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꽤 여러 권의 소설을 읽었는데, 귀찮아서 제목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의욕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다 가을이 와 버렸다.
기억 나는 건 권여선의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
문지혁의 장편 <초급한국어>, <중급한국어>, 장진영의 <취미는 사생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이토록 사소한 것들> 아, 연초에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시, 올리브>를 잊고 있었네.
이제껏 읽은 소설 중에 단연 으뜸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이다.
151쪽의 짧은 소설이라 2-3번을 읽었는데, 읽을 수록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늘어난다.
"그래도 북적거리던 시절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활기가 탱글탱글한 덩어리처럼 손에 만져질 듯 기운 넘치던 시절에. 밤길을 걸어만 다녀도 축제 같은 기분이었어. 관광지라서 참 좋았는데. 가을이 오면 여름철에 바빴던 동네 사람들이 좀 멍하고 축 늘어져서 휴식에 들어가는 느낌도 좋았고.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런 말도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거쳐야 할 과정을 거쳐 지금 이렇게 된 거니까. (p.56)
그렇게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엄청난 일이다. 서로가 살아 있다는 것.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 누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
사실은 많은 것들이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다고 의식하고 살면 너무 괴로우니까 생각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 몸을 멍하게 지내는 세월에 버틸 수 있게 만든 것일까.
이 세상에 있는 자비와 무자비의 균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거대하다. 그저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깜짝 놀라면서 때로 받아들이는 정도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 같다. (p.62)
저녁노을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오늘이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침묵 속에서 깨우쳐 준다. (p.77)
“하느님이 참 두루 잘 생각했네.”
“그러게 말이야. 빈틈없이 생각하고 만들었다니까. 이 세상을.“
신기하게 의견이 같아, 둘은 마음이 둥실 넓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94쪽)
얼음은 녹아 금방 없어지는 것이라, 나는 늘아름다운 한때를 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의 꿈. 그것은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린아이도 나이 지긋한 어른도 다들 신기해하는, 이내 사라지는 비눗방울 같은 한때였다.
그 느낌을 정말 좋아했다.
그러니 그것을 잡아 조금이라도 어디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얼음은 엷고도 달콤하게 사라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나는 그걸 좋아했다. 그저 단순히 좋아했다. 처음에는 그 자잘하고 하얀 안개 같던 것이 점차 덩어리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물이 된다. 모두 달콤하게 배로 들어간다. 그런 느낌. (100쪽)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말이지. 그래도 모두의 마음 속에서 여기 빙수가게가 있었다는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이 앞을 지나면서 나와 빙수와 에스프레소의 맛을 떠올려 준다면, 나는 여기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 셈이잖아. 그건 또 내가 이 동네의 자연에 한 일이기도 하고. 여기에 오직 순수한 사랑을 남겼다. 그게 전부가 아닐까.”(113쪽)
……올해도 헤엄치게 해 줘서 고마워. 올해도 이 바다가 있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년에도 이곳에서 다시 헤엄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헤엄칠 때는 언제나 아쉽고, 바다에 그대로 하염없이 있고 싶으면서도 해가 저물어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다. 그 미지근한 물까지 몸을 따라 나오는 것 같다. 몸과 영혼의 일부가 바다에 녹아드는 듯 하다. 몸이 다 빠져나와 발목에서 파도가 찰랑거릴 때가 되어서야 겨우 포기한다. 그리고 애틋함만 남는다.(120쪽)
고향인 바닷가에서 빙수가게를 하는 마리와 여름 한 철 우정을 나눈 하지메가 주인공이다. 읽고 있노라면 내가 바닷가에 머무는 것 같기도 하고, 한가로운 휴가의 나날을 보내는 기분이다. 양양에서 이틀 동안 원없이 바다 수영을 한지 얼마 안되어 읽은 책이라 더욱 그런 기분에 빠져들었다. 유난히 '난폭했던' 올 여름에 청량한 선물처럼 만난 귀한 책이다. 추천해준 동료 순재 샘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