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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회수를 도와주고
증 언 자 : 김정현(남)
생년월일 : 1948. 3. 1 (당시 나이 32세)
직 업 : 제약회사(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은 국민학생을 적십자병원에 데려다준 후 병원 앞에서 무장을 하고 22일부터는 전남일보 현관 입구에서 무기를 회수하는 일을 도왔다. 27일 중앙고속터미널 부근의 초원장여관에서 31사단으로 끌려가 6월 중순 풀려 났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남의 집에 입양
나는 1948년 전남 영광군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교편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6.25 때 좌익활동에 연루되어 총상을 당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3살 된 나를 영광금융조합 상무인 양부에게 입양시켜 버렸다. 양부, 양모의 끔찍한 보살핌으로 활발하게 지냈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춘기 때부터 뿌리에 대한 갈등을 시작한 나는 점차 방탕의 길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광주 숭문고를 졸업하고 서울 우석대학에 입학했으나 1학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제적 되었다.
광주로 내려와 하는 일 없이 지내다 소위 건달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이런 중에도 나는 친부모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1972년 가사재판을 하여 다시 호적을 찾았다. 그때는 형님 한 분만 살아계실 뿐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다.
새로이 마음을 잡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1975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광산군청 식산과에서 근무했으나 공무원 생활을 진득이 할 수가 없었다.
1979년부터 삼성산약 제약회사에 다니는 선배의 소개로 그 회사의 판매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후 구시청 사거리에 있는 결혼한 그 선배 집에서 함께 살았다.
시위상황을 목격하고
평소 박정희 장기독재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김대중씨의 팬이었다. 김대중씨 등 많은 인사가 구속되고 계엄령이 선포되어 광주시내에서 이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나자 나는 시내 이곳저곳의 상황을 보러 다녔다.
5월 18일은 계엄령이 확대조치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선배와 친구들과 함께 제2수원지에 있는 닭집에서 밤을 지샜다.
그 다음날 구시민관(현재 한미쇼핑) 2층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는데 시내 분위기가 이상했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공수부대가 보였고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원래 성격이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회사로 출근한 후 곧바로 시내로 나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오전에 학생회관 후문 계단에서 4, 5명의 공수대원이 남학생 2명의 손을 뒤로 묶어놓은 채 곤봉으로 등을 때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공수들에게 돌을 던지고 도망갔다. 재빨리 쫓아간 공수들은 그 사람을 잡아 온몸을 지근지근 짓밟고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 사람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하고 다들 흥분했지만 더 이상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해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도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18일 오전 광주공원 앞에서도 남녀 학생을 공수들이 남학생을 팬티만 입히고 여학생은 속옷이 다 보일 정도로 옷을 흐트러놓고는 양팔을 뒤로 묶은 채 어디론가 끌고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자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재 그랜드호텔 옆 골목길에서 공수대원들이 소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봤다.
"어째 오늘은 쉬요?"
"우리도 쉬면서 진압해야죠."
그들은 술을 먹다 말고 대꾸했다.
5월 20일 시내가 시끄러워 직장도 쉬었기 때문에 아침 나절을 집에서 보낸 후 오후에 시내로 나갔다. 금남로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켠 수백 대의 차가 일제히 도청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버스와 트럭이, 그 뒤에는 택시가 줄을 이었다. 금남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을 밝혔다. 나는 한국은행 앞에서 구경을 했는데 공수부대들이 갑자기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가톨릭센터 뒷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얼마 후 MBC방송국이 불에 타는 것을 봤다. 그곳에는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MBC방송국이 불에 타자 그 옆의 전자제품상회에서는 제품을 모두 도로가로 옮겨놓았다. 갑자기 공수부대가 탄 장갑차가 노동청 쪽에서 달려와 그 제품을 깔아뭉개고 지나가더니 다시 노동청 쪽으로 갔다. 그때 한 여인이 방송을 하고 다녔다.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알리고 시위대의 투쟁열기를 고양시키는 내용이었다.
21일 이전으로 기억되는데 도청 뒤의 현재 미주장 앞 가두에서 하얀 머릿골을 봤다. 그곳에서 시민들이 총에 맞은 시체를 어디론가 옮겼다고 했는데, 아마도 하얀 머릿골은 시체의 머리에서 나온 모양이다. 또 계림동을 지나다가 피범벅이 된 시체를 봤다. 광주고와 계림동 사거리 사이의 왼쪽 2층 건물의 계단에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계엄군은 국민학생에게도 총부리를
5월 21일 사직맨션에 사는 김병목 선배와 함께 도청으로 나갔다. 도청 앞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나와 선배는 상업은행과 관광호텔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장갑차 한 대가 금남로 5가 쪽에서 도청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공수부대들은 장갑차가 관광호텔 앞에 이르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순간 천지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장갑차 안의 학생이 고꾸라진 것을 보고 도망을 갔다. 그 많던 사람들이 물결 가르듯 흩어졌다. 계속해서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망가는 사람들에 부딪히며 무등극장 쪽으로 빠졌다. 선배와 나는 다시 만나 무등극장 앞에서 상황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총소리는 멎었다가 다시 연발로 들리곤 했다. 바깥 상황이 궁금하여 전남매일신문 앞 도로를 내다봤다.
전남매일신문사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선배와 함께 즉시 그 곳으로 달려갔다. 자세히 보니 국민학교 2-3학년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가 척추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애는 이미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그때가 오후 3시 쯤 되었을 것이다. 쓰러져 있는 아이를 업고 근처의 김기창내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다. 부상이 심해 그곳에서 치료할 수 없어 적십자병원으로 연락을 했더니 지프차가 왔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적십자병원으로 가서 총상당한 국민학생을 응급실로 데려다주고 나왔다.
병원 앞에는 마침 여러 대의 시위차가 지나고 있었다. 그중 안면이 있는 후배가 군용 트럭을 운전하고 있었다. 선배가 집으로 가버리자 나는 그 군용 트럭에 탔다. 차 안에는 열 명 이상의 시위대가 카빈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도 차 안에 있던 카빈으로 무장했다. 차가 구시청사거리를 지나자 나는 서너 명의 시위대와 함께 총을 들고 내렸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황금동지역을 지키자고 하면서 그날 밤을 불로교 부근의 여인숙 옥상에서 교대로 경비를 섰다.
22일 아침 총을 들고 구시청사거리에 있는 선배 집으로 갔다. 형수는 선배가 들어오지 않는다며 찾아다니자고 했다. 하는 수 없이 형수와 함께 도청, 상무관 등으로 사망자를 확인하러 다녔다. 먼저 상무관 벽에 붙어 있는 사망자 명단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김재환이라는 선배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형수는 울상이 되었다. 나는 선배가 다른 여자와 함께 도망쳤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시체라도 찾기 위해 상무관으로 가봤다. 그곳에는 가족들이 나타난 몇 십 구의 시체가 입관된 채 태극기로 덮어져 있었다.
다시 도청 안으로 가서 선배를 찾았다. 도청 회의실 옆 길목에 20여 구의 시체가 있었다. 입관된 것도 있고 죽은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시체도 있었다. 시체는 대개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총이나 대검에 찔린 경우가 많았다. 그곳에도 선배는 없었다.
곧바로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향했다. 영안실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시체의 형상이 끔찍해 얼굴만 보고 다녔다. 대개 젊은 청년층이 많았다. 전남대병원에서도 찾지 못하자 선배가 자주 다니는 여관을 돌아다녔다. 모두 허사였다.
도청에서 무기회수를 도와 주고
하는 수 없이 형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청에서 무기를 회수한다는 방송이 들렸다. 나는 집에 가서 숨겨두었던 카빈총을 가지고 도청 앞으로 갔다. 전남일보 현관 입구에서 무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7, 8명의 학생들 이 지하계단에 총을 쌓아두고 지키고 있었다. 카빈, 권총, 수류탄, 실탄, 등 2백 여 정의 총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그때 내가 아는 전남일보 신문기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학생들이 저지했다. 내가 그를 들여보내 주라고 해 그는 자료를 챙겨서 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무기를 회수했다. 기관총과 LMG도 수거되었다. 무기회수를 도와주고 궐기대회에도 참가했다.
27일 계엄군의 검문을 받고
5월 26일은 회사의 연락을 받고 출근했다. 행방을 몰랐던 선배가 돌아와 사무실에서 동료 한 명을 포함해 세 명이 삼봉을 쳤다. 저녁이 되자 선배가 집에 들어가지 말고 여관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 세 명은 여관이 많은 중앙고속터미널 부근으로 선배 차인 은색 포니를 타고 갔다. 여관으로 가던중 광주역 근처에서 지프차를 탄 시위대를 봤다. 아는 후배가 총을 들고 있었다. 무기회수를 했던 나는 그가 위험할 것 같아 총을 달라고 한 다음 자가용 뒤 트렁크에 실었다. 그런 후 곧바로 초원장여관으로 갔다.
5월 27일 아침 창문을 열어보니 부근의 건물 옥상에 1, 2명의 계엄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곧이어 임검을 나왔다며 철모에 하얀 띠를 두른 계엄군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방을 뒤지더니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우리는 총을 가지고 있어 불안한 마음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며 "지금 나가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지금은 나가지 말라고 했다.
잠시 후 또 검문을 하더니 세번째 검문 때는 모두 나오라고 했다. 여관의 현관 입구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우리 세 명은 '설마 무슨 일이 생길라디' 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현관 입구로 내려갔다. 그들은 우리 차를 향해 M16을 쏘았다. 어제 후배에게 가져온 총을 본 모양이었다. 이후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차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여관 주인이 우리를 손가락질 했다. 계엄군들은 우리 세 명 중 나에게 달려들어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세게 때렸다. 우리들 중 내가 가장 젊어 보였고 머리도 길어 나를 찍은 것이었다. 그런 후 나를 향해 총을 겨냥했다. 내 머리 위로 총알이 핑핑 날아와 벽에 구멍이 뚫렸다. 나는 공포감에 눈만 감고 있었다.
계엄군 중 한 명이 중앙고속터미널 대합실로 내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갔다. 그 곳에는 5, 6명의 계엄군만 있을 뿐 일반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뒤에 있던 계엄군이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찍어버렸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에 깨어나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선배와 친구가 보였다. 여관에서 잡혀온 다른 여러 사람도 보였다. 선배의 말이 내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고 했다.
31사단으로 끌려가
우리는 신발을 입에 물고 요한병원 앞까지 차에 실려 끌려갔다. 그곳에는 다른 곳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계엄군들은 50여 명의 사람들을 굴비 엮듯 묶어 군용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31사단 연병장이었다. 높은 군용 트럭 위에 한꺼번에 묶여진 우리들은 군인들이 한 사람을 끌어 내리자 일제히 밑으로 떨어졌다. 곧바로 우리는 연병장에서 팬티만 입은 채 모두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그런 후 31사단 영창 안으로 끌려갔다. 영창 안에는 네 개의 방이 있었는데 우리는 제일 큰 방에 보내졌다. 모두 50여 명의 사람들이 꽉 찰 정도였다. 곧바로 조사를 받았는데 총을 소지했다는 것 때문인지 A급을 받았다.
며칠 후 합동수사본부에서 수사를 했다. 우리가 있는 바로 앞방이 조사실이었는데 조사받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겁을 잔뜩 먹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 이름을 불러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그런데 조사실 입구에 내가 아는 후배가 있었다. 보안대 중사인 진장용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후배는 나를 보자 "형님, 무슨 일이오?"라며 의아해 했다. 그는 내 조서를 보더니 사실이냐고 했다.
나는 사실대로 후배가 가지고 있던 총을 차에 옮겨놨을 뿐이라고 했다. 그 후배가 조서를 작성해 주어 D급으로 판정을 받았다.
31사단 영창에서 2주일 정도 있다가 군용 트럭을 타고 상무대로 갔다. 31사단으로 끌려올 때 신발을 입에 물고 있다가 놓쳤기 때문에 맨발로 갔다. 그들이 이끄는 상무대 안의 공병대 창고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교도소에 있던 사람, 통합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옮겨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정훈교육을 받은 후 각서를 쓰고 6월 중순쯤 석방되었다. 선배와 친구는 나보다 보름 뒤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의 병치료
석방 후 곧바로 목욕탕으로 가서 몸을 살펴보니 계엄군에게 맞은 자국으로 온 몸이 시퍼랬다. 몸이 아파 회사에 나가지 못하고 병치료만 했다.
1981년 10월 김두원신경외과에서 추간판탈출증(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허리가 약간 휘어져있어 수술을 했으나 그후에도 통증이 계속되었고 머리에도 열이 났다. 머리 왼쪽을 보니 말랑말랑했다.
개머리판으로 맞은 부분이 그렇게 아팠던 것이다. 윤정수외과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머리에 고름이 들었다며 50시시 주사기로 고름을 빼냈다. 약을 먹으니 머리의 부기가 가라앉기는 했으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은 계속됐다.
1982년 10월 김두원신경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머리의 왼쪽을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머리의 피가 터지지 않아 부어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수술을 했더니 머리뼈 깨진 것이 나왔다. 1.5센티미터 정도의 머리뼈가 핏덩이에 싸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7년 동안 알콜 속에 넣어 보관했다. 수술 후에도 계속 약을 복용하나 두통이 심하고 구역질이 나 정신을 잃을 정도다. 특히 날씨가 덥거나 추울 때 화를 내거나 허기가 질 때면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빠질 듯한 통증이 온다.
1981년 1월 다시 신창약품 제약회사에 근무했으나 12월에 그만두고 개인 수입 약품상사를 1985년까지 계속했다. 그후 대하신약병원 과장으로 근무하다 1987년 5월에 그만두었다. 내가 했던 일은 주로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 약품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5·18은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해결책으로 부상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광주시민 전체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때는 소수 몇 명이 싸운 것이 아니다. 광주시민 전체가 동참하였으므로 광주 시민 모두가 피해자인 것이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