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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는 “2023년 사회적 연결과 공동체가 외로움과 고립이라는 전염병을 치유하는 효과에 대한 미국 공중보건국장의 권고안”에 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비벡 머시의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 관한 연구 결과였다. 이에 따르면, 미국인의 절반가량은 이미 코로나19 이전부터 고독사의 영향권 아래 놓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을 낫게 하는 연결의 열쇠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간단히 실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누군가를 초대해 식사를 나누고, 대화 중에 경청하고 함께하며, 타인에게 봉사할 기회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만한 열쇠마저 너무 버거워 한다는 데 있다. 한국은 어떨까? 최근 김용 세계은행 (전)총재는 한국의 우울증이나 우울 증상은 37%로 세계 최고면서도 항우울제 투여량은 최저라는 이중 병리 현상을 지적하며 경고했다. “한국은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저 출생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출생률은 수백 년 전 유럽에 전염병이 돌던 시기보다 낮다. 인구 절벽은 가속화되고 자살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외로움이라는 전염병까지 퍼지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이 될 수 있다.”
퓨리서치 조사를 보아도 한국의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은 미국 등 여타 선진국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명적이다. 한국은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까?”라는 설문조사에서 친구와 일과 취미가 아닌 물질적 풍요를 선택한 유일한 나라다. 같은 전염병이라도 훨씬 치명적인 변종이 있듯,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전염병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변종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지 한참 지난 건 아닐까? 《한국교회 트렌드 2024》에 따르면 국민 절반 정도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한 외로움을 호소하는 데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교회마저 외로움을 해결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신자의 80% 이상이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신앙 활동이 아닌 다른 방식, 예를 들면 친목모임이나 여행과 같은 다양한 취미 생활에 의지한다는 통계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목회데이터연구소는 한국 사회에 가득한 외로움을 어떻게 대처할지에 관한 물음에 이제는 사회적 차원의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지지와 공감, 신뢰와 친절을 나누는 DNA를 가진 영적, 실체적인 공동체이므로 일반 시민만이 아니라 신자들이 외로움에 대처하는 주요 방식을 교회 안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면 좋겠다고 제언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근원적인 처방일까? 이러한 논의에 앞서 혹은 더불어 그리스도인이 외로움의 신학적, 영적, 실존적 차원을 직면하는 게 우선 아닐까?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혼자”라는 신학자 폴 틸리히의 전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틸리히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분리돼 있기에 하나님도 인간을 홀로 있음에서 해방하실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성이 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문제는 인간의 ‘홀로 있음’(aloneness)이 때로는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모르지 않기에 그는 전자를 ‘고독’(solitude), 후자를 ‘외로움’(loneliness)으로 구분했다. 오늘날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은 여기서는 후자에 해당한다. 틸리히는 “교제의 느낌을 줬던 이들이 떠났을 때 외로움은 지속적인 상태가 되고 심각한 우울을 지속시키는 원인까지 된다”라고 진단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 학문의 진단과 달리 그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더 나은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외롭지 않은 이들조차 죄책과 죽음으로 인한 외로움에서 오는 궁극적인 고립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까지도 외로움의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꼽는 세속화의 엄연한 현실을 고려할 때, 교회 내에서 단지 이런저런 상호 교류의 증진 노력만으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 이면에 더 깊은 원인이 내재한다면 이를 먼저 짚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본고에서는 일시적인 가치와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각각 지향하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을 스케치하고자 한다.1 이는 사실상 경제적 풍요로도 해결되지 않는 태산 같은 외로움의 영적 두께를 직시하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 서서히 나오도록 도울 수 있는 하나의 오래된, 그렇지만 진실한 지도를 흘깃 들여다보려는 것과 같다.
첫 번째 산에서 두 번째 산으로
2020년 아브라함 카이퍼 상 수상자로 선정된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두 번째 산》에서 인간의 일생에는 두 개의 산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처음에는 자아를 성취하고자 첫 번째 산을 오르려 한다. 그러다 생각하지 못한 추락을 경험하면서 이상한 행복을 경험한다. 이는 자기중심적 자아가 중요한 피라미드 산에서 타인 중심적 소명이 중요한 시내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이다. 첫 번째 산을 정복해서 자신이 바라는 우상을 제조하려던 오만한 사람이 이제는 두 번째 산에 정복되고 싶은, 그래서 산 정상이 아니라 경계까지만 오르는 겸손한 사람이 돼 하나님이 바라는 존재로 변해 가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있어야 할 자리로 인도된다. 조엘 오스틴이 첫 번째 산에 올라 잘 풀리고 잘 나가는 인생을 누리라는 소위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을 선언했다면, 미로슬라브 볼프는 두 번째 산에 올라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을 누리라는 또 다른 차원의 ‘번성 복음’(flourishing gospel)을 선언한다. 바로의 피라미드 산에서 추구한 것이 끝내 사라지고 마는 그래서 외롭기 짝이 없는 기쁨이라면, 모세의 시내산에서 조우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렇기에 외롭지 않은 기쁨이었다. 어쩌면 두 산 사이에 있는 인생 계곡에 떨어진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경험은 모호한 성취에 집착하던 낡은 자기가 빠져나오는 것이기에 결코 소모적인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료한 소명을 지향하는 새로운 자기로 다시 빚어지고 궁극적인 헌신을 향해 활짝 열리기 위해 고스란히 거쳐야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가면의 기슭에서 얼굴의 기슭으로
그렇다면 첫 번째 산을 오를 때 인간은 등반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을까? 스위스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에 따르면 사람은 ‘실제 인간’(la personne)과 ‘등장인물’(le personnage)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산에서 인간은 등장인물이라는 겉옷을 선택한다. 그리고 번영의 삶을 꿈꾸며 발을 내딛는다. 본래 실제 인간과 등장인물은 하나님의 형상과 신적 소명이 조화되도록 밀접하게 연결된 속옷과 겉옷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에덴에서의 타락 이후 실제 인간이라는 속옷은 심각하게 손상됐다. 그 후로 사람은 누구나 왜곡된 자신의 속내(속옷)를 완전히 드러내는 법이 없다. 대신에 등장인물이라는 두꺼운 겉옷으로 감춰 버린다. 그래서 참된 자아를 드러내는 통로가 돼야 할 얼굴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장만한 ‘가면’(persona) 노릇을 하고 만다. 우리가 가진 상당수의 만남은 각자 분장하거나 가면을 쓴 등장인물이 돼 만나는 정신적 만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최근 MZ세대가 관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어째서 관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할까? 표면적 관계에서 느끼는 허전함에 지쳐 가고 동시에 소중한 사람에 대한 진짜 그리움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산을 등정할 때 인간은 이제 등장인물이라는 겉옷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안에 실제 인간이라는 속옷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얼굴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 은혜로 모든 인간에게는 여전히 어떤 얼굴이 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인간의 얼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얼굴은 존재를 나타내고 자신을 보여 주는 통로다. 에덴의 타락 후에도 여전히 타자의 얼굴은 단지 밖에서 오지 않고 저 위에서 오는 어떤 것이다. 인간의 얼굴에는 낮음만 있지 않고 높음이 공존한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얼굴이 그분을 비추는 거울과 같기 때문이다. 햇빛은 달빛으로 반사해서 볼 때 아름답고 해로움이 없다. 햇살을 받는 대상의 광채에서 태양을 인식하듯, 타인의 얼굴을 통해 그분의 얼굴이 보이고 자신의 얼굴도 보이는 법이다. 그곳에 외로움이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로워도 나르시스의 연못에 비친 자아의 얼굴만 들여다보면, 나의 온전한 얼굴을 만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얼굴과 타인의 얼굴이 없는 자신만의 얼굴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자아의 능선에서 인격의 능선으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오직 ‘나와 그대의 나’가 있든지, ‘나와 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온 존재를 기울여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그대의 나’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그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하면 ‘그것의 나’가 되고 만다. 전자는 관계의 세계를 형성하지만, 후자는 경험의 세계에 머물 뿐이다. 관계의 세계에는 함께했던 나날의 정겨운 추억이 남지만, 경험의 세계에는 외롭고 씁쓸한 기억만 남는다. 이를 잘 알았기에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이력서 덕목’보다 ‘조문(弔文) 덕목’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것의 나’는 번영을 위한 ‘이력서 덕목’을 써 가지만, ‘그대의 나’는 번성을 위한 ‘조문 덕목’을 써 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력서 덕목’은 야망에 충실하고 실용을 중시하며, 경제 논리를 따르는 ‘외적인 아담’을 소개하지만, ‘조문 덕목’은 초월적 진리에 순응하고 친밀한 사랑을 원하며, 타인을 위해 헌신하려는 도덕 논리를 따르는 ‘내적인 아담’을 기억하기 위해 작성된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는 개인의 반대말이 공동체가 아니라 인격이라고 제대로 짚어 낸 바 있다. 이 말은 개인들로 이뤄진 공동체는 아무리 사회적, 재정적, 물질적 자원을 쏟아부어도 통상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고독의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경고다. 인격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공동체가 돼야만 고독의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본래 개인 혹은 자아는 인간보다 작은 차원에 속하지만, 인격은 인간보다 큰 차원에 해당한다. 개인 혹은 자아는 고립의 거리 두기에 따른 홀로 있음이지만, 인격은 관계의 연결하기에 따른 함께 있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김선희는 “자아(self)가 한 개별자가 자신에 대해 의식하는 능력에 대한 개념이라면, 인격(person)은 다른 인격들과 사회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고립된 인간은 자아는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격을 보존할 수는 없다. 인격은 공동체 안에서만 빚어지고 발휘되는 인간의 속성이자 능력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블라디미르 로스키가 정의한 바, 사람의 본성을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 적절한 장소를 인정할 때에야 포착되는 인격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번성을 소망하는 두 번째 산이리라. 인격이 빚어지는 그 산에는 외로움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니 말이다.
이 두 번째 산, 즉 번성의 산에 거하는 모든 인격적 존재와 교제의 근원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persona)에서 비롯됐음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시 133:1, 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야말로 자아도 아니고 개체도 아니라 인격이다. 따로 존재할 수 없고 함께 존재하는 분이다. 토마스 토랜스 말처럼, 삼위일체는 타자의 번성 혹은 충만을 위한 존재, 사랑하는 존재, 즉 인격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형(형상)이자 그분의 인격성이 심긴 존재로서 흙으로 빚은 것이 사람이다. 시인 정현종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인간과 인격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한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내 자아와 네 자아는 서로 기대지 못한다. 하지만 내 인격과 네 인격은 서로 기대고도 남는다. 그러고 보면 인격의 부재로 몸살을 앓던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이렇게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의 인격’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외로움의 비박2에서 고독의 비박으로
2018년 영국 정부는 고독부를 신설했다. 외로움은 국가가 직접 나서서 대처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다는 말이다. 고독사가 급증하는 일본도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 외로움을 고령자의 전유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지만, 깊은 고독 감정이 널리 퍼져서 이제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일곱 명 중 한 명이 만성적인 외로움을 느낀다. 가장 큰 충격을 준 대목은 이러한 만성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열다섯 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은 의학적 손상을 신체에 가한다는 사실이다. 멀지 않아 고독부 설치는 전 세계적 추세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고독부의 정확한 우리말 번역은 ‘외로움부’가 맞지 않을까? 사람들은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틸리히는 둘을 구분한다. 그는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혼자라고 규정한다. 모든 피조물은 숭고한 고립 가운데 타자와 거리두기를 하는 자기 제한성을 존재의 필연적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만 혼자가 아니라 별들도 혼자다. 광막한 우주에서 숭고한 고립 가운데 홀로 떠 있다. ‘홀로 있음’(aloneness)은 인간의 본질이자 현실이다. 이러한 홀로 있음은 고통스러운 외로움으로 하강할 수도 있지만 위대한 고독으로 상승할 수도 있다.
영국과 일본 정부가 고독부를 신설한 것은 ‘외로움으로 하강하는 홀로 있음’ 때문이지, ‘위대한 고독으로 상승하는 홀로 있음’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배고픈 5천 명의 무리를 먹이신 기적 후에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마태는 그날 저녁 예수님이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 14:23)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은 외로움을 이겨 내기 위해 섣부른 어울림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고독을 선택하셨다. 틸리히는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외로움을 이겨 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산 정상에 오르기 전 밤을 지새우는 비박은 그 정상이 두 번째 산이라면 외로움의 비박이 아니라 고독의 비박일 것이다. 틸리히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독에 대한 생래적 갈망을 지니고 있다. 고독은 우리가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행위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군중 가운데서 혼자일지 모르나 외롭지는 않다. 영원한 현존이신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이라면 고독은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은 경험이다. 그러니 담대하게 고독을 추구하는 것이 어떨까.”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렘 15:17).
사정이 이러다 보니 첫 번째 산의 세속 정부가 제아무리 노력한들 그저 번영을 열망하는 개인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자주 모인다고 해서 외로움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에 관해 솔직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두 번째 산의 교회 공동체가 번성과 충만을 지향하는 인격적인 만남의 자리가 돼 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주중에 홀로 있는 고독의 날이든, 주일에 함께 있는 교제의 날이든, 언제라도 외로움의 날은 아닐 것이기에,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백신으로 공인될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 그래서인지 틸리히는 “(첫 번째 산에서의 어설픈 필자 주) 여러 시간의 대화보다 (두 번째 산에서의 필자 주) 한 시간의 고독이 훨씬 더 우리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가까워지게 해 줄 수 있고 우리와 함께 그들을 영원의 산으로 데려갈 수 있다”라고 역설한다.
혼밥의 정상에서 성찬의 정상으로
성경은 날마다 삼시세끼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 세 종류의 인생이 있다며 세 가지 양식에 빗대어 이를 구분한다. 첫 번째 양식은 애굽에서 먹던 아담의 양식, 육의 양식,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 말을 빌리면 눈물의 빵이다. 이 빵은 먹어도 먹어도 외로운 그런 빵이다. 두 번째 양식은 애굽의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엮이지 않은 하늘의 빵이다. 광야의 식탁에서 먹었던 만나와 오병이어의 보리떡이다. 이 빵은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후한 빵이었지만,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외로울 수도 있는 빵이다. 세 번째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영적 연회에서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빵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곡식의 수많은 알갱이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섞여 한 덩어리의 빵이 되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매개로 서로 일치되고 결합한다. 그래서 이 빵은 결코 외로울 수 없는 빵이다. 빵을 통해 나는 너를 만나고 너는 나를 만나고 우리는 그분을 만나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이 모여 ‘교제의 빵’을 함께 먹는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 낸 작품으로 이자크 디네센의 단편 《바베트의 만찬》이 있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 가족과 터전을 잃고 가난하고 외로운 도망자가 된 바베트가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이 퍼진 노르웨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어느 목회자 자녀들의 환대로 12년을 숨어 지낸다. 그러다 일만 프랑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 놀랍게도 그녀는 그 돈으로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한 만찬을 준비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녀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놀라워한다. 소박하고 엄격한 삶을 살아온 그들이 흥겨워하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원망과 분노로 인해 퍼진 외로움은 사그라들고 마침내 화해의 마음이 마을 전체에 피어 오른다.
홀로 있는 날과 함께 있는 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함께하는 날’만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날’도 선물로 건네셨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홀로 지내신 주님께도 고독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고독이 영원한 현존이신 하나님 손에 붙들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면,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농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 작가 미우라 아야코, 의사 장기려 등 고독 가운데 하나님을 만남으로 외로움을 이겨내고 자기 자신의 남은 나날을 이웃을 위한 선물처럼 사용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첫 번째 산의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에서 외로운 군중으로 사는 데 만족하지 않고, 물리적 고립과 단절 속에서도 두 번째 산에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다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해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을 퇴치할 수 있다.
코로나가 끝나서 다시 모인다 해도 전처럼 번영을 열망하는 정신적 공동체가 된다면 흩어지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외로움이라는 복병을 맞닥뜨린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눈으로 사랑을 그리는 예배나 입술로 사랑을 말하는 첫 번째 산의 외로움만 남기는 교제는 멈추자. 가난함도 부요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참사랑의 교제와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주는 두 번째 산에서의 만남을 시작하자.
註
1) 본고는 필자의 저서 《하나님의 공동선》, 《성경과 공동선》 등을 기반으로 작성해 미래목회와말씀연구원 인카운터 포럼(2024.5.1)에서 발표한 “두 개의 산 ? 번영(prosperity)에서 번성(flourishing)으로”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2) 프랑스어 ‘bivouac’에서 나온 말. 야외에서, 특히 산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에 텐트를 설치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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