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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장군 군검열중; ebay photo
맥아터는 한국사람들의 영웅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다른 장군들이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을 패배 시킨 은인이라고 믿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숭상 했던 조선 사람들을 연상 시킨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워커 장군은 잘 모른다. 아마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6성 호텔의 이름이 워커장군을 기념하기 위해서 워커힐이라고 한 것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인민군과 미군, 중공군과 미군의 전쟁이었다. 인민군과 미군의 전쟁은 워커 장군이 중공군과 미군의 전쟁은 맥아터가 수행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워커 장군의 전쟁은 승리 했고 맥아터의 전쟁은 패배 했다.
전쟁 발발 3일만에 국군은 괴멸 되었다. 한국은 나라를 방어할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군대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 했지만 당장 대규모의 병력과 무기, 군수물자를 한꺼번에 보낼 수는 없었다. 우선 일본 주둔 병력이었던 24사단의 일부 소규모의 부대를 파병 했다. 그러나 오산에서 패배하고 금강 방어선이 어이없이 무너져 대전 까지 후퇴 했다.
1950년 7월 중순, 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지금 한국으로 오고 있는 병력으로 닉동강 유역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 했다. 맥아터는 워커를 한국전쟁 야전사령관으로 임명 했다. 이때 이미 맥아터 장군은 상륙작전으로, 적의 포위망을 풀기 위해서, 적의 후미를 공격하기로 결정 했지만 낙동강 유역에서 적의 진격을 막지 못한 다면 다 소용 없는 작전계획이었다.
워커는 대전에 있는 24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을 찾았다. 워커는 딘에게 "대전에서 이틀만 인민군을 막아 주시요. 그 동안에 나는 25사단과 기마 1사단을 낙동강 유역에 배치 하겠소."하고 대구로 떠 났다. (This Kind of War, The Classic Korean War History, TH Feherrenbach, 50th annivereary edition)
딘 소장은 워커 중장의 요구대로 대전에서 인민군의 진격을 이틀동안 저지한 후 홀홀단신으로 도주하다가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 그는 1953년에 미군 포로였던 인민군 대좌 이학구와 포로 교환으로 석방 되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 했지만 소련은 인민군에게 해군과 공군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미군과의 층돌을 피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으나 그는 김일성처럼 적화통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아마 전쟁 자체에 목적이 있었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놓아 유럽에서 소련의 세력 확장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 는 것이 한국전쟁의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인민군은 미군의 폭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은 모두 바다였고 미약한 인민군의 해군력 덕분에 워커는 동부 해안을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미군은 일본 공군기지와 항공 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를 동원하여 남북한의 철도, 도로, 교량, 보급기지등을 맹렬하게 폭격 했다. 전쟁 초기에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 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8월말 까지 적화통일을 완결할 것이라고 장담 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극심한 보급 부족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 되었다. 식량, 무기, 보충병 모두 부족 했다. 보충병이 오지 않아서 남한 주민을 강제로 잡아다가 전투에 투입했고 하루 한끼 두끼의 죽을 먹고 전투에 임했다. 반면에 처음에 형편 없었던 미군의 전투력도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향상 되었다. 유엔군이 들어오고 모든 군수물자가 해상과 공중으로 아무 저항 없이 순조롭게 도착하여 아군의 전력은 날로 증강 되었다. 괴멸 되었던 국군도 점점 정비되어 재법 잘 싸웠다. 보급이 부족 했지만 중국내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주축이었던 인민군의 전투력은 대단 했다. 인민군은 8월 중순과 9월초에 총공격을 시도 했다. 수세에 몰린 유엔군은 미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결국 인민군은 9월 중순에 워커 장군 지휘하의 유엔군에게 완전히 와해 되었다. 당시의 인민군의 2/3가 남한 현지에서 징집된 군인들이었다. 1950년 9월15일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의 총 퇴각을 명령 했다. 바로 이날 인천상륙작전이 감행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서 인민군이 패퇴 한것이 아니고 낙동강 전선에서 워커의 유엔군에게 인민군이 패퇴 했기 때문에 인천성륙작전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인천에서 서울 진입이 13일이나 걸려서 퇴각하는 인민군을 많이 놓쳤지만 독안에 든 쥐가된 인민군은 무려 10만여명이 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작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인민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중공의 저우엔라이는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을 김일성에게 알렸으나 그는 속전속결로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을 패배 시키고 적화통일을 완결 하겠다는 비현실적인 고집을 버리지 않고 상륙작전 전에 퇴각하거나 병력을 인천 서울 방향으로 이동 시키지 않았다.
"Although Kim's early successes led him to predict he would end the war by the end of August, Chinese leaders were more pessimistic. To counter a possible U.S. deployment, Zhou Enlai secured a Soviet commitment to have the Soviet Union support Chinese forces with air cover, and deployed 260,000 soldiers along the Korean border, under the command of Gao Gang. Zhou commanded Chai Chengwen to conduct a topographical survey of Korea, and directed Lei Yingfu, Zhou's military advisor in Korea, to analyze the military situation in Korea. Lei concluded that MacArthur would most likely attempt a landing at Incheon.[189][190] After conferring with Mao that this would be MacArthur's most likely strategy, Zhou briefed Soviet and North Korean advisers of Lei's findings, and issued orders to PLA commanders deployed on the Korean border to prepare for U.S. naval activity in the Korea Strait.[191]
On 18 September, Stalin dispatched General H. M. Zakharov to North Korea to advise Kim Il Sung to halt his offensive around the Pusan perimeter and to redeploy his forces to defend Seoul. Chinese commanders were not briefed on North Korean troop numbers or operational plans. As the overall commander of Chinese forces, Zhou Enlai suggested that the North Koreans should attempt to eliminate the UN forces at Incheon only if they had reserves of at least 100,000 men; otherwise, he advised the North Koreans to withdraw their forces north.[209]"(Wikipedia; Korean War)
"맥 아터가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기 되기까지는 그렇게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1950년 8월 23일, 도쿄 마루노 이치 디스트릭트에 있는 다이치 빌딩 회의실에서는 워싱톤에서 온 육군과 해군 참모장, 각군의 장군들이 맥 아터에게 상륙작전 계획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같은 날(8월 23일) 중공군 참모장 레이 윙푸(Lei Yingfu)는 마오 제퉁에게 미군이 서해안 6곳 중에 한 곳을 선택하여 상륙할 텐데 가장 의심되는 지역이 인천이라고 보고 하고 있었다. 저우 엔라이는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레이 윙푸에게 미군이 어뗳게 전쟁을 진행할 것인가를 조사해서 보고 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그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저우 엔라이에게 보고 했다. 즉시 자우 엔라이는 그로 하여금 직접 마오에게 보고 하라고 지시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오는 그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하여 소련과 김일성에게 알리고 소련도 김일성에게 인천 상륙을 알려 주었다. (the Japan times sept. 21, 2000)
마오 제둥(모택동)은 저우 엔 라이(주을래)에게 한국전쟁의 총지휘를 맡겠다. 말하자면 맥 아터 장군의 대항마였다. 그는 8월 말까지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김일성의 장담을 믿지 않았다. 저우는 소련으로부터 공군 파견을 약속받는 한편 가오 강(Gao Gang)을 지휘관으로 하는 260,000명의 대군을 만주와 북한의 경계선(압록강)에 배치했다. 대만을 공격하려던 병력이었다. 저우는 차이 챙원에게 한반도의 지형 조사를 지시하고 레이 윙푸에게 미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보고 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중공 고위층과 지휘부는 인천 상륙을 미리 예측하고 소련과 인공에게 알려 주었다. (위키 페디아 Korean War)
저우 엔 라이는 김일성에게 "10만 명의 예비 병력이 없으면 인천에서 미군의 상륙을 막으려 하지 말고 북으로 퇴각하라"라고 조언했다(wikipedia, Korean war). 저우 엔 라이는 이미 사실상 한국전에서 인공 측 총사령관이었다.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저우 엔 라이는 유엔군을 북쪽 산악지대로 유인하려 했을 까? 아무도 모르지만 결과를 추인해 보면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제갈공명과 손자병법을 낳은 중국의 저우 엔 라이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명장 맥 아터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3장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온기철, 브런치 작가)
위 참고 자료가 증명 하듯이 한국전쟁 중공군 총 책임자였던 저우엔라이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을 8월 말 경에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소련과 인공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인천에 상륙작전 방어를 위해서 10만명의 뱡력이 없으면 인천을 포기 하고 북으로 후퇴하라고 충고 했다.
사실상 간만의 차 이외에는 상륙 지체와 인천 함락은 큰 저항 없이 이루어 졌다. 인천상륙은 보통 모래사장에 상륙군이 내려 돌격하고 방어군이 사격을 하는 영화의 장면같은 상륙이 아니었다. 상륙선이 높은 방파제 가까이 접근하면 병사들이 방파제를 타고 넘어서 육지에 도달하는 상륙이었다. 이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인천에는 인민군 2000명이 방어하고 있었다. 인천 또한 별 어려움 없이 함락 되었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 되었다. 맥아터는 한국전쟁 야전사령관 워커와 상륙군 사령관 10군단장 아몬드를 불러 북진 계획을 발표 하면서 지휘체계 개편을 말 했다. 지금 부터는 자신이 한국전쟁 야전사령관 임무를 수행하고 워커는 8군사령관으로 복귀 한다는 것이었다. 워커는 너무나 실망 했다. 지금까지 낙동강 전투에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그는 당연히 자신이 계속해서 야전사령관 직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명예욕이 큰 맥아터는 남북통일의 공을 자신이 독차지 하고 싶었을 것이다. 워커는 묵묵히 명령을 따랐다.
북진 작전계획은 너무나 터무니 없었다. 8군은 서쪽에서 평양으로, 10군과 해병대 1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서북쪽으로 진격해서 8군과 합류하여 평양을 함락 한다는 것이 맥아터의 작전이었다. 북한지형을 고려 할 때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였다. 북한은 동서 교통이 매우 불편 했다.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는 원산에서 평양가는 길 밖에 없었다. 동에서 서로 가려면 낭림산맥을 넘어야 했다. 두 병력간의 통신과 교통이 북으로 갈 수록 어려질 것은 뻔한 이치 였다. 보급도 각각 따로 해야 했다. 원산에서 상륙작전을 하려면 인천과 서울에 있는 병력, 무기, 군수물자를 배에 싫고 한반도를 돌아서 원산 앞바다에 도착 해야 했다. 군 작전상 상식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랜시간과 많은 비용이 들 것은 자명 했다.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괴멸 되자 맥아터는 물론 미국정부와 미군 수뇌부는 흥분 했다. 나라를 방어 할 군대가 없는 인공은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의 총 책임자 맥아터는 또 한번 영웅이 되었다. 명령 체계 상 국군은 유엔군 사령관 즉 맥아터의 허락을 받아서 군을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정일권에게 북진할 것을 명령 했다. 10월1일 동해안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사단이 먼저 38선을 넘어 북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군은 원산을 함락 했다.
미 10군단과 해병 1사단이 원산 앞바다에 도착 했다. 그러나 원산 앞바다에는 소련군이 수뢰를 깔아 놓아 이것들을 제거 하지 않고는 상륙이 불가능 했다. 더구나 상륙 해야 할 원산은 이미 국군이 점령 하고 있었다. 전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며칠이 걸려서 수뢰를 제거 하고 아무 전투없이 상륙 했다. 그 동안에 서쪽 8군과 국군은 이미 평양을 함락 했다. 8군과 만나서 평양으로 진격할 필요가 없었다. 10군단과 해병1사단은 장진호 쪽으로 진격 했다.
서울 수복 이후로 중공의 저우엔라이는 유엔을 통 해서 만약 미군이38선을 넘어 오면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 올 것이라고 계속해서 경고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펜타곤은 중공이 공갈 협박하고 있다고 이를 일축 했다.
10월 이후로 북한 곳곳에서 중국인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기 시작 했다. 국군과 미군에게 잡힌 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은 만주에 사는 중국 사람인 데 부족한 인민군을 매꾸기 위해서 인민군에게 끌려와 인민군 병사로 참전하고 있다고 말 했다. 미군으로 하여금 아직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 와 있지 않다고 믿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미군은 이들의 말대로 그들이 중공군이 아니라고 믿었다.
10월 중순에 청천강 북쪽에서 소규모의 중공군이 국군 2사단과 8군의 일부 사단과 교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중공군이 사라졌다. 그리고 교전 중 포로가 된 미군을 풀어주었다. 중공군이 본국으로 철수한것 처럼 보이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들은 11월중순에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 근처에서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터는 각종 군 정보기관에서 들어오는 중공군 개입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무시 했다. 미군 정보참모 월랜비는 맥아터의 의중을 파악하고 중공군이 개입한 징후가 없다는 정보만 맥아터에게 보고 했다.
맥아터는 추수감사절 다음날 유엔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크리마스 호음캄잉 오펜스 였다. 12월 중순 까지 인공을 멸망 시키고 한반도 전역을 이승만 정부가 통치하도록 하고 장병들을 귀국시켜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게 하겠다고 장담 했다.
맥아터의 군대는 북한의 겨울 날씨에 대한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의 지형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산악지대의 외길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맥아터의 군대는 중공군이 얼마나 많이 이미 북한에 들어 와 있는 지 몰랐다. 그들은 중공군의 전투력을 너무나 과소평가 했다. 맥아터의 군대는 적을 몰랐을 뿐더러 그들의 병력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워커는 맥아터의 성급한 진격 명령과 낙관적인 견해에 대해서 회의적이였다. 워커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다는 맥아터와 도쿄 본부의 주장도 믿지 않았다. 워커는 점점 추어지는 날씨, 수많은 군수품 보급 부족, 대량의 중공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으로 진격하라는 맥아터의 명령을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날이 갈 수록 증공군 개입에 대해서 걱정 했고 단기간에 승리 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공격을 늦추고 보충병을 채우고 군수물자를 저장했다. 그는 중공군의 공격에 못견뎌 총퇴각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의 신중한 공격 지연은 맥아터 도쿄 본부에 많은 적을 만들었다.(Arlingtoncemetery.net; Walton Harris Walker)
중공군은 도보로 산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 미군은 계곡의 좁은 길을 차로 움직였다. 중공군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는 미군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지만 미군은 중공군의 옴직임을 볼수 없었다. 길이 좁아서 점점 일렬로 서야 했다. 산악 지대로 들어 가면 갈 수록 소규모의 부대로 분리 되었고 이들간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 졌다. 보급도 힘들어 졌다. 고지의 추위는 방한복이 부족한 미군을 괴롭혔다. 고립된 소규모의 미군은 항상 아군의 숫자보다 월등하게 많은 중공군을 상대 해야 했다. 증공이 인간의 생명을 소홀이 여겨 천문학적 숫자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미군을 후퇴하게 했다는 소위 "인해전술"의 신화는 아마 유엔군의 패배에 대한 변명 일 것이다. 유엔군이 북한에 투입한 군대의 총수는 중공군의 그것 보다 많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질 때 마다 소규모로 분리된 미군은 몇배나 많은 중공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앞에 나타난 중공군이 사람의 바다처럼 보였을 것이다.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 한후 맥아터와의 작전 회의 에서 워커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반격 하자고 제안 했다. 그러나 당항한 맥아터는 총 퇴긱을 명령 했다. 동 쪽 전선의 10군단과 해병 1사단은 장진호에서 총 퇴각 했다.
12월 초에 워커의 8군은 평양을 버리고 38선 이남으로 퇴각 했다. 1950년12월23일 워커 중장은 여느 때 처럼 치프차에 서서 타고 서울 근교 에서 8군 장병들에게 훈장 수여식을 하기 위해서 의정부 근처 도봉동의 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 때 반대편에서 국군 무기운반추럭이 달려오다가 워커 중장의 지프차쪽으로 뛰어 들어 충돌 했다. 워커 중장은 즉사 했다.
중공군에 무참하게 패배한 맥아터는 중공과의 전쟁을 원했다. 1951년 3월 맥아터는 비밀리에 도쿄 주재 스페인과 포르트갈 대사에게 그가 한국전쟁을 중공과의 전면전으로 확대 할 수 있다고 말한 사실이 들어 났다.
동년 4월에 미하원 공화당 대표인 조셥 마틴이 맥아터가 그에게 보낸 편지를 하원에서 크게 낭독 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지면 유럽에서도 진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려는 미국정부의 정책을 무시하고 맥아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이끌어 갈려는 행위를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좌시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파면 당 했다.
과묵하고 군인정신이 투철한 워커 중장은 낙동강전투에서 승리하여 인민군이 총 퇴각하에 한 공을 세웠지만 맥아터 처럼 유명하지 않다. 인민군에 빼앗긴 남한 영토를 회복 시킨 장 본인은 바로 그다. 맥아터는 과시를 좋아하고 명예 욕이 많은 인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결코 인민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항간에 그렇게 알려진 이유는 맥아터의 쇼맨쉽, 미국정부와 한국정부의 선전, 미국국민의 맥아터에 대한 인기에서 비롯되었지 않았나 짐작 해 본다. 특히 맥아터의 중공군과의 전투는 수치스러울 정도의 참패 였다.
맥아터의 미군을 패배 시킨 중공은 건국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었다. 100년동안 서구 열강에게 수모를 당한 중국은 세계 최강국의 군대를 제압함으로서 자존심을 되 찾았다. 그리고 공산당의 인기는 절정에 달 했다. 그렇지만 유엔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와 정상적인 국교가 맺어지지 않아서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말하자면 장기적인 경제제제를 당 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인민들은 마오가 죽고 등소평이 나타날 때 까지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