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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님이시여! 당신을 알고부터...
안산 원곡성당 FB
김 세실리아 (상희)
님 향한 일편단심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님이시여!
피 끓는 그 사랑을 바치신
이름 모를 넋이여!
그 사랑의 몸부림 되어
하얗게 웃는 고운 모습으로
말없이 길가에 피어난 님이시여!
그렇게 조용히 웃으며
말없이 살라 하시네.
당신을 알고부터
슬픔도 잊었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원망도 잊었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사랑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행복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용서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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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하느님 인식(認識) <제4부>
윤 클레멘트(양호) 신부님
<전주교구청 사무처장>
성녀 가타리나는 자신의 하느님 인식은 삼위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조주로부터 오는 힘, 아드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성령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 (이렇게 삼위 하느님을 잘 알고 사랑하기 위하여, 가타리나는 성 바오로의 말씀들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 ‘삼위 하느님의 지엄하심 ...’ ‘하느님을 맛들이고 알기 ...’ 등은 모두 성령의 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깊이를 가지데 될 때에, 우리는 “영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삼위 하느님은 온전한 하느님이시고 온전한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가타리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고 있느냐? 누구도 나의 빛 없이는 빛 안에서 걸을 수 없고 살 수 없다는 것을 ... 너는 참 빛인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너의 이성도 나로부터 나가는 것이고, 너의 믿음도 나를 비추어내는 것이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내어진 삶을 잘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빛으로 숨 쉬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만나며, 우리 인간 삶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영국의 신비가 노르빅의 쥴리앙(1342-1420, 영국의 신비주의자)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기술합니다. 쥴리앙은 기도의 신비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하는 분과 만나게 됩니다. 쥴리앙이 말해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하는 분과의 만남에서의 인식을 ... “예수 그리스도는 소박하시고, 친절하시며,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노르빅의 쥴리앙, 이 두 여인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십자가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내어진 존재들입니다 ...
가타리나는 하느님의 인식과 우리의 인식을 잘 전해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발견하게 되면서, 또한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과 우리를 둘러싼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하고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삶의 길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하여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미움과 어둠으로 지치기 쉬운 우리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서도 하느님을 얼굴과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
자녀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들의 눈과 마음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스로운 얼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더 잘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리워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의 선함과 존엄성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진리는 바로 우리 삶의 주변에서 선함과 존엄성을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 따스함. 수용. 인정. 존중. 돌봄. 용서. 화해. 연민. 평화 등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다른 것들 안에서 하느님의 좋으심과 선하심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해 갈 때에 우리 삶은 그만큼 풍요해 집니다. 우리 삶은 그 만큼 아름다워 집니다.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해 가는 삶은 가장 위대한 영성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각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나와 많이 다른 이들에게도 당신의 같은 모상과 사랑을 주시고 계시는 때문입니다 ...
‘하느님은 선한 이에게도 악한 이에게도, 옳은 이에게도 옳지 않은 이에게도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마태 5, 35) ...) 어떻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해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또 하나의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미움에서 사랑으로, 적대에서 친구에로, 갈등에서 화해에로, 전쟁에서 평화에로, 분노에서 용서로, 화나 성냄에서 연민으로 바꾸어 갈 수 있을 때, 그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아울러 우리 인간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을 다 겪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우리 인간의 얼굴로 당신도 함께 고통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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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2014. 7. 6
마태오 10, 17 ~ 22
♠ 복음 연구
* 17-18절 : 여기서 제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는다. 특히 그들이 첫번째 선교를 수행해야 할 유대인들 가운데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로마 총독들과 헤로데 일가의 유대 왕들이 관여하여 그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들 앞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변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고발되며, 일간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심을 가지고 비난과 단죄를 받는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한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증언이 될 것이며,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계시될 것이다.
* 19-20절 : 법정에 잡혀 가게 되면 결코 자신의 지혜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적절한 답변을 찾느라고 걱정해서도 안 된다. 순수하고 명확하게 신적인 증거만 하는데 만 온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협력자요 옹호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해 주시고 비난하는 자들로부터 지켜 주신다.
* 21-22절 : 집 안에서까지 박해자가 발견되며 증오가 가족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몹시 마음이 삐뚤어지고 정신이 혼란해져서 가족이라는 자연적인 유대 관계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묘사하신 것 역시 같은 것이다. 즉, 그분의 특사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미움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며, 온갖 맹렬한 비난과 실망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낙담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은 보장된 것이기에 그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조금도 절망할 이유가 없으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절망할 까닭이 없다. 법정에 끌러갔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주러 오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말없는 무수한 영웅적 행위들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충실함 속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된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신앙생활을 하면서 박해가 왔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견뎌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②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때 순교자들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복음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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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2014. 7. 13
마태오 13, 1 ~ 9
♠ 복음 연구
* 1~3절 : 예수님은 군중을 가르치려고 갈릴래아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분은 대군중이 당신 주위로 모여드는 바람에 앉을 자리가 없어 배위로 올라가 앉으셨다. 예수님은 스승의 위치에서 뭍에 있는 군중에게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내용이다. 비유의 구체적인 상황은 설명 없이는 찾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비유가 수수께끼처럼 애매모호하기도 한다. 씨가 뿌려진 여러 상황은 농경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씨를 먼저 뿌리고 나서 쟁기로 흙을 덮는 경우에는 씨가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좋은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씨를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시고, 씨는 하느님 왕국에 대한 말씀이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은 하느님 왕권이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사람들이 배척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이는 세 번이나 실패했지만 결국에는 성공하듯 그분의 활동도 성공작이 된다.
* 4~7절 :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 이 비유는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상황을 가리킨다. 그들이 복음을 배척하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복음을 앗아 가버린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금방 싹을 내지만 해가 떠오르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수분이 없어 타 죽어 버린다. 돌밭은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복음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를 받게 되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즉시 걸려 넘어져 복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처음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진지하지 않았거나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그 속에 파묻혀 질식하고 만다. 가시덤불은 현세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저버리는 이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현세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사람은 재물에 집착하면 그릇된 안정감에 빠져 하느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하기에 이른다.
* 8절 : 하느님은 위에 제시된 세 가지 장애물을 이기고 당신의 왕권을 실현하신다. 이 세 경우와는 반대로, 비옥한 토양에 뿌려진 씨는 열매를 내는데 어떤 것은 백 배, 다른 것은 예순 배, 또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이러한 토양은 하느님 왕국의 말씀을 실천하여 이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제자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산상설교에 수록된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왕권이 그들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실현된다. 이러한 결심은 인간적인 힘에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의 활동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적인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복음선포가 세상종말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낙관하셨다.
* 9절 : 예수님은 위에 제시된 비유가 가르치는 진리를 알아들으라고 재촉하셨다. 이 비유의 뜻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촉구하신다.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하느님 왕국의 신비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은혜에 힘입어 이 신비를 날로 깊이 알아듣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배척하는 이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점점 더 심각한 무지 속으로 빠져든다.
♠ 복음 요약 :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대해 농사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다. 씨가 길바닥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수확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엄청난 결실을 낼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이곳저곳에 선포되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있어 수확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은 엄청나게 풍요로운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은 날마다 하느님 왕권에 대한 복음의 씨를 우리 마음속에 뿌리신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나눠봅시다.
② 밭이 부실하거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면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기가 어렵다.
‘나’라는 하느님 나라의 밭은 어떠한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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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 농민주일
2014. 7. 20
마태오 13, 24 ~ 30
♠ 복음 연구
* 24~26절 :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모르고 지내다가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가라지들은 이처럼 처음에는 밀과 모습이 비슷하여 구별이 안되지만, 가리지는 밀로 바꿔지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추수 때가 되면 밀은 통통한 열매를 맺지만 반면에 가라지는 열매가 없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의 비유 앞에서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과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마태오 13, 23)” 가라지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맺는 열매에는 독보리나 가라지가 들어 있어서는 안된다.
* 27절 : 주인은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린 것을 알았지만 일단 그대로 둔다. 왜냐하면 밀들이 다칠까 봐서 그렇다. 주인의 깊은 뜻을 모르는 밀은 추수 때까지 가라지의 괴롭힘을 견뎌야 한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밀이 취할 영양분을 뺏어 가기 때문이다.
* 28~30절 : 그러나 주인은 밀들에게 준 영양분을 옆에서 뺏어 먹고 자란 가라지를 결국 수확할 때 뽑아서 태워버린다
♠ 복음요약 : 우리는 세상이 어지러워 보일 때 마다 의문을 품게 된다. 도대체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 흘러 갈 수 있단 말인가?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의하면 답변은 이러하다. “세상은 날마다 좋아지고 있는 동시에 날마다 나빠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두 가지 씨 뿌림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좋은 씨앗을 뿌리고 계시고, 원수는 나쁜 씨앗을 세상 안에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을 영적 전쟁이라고 부른다. 매일의 삶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성령의 뜻에 순명하면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고 육정을 따라 움직이면 가라지가 될 수 있다. 원수는 신앙적 모임에서도 가라지를 뿌린다. 정통 가르침과는 다른 이단적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뜨리려 하고 성령의 인도 속에서 살아가야 될 신자들 내면 안에 교만과 탐욕을 심어 자신의 노예로 삼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악인이 잘 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정의가 있다면 어떻게 저런 악당이 아직도 활개를 필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 언제까지 이 불의를 참고 계실 것입니까? ’ 하고 주님께 여쭌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실 것이다. “추수할 때까지...”
♠ 대화방향 : 나는 밀인지 가라지인지 그것은 마지막 추수 때에 주님만이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많은 말씀을 듣고 살고 있다. 내 마음 안에 좋은 씨가 뿌려져 있다면 나는 세상의 선하고 좋은 것들에 마음을 두게 될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행전),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라틴어로 '네모 다트 쿠오드 논 하베트(Nemo dat quod non habet /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은 남에게 줄 수 없다)란 말은 스스로 불행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들에게 불행과 신경질밖에 줄 수 없다. 먼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행복하게 여겨야 남에게도 그것을 줄 수 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밀이 되기 위해 비판과 흠집만을 찾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긍정과 감사와 배려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밀은 열매를 맺고 추수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대화해 보자.
♠참고문헌 : ▪ 삶 속의 영적 전쟁 (송봉모 신부)
▪ 교부들의 성경 주해 (오리게네스 / 분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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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2014. 7. 27
마태오 13, 44 ~ 52
♠ 복음 연구
** 마태오 복음서 13장에서 가르치시고 있는 비유들 중에 많은 것들이 “하늘나라는 ~와 같다.” 라는 직유법을 쓰고 있다. 이 비유에서 발견되는 것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생활 속의 이야기를 통해 하늘나라의 특징을 가르치면서 신앙인이 지녀야 할 구체적인 진리의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44), 그것을 선택한 사람의 기쁨(45-47), 선택에 따른 심판(47-50)에 이어 이 비유를 깨닫는 제자들의 “예”를 반기고 율법학자에 대한 축복이 따른다..
* 44-46절 :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고대로부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이집트에 이어주는 3개 대륙의 역할을 하는 중동의 일부이기 때문에 평온한 날이 거의 없었고 피와 고통의 극적인 역사를 겪으면서 긴하게 피난을 갈 경우 귀중품들을 항아리에 넣어 동굴이나 땅에 숨겨놓고 떠났다. 세월이 지나 주인은 없고 그 땅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고 우연히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게 되면 그 보물을 얻기 위해 몇 배의 값을 치르더라도 그 땅을 사지 않겠는가?(34절).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고 한다. 고대에 진주는 귀한 보석으로 흠이 없고 아름다운 것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상인이라면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마자 지체 없이 자기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하늘나라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의 처신에 관한 말씀이다.
* 47-50절 :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한다. 고기를 추려내는 어부가 등장한다. 유다인의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먹지 못할 고기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고 등뼈가 곧지 않은 물고기(레위기 11,9-12))를 가려내는 종말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적 비유로 최후심판 때 선인과 악인이 가려져 영생이나 영벌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 51-52절 :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자 모두가 “예”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반가워하시고,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율사로 지칭하며 결론이자 절정을 이루는 축복의 말로 끝낸다. 율사들은 옛것인 구약성서와 율법, 그리고 새 것인 신약을 다 익힌 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언행에 비추어 구약의 율법을 풀이할 수 있는 집주인과 같다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보물을 발견한 자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서 중요한 사실은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비유가 말하는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 나라이지 않을까? 헨리 라우렌은 “당신은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까? 그러나 그 보물을 발견했다 해서 그것이 당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그것을 당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즉 보물을 얻으려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하며, 그물로 고기를 가려내듯 삶의 가치가 상실된 사회에서 종말을 매 순간 살며, 보물을 알아 볼 수 있는 눈과, 발견할 때 각자의 삶과 시간을 통해 하늘나라를 실현할 것이다.
♠ 대화 방향 : 솔로몬은 하느님께 옳은 것을 가려내는 지혜의 분별력을 청했습니다. (1열왕 3.4-11)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늘나라의 보물을 찾기에는 힘듭니다. 우선은 자녀, 건강, 명예, 돈이 최고이지요. 2천 년 전에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하느님,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으며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루카12.33-34) 그런가 하면 부를 누리다 죽은 어느 부자의 비유(루카 12.16-24) 등 재물의 파괴적인 힘을 예수님도 인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님의 보물을 얻기가 힘든 것은 채우고 모으는 것보다 비우고 버리기가 더 어려운 듯 보입니다. 내 안에 숨겨진 하늘나라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1) 하느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금번 세월호의 사건을 보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어떠해야 되겠는지 숙고해봅니다.
(2) 하늘나라는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내 인생에 있어 신앙의 진리를 얻기 위해 가장 노력을 기우린 때는 언제였을까요?
(3) 내가 꼭 가지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었던 일, 그리고 버리고 싶고 힘들어 했던 것들은? 깨닫는 순간 그것은 소중한 시간입니다.
♠ 참고 문헌 : ▪ 대전교구 살아 숨 쉬는 공동체
▪ 비유로 듣는 복음 - 신약의 비유 (허규 신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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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큰모임 스케치 >
‘큰모임’을 마치고서...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FB
기록원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안산팀은 이른 시각인 8시에 성당 앞에 모여서 자동차 3대를 동원하여 출발하다.
제가 탄 차량은 제법 이른 시각인 9시좀 지나서 남안성IC를 지나, 국도로 접어들어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아서 지방도로 휴게소에 잠시 정차, 그곳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노란 미니버스를 만나 난 그 차로 갈아타고 목적지에 성거산성지에 도착해보니, 어느 덧 전주팀이 도착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고, 아나스타시아 자매님의 진행으로 찬양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정지풍(아킬레오) 성지 주임신부님이 오셔서 성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를 말씀해주십니다. 성거산교우촌이 태생할 때까지와 그 이후 최양업신부의 활약상이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 강원 경상도지방에 퍼져갔던 교우들의 모습을 생생히 짧은 시간에 그려낸다.
순례객들이 단지 건물이며 어떤 고형물보다는 교우촌을 이루었던 그때의 정신들, 우리나라가 도입한 남미의 소공동체보다 150여년이 앞선 우리나라 전통의 촌락문화가 깃든 공동체인 교우촌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흔적 신앙으로 이어져야한다고 하십니다. 프랑스 성지순례시 조선땅에서 순교한 빠리외방 선교사들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모든 수도자가 나와서 대영광송을 바치는 장면이 감명스러웠다고 회상한다. 이어서 무명자 줄무덤의 조성 경위와 순례 순서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을 이어 하신다. 그분들로 인해서 우리가 편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제1줄무덤을 중심으로 순례를 한다. 줄무덤 앞에서 모인 형제들이 함께 기도 후에 무덤 앞에서 절을 한다. 한 봉분에 여러 구가 합장되었다고 하신다. 산꼭대기에 있는 부대의 도로를 내기위해서 공사하던 중 발견된 유해를 수습했다고 하시면서 그 이후로 이일을 하시기 위해 아킬레오 신부님께서 이곳을 택하셨다고 하신다.
안나 수녀님의 코이노니아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고, 몇몇 사람들의 신앙체험발표가 이어진다. 세월호사건과 관련하여 아가다 자매님의 고백은 다들 숙연하게 만들고, 새로운 신앙의 전환기를 마련한 듯해 보였다.
그리고 조별로 코이노니아를 한다. 코이노니아는 40여분 동안 이어지고, 그이후로 전주팀과 여러 지역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아주 푸짐한 식사여서 먹느라고 사진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식사 후 코이노니아를 하면서 느낌 점에 대해서 몇몇 분의 증언이 있었다.
성가연습, 그리고 준비해온 분들의 성구암송과 낭송이 이어지고, 미사 준비를 하는 동안 신부님께서 친절하게도 신자들을 위한 고백성사를 베풀어주신다.
전대사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파견미사를 한다. 미사 중에 5분의 FB선서자가 나와 신부님께 선서하고 안수를 받는다. 신부님은 강론 중에서 육화된 공동체의 사랑을 살았던 교우촌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승천 후 10일째에 성령강림이고, 성령을 가득 받은 제자들의 놀라운 성령강림의 체험은 베드로의 설교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들도 놀라운 일들을 하게 됨을 선포하신다. 이때부터 교회가 시작되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임을 느끼게 되었다고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성서형제회 가족들을 특히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내년을 기약하고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작별인사를 하신다. 제자들이 그때 세상에 나가서 그들의 체험을 선포하였듯이 우리들도 삶의 현장에서 그리하리라 여기면서 모두들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큰모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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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선서 후기 >
선서의 기쁨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이 안셀모 (기대)
선서의 기쁨이 이런 거라면 자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로 표현이 힘든 가슴 벅찬 서약식 세례와 느낌이 확연이 다르다.
성거산 큰모임 체험은 나의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조 분들의 영혼이 담겨 있는 현장 주님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맡긴 숨결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새기면서 살아야 함을 절실히 느낌이다.
무엇이 나를 변화 시키는지 한참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글을 올립니다.
성서형제회를 통해서 성경을 일용할 양식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을 가슴깊이 갈무리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형제자매님들, 감사합니다...
축복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신 주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안 가브리엘 (태현)
찬미 예수님 !!!
큰 모임을 참석하고 선서하기 까지 저에게는 큰 축복이고 영광이었습니다.
긴장되고 설레이는 마음에 선서할 때 성서에 손을 얹을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답니다.
약간 마음이 부담이 되긴 하였지만, 천천히 부담을 줄일 수 있게끔 모임과 코이노니아에 참석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앞으로 생각보다는 몸과 마음이 먼저이고, 주님 말씀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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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고백-1 >
큰모임 후...
안산 원곡성당 FB
장 아가다 (소희)
오늘로 사무엘을 주님과 성모님 품으로 보낸 지 57일 되었습니다.
사실 성거산에 사무엘과 같이 갔었던 추억을 느끼고 싶어서 함께 가도 되는지 연희 마리아언니께 먼저 전화를 걸었죠.
근데 너무도 당연히 “함께 가야지” 하시는 말씀에 또 한 번 감사함에 눈물이 났습니다.
‘많은 분들께 좋은 날이고 행복한 날이어야 하는데 괜히 사무엘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망치면 어쩌지? 나의 슬픔을 남에게 나누고자하는 나의 이기적인 맘 아닐까? ’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걱정과 달리 우리 성서형제회 회원님들은 같이 아파도 해주셨지만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할 방향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그냥 눈빛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슬픔도 중요하지만 사무엘을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고 기도해주신다는 그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온 제가 너무도 작은 인간임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제 아들 스테파노가 첫 복사를 서는 날인데 사무엘 생각이 나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더니 스테파노가 그러더군요. "복사 서는 동안 큰 형님과 함께 하는 기분이 들어서 든든하고 행복했어... 그러니까 엄마도 그만 울고 큰형님 위해서 기도하고 그러면서 만나!" 라고요. 전 사무엘에게도, 남은 아이들에게도, 또 신자 분들과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가장 크신 주님과 성모님께 많은 걸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무엘을 먼저 데려가신 것은 너무도 원망스럽지만 남은 아이들과 저에게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성거산 큰모임은 언제나 좋았지만, 이번에 가서는 사무엘을 주님께 진정으로 보내줄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아 더 좋았습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결코 이 감사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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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고백-2 >
나의 삶, 나의 신앙
전주 호성동성당 예수성심 팀 FB
유 가브리엘라 (미화)
‘신앙 체험 발표...’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는 ‘큰일 났다, 어떻게 하지? ’ 하고 고민하려는 순간, 언니는 벌써 제 생각을 알아챘습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은총을 주셨는지 모른단 말이니?” 순간 ‘아니라고, 알고 있다’ 고 했지만 머릿속은 캄캄했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고 주님을 알게 된 지도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이끄신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발로 왔는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에 형제자매님들이 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어쩜 저렇게 말도 잘하고 기도도 끊이지 않고 저렇게 잘할까? ’ 부러워하기만 했습니다. ‘무슨 복이 많아 저렇게 행복할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 하면서 부러워만 했지요.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고와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들이 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시련을 주실까? ’ 생각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계시는 것일까? ’ 원망도 했습니다. 냉담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다음에, 또 다음에 하면서 주님을 멀리 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가 밉지 않으셨나 봅니다. 레지오 단장님과 형제자매님, 수녀님, 저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이라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항상 제 곁에 천사들이 기도와 더불어 저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가 참 어려웠거든요... 묵주기도 또는 책자에 나오는 기도문을 그저 읽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한 자매님을 만나고 ‘기도란 이런 것이구나! ’ 하면서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저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와 이야기하듯 기도했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고 고난을 주시느냐’고 원망하면서 울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누가 “먼저 기도 시작 하세요.” 하면 당황합니다. 하지만 주님과 대화하라고 영적인 생명을 주셨기에 육적인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처럼 그렇게 부탁도 원망도 하면서 ‘저도 사람인지라...‘ 하며 애교 아닌 애교도 하지요.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의 기도에는 주님의 사랑이 숨어 있었다는 것, 주님께서는 저를,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에도 다 이유가 있고, 제 곁에서 제가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시고, 힘듦과 어려움이 지나면 그보다 큰 행복과 기쁨과 사랑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요. 제가 많이 부러워했던 분들, 물론 지금도 많이 부러워요. 하지만 이제는 부러워만 하지 않아요. 저도 함께 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런 저도 부러워하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분께 제가 “얼마 전만 해도 제가 그랬답니다. 부러워 마세요. 금방 아실 거예요. 순간순간 어떤 순간이라도 주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요...” 며칠 전 저를 아는 언니가 말씀하셨지요. “얼마 전만해도 그야말로 손대면 톡하고 터지는 봉선화씨앗 같았다.” 정말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조금은 작지만 단단한 포도 씨앗이랄까요. 많은 분의기도와 함께 제가 이렇게 성숙해 가고 있답니다.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더욱 발전하는 교만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많이 행복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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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4년 5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