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심問心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찍이 옛사람은,
'인물의 생사生死란 곧 한 기운[一氣]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기운이 모이면 물체物體를 이루고, 기운이 흩어지면 물체는 없어진다.
모여서 물체를 이루면 자연히 그 속에 정신이 생겨 물체와 함께 성장成長하고
지식知識이 성취된다.
물체가 오래 되면 형체는 낡아지고 정신은 쇠약하고 혼미해져 물체와 함께 없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빈 것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나고 죽는 즈음을 살펴보니 적이 이 설設에 의심되는 점이 있다.
사람이 처음 났을 때에는 지해知解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영조靈照가 환하게 밝으며,
사람이 금방 죽게 되었을 때에는 수족은 혼란하여져도 영지靈知는 전과 다름이 없다.
일찍이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이 단속斷續되는 일이 없고
정신이 혼미함과 밝음이 증감增減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난다는 것은 응당 본래 없던 것이 홀연히 있는 것이 아니고,
죽는다는 것은 응당 본래 있던 것이 홀연히 없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저것이 이미 생사를 관통하여 한결같다면,
그 처음과 끝을 누가 능히 구명究明할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은, 그속에 과연 법칙이 있는 것일까?"라고 하였다.
대답한다. "이 법칙이 세상에 밝혀지지 아니한 지가 이미 오래다.
너는 잠자고, 그리고 깨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꿈과 깸은 서로 변환變幻하여 천 번 변하고 만 번 바뀌며,
지해知解의 성립과 괴멸과 사상의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몇 번이나 옮기고
변전하는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변환 속에서' 그 변환을 따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것(변전하지 않는 것)에 의하여 꿈꾸기도 하고 이것에 의하여 변화하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누가, 그것은 꿈이며 그것은 깬 것임을 알 수 있겠으며,
함께 변화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무지無知의 지혜는 능지能知의 지혜와는 다르다.
네가 능지의 지혜를 가지고 어찌 무지의 지혜를 알 수 있겠는가."
或曰嘗以爲人物生死 卽一氣聚散 氣聚成物 氣散物亡 聚而成物
自然神生於中 與物俱長 知識成就 物久形弊 精哀神昏 與物俱亡
究意歸虛 觀於生死之際 竊有所疑 初生也 知解未成 而靈照朗然
垂死也 手脚慌亂而靈知自如 未嘗爲聚散之所斷續 昏明之所增滅
其生不應自無而忽有 其死不應自有而忽無 彼旣貴生死而一如
其始終熟能究焉 不識其中 果有斯理乎 曰斯理之不明禦世久矣
爾不知寤寐乎 夢覺相幻 千變萬化 知解之成壞 思想之斷續
不知其幾許遷轉 而一貫不隨者存 故依此而夢覺 依此而變化若無是
孰能知夢知覺知變知化而不與之俱乎 無知之知 異乎能知之知
爾以能知之知 惡知無知之知
표제의 문심問心이란 말은 마음에 물어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편은 저자 월창 거사가 자기 마음에 대하여 자문자답한 것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난다는 것은 기氣가 모여서 형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형체가 구성되면
거기에 정신이 부여되어 형체와 함께 성장하고 지식이 성취된다고 생각하였다.
또 죽는다는 것은, 형체가 낡아지면 정신이 쇠약하여져서
물체와 정신이 함께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거기에는 의심되는 점이 있다.
사람이 나면 금방 마음의 영명함이 있고,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에도
정신은 정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물체와 정신이 성장한다는 말,
물체와 정신이 혼미하여 흩어진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난다는 것은 없던 것이 홀연히 있어지고,
죽는 다는 것은 있던 것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은 또 아닐 것이다.
죽고 사는것을 꿰뚫어 한결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 처음과 종말을 누가 구명究明할 수 있는가.
과연 생사에는,
기가 모이면 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렇게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의 꿈과 깸은 서로 천 번 만 번 변하며 사람의 안다는 것,
사상이란 것도 몇 번이고 변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다.
깬 것이다라고 분별하면서 그 변화에 따라 그 자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환상도 아닌 것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니 인간의 능지能知의 지혜,
즉 인위적으로 애써서 알려고 하여 아는 지혜를 가지고는,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아는 지혜(無知之知),
즉 천지자연의 저절로의 법칙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월창 거사의 진리에 대한 솔직하고 순수한 고백이며
또한 간절한 염원이기도 할 것이다.
노자老子는 "알면서 아는 체하지 않는 것이 상덕上德이고,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病)." 라고 하였다.
월창 거사는 적어도 병든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 노자는 우주의 항구불변의 법칙을 '도道'라고 하였다.
'도'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법칙이라는 말이겠다.
또한 항구불변하는 것이니 진리眞理인 것이다.
노자는 이 항구불변의 진리를 '도'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혼돈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어서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고요히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짝도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디서나 안 가는 곳이 없건만 깨지거나 손상될 위험이 없다.
그것은 천하 만물의 어머니가 될 만하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字를 '도道'라고 지어 부른다.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큰 것[大]이라고 한다.
하늘은 '도'의 법칙에 따르고 '도'는 자연의 법칙을 좇는다."
천지보다도 먼저 있고 하늘도 그의 법칙에 좇는다고 한 '그것'을,
노자도 그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자를 '도道'라고 지었다고 한다.
여기 월창 거사가 알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영원불변의 존재,
그것이 바로 이 노자의 '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인간의 지혜란 어느 한계 이상을 살피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월창 거사가 안타까워한 아쉬움도 바로 영원한 인간의 아쉬움인지도 모른다.
신록 속에 감추인 은혜로운 빛깔도
한량없는 그 숨결 아직은 모르는데
철없이 마음 설레어 미소 지어 보는가.
어디메 물레바퀴 멎는 여음餘音처럼
걷잡을 수 없는 슬기 차라리 잔으로 넘쳐
동경憧憬은 원시로웁기 길이 임만 부르니라.
朴在森의 "攝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