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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은 누구에게는 ‘학살’이고 누군가에겐 ‘소요’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참사’인 2009년 용산 4구역 재개발 지역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인 사건을 누군가는 ‘광주항쟁’이라 부르듯, 12.12를 ‘쿠데타’라 부르는 사람들과 ‘사건’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듯, 기록은 기억하는 자들과 지우려는 자들 사이의 투쟁이다.
그래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은 이를 호명하는 일부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것은 사건이지만 어떤 것은 학살이 된다. 용산은 아직 사회적 호명을 위한 싸움이 진행 중인 현장이고 사건이며, <두 개의 문>은 용산‘살인진압’과 용산‘참사’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각자의 진실을 좇는 흥미로운 영화다.
이 글은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에 대한 ‘영화적’인 리뷰는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영화가 개봉된 이후 이 영화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들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이며 지극히 사소한 단상들이다. 덧붙여 <두 개의 문>이 한창 5만 관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한켠에서 벌어졌던 또 다른 논란과 <두 개의 문>이 닿았던 지점을 이어보는 아주 사소한 글이다. 사소한 것에 담긴 정치성, 단순하고 익숙해 보이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맥락, 그런 것을 한 번 좇아보았다.
사소한 단상 1
용산에 대한 또 다른 다큐 <용산>을 만든 문정현 감독의 작품인 <슬로브핫의 딸들>을 보면 목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여성이 나온다. 감독은 보수적인 교단을 불편하게 하면서 자신도 어려움을 겪는 그녀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서 꼭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감독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물었느냐?”고. 감독이 여성이었다면 그런 질문을 했을까, 나는 궁금했다. 목사 아닌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그 여성은, 자신의 어떤 철학과 신앙과 신념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왜 그렇게 세상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 먼저 설명하면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영화 속에서 그 질문은 남성의 영역에 들어가려는 여성들의 현실을 씁쓸하게 확인해 주었다. 감독은 이 물음에 대해 남성인 자신의 인식의 한계라고 말했다.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지예 감독의 <얼굴들>에도 비슷한 느낌의 장면이 있다. 한 조합원의 집에서 감독과 여성 노동자가 인터뷰를 한다. 그녀의 남편은 감독의 촬영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에도 아내에게 “물을 가져와라” “00가 필요하다”는 심부름을 시킨다. 그녀는 남편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인터뷰를 중단하고 그 일을 해결한 후에 다시 인터뷰에 응하곤 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관객들은 권위적이고 아내에 대한 존중이 없는 그녀 남편의 태도에 화를 냈다. 여성인 지예 감독은 한 발 더 나아가 “아마 내가 남성 감독이었다면 저런 태도를 보이진 않았을 거”라고 했다. 남성 감독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면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출연 장면을 얌전히 구경하지 않았을까.
각각 다른 상황의 영화이며 장면들인데도 이 두 사례가 떠올랐던 건 <두 개의 문>에 나온 한 대목 때문이었다. 나는 <두 개의 문>을 두 번 봤다. 처음 봤을 땐 이 장면을 그냥 지나쳤는데 두 번째 관람하던 날엔 유독 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날 새벽, 참사가 일어나고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의 심정을 인터뷰한 장면에서 묘하게 내 시선을 끄는 지점이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터뷰이들은 이렇게 말했다.(정확하진 않지만 대강 기억으로 쓰자면)
김형태(변호사/남): 아, 이건 이 정권을 뒤흔들 사건이겠구나. 어쩌면 정권이 물러날 수도 있을 만큼 큰 사건이 벌어졌다...
권영국(변호사/남): (출범한 지 얼마 안 된)이명박 정부의 본질이 드러나는 사건이구나...
박진(인권활동가/여): 그 소식을 처음 듣고 조세희 선생님이 시위하던 농민들이 죽었을 때 영혼이 쓰러지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내 영혼이 푹 하고 쓰러지는 느낌...
나는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이 과연 사회적으로 말해질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과 공감의 형태는 어떤 것에 좌우되는가? 라는 물음말이다.
위의 인터뷰에서 보듯, 남성들은 이 사건을 이명박 정권과 연관 지어 분석했다. 이 사안은 정권의 안위까지 무너뜨릴 만한 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 정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 그렇다. 반면 여성은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영혼이 푹 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어떤 사건으로 규정되고, 어떤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지에 대한 분석적인 답이 아닌 자신의 느낌, 감정을 먼저 표현했다.
물론 그들의 말 가운데 일부를 편집한 것일 테니 이는 온전한 분석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를 발췌한 것이라 해도 이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남성은 이 사건을 느끼기에 앞서 분석하고 여성은 이 사건을 분석하기에 앞서 느끼고 표현한다. 이는 남성 지식인 캐릭터를 수용하는 우리의 방식을 의식적이진 않지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규정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주는 화자로서 남성, 그리고 그가 가진 말의 권위 같은 것. 남성은 객관적인 ‘상황’에 집중했고 여성은 주관적인 ‘아픔’에 집중했다. 그 미묘한 차이가 미묘한 잔상을 남겼다.
목사가 되려는 여성에게 어찌 보면 차별적인 질문을 던진 남성 감독에 대한 여성들의 문제제기, 여성감독이었기에 처한 상황을 보는 여성들의 더 예민한 문제의식, 어떤 문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남성과 여성은 왜 다르고,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할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들 세 명의 인터뷰를 보고 여성이 이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더 피해자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더 주관적이며, 그러므로 인간이 겪은 고통과 아픔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생각은 만약 현장의 진압 책임자가 여성이었다면, 경찰청장이, 대통령이 여성이었다면, 우리 진영의 철거민 대표들이나 대책위의 대표들까지로 확장되었다. 여성인 두 감독은 이 사건을 대하는 남성과 여성의 태도의 차이에 대해 혹 생각해 보았을까? 에 까지 이어졌다. 여성인 두 감독, 그들은 이를 의식했을까?
사소한 단상 2
<두 개의 문>에는 진압에 투입된 특공대원들의 진술이 나온다. 혼란했던 순간의 기억을 복기하며 또 다른 혼란에 빠진, 그래서 그들 또한 화염 속에서 공포에 떨었던 피해자임을 드러내는 대원들의 진술에서 관객들은 <두 개의 문>이 가진 미덕을 칭송한다. 철거민은 피해자, 경찰은 가해자라는 이분법에서 나아가, 더 깊숙한 구조의 문제를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도전 받지 않는 권력, 유일무이한 합법의 폭력집단인 국가 체제에서는,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집행하는 자라는 위계가 있고, 물리적인 위험의 현장에 내몰리는 하위의 집행자는 용산에서처럼 때로는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 이는 철거민과 피해자로서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라는 게 이 영화의 성찰이다. 그것이 자칫 그들이 가담한 가해 행위마저 감싸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내가 집중한 건 특공대원이 아닌 특공대장과 용산경찰서장(또는 과장?)의 특별한 말투였다. 그 둘은 모두 호남(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호남 출신의 국가 관료가 가진 거의 맹목에 가까운 충성심, 나는 그것이 또 마음에 닿았다.
주류의 영역에서 살아남거나, 혹은 성공하기 위해서 태생적인 비주류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다. 사회적 유전자로 각인된 차별은 눈에 띠지 않는다. 배제되는 자들의 실패 원인은 보통 개인의 무능이란 외피를 두르고 있다.
남성권력 사회에서 여성이, 이성애권력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영남권력 사회에서 호남출신들이, 서울대 권력 사회에서 비서울대 출신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류사회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보통으로 살 수 있는 자들을 압도하고, 주류에서 상위에 있는 자들이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이를 악물고 진입한 주류의 세상에서 언제든 탈락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늘 배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이들은 주류의 보통들보다 더 열심히 주류의 상위층에게 충성해야 한다.
진술을 통해 드러난 진압 과정에서 말단 대원들이 느꼈던 공포와 의문, 그것을 단 한 순간도 가지지 못한 지휘관과 용산 서장의 호남 사투리에서 나는 문득 연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저들이 가진 무색무취한 충성, 강도 높은 맹목은 태생의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두른 철갑 같은 전투복은 아니었을까?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와 같은 그의 실존의 문제는, 대치하고 있는 철거민들이 자칫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날릴 수도 있는 불안한 대상이면서, 잘하면 자신의 주류화에 기여할 수도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먼저 계산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들의 의심 없는 충성에 겹친 그 호남 사투리가 문득 슬펐다.
사소한 단상 3
<두 개의 문>이 드러내는 문제의식 중 하나가 경찰특공대원 역시 억울한 피해자이며, 국가 폭력의 희생자라는 측면이다. 이는 구조적인 폭력, 폭력의 구조 문제를 들여다보는 시각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모두가 피해자라면 우리는 국가라는 허울에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이는 구체적인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닌가? 그런 논리라면 용역깡패도, 구사대도, 회사 편에 선 중간관리자도 모두 구조의 피해자들인가? 어디까지가 개인의 문제이고, 어디부터가 구조의 문제인가? 주체로서 개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구조 안에서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는가?
<두 개의 문>이 한창 화제일 때, 이와 비슷한 맥락의 논란이 있었다. 파업 중인 MBC 노조원들 대신 대체인력으로 투입한 비정규직 ‘시용기자’ 한 명이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미숙한 진행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해 정규직 노조원인 MBC 기자가 “해당 기자는 파업 때 채용된 비정규직”이라 말했다가 트위터에서 집중 포화를 맞았다.
“정규직이 그런 실수를 하면 괜찮고, 비정규직이 실수해서 문제인가,”, “정규직 기득권의 오만한 발언이다.” “인터뷰한 사람이 무슨 죄인가, 인터뷰어가 계약직인 게 무슨 상관이냐” 등의 비판과, “이 고용 불안 시대에 MBC의 시용기자에 지원한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며, 회사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절대약자인 이들의 행위를 비난해선 안 된다”는 옹호로 이어졌다. 결국 문제의 발언을 한 정규직 기자는 사과를 했다.
정규직 기자를 비판한 사람들 상당수는 MBC의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시용기자가 기본적으로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투입한 대체인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이는 시용기자라는 파업 파괴 인력에 지원한 개인의 사회의식보다는, 먹고사니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인식은 시용기자 채용으로 파업을 파괴하려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비판이 아닌 직장 내 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갈등 구도로 사태를 바라보게 했다.
“그들은 회사가 까라고 하면 까야 하는 힘없는 계약직이다”라는 말은, 행위 당사자로서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과 행위를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우리는 MBC 노조의 파업을 왜 지지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그것이 지켜 줄 민주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대로 보도해야 한다는 지성을 가진 이들이 파업 파괴 인력을 먹고사니즘으로 옹호하는 사태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 자리라도 택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들을 욕해선 안 된다면, 먹고사니즘 때문에 권력에 순응한 노동자들에 대해서 비난할 수 있을까? 취업 앞에선 용역깡패도, 파업 대체 인력도 모두 까방권이 되어야 할까? 먹고사니즘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인식이 결국 이명박의 당선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먹고사니즘을 생각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공염불일 터이다.
MBC의 정규직 조합원들도 회사와의 관계에선 약자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가 가진 최고의 투쟁 수단이며 이를 파괴하기 위해 대체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이다. 시용기자는 그런 기본적인 사회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언론인이 된다는 뜻이다.
파업을 파괴하고자 채용한 대체인력이 투입된 방송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제대로 보도되거나, 권력에 비판적인 방송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통 불편이나 읊어대는 보도 말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언론에 보도되기를, 그것도 제대로 보도되기를 바라던 이들마저 “평소 원하던 언론인 자리에 기회가 왔고 이에 응해서 시용기자가 된 걸 왜 욕하느냐”고 파업 대체 인력을 옹호한다면 이들이 원하는 언론의 자유는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언론인은 다른 어느 직종보다 더 민주주의에 민감해야 하는 직종 아닌가. 먹고사니즘에 별 문제 없었던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걸고 파업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우리는 그래서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었으니까.
분노는 지혜로워야 한다. 분노가 지혜로울 땐 저항으로 조직되고 분노를 일으킨 대상에게 위협이 된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분노는 본인에겐 허탈감을 주고, 지배계급에겐 방패막이가 된다. 관계의 맥락을 살펴서 응원과 비판을 지혜롭게 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의 분노가 정규직을 향하는 한 이길 수 없듯, 비정규직 옹호가 대적하기 어려운 자본 대신 누구나 욕해도 되는 정규직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면 이 또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구조 안에서 개인의 선택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회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런 훈련에 사회구성원들이 익숙해질수록 개인의 선택들의 총합이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타날 것이다.
국가기구의 하위관료인 ‘나’는 폭력진압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민주주의와 평화에 기여해야 하는 지구 시민으로서 ‘나’는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위험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인식. 고용불안 시대의 약자인 ‘나’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시용직에 지원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먹고사니즘을 해결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 ‘나’는 파업을 파괴하는 대체 인력 투입을 거부해야 한다는 인식. 그것이 결국 구조 안에서 개인의 행위를 용인 받을 수 있는 평가 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특공대원도 피해자다, 라는 말은 어떤 면에선 맞지만 어떤 면에선 온전히 맞지 않다는 고민이 남는다. <두 개의 문>은 여러 단상을 남겨 준 점에서 내게 정말 뜻 깊은 영화였다. 십만, 이십만 이라는 관객 수를 넘어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사소한 단상의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