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구층목탑의 높이는
82m
황룡사구층탑 복원예상도
'구황동'이라는
동명
황룡사지 일대를 행정구역상 지금까지도 구황동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일대에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 '황' 자가 들어가는 절이 아홉 개가 있었다고
해서 구황동이라고도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신라 진흥왕 때 이 곳에 신궁을 지으려고 했는데 아홉 마리의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므로 궁궐
대신 절을 세우고 구황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황룡사의 구층탑을 줄여서 구황동이라고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수없으나 대체적으로 첫번째 설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황룡사지
황룡사는 신라 불교문화 속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성지이며 신라호국정신의 구심체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553年 2月에
진흥왕이 소사(所司)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남으로써 왕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여 불사(佛寺)로
고쳐 짓게 하고 그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로 하게 했다"고 한다
신라 최초로 법흥왕이 불교를
528년에 공인하고 13년 되던 해인 540년에 돌아가시자 조카인 진흥왕이 나이 7세로 왕위에 올라 14년되던 해인 553년에 비로소
皇(黃)龍寺란 사찰 이름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했지만 신라는
이 새로운 불교를 당면한 국가적 요청과 결부시켜 삼국통일의 숙원을 이룩하려는 계기의 하나로 황룡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건립된 황룡사는 신라와 고려,
두 왕조를 통해 국민들의 구심체로 숭앙받아 오던 중 고려때 몽고의 침입과 더불어 호국정신을 말살하려는 몽고병의 의도적인 방화로 모두
불태워짐으로써 700여년 동안이나 계승되었던 법등(法燈)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그후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절터는 민가의 대지나 전답으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유적지(遺址)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6年 4月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착수하여 8년 동안 황룡사의 대체적인 모습을 찾아내고 1983年에 발굴조사를 모두 끝마치게
되므로써 베일에 쌓여있던 황룡사에 대한 비밀이 대략 밝혀지게 된
것이다
황룡사 출토 금동 이병불상
황룡사지구층탑
황룡사구층탑은 장륙존상을 안치한 금당이 조성되고 60여년이 지난 후인
선덕여왕 재위 14년인 645년에 조성이 되었다.
이 구층탑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자장율사가
당나라 정관 10년 즉 636년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태화못가를 지날 때 신인이 나타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
대화에서 자장은 우리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해 있으며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라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고 했다. 즉 이 내용은 불력으로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장은
정관 17년 즉 643년에 당태종이
준 경전과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 에게 건의했다. 선덕여왕은 군신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기술 지도를 받고 이간 용춘(용수)으로 하여금 공사 감독관으로 하여 소장 200人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된 것이다.
또 탑이 세워질때의 상황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음 찰주를 세우던 날에
공장 아비지의 꿈에 본국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문에서
나와 목탑의 기둥을 세운 후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아니하였다. 아비지는 이 일이 부처님의 계시임을 깨닫고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완성된 년대를 정관
19년을사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 졌다고 하여 645년에 완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탑을 세운지 23년 후에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된다
황룡사구층탑
예상도 시민체육관 앞에 있는 구층탑 모형
탑의 규모를 보면
황룡사구층목탑의 높이가 철반 위쪽은 7보(42자) 그 아래는 30보 3자(183자),
총225자로 적혀 있다. 이를 현재 수치로 환산하면 탑의 높이는 무려 82m나 되는 엄창난 크기의 탑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자장이 오대에서 받은 사리 백립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과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구층목탑의 사리함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황룡사 사리함
1964년 황룡사지 금당부근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목탑이 있었던 자리에서
거대한 덮개돌을 들어내고 심초석의 사리공을 찾았지만 그 안에 있어야할 사리함은 이미 도굴되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구층목탑의 심초석과 사리한 뚜껑
황룡사구층탑의 심초석과 사리공
그로부터 2년 뒤인 1966년, 황룡사 발굴 당시 발굴조사위원이었던 황수영박사는
진귀한 물건이 있으니 감정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의뢰품울 받아 곰꼼히 살펴보니 그 물건은 바로 황룡사 심초석에 있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의 사리함이었다. 이로 인하여 범행을 한 사람들이 잡히고 사리함은 회수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4개의 금동판을 경칩으로 연결하여 사각형 형태인 사리함 네 귀에는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고 문고리가 있는 앞면에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금당(법당) 안에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10대 제자상, 2기의 신장상이 새겨져
있었다
청동사리함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가지고 와 황룡사구층목탑에 봉안한 부처님진신사리
황룡사 사리는 정확한 기록과 출토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리함 안에는 사리 그릇, 청동으로 만든 작은 함, 사리내함이 있었는데 사리내함은
많이 부식되었지만 3면의 안밖에 황룡사구층탑의 내력을 적은 '찰주본기(刹柱本記)'기 적혀 있어 황룡사를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우리나라 진신사리 안치에 대한 문헌기록으로는 '신라 진흥왕 10년(549년) 봄 양(梁)나라에서
신라의 각덕(覺德)과 동행하여 사신을 파견하면서 불사리를 봉송하여 오자 왕은 백관과 함께 경주 흥륜사(興輪寺)의 앞길에 나가 이를 맞아
들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조에 최초로 나타나고, 실물로서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사리감이 567년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황룡사치미
황룡사 치미(망새) 기와
길상(吉祥)과 벽사의 의미로 궁궐이나 사찰의 용마루 끝에 사용되던 장식기와인 치미는
망새기와라고도 하는데 복을 기원하고 액운을 쫓기 위하여 상상의 새인 봉황의 날개와 깃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황룡사의 치미는 무려 높이가 182cm, 너비가 105cm로 워낙 크기 때문에
한꺼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와 위로 둘로 분리하여 만들었다
치미의 가운데를 보면 구멍이 있는데 이는 아래 위를 끈으로 묶었던
자리이다.
색채는 흑회색을 보이며, 표면의 경도는 단단한 편이다
황룡사 치미에 새겨져 있는 남여 인물상
이 치미의 양쪽 옆면과 뒷면에는 연꽃(연화문)과 인물상(인면문)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는데 인물상은 웃는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엇갈려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인면문의 남자는 수염까지 상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치미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의 문양이며 좌우측이
안정된 구조를 이룰 뿐만 아니라 깃과 문양까지도 아주 세부적으로 표현되어진 걸작이다
황룡사 사리내함에 적혀있는 찰주본기
찰주본기에 적혀 있는 명문들은 1972년 원자력연구소에서 표면의 녹을
기술적으로 처리 제거한 결과 판독을 할 수가 있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룡사구층탑
찰주본기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대왕 때에 세운 것이다.
전에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호를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선덕대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당나라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638)에 우리나라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왕
12년 계묘년(643)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이에
(왕은)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과
소장(小匠)
이백여인을 데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치었다.
(탑의)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이다.
과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군신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
(탑을 세운지)
백 구십여년을 지나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이르니 (탑을 세운 지가)
오래 되어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라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여러 재목을 모은지 3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의 왕이 즉위한 지
11년인 함통(咸通)연간 신묘년(879)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왕의
친동생인 상재상(上宰相)
이간
김위홍(金魏弘)이 책임자가 되고 사주(寺主)인 혜흥(惠興)을 문승(聞僧)이자 수감전(脩監典)으로 삼아 그들과……대통(大統)이자 정법화상(政法和尙)인 대덕(大德)
현량(賢亮)과 대통이자 정법화상인 대덕
보연(普緣)
그리고
강주보(康州輔)인 중아간 김견기(金堅其)
등 승려와 관인들이 그해
8월 12일 처음으로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안에 다시『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거 하여 작은 석탑 99개에 각각의 석탑마다 사리 하나씩을
넣고,
다라니 네 가지와 경전
1권을 책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여 철반의 위에
넣었다.
이듬해
7월에 9층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
그 물건은 불가사의한데
다만 날짜와 사유를 적은 것이 없었다.
25일에 본래대로 해두고
다시 사리 백개와 법사리 두 가지를 봉안하였다.
(왕이)
사유를 적고 창건한 근원과
고쳐 세운 연고를 간단히 기록하게 하여,
만겁이 지나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함통(咸通)
13년
임진년(872)
11월
25일 적음.
숭문대(崇文臺)
랑(郞)인 춘궁(春宮)
중사성(中事省)의 신(臣)
요극일(姚克一)이 왕명을 받들어 씀
사리내함의 겉면
황룡사지에서 왜 이런 물건이 출토되었을까?
왼쪽은 회랑 외곽에서, 오른쪽은 담장 배수로에서 발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