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민일보 2024년 10월 25일 금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식물도감
송태한
빼곡한 책시렁에 갇혀있던
큼직한 책을 펼쳐 들면 불쑥
숨어있던 꿀벌이 앵앵거린다
책갈피 잎사귀 틈에서 살며서
모시범나비 날개를 편다
범부채 벌개미취 노루오즘 광대수염
가슴에 이름표 단 유치원생들처럼
앙증맞은 꽃들이 줄지어 얼굴 내밀고
구름 지나가듯 계절이 성큼 건너간다
상수리나무 타고 내려온 다람쥐가
총총걸음으로 책장을 질러간다
식물도감 마지막 쪽
제철 만난 수목원 귀퉁이엔
수줍은 뱀딸기처럼 어느 틈에
꿈꾸듯 나도 기대앉아 있다
♦ ㅡㅡㅡㅡㅡ 식물도감을 수목원으로, 수목원을 식물도감으로 표현한 이중구조다. 수목원을 거닐다보면 큼직한 식물도감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식물도감을 펼치고 앉으면 머릿속에 수목원 풍경이 그려진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자신이 경험한 어떤 것에 대해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상이 펼쳐진다. 생각이 펼쳐놓은 상에는 이전에 보았던 것, 보이지 않던 것, 보지 못했던 것까지 나타나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이든 독서이든 자신의 안목만큼 펼쳐지고 보인다. 인생도 안목만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