모리아출판사).
“결 국 구원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배우는 만큼 그리스도를 신뢰하게(믿게)되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그를 본받아 자라게 되며, 선악을 잘 분별하여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한다면 ‘믿어서’입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135, 모리아출판사).
“또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대속의 참 뜻을 죽어야 할 나는 죽지 않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정확한 성경적인 대속은 나를 대표하여 대신 하신 것이므로, 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대신’이란 표현보다 ‘대표하여’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p.101, 모리아출판사).
5. 개혁파의 불가항력적 은총 교리를 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면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불가항력적 은혜, …The irresistible Grace) 그렇게 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되기 때문에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좀 부드러운 표현으로 유효한 은혜(Efficacious Grace)라고 하면 좋겠습니다.”(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p.147, 모리아출판사).
6.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을 혼동합니다. “창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칭의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고, 믿음이 자라서 온전해 질 때 참 칭의와 구원이 주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라고 연단되어서 온전한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54, 모리아출판사).
“행위구원론을 비판하고 ‘오직 믿음만’이라고 주장하면서 왜 큰 희생과 수고의 행위를 강조합니까? 전적 타락으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어서 성화 교리를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거창한 일을 꿈꿉니까?”(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62, 모리아출판사).
“그 래서 우리의 구원은 단순한 용서와 칭의와 양자 삼으심만이 아니고, 새롭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성화시키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명분만의 칭의가 아니라 실제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로 만드시는 의화(義化, justification)입니다. 이를 새창조라고 성경은 계속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칭의(정확한 표현은 의화)를 법정 칭의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실제로 의롭게 만드신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윤종하, <원죄와 타락교리는 성경적인가?>, p.130, 모리아출판사).
“타락이론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온전한 작품을 만드셨는데, 그 작품이 망가지자 새로 만드시지는 않고 겉만 예수님의 의로 예쁘게 포장해서 천국에 들여놓으시는 것이 됩니다. 타락한 인간을 어찌하지 못하셔서 벌도 주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형벌로 대신하시고 큰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어 천국의 삶을 공짜로 받아 누리게 하신다는 우스꽝스런 구원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p.25, 모리아출판사)
“신학적으로 중생과 성화를 구분하였기에 많은 오해가 생겼습니다. 새창조나 중생이나 구원이나 칭의나 성화는 같은 것인데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여 성경을 오해하게 만든 것입니다”(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p.70, 모리아출판사)
“사실 성화…와 의화…는 같은 표현입니다”(윤종하, <첫 창조와 새 창조>, p.73, 모리아출판사)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시험은 예수님 안에서 욥,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통과해야할 과정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고(없이 하고) 그 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용서받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출애굽의 유월절(어린 양의 피)과 홍해를 건너는 것(세례)만으로는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광야를 다 통과해서 안식의 땅에 들어가야(죽는 그 날에) 구원이 완성됩니다. 광야에서 믿음이 검증되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9절). 우리 각자는 자신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윤종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p.95, 모리아출판사)
7. 완전주의의 오류를 범합니다. “완 전한 창조와 구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창 17:1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전능하다. 그렇다면 나를 믿고 내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한 요청입니다. 성화를 불신하거나 완전해진다는 성경 말씀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입니다.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인간의 무능한 행위만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왜 교회 역사에서 완전을 주장하는 자는 항상 이단으로 규정하고 전적 타락 교리만 정통으로 결론 내렸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믿음이 없어서 성화가 안 되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오만입니다”(윤종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p.41, 모리아출판사)
“‘이 세상에 진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하세요! 장로님은 그럼 죄를 짓지 않습니까?’ 하면서 흥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에서 완전히 떠나 있지 못하면 겸손히 자기반성을 하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성찰해보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성화되고 있는 사람까지 끌어내리며 완전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잘못 아니겠습니까? …물론 누가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이라고 할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윤종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p.43, 모리아출판사)
“우 리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듯이, 시험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고,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욥기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 주었으며, 히브리서에서도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력(自力)으로 시험을 극복하려 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많지만 먼저 이기신 예수님께 의지하면 우리를 능히 도우셔서 완전히 이기게 해주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윤종하,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p.93, 모리아출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