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남석리 일대 드들강이 흐르고 있다. 전남에서 유일한 민물욕장이다.
이 강은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천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순 쪽에서
흘러온 물이 나주호에서 내려오는 대초천과 합류하여 흐르는 강으로 물이 쪽빛처럼 맑아 강 안쪽 마을의 이름이 '쪽돌'이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강변을 따라 숲쟁이가 조성돼 있었다.
이곳에는 슬픈 사연이 전하고 있다. 그 하나는 드들강이라고 부른고 있는 사연이다.
고려말엽, 인근 주민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드들강의 물이 필요하자 강물을 사용하기 위해 보(洑)를 쌓기만 하면 강물에 휩쓸리고 말았는데,
보를 쌓으면서 처녀를 산 채로 제물로 바치면 보가 무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아 홀아비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처녀 드들이에게 그 홀아비를
공동으로 모시기로 하고 제물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여 마침내 보가 완성되었다 한다.
흐르는 강물도 그 정성에 감동했는지
다시는 보가 떠내려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이후로 비가 와서 강물이 범람하면 드들드들 하는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1872년께 남평현 지도에 드들강변에 ‘십리송(十里松)’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 유명 명소였다. 이곳은 조선 초 현감 우성(禹成)이 흙을 쌓아 심었고,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이 높았던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1541∼1545년 재임) 당시 예조좌랑에 이어 남평현감으로 재직시 십리송(十里松)을 길렀다.
남평 8경을
이르는 데도 십리송(十里長松)이 나온다.
月峴杜鵑 월현대 산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
砥石釣火 고요한 지석강에 태공이 밤 낚시하는 등불이 비치네.
六龍落O 육림들에 내리는 기러기
十里長松 현감 백휴암이 심은 십리나 늘어선 노송
竹林晩鐘 천년고찰 죽림사 늦은 밤에 울려오는 은은한 종소리
新灘月色 은빛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여울의 달빛
烏山落照 오산마을 너머로 물 드린 저녁노을
西山暮煙 봉산마을 깊숙한 골짜기에 저녁밥 짖는 연기
그는 당 조선시대 남평현에 학당을 세우고 학장을 두어 자재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렀으며 그레서 드들강을 바라다보이는 서산리 16 서원마을 능선에 봉산서원(蓬山書院에 제향하고 있다.
지금은 솔숲이 우거져 산림욕을 즐길 정도지만 어느날 전남 나주 노안면 용산리 출신 근대 유학자 서천(西川) 김낙민(金洛敏 1872 고종7~1936)이 일제강점기 일대를 지날 때는 그렇지 못했음을 알리고 있다.
휴암(休庵)선생이 손수 심은 나무/나무하는 아이들 무심코 베어내네
가을바람에 남(南)으로 가는 길손/눈물 흘려 마른 가지에 뿌리네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 굴곡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꿈의 실현을 바라던 호민을 그리워하던 사상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더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남평(南平)
가는 길에 나타낸 감흥과 이곳과 가장 일치된 곳이다.
한가로이 말을 타고 너른 들을 밟아가니 / 들 밖의 마을 집들 새로 지붕
이었구려
봄 저무니 언덕 꽃은 바람에 휘날리고 / 비가 개니 물오리는 모래톱에 노래하네
閒來擁傳踏平郊 野外村家盡覆茅 春晩岸花飄蔌蔌
雨晴沙鴨語咬咬 / 惺所覆瓿藁 南征日錄
전설을 안고 어머니 품같이 아늑하고 조용히 흐르는 백사장 섬 드들강 솔밭유원지에도
1587년(선조 20) 파평윤씨 지암(芝菴) 윤선기(尹先機)가 지은 처식소(褄息所)였던 곳으로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남석리 하남마을 입구
탁사정(濯斯亭)이 있다.
나주 출신 월북 작곡가 죽산(竹山) 안성현(安成絃, 1920.7.13~2006.4.25)씨를 기리는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홍수로 인해 파손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일제강점기때 중수되었고 최근 1974년 이후 재중수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현판된 시가
정자를 지은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탁사(濯斯)는 탁(濯)은 씻을 탁,(=水, 氺)-물에 두드리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翟(탁),
사( 斯)는 이 사로 구성되어 "물에 적시어 이것을 막대기로 두드려서 더러워진 곳을 빠는 것을 나타 낸다."는 뜻으로 원래의 어원은 초사
어부사와 맹자에도 인용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어부사(魚父辭)에서는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간신의
모함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나와 강가를 거닐며 남루한 모습으로 시를 읊고 있는데 굴원을 알아 본 어부가 그 연유를 묻자 굴원은 "온 세상이 흐려
있는데 나 혼자 맑고 뭇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혼자 깨어 있었다." 말했다.
그러자 어부가 말하길 "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걸리지가 않아 세상과 함께 잘도 옮아가니, 세상 사람이 다 흙탕물에 뒹굴고 있거늘, 마땅히 그 흙탕물을 휘저어 남처럼 함께 뒤집어쓸 것이며,
모든 이가 취해있거늘, 그 술찌끼를 함께 씹으면서 말술을 들이마시면 될 일이지 혼자 고고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하는가?" 라고
말했다.
이에 굴원이 다시 말하길 " 머리를 새로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털고 몸을 새로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을 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고 했으니 차라리 상강으로 달려가 강의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
지낼 지언정 어찌 희고 흰 결백한 것으로써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쓸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어부가 빙그레 웃으면서 배를
저어 떠나며 이에 노래하길 "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탁하거든 내 발을 씻을 수 있도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세상이 맑으면 맑게 살고 세상이 흐리면 흐리게 살라는 즉 청탁자적(淸濁自適)의 태도로
살라는 뜻이지만 해석에 따라 분분하다. 어찌되었든 탁사정은 우리내 욕심과
탐욕을 지석강 맑은 물에 빨아 내어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조선 경종때 문인었던 임황(任璜)이 물가
정자에서(水閣) 탁족하는 즐거움은 이러했다.
숲 속 샘물에서 발 씻고서 / 유연히 깨끗한 돌에 눕는다.
그윽한 새소리에 꿈에서
깨보니/가랑비에 앞산이 저물고 있네.
濯足林泉間 悠然臥白石 夢驚幽鳥聲
細雨前山多
이곳은 지석강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우리선조가 풍광을 노래하고 기리는
유적자중의 한 곳인 탁사정은 정면 2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대청형
정자이다.
내부에 영광 김씨로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때 명인 율계(栗溪) 정기(鄭琦),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효당
(曉堂) 김문옥(金文鈺),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선생 등과 교류했던 인곡(仁谷) 김정채(金正采 1899-1964)가 쓴 기문인 '탁사정기(濯斯亭記)'를 비롯하여 이와 함께 여러편의 재영이 있는데 7대손 자용(濨用) 재영, 9대손
기혁(奇爀) 등이 쓴 여러 편의 시문이 편액도 걸려 있다. 그중에 윤자영의
탁사정원운의 일부를 보면 그 넉넉함이 묻어난다.
.......매양 갈매기와 맹서하려 우장과 삿갓을 둘추어 입고/ 고기들의 즐김을
깊이 알고 낚시 대를 놓아버렸네....일어나서 창랑곡(滄浪曲) 한곡을 부르니/ 세상의 영욕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구나.탁사정(濯斯亭)이라는 판액(板額)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예가로 화순 물염정(勿染亭) 등 많은 정자에 현판에 글씨를 남긴 고당 김규태(顧堂
金奎泰, 1902~1966)가 쓴 글씨로 그는 전남 구례 출생. 정기(鄭琦)의 문인으로 서학(西學) 등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성리학적
정통을 수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학문과 더불어 산행을 매우 좋아하여, 산행기(山行記)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특히 가례(家禮)에 밝았다.
문집에는 《고당집》이 있다.
현판에 이천(利川) 서달수(徐達洙)는
이 정자에 올라앉아 이 마음이 편안하니/탁족 하는 것이
무슨 어렴 있을손가
세상사람 좋아하는 부귀공명 저버리고/조그마한 낚시 대에 깊은 재미 붙였도다.
주인 없는 강산 풍월 자기혼자
독점하여/날아오는 압노(鷗鷺)떼와 짝을 지어 즐겼도다
지난 옛날 창랑곡(滄浪曲)이 어이하여 생겼던고/저석물결 바라보며 그 이치를
알았도다.
이곳은 한때 친수공원으로 개발되면서 철거 위기에
처해 나주시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옛선인들도 이곳에서 탁족(濯足)을 즐겼다는 이곳 드들강변은 드들이라는 처녀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고려말엽, 인근 주민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드들강의 물이 필요하자 강물을 사용하기 위해 보(洑)를 쌓기만 하면 강물에 휩쓸리고
말았다.
보를 쌓으면서 처녀를 산 채로 제물로 바치면 보가 무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아 홀아비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처녀
드들이에게 그 홀아비를 공동으로 모시기로 하고 제물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여 마침내 보가 완성되었다.흐르는 강물도 그 정성에 감동했는지 다시는 보가 떠내려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이후로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범람하면 드들드들 하는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강의 중앙에 둔치가 형성되어 그림같은 소나무숲과 큰 나무들이
많이 있어 일대의 학교에서는 소풍의 단골지역으로 그리 오래되 않은 시기에 뱃노래 등으로 왁잘지껄 거렸다. 여름에 피서지로 애용되고 있으며, 동쪽
끝의 수중보 밑은 강물의 수심이 얕고 물이 비교적 깨끗하여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다.
풍산 홍석희도 탁사정에서 시를 읊기를
아름다운 이 정자가 그지없이 편안하니 / 무엇하러 옷을 걷고 깊은 물을 건널손가
난초 이슬 헤치면서 묵은 잡초 베어내고/가는 세우(細雨) 무릅쓰고
낚시 줄을 던졌도다.
맑은 지령(地靈) 덕분으로 여러 인물 태어나고/마른 정도 지키면서 많은 기회 잃었도다.
창랑이란 그
노래가 그지없이 아득하니/하늘가의 미인소식 찾아보기 어렵도다
그래서
세상사를 탁사(濯斯)하려고 많은 명인사들이 들렸다. 그중에 화순군 남면 절산리 출신 인암(訒菴) 김영춘(金永春 1911~1980)도 이곳에
들려 시를 남겼다.
더위에 매양 각력(脚力) 쇠잔함을 걱정하였더니/명구(名區)에 이른 곳마다 이 마음 확 트이네.
재주 없는
나는 졸시(拙詩)가 부끄럽고 / 덕(德) 쌓은 그대는 완복(完福)을 누렸네.
이씨대(李氏臺) 앞에서 옛일 위로하고 / 탁사정(濯斯亭)위에서
몇 번이나 갓 털렸느냐.
아름다운 산수가 둘러 있으니 / 이곳이 지옹(芝翁)의 서식처(棲息處)임을
알겠네.
고 김태정 시인이 이곳에 들려 노래했던 '가을 드들강'이라 시를 가슴에 담고 이곳을 거닐면 그 의미는 배가 된다. 우리도 이제는 우리도 정신적 수준을 높혀 놀 때가 됐다.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이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 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여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갈스러운 거
강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가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 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 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 자락
기일게 끌어 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