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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가 있는 새 교훈의 말씀 신18:15-20, 고전8:1-13, 막1:21-28.
1월 교역자회가 지난 주 월요일에 있었습니다. 교역자회에서 저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달 23일부터 사흘간 새날기도원에서 지방 교육부 주최로 학생 사경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지방내 어느 목사님의 딸도 참석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 딸이 말하기를, “아빠, 나 이제부터 학교 다니지 않을테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나 놀랍고 어이없어서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고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난 이번 사경회에서 학교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고 엉터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그런 학교를 다녀서 무엇합니까?” 하고 되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딸하고 3시간이상이나 붙들고 대화를 해서, 딸의 생각을 간신히 진정시켰노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육부 총무가 소위 운동권 목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해마다 교육부가 주관하는 교육프로그램은 그런식의 내용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 생각하고, 성경말씀을 가르치기보다는 그와 같은 의식화 교육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교육부 행사를 트집잡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중요성을 전해드리고자 이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고전 8:1) 에,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사랑은 사람을 향상시켜 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육부가 사람을 망치자고 그런 프로그램을 마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목사님의 딸로 하여금 학교 교육자체에 부정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니, 학생 사경회가 목적은 어떠하든지 간에 사람을 향상시켜 준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올바른 지식 곧 진리는 사람을 살리고 잘못된 자식은 사람을 망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회를 전면 부정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다든지 이민을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사회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 어둠을 밝힐 빛이 필요합니다. 누가 그 빛의 역할을 할 것입니까? 학교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나 교회 내에도 모순과 부조리가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학교나 교회를 다 때려부수어야 할까요? 아니면 학교나 교회를 아예 외면하고,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서 깨끗하게 살아가면 되겠는지요?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뭔고 하니, 우리자신이 이 어두운 사회의 한 일원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정교육이든지 교회교육이든지 한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문제 많은 교회의 한 성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문제를 파헤치는 일에만 힘 쓸 것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의 문제를 놓고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학교든지 교회든지 간에, 문제의 원인은 1차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기도하는 일이 제일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누구를 위한 중보기도 보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회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천주교에서는 “내탓이요” 운동일 벌이고 있는데, 개인이 첫 번째 할 일로 “나부터 반성하기” 이고, 두 번째는 “남을 비방 안하기” 로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보다는 내 잘못을 먼저 찾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잘못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겠다고 (신 18:9) 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바르다”, “잘못되었다” 라고 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제각기 자기 기준에 따라 자기식으로 평가를 하게 되면, 자기 잘못은 없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삶의 기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일을 예언자인 목사가 하게 되는 것이고, 그 말씀대로 백성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목사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주제넘게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게 되면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신 18:20) 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말씀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책임을 추궁하실 것이라고 앞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자식이 아닙니다. 지식은 무엇을 알게 해주지만 사랑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지식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지식이 되고 맙니다. 말씀을 아는데서 그치면, 그 말씀은 한갓 지식으로 남아서 자신도 괴롭히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고 망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알려주어서,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주는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지식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중심 내용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지식은 아픔이 없으나 사랑은 아픔이 있습니다. 말씀이 머리 속에 머물러 있으며 지식이 되는 것이고, 말씀이 생활로 옮겨져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랑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을 보면, 저를 비롯해서 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1.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전하지 않고 지식으로 전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에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당신이 아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는 지식 전달자로서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몸바칠 각오를 가지고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령까지도 예수님이 말씀에 굴복했다고, 마가복음기자는 (1:27) 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권위있게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적습니다. 저 자신도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아무튼 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권위있는 분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권위있는 가장이 사라져 가고 있고, 학교에서는 권위있는 선생님이 적고, 교회에서는 권위가 있는 목사가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정치지도자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이제는 교수들까지도 그 권위가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끌어가야 할 입장에 있는 교사와 목사, 그리고 교수의 권위가 이처럼 위기에 처해 있으니,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세상의 빛과 소금되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성도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습니까? “예” 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사라지게 되면 그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지도자가 없어지게 되면 더욱 타락하여 멸망하는 순서를 밟게 됩니다. (고전 8:6)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이 사라지게 되면, 여러 가지 잡다한 사상과 우상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래서 가치관이 흔들리게 되고 양심까지도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고귀한 것이며 먼저 해야될 것인지를 잊어버립니다. 예체능계 교수들이 돈을 받고 부정입학을 시킨 것은, 이 시대가 지금 물질 우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교수들까지도 그 우상에 의해 양심이 멍들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뵙게 된 이후, 지금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분토 같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진리안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무슨 진리입니까? 자아를 죽이고 희생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돈이나 환경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교육을 시키면 그 선생님은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생활비 적은 것을 탓하지 않고 교인이 많든지 적든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면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떠해야 될까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압니다. 다만 한가지 말씀 드린다며, 신앙이란 자기 희생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 생각되면 이유를 달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축복이 됩니다.
두 번째로, 세상에서 권위가 사라지게 된 것은 잘못된 지식 때문입니다. (고전 8:2)에,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로 교회가 시끄럽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 제물을 먹음으로 죄가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먹어서 몸에 이로우면 좋은 것이고, 먹어서 해가 되면 안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담배와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먹어서 죄가 되고 안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먹었을 때에, 과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 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이 볼 때에는 우상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다 생각할지라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할 위험성이 있으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고전 8:9) 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관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지식입니다. 누구든 먹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고 있고, 어떤 사람은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될 때, 이 두 삶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아는 것을 끝까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 주장은 많은데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적어져서 권위가 사라졌다고 봅니다. 바울은 (고전 8:15)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고기를 좋아해도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멋있는 말이지요?
(고절 8:3) 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 그보다 더 큰 권위가 어디 있을까요? 이처럼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지 않고, 돈 많은 것과 좋은 집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세상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이웃을 괴롭히고 자신의 인생도 망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어떻게 살아야 복된 삶인지, 무엇을 먼저 해야 잘 살 수 있는지,
2. 예언자를 세워 당신의 말을 전하게 하시고, 그 말씀에 백성들이 따름으로써 이웃에게 많은 덕을 끼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에수님이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귀신들렸던 그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 자리에서 말씀 전하는 것은, 성경을 잘 알아서 그 아는 것을 여러분에게 드러내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코 큰 것을 뽐내려 하는 것도 아니고 말 잘하는 것을 자랑하려 함도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식이 아닌 생명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려고 제 입술을 이용코자 하시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 중에, 누구를 비방하거나 해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제 입술을 이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말에는 결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 여러분을 이롭게 하는 말씀이라면 아멘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크게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마귀는 정신없이 도망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마가복음기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자기들은 행치 않고 자기들이 아는 성경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정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의 과거 잘못에 대하여 칼같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씀을 듣고 통회자복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이요, 둘째는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니까 듣기가 거북하고 부담스러워서 그 자리를 피한 사람들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그 말씀 때문에 적대감을 가지고 예수를 죽이기로 맘먹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들으니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고쳐 행했습니까? 아니면 괴로워서 교회를 멀리하려하지는 않았는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혹시 저는 여러분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하면 여러분이 좋아할지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굳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선한 목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서 전하려는 말씀을 대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네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리라. 내가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주리니, 그는 나에게서 지시 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일러줄 것이다. 그가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을 전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친히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라고 시키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신 18:18-20) 에 있는 말씀입니다.
3. 참된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삽시다.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그 부모님이 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창 12:2-3)에,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여 줄 수 있는 덕목은 무엇일까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성실해야 합니다. 약속한 것은 잘 지키고, 하나님께 솔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서로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삼가고, 좋은 것은 꼭 먼저 상대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웃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뭔가 주는 것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말을 골라서 사용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부모와 성도로서의 권위, 목사와 교수로서의 권위, 직장인으로서의 권위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서의 권위로 회복시켜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이웃에게 복을 끼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