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옆지기(딴방지기)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 할까 한다, 지난 어느날 모 산악회의 길라잡이 의뢰를 받고 임무를 수행 하다가 자존심도 있고 어쩐지 내 자신에게 도움이 없음을 인지코 그만 두기로 결심을 공포하고 나니, 몇차례의 "해라" - "안한다" 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을즈음 마누라가 이 사실을 알고, 일갈[一喝]을 吐했겠다
"당신이 아는 것이라고는 총 쏘는것 하고, 길(道路), 그리고 山밖에 더있소? 그 분들도 당신이 필요해서 부탁 하는것이니 처음에 말해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해 줬으면 좋것소" 라는 몇 달전의 마누라의 봉침[蜂針]같은 소리가 뇌를 때리는 생활의 소리를 생각하는 사이 애마는 목적지에 도착을 한다, 영모리 마을 회관에 차를 새워도 되나 학교의 정문이 활짝 열려 좁은 길 우회전 보다는 직진이 편할 것 같아 학교 주차장에 차를 새우고 매무새를 잡는다,
개교 86년 전통의 아산초등학교 전경을 보니, 여늬학교는 잔듸를 깐다 어쩐다 하여 단장을 하는데 전통의 역사 다웁게 어쩐지 을씨년 스럽다 못해 고색창연한 모습이다, 엣다 모르것다 두락암(전자바위라고도 함)을 정면으로 직진하는 무지하고 우직함이 발동한다, 순간 이를 뉘우치고 운동장을 나와 왕벚나무 드리워진 길을 따라 학교 급식소를 지나면 마을길이다
두암초당(斗巖草堂)
처음보는 사람은 아찔함에 가슴 설래이는 모습이다, 이곳에는 호암 변성온 과 변성진 두 형제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의 영모정 뒷 바위산인 두락암의 남쪽 벼랑에 위태롭게 자리잡고 서 있다 하서 김인후에게 가르침 받고 퇴계 이황과 교류한 호암이라니 대단한 인물인갑다, 그의 인품이 곡식을 되는 말이나 저울추같이 평평하여 치우지 않는다고 하여서 두암이라 하였다
일제시대 호암 변성온과 동생인 변성진이 학문을 닦았던것을 기려 주민들이 두암초당을 창건했지만 훼손된 것을 1815년 영모정에 호암의 손자인 변동빈에 의해서 중수되었으나 또 훼손되어 5대손인 변동빈이 1954년 현재의 위치에다 초당을 새롭게 중창하여 후손인 변태섭이 관리하고 있다
마루에 어렵게 들어 걸터 앉아보니 선계(仙界)와 속계(俗界)의 경계(境界)쯤이라고 느껴지는 곳,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집, 천길 벼랑아래 위태롭게 걸려있는 두암초당(斗巖草堂) 은 수직으로 우람하면서도 아찔하게 치솟은 두락암이란 이름을 가진 그 수직의 바위 벼랑에 지붕과 처마를 밀어 넣어 지어낸 정자다. 수직의 바위에 매어놓은 모습에 한 칸짜리 방을 내고, 거기에 누마루 두 칸을 더 보태서 지은 정자이다.
간담이 서늘한 높이에 그윽한 풍류가 만나는 자리다. 정자는 그 경계에서 400년 동안 한 편의 시(詩)처럼 서 있었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현기증 나는 그 아찔한 위치의 자리에 솜씨 부려 정자를 세운 이의 담력도 담력이지만, 그 자리에 올라 경관에 취해 무릎을 치고 "옳지" 하며 정자를 들이기로 결심한 주인의 눈썰미 또한 더더욱 감탄스럽다는 생각이다.
두락암의 바위형상이 꼭 곡식을 재는 말(斗)처럼 생겼다 해서 斗洛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수직의 마름모꼴로 우뚝한 斗洛巖은 크기와 생김새도 예사롭지 않은 이 암벽의 중간쯤에 허공에 매달아 놓은 듯한 斗巖草堂이 더욱 기이스럽다. 수직의 바위 움푹 파인곳에 기둥을 세워 처마를 밀어넣고 기와를 올렸다. 지붕의 반은 바위 안으로 나머지는 허공에 다리가 되어주는 바위에서 마무리를 한 정자안에는 한 칸짜리 방과 남,서로 방을 둘러 두 칸의 마루를 만들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다
호남의 8대 명혈에 속하는 곳이 영모마을의 뒷산은 금반옥호, 선인취와 형국이란다, 금 소반에 술을 차려놓고 신선이 술에 취해 누워 있다는 뜻이다. 들 건너 구암마을 주변에는 아홉개의 바위가 있는데. 산신이 말을 타고 내려와 술을 마시기위해 안장을 얹어두고 탕건을 벗어 두었다는 안장바위와 탕건바위, 그리고 술에 취해 잠든 신선을 말이 울며 깨웠다는 마명바위와 시끄러워 재갈을 물렸다는 재갈등바위와 함께, 선바위, 형제바위, 병풍바위, 벌바위, 병바위까지 다양한 신선설화가 깃든 9개의 바위를 바라볼 수 있다하여 九岩이라 부르게 됬단다.
근차(謹次 -삼가 차운하며), 호암초당 운(壺巖艸堂 韻),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그 외의 글씨들은 먼말이 먼말이고 먼뜻인지 알수없는 나지만...........좌우지간 이런 편액이 걸려있응께
초당에 몇개의 현판이 걸려 있지만 누마루에 걸린 '고산경행(高山景行)' 편액은 시경에서 따온 글로 '사람이 우러러보는 산과 사람이 걸어가는 큰길'이라는 뜻이다. 무릇 세상을 이끄는 이들이 높은 산과 큰길처럼 공명정대하게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옛날 주인의 마당쇠는 이 어려운곳 까지 나무를 매고와서 주인어른 물팍 따숩게 하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
급식소 뒷편 길에 이르지만 두암초당을 찾아가라는 이정표는 없었다, 농작물 넝쿨과 잡초 사이를 해집으며 짐작으로 오르면 희미한 길이열린다, (겨울철에는 선명한 길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두암정에서 되돌아나와 두락암 좌측인 우측으로 길이 열리고 약간 급한 경사를 따라 오르면 두암초당 전자바위 뒷편에 이르게 된다. 몇 사람이 비를 피할수 있는 굴이있고 그 옆으로 밧줄이 대롱거린다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데 초보자나 노약자는 도움이 필히 요구된다
4~5m의 수직바위를 조심스럽게 오르면 가슴 트이는 풍광이 펼쳐진다, 아산지방의 들녘 건너편으로는 선운산으로 이어지는 안장바위가 손에 잡힐듯이 건너다 보인다
혹시나 하고 두암초당의 지붕을 볼 수 있을까 하고 벼랑끝에서 고개를 내밀어 볼려고 시도 해 보지만 후들거린 다리와 쿵당거린 가슴에게 이를 완강하게 거부 당하고...................
잠간의 시간에 눈 을 호강시켜주고 되돌아 내려 오는데 오르는 것보다 더 위험함을 경험한다
두암초당 주변들은 만정 김소희 명창이 15세 때 득음한 곳으로 알려졌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은 고창 아산면 소재지에서 선운사로 가는 길목인데 선운사 문화권 지역으로 개발되는 지역이라 한다, 아산초등학교가 멋들어지게 내려다 보인다,
그림 중앙의 2층건물이 영모마을 회관이다, 버스는 마을까지 진입이 어렵다,
병바위 옆으로 인천강 주진천의 돌징검다리가 보인다 여기서 보기에는 건널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려서 요즘 내린비로 건너기 어렵다, 고창군에서는 건널수 있음은 물론 아산초교에서 병바위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탐방객의 바램이다
초당으로 가는 길 옆으로 있는 할매바위라고 하는데 병바위와 이름을 바꿔 불렀으면 어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할매같이....아니 할매를 닮은 이 바위가 병바위다, 어떤이는 이승만 대통령을 닯았다고 해서 큰바위 얼굴이라고도 부른다,
병바위설화 선동(仙洞) 뒤 선인봉에 사는 신선이 반암(盤岩) 뒤의 채일봉에서 잔치를 하여 몹시 취했다. 취하여 자다가 잠결에 소반을 걷어차서 술병이 거꾸로 선 것이 지금의 병바위이고, 반암에 있던 소반이 굴러 영모정 뒤 지금의 자리에 놓이니 바로 소반바위이다. 이곳에 반암, 호암의 마을 이름이 생기고 금반옥호(金盤玉壺), 선인취와(仙人醉臥)라고 하여 명당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 병바위 위에 금복개[금 술잔]가 있는 것으로 전하나 워낙 가팔라서 아무도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암리 병바위」는 신선이 잔치를 벌이고 취하여 자다가 소반을 걷어차 거꾸로 선 술병이 병바위가 되었다는 암석 유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