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유적 놓고 개신교ㆍ천도교 갈등우려
3ㆍ1정신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유적 을 놓고 개신교와 천도교간에 갈등이 우려된다. 천도교청년회 중앙본부(회장 김산)는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15일 낮 12시 제암리 3ㆍ1운동 순국선열 위령탑 앞에서 81년만에 처음으로 천도교 예법에 따라 합동위령제를 개최한다.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92년 작고)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유해를 발굴, 82년 9월29일 경기도 주관으로 위령제를 지낸 적은 있었지만 순국일인 4 월 15일에 맞춰 천도교가 주관해 행사를 치르는 것은 최초이다. 길놀이에 이어 큰북공연, 천명, 위령제, 살풀이, 진혼제, 대동제, 모듬 북 공연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소속교단 신도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천도교청년회가 개신교 성지로 알려진 이곳에서 위령제를 개최하는 것 은 당시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천도교인이었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일제 헌병은 3ㆍ1 만세운동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던 이곳의 주민 20여 명을 교회안에 몰아넣은 뒤 불을 질러 죽였으며 곧바로 인근의 팔탄면 고주리로 몰려가 김흥렬 천도교 전교사 일가족 7명을 난자해 목숨을 빼앗았다.
김선진씨가 83년 펴낸「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미래문화사간)는 교회당 안에서 참살당한 주민 24명 가운데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감리교 신자 및 기타가 9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산 회장은 고주리를 포함해 제암리 교회 주변에서 학살당한 주민은 모두 31명이며 이 가운데 천도교인은 22명이라고 주장한 뒤 일제가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학살하기 위해 예배당을 택했을 뿐인데 기독교가 이를 왜곡해 기독교인의 순교성지로 둔갑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료에는 일본 헌병이 마을 기독교 주민 23명을 집단적으로 학살(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세 이상 남자 신도들은 교회에 모이라고 하였다(두산대백과사전)등 당시 교회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개신교 신자라고 적혀 있다. 또 이곳 역사기념관에 전시된 교회 모형도 인형들이 모두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관광공사도 제암리 교회를 개신교 성지순례 코스로 지정해 개신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5일 행사를 두고 개신교와 천도교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으며 제암리의 비개신교 주민과 교회 사이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실제로 해마다 이날 오후 8시 추모예배를 개최해온 제암리 교회의 강 신범 목사는 천도교청년회 주최의 위령제 참석요청을 거절했다. 강목사 는 주민들과 함께 천도교 신도들이 위령제를 지내는 것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종교 간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암리의 안용웅 이장은 3ㆍ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가 번성 했으나 지금은 교세가 약해 개신교 위주로 순국 유적이 꾸며지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교회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연합뉴스 2000/04/12 이희용기자 ]
[이와 비슷한 기사로 2000,04,15일의 한국경제신문의 윤승아 기자 의 기사도 있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제암리에서 일제에게 학살당한 주민중 대다수가 천도교인이었고 나머지는 기독교인 몇 명과 기타종교, 무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헌병은 단지 대량 학살 장소를 자행하기 위해 기독교의 예배당을 선택한 것일 뿐인데, 기독교는 재빨리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사료로써, 1998년 11월 4일 일본의 참의원 방한단으로 국내에 온 하시모토의원은 학살 관련 외교문서 복사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 공산당 하시모토 아치(4선)의원은 독립기념관을 찾아와 박유철 관장에게 전해준 문서에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9년 4월 22일 오후 1시 50분 일본의 총리대신 앞으로 보낸 것으로, 펜으로 쓴 육필이 5장, 사건전모를 요약 정리한 내용 1장 등으로 모두 6장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수원군 발안장에 파견된 보병중위 12명은 4월 15일 부근 주재순사를 동행, 제암리 기독교회당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25명을 집합시켜 전부를 사살하고 불을 질렀다. 문건의 내용은 이 사건이 군대와 경찰의 위신에 관련되고 외국인들이 비난할 소지가 있으니 철저하게 은폐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문서를 건네준 하시모토의원은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의해서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선생에게 헌화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외교문서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했다고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학살당한 사람들이 전부 기독교인으로 둔갑되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사망한 천도교인들을 기독교인들이 또 한 번 죽인 셈이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각인가!
만약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활발했고, 항일운동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증거가 있었다면 이러한 역사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항일역사가 너무도 빈약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