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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方[3539]둔촌 이집과 포은 정몽주와의 교유
둔촌 이집과 포은 정몽주와의 교유. -박동환-⑨. (12)
목 차.
Ⅰ. 序 論
Ⅱ. 李集 文學의 背景
1. 時代的 背景
2. 李集의 生涯
3. 交遊 關係
Ⅲ. 李集의 詩 特徵과 交遊詩의 世界
가. 목은 이색과의 교유
나. 포은 정몽주와의 교유
다. 척약제 김구용과의 교유
라. 삼봉 정도전과의 교유
마. 도은 이숭인과의 교유
Ⅳ. 李集 交遊詩의 文學史的 位相
Ⅴ. 結 論
나. 圃隱 鄭夢周와의 交遊
圃隱 鄭夢周(1337~1392)의 본관은 迎日․자는 達可이고, 시호는 文忠이다.
永川에서 태어나 1360년 문과에 장원, 동북면도지휘사 韓邦信의 종사관으로 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1376년(禑王2) 成均大司成으로 있으면서
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彦陽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일본으로 잡혀간 수백 명의 고려인을 귀국시켰다.
1384년 政堂文學에 올라 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당시 喪制가 문란해져서 士大夫들도 모두 초상 난 후 100일만 되면 부모상을 벗었는데
정몽주만은 부모상에 廬墓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모두 극진하였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 온《朱子集註》를 鄭夢周가 유창하게 강론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 뛰어 났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의심하였다.
그 후 胡炳文(중국 원나라 인종 때의 유학자)이 쓴《四書通》을 얻어 참조해 본즉
그와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더욱더 탄복하였다.64)
그와 사우관계인 李穡은 극구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鄭夢周가 이치를 논함에 이러저러하게 함부로 하는 말도
어떤 것이나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性理學 창시자로 추대하였다65)에서 볼 수 있듯
性理學의 巨匠인 李穡도 鄭夢周를 東方理學之祖로 推擧하였다.
《遁村遺稿》에 실린 교유시 중에
그와 주고받은 시문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도 남달리 우정이 돈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7> 鄭夢周에게 贈與한 詩
제 목 | 5언절구 | 5언율시 | 7언절구 | 7언율시 | 비고 |
上宗工鄭相國 | 1수 | ||||
寄宗工鄭相國 | 1수 | ||||
敍懷四絶奉寄宗工鄭相國 | 4수 | ||||
寄呈宗工鄭相國 | 1수 | ||||
寄圃隱二首 | 2수 | ||||
呈圃隱行次 | 1수 | ||||
奉寄宗工鄭相國 | 1수 | ||||
次呈圃隱三首 | 3수 | ||||
雨中獨坐走筆呈圃隱 | 1수 | ||||
至日偶作呈圃隱陶隱宗之三君子 | 1수 | ||||
立春日書懷三首寄京都故舊 | 1수 | ||||
六月十五日呈圃隱 | 1수 | ||||
次九日諸公韻 | 1수 | ||||
謁宗工鄭相國有作 | 1수 | ||||
復用前韻呈諸君子 | 1수 | ||||
送日本通信使二首 | 2수 | ||||
復賦前韻呈圃隱 | 2수 |
<표-8> 鄭夢周의 和答詩 및 贈與詩
제 목 | 5언율시 | 7언절구 | 7언율시 | 비고 |
次呈圃隱三首 - 附元韻 | 3수 | |||
次九日諸公韻 - 附次韻 | 1수 | |||
復用前韻呈諸君子 - 附次韻 | 5수 | |||
遁村卷子 | 5언배율 | |||
浩然卷子 | 5언배율 | |||
次李太常賀李遁村子登第 | 3수 | |||
哭李浩然 | 3수 | |||
金城驛懷松京諸友 | 1수 | |||
次遁村韻 | 1수 | |||
謹和遁村六月十五日之作 | 1수 | |||
次韻呈遁翁 | 1수 | |||
謹和雨中獨坐詩走邀李遁村 欲以對酌… | 1수 | |||
和元日見寄詩以發一粲 | 2수 | |||
謹和李遁村賀詩呈左右 | 1수 | |||
有懷李陶隱鄭三峰李遁村三君子 | 1수 | |||
楊州竹西亭懷松京諸友 | 1수 |
李集에게 답하는 서간문에,
문득 “遁村의 글을 받고 두 번 세 번 읽는 동안
物外에 超然한 사람은 그 하는 말씀도 灑然하여 속인들은 미칠 바가 못된다”고 하면서
驪江가에 자리잡아 소일하는 일은 자신도 항상 바라는 것이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陶隱과 함께 李集이 있는 川寧에 들려
조정의 벼슬살이하는 어려운 심정을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픔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매번 추수 때가 되면 햅쌀을 보내주어 고맙게 여기는 것66)으로 보아
10여 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가깝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주고받은 시문에
“도가 곧으니 시속과 거스르고/ 시를 지으면 올바른 음률과 흡사하도다”67)와
“셈해보니 論交한 지 삼십년인데/ 몇 번을 淸談으로 등잔 앞에 마주했던가”68)를 통해 보면
李集과 鄭夢周는
도학적 측면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여 名利를 떠난 순수한 학문적 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當時는 정세가 악화되어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난 시기였기에
鄭夢周는 세속을 떠나 사는 李集에게서 무욕의 초탈한 인간성에 매료되었는데,
그와의 만남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토로하기보다는
世事를 잊을 수 있는 이야기로 양자간의 괴로움을 승화시키고자 한 것 같다.69)
1363년(癸卯年)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이지만
도학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언제나 깊은 존경을 표시했다.
아래 詩는 같은 해 5월 2일,
비가 오는 쓸쓸한 날 李集이 鄭夢周의 집을 방문하였을때 鄭夢周가 쓴 것이다.
〈附元韻 中 其一〉
閉門聊坐睡 문을 닫고 하염없이 졸고 앉았노라니
微雨灑園林 보슬비 시원스레 원림에 뿌리네
欲作靑春夢 청춘의 꿈이나 꾸어볼까 했는데
忽聞黃鳥音 느닷없이 황조 소리 들려오네
蕪菁花結子 장다리 무우꽃 열매 맺히고
桃李葉成陰 복사와 오얏잎 그늘 이뤘네
時有西鄰客 때마침 이웃 손님 찾아와
相尋伴我吟 나와 어울려 시를 읊노라
〈附元韻 中 其二〉
遁村能避色 둔촌은 피세할 줄 아는 분이니
不必在山林 산림에 숨어 살 필요는 없지
道直忤時俗 도가 곧으니 시속과는 거스르고
詩成逼正音 시를 지으면 정음과 흡사하도다
京華聊送老 서울에서 노경을 보내려 한 듯한데
節序又生陰 절서는 또다시 생음되었구려
欲把菖蒲酒 창포주나 들면서
從君一醉吟70) 그대와 함께 취하며 읊고 싶네
장다리 무꽃에 벌 나비 날아들고 복사꽃과 오얏나무 무성하게 숲을 이룬 계절,
한가로움에 여유를 부리는 鄭夢周이다.
때에 맞춰 생명수와 같은 이슬비가 대지를 적시는데 느닷없이 黃鳥소리가 들려온다.
황급히 밖을 내다보니 李集의 방문이다.
반가이 마주 앉아 시를 읊는 풍경, 忘年之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이다.
둘째 수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가 숨는다”71)는 것을 아는 李集이기에
이제는 출사하여 자신과 함께 하고자 하는 鄭夢周의 권유가 담긴 시라 할 수 있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李集이기에 辛旽의 화를 당하였고,
끝까지 시속과 타협하지 않고 은둔의 길을 걷는 知己이기에 안타까움은 한없이 컸으리라 여겨진다.
鄭夢周의 시에 次韻하여 李集이 쓴 和答詩이다.
〈次呈圃隱三首 中 其一〉
老去還城市 늘그막에 城市로 돌아왔더니
僑居更遠林 僑居는 다시 먼 林泉과 같도다
關門無俗客 문을 닫고 있으니 속된 손님 없었고
鼓瑟有遺音 거문고 타 보니 遺音이 남았더구나
蒼翠憐松嶺 松嶺의 蒼翠를 사랑하고
茅茨憶漢陰 한강 남쪽의 茅茨를 생각하는구려
新詩起予興 그대의 新詩는 나의 흥을 돋구어
三復發高吟 세 번이나 소리 높여 거듭 읊노라
〈次呈圃隱三首 中 其二〉
耽書窮聖域 책에 탐닉하여 성역을 궁구했고
射策振儒林 사책은 유림을 진동했도다
奉使能專對 사명을 받들고는 전대를 하였고
還家亦好音 돌아와서는 좋은 소식도 전했지
世塗相得喪 세도는 항상 득상이 있는 법
天日伴晴陰 천일 또한 청음이 있도다
爲圃有眞趣 園圃를 다스림에 진취가 있나니
憂來快活吟72) 시름이 일 때면 시원스럽게 시를 읊어보게나
국내적으로 공민왕의 즉위로 새롭게 정치개혁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국외적으론 홍건적의 1, 2차 침입으로 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하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李集은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道美寺에 은거하였고
개성에 있는 鄭夢周 집을 찾아 世事를 얘기하며 우의를 돈독히 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이 때 李集은 37세, 鄭夢周는 27세였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교류를 통한 도학적인 만남은
야인으로서, 정치의 중심 인물로서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주고받은 시문을 보면 이들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짐작하게 된다.
이에 대한 李集의 和答詩 <圃隱의 시를 차운하여 그에게 드리다 三首>중 一, 二首이다.
辛旽의 禍를 당하여 경북 영천에 피신하였다가 개성으로 돌아오니
예전과는 다른 세상이 되었다.
名利를 찾는 이들과 성리학자로써 도를 중요시하는 이들과는 거리가 생길 뿐만 아니라
당을 만들어 적대시하였고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진 혼란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도학적인 만남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마음은 변치 않아 서신 왕래뿐만 아니라,
자주 만나 흥취를 나누었으며
새로운 시를 지으면 서로 보내주어 문학적인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李集의 答詩 둘째 수에서,
圃隱의 글공부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의 科擧 시문은 유림 중에 출중하여 그 명성이 세상에 떨쳤다고 하였다.
鄭夢周는 1372년 36세에
書狀官으로 知密直司事 洪師範을 따라 중국에 들어간 것을 비롯하여
日本 등을 다녀오면서 모두 맡은바 직분에 충실하여 나라에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권세란 영원한 것이 못되니
언제나 처신에 신중해야 하고 난세에는 문학을 탐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역설하고 있다.
李集은 젊은 鄭夢周가 장차 국가의 棟樑이 될 것임을 예견하였으며
언제나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충정 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시는
鄭夢周, 李崇仁, 金九容 등에게 贈與한 것으로 其一은 諸公에게, 其二는 鄭夢周에게 주었다.
〈復用前韻呈諸君子 中 其一〉
遁村深處一衰翁 둔촌은 깊이 묻힌 한 늙은이인데
也忝諸公氣槩中 제공들의 기개 속에 욕되게 끼였도다
雪鬢愧非前日見 허연 귀밑머리 부끄럽게 예전과 다르지만
風情向與少年同 풍정만은 아직까지 소년과 다름없네
〈復用前韻呈諸君子 中 其二〉
谷口前頭老圃翁 산골짝 어귀 앞에 늙은 포옹은
沉潛醉著六經中 틀어박혀 취한 듯 六經 속에 붙어 있다네
旣修天爵從人爵 天爵을 이미 닦으니 人爵이 따랐는데
看似尋常調不同73) 심상한 듯 보이지만 격조는 다르다오
鄭夢周뿐만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여러 교우들은
나라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데
낙향한 자신은 이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스스로 자탄하고 있다.
重九日에 제공의 운을 빌어 지은 시에
‘上客은 동쪽에, 나는 서쪽에 자리했도다’ 하여
기개있는 사람들과 자리함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또한 鄭夢周에게 보낸 시에
“음이 다하고 양이 생겨 세율이 새로우니/ 군자가 행도할 때라 짐작되네/
이제부터 나도 彈冠하고 가려는데/ 周行에는 백발노인 몇 사람이나 있는지”74)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군자의 道를 행할 때라 역설하며 벼슬에 대한 아쉬움을 시사하고 있다.
《孟子》<告子章句上>에
“하늘이 준 벼슬도 있고 사람이 준 벼슬도 있으니 仁義忠信은 하늘이 준 벼슬이요,
公卿大夫는 사람이 준 벼슬이다”75)하여
鄭夢周는 天爵을 이미 얻었기에 人爵이 따른 것이고
六經 또한 달통하여 사람의 品格과 志趣를 얻었기에 언젠가는 크게 쓰일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鄭夢周의 和答詩에는
李集을 비롯하여 東隱, 李崇仁, 金九容등에게 酬答했으며 자신을 읊은 시를 합쳐 5首가 있다.
그 중에서 첫째 수는 李集에게 화답한 시이고 다섯째는 鄭夢周 자신을 읊은 詩이다.
李集에게 화답한 첫째 시이다.
〈附次韻 中 其一〉
蕭灑行裝似野翁 조촐한 차림새는 마치 野翁같지만
新詩如錦滿囊中 비단 같은 신시는 주머니 속에 가득하네
漢江可以濯吾足 한강은 탁오족할 만한 곳인데
何日言歸與子同 어느 날에나 돌아가 그대와 함께 할까
鄭夢周가 자신을 읊은 다섯째 시이다
〈附次韻 中 其五〉
衣冠縛束二毛翁 의관으로 얽어맨 이모옹이
觸熱行香佛寺中 열기에 시달리며 절간에서 행향을 하네
安得斯文二三子 어찌하면 사문의 몇몇 친구들과
松風一榻晤言同76) 송풍 아래 앉아 정다운 이야기 나누어볼까
이 때에 鄭夢周는 벼슬살이하는 몸으로 法王寺의 行香儀式에 참석하였고
濯吾足할만한 驪江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李集이 그리워 화답한 것이다.
李集의 성격이 소탈하고 글을 짓는 재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우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
벼슬살이에 심신이 괴로울 때 천령의 李集을 그리며 함께 하고픈 정몽주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李集이 세상을 떠나자
鄭夢周가 30년의 우정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輓歌를 지어 슬퍼한 시이다.
〈哭李浩然〉
屈指論交三十年 세어보니 논교한 지 30년인데
淸談幾度共燈前 몇 번을 청담으로 등잔 앞에 마주했던가
白頭失此知心友 백두에 마음 통한 벗을 잃었는데
誰謂無從涕泫然77) 그 누가 무종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1387년 丁卯年, 李集이 61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것이다.
李集과 鄭夢周는 광주촌사와 驪州 川寧縣을 오가며 청담으로 밤을 새웠고
매 추수철이면 햇곡식을 보내주었던 평생지기였다.
知心友를 잃은 슬픔에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10여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고,
鄭夢周가 李集에게 답한 글에
“物外에 초연한 사람이라 속인들은 미칠 바가 못된다”78)하여
驪江에서 自適하는 李集의 삶을 동경하였으며
歸去來를 실행치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 계속
옮긴이 : 2013. 10. 25(금). 大田市 寶文山 아래 靑綠室에서
遁村(諱 集)의 21代孫 朋村 李明鍾(鍾字 行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