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공비급 武功秘級
나흘 전,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두 노인.
알고 지내던 동네 지인이 지병으로 별세하여 그 상가 喪家에 문상 問喪하였다.
성황당 城隍堂에서 멀잖은 산 기슭 모퉁이에 각진 산 돌과 둥근 강 돌을 조화롭게 맞추어 벽을 쌓은 작은 상여 喪輿집이 있었다.
상당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 상엿집에 보관한 상여를 상여꾼들이 어깨에 메고 나오다, 어제 저녁부터 밤새워 마신 술에 취한 동 洞 꾼의 실수로 상여집 문틀 상부 인방 引枋을 받아버렸다. 그러자 상여집 문짝이 삐딱하게 틀어지고 말았다.
이에 마을 촌장의 부탁으로 두 노인이 동군을 대신하여 마을 공동 관리물인 상여집의 뒤틀린 문틀을 점검하였다.
틀어진 문틀을 살펴보다가 외부의 형태도 둘러보았는데, 상여집 뒤쪽의 큰 바위 옆을 지나다가 술에 취한 상태로 걸음을 옮기다 발을 잘못 디뎌 아래쪽에 넓적한 돌의 가장자리를 밟고 말았다.
밟은 돌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사람 종아리 크기의 옆으로 난 천연적인 암혈 巖穴 구멍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암혈 속에 무엇인가 들어있었다.
호기심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끄집어 내어보니, 낡고 오래된 반은 썩어가는 죽간 竹簡 한 권이 나왔다.
촌구석에서 죽간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도 아주 오래된 낡은 죽간이다.
펴보니 애들이 낙서한 것처럼 사람 모습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다.
이미 술도 한잔 된 터라, 아마 애들의 낙서물이거니 하고, 무심코 숲에 던져 버린 후, 젊은이들에게 뒤틀린 문짝을 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두 노인은 인생무상 人生無常을 논하며 종일 술을 마셨다.
다음날 술이 깨고 나니, 어제 보았던 그 죽간이 갑자기 생각난 백두옹, 반백 노인에게 같이 가보자고 하니, 반백 노인도 무언가 느낌이 이상한지 기꺼이 응한다.
둘이 상엿집 그 숲에 가보니 다행히 죽간이 어제 그대로 풀숲 속에 있었다.
다시 펼쳐보니 오래되어 낡고 서툰 그림 같아 보이나, 손에 긴 막대를 든 사람의 동작들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었다.
아마 무공비급인 것 같다.
그런데 표지가 낡고 썩어서 제목은 물론 저자 著者마저도 알 수가 없다.
죽간 한 칸의 크기가 일반 죽간에 비해, 3할 이상 더 크고, 두껍고 투박하다.
이를 미루어보아 죽간 자체도 아주 오래전에 만든 것이다.
죽간의 크기나 형태를 보아하니 선사시대 先史時代 급 유물이다.
표지가 없다.
저자도 알 수 없는 무공비급이다.
그러나 창술 槍術로 잔뼈가 굵은 노인네들 술이 깨고 나니, 이 낡은 죽간 竹簡이 창술을 전개 순서에 따라 그림으로 그려둔 대단한 비술 祕術을 기록한 것임을 비로소 느낀다.
일반적으로 죽간은 가로로 펼쳐보면서 우측부터 세로로 작성하거나 읽거나 한다.
그런데 이 비급은 세로로 그러니까, 위에서 아랫쪽으로 펼쳐보게끔 되어있다.
세로로 3간씩이 한 줄로 연계되어있다.
즉, 세 칸이 상중하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간 上簡은 사람의 머리,
중간 中簡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그리고 하간 下簡은 하체의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렇게 상중하 세 칸이 한 줄로 연결이 되는 도형 圖形이다.
한 줄에 4가지 동작을 그려 놓았다.
4가지 동작이 1초 식인 것이다.
죽간의 칸 수는 30개다.
죽간의 우측 머리맡에는 순서대로 삼(三)부터 십이(十二)까지 표시되어있다.
원본은 39간이었던 것이, 표지 3간과 제 1 초식 3간, 그리고 마지막 13 초식의 3간 정도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유실된 죽간의 합이 9간이다.
백두옹, 어림짐작으로 오래전에 실전된 ‘치우 13식 창법’이 아닌가? 어림으로 짐작해 본다.
모든 무술인이 꿈에도 그리던 창법이기에,
죽간의 앞쪽 두간 頭簡이 없고, 뒤쪽 미간 尾簡도 몇 간이 유실된 아주 낡고 오래된 죽간도 竹簡圖다.
본시 죽간은 뒷간부터 말아서 첫머리 두간이 바깥을 감싸는 형태인데, 노인네가 발견한 죽간은 중간 부분을 접어서 말아 놓았다.
그러니까 죽간의 바깥이 머리 간과 꼬리 간이 겹쳐진 관계로 두서 頭序가 없다.
‘두서 頭序가 없다’라는 어원 語源이다.
한 칸, 두 칸이라는 순수 우리말, ‘칸’이란 말도 죽간 竹簡의 간 簡에서 유래되었다.
‘위편삼절 韋編三絶’이란 고사 古事도, 공자 孔子가 죽간에 쓰인 ‘주역 周易’을 늘 곁에 두고 자주 탐독하다 보니, 죽간을 엮은 질기기로 소문난, 소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두서없이 죽간이 말려있다는 것은 그 죽간을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이 아주 다급하게 죽간을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 길지도 않은 죽간을 순서대로 말아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앞뒤 순서도 없이 급하게 죽간을 말았다는 것은 이 죽간이 아주 중요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죽간을 발견한 암혈을 다시 찾아보니,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상여집의 벽과 바위 사이에 있는 관계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로써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묘한 위치였다.
아마도 도망자가 도피 중에 다급하게 숨겼는데, 죽간이 썩을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아마 적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햇살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죽간에는 앞쪽에는 한 두 자씩 가림토로 추측되는 고대문자 古代文字가 몇 자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슝노 출신의 반백 노인은 ‘치우창법’이 아니라, 번 조선(알타이산 부근)의 유명한 천오창술 天烏槍術이라 우긴다.
그렇게 죽간을 들고 두 사람이 다투다 보니, 낡고 오래된 죽간이라 죽간을 엮어 놓은 오래된 낡은 가죽끈이 끊어지고, 여기저기 풀어지면서 죽간들이 뒤섞어 버렸다.
이제는 뭐가 뭔지 분간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로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두서 頭序가 없어졌다.
할 수 없이 두서없이 죽간들을 주워 모아 소가죽 줄로 한 묶음으로 묶어 버렸다.
죽간끼리 엮은 끈 없이 한 묶음으로 만들어버리니 부피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 상태로
삼일, 밤낮을 서로 다투어도 합의가 되지 않자 무불통지 無不通知로 알려진, 십칠 선생에게 판결을 받고자 왔다.
이 죽간이 치우창법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면 백두옹이 죽간을 가져가고, 만약 반백 노인이 주장하는 천오창술이 맞다면 반백 노인이 이 비급을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다.
그런데, 두 노인네가 십칠 선생댁에 도착하자마자, 십칠 선생이 마침 급한 연락을 받고 나간다면서 인사만 얼른 하고, 두 소년이 곧 올 것이니 대신해서 접대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말을 타고 나가버렸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두 노인, 무심코 집안을 둘러보는 눈에 마루 한편에 놓인 바둑판이 눈에 띈다.
평생을 기우 棋友로 때로는 기적 棋敵으로 지낸 호적수 好敵手인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춘다.
이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십칠 선생을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바둑으로 이기는 사람이 무술 비결이 그려진 죽간을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하고, 이처럼 내기바둑을 두고있는 중이었다.
서로의 창술과 무예도 우열 優劣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자고 바둑 또한, 주위에서 가장 잘 두는 호적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 한판의 승부가 바둑은 물론이고, 차후에는 무술의 고하 高下마저 가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둘 사이에 벌어진 인생 최대의 승부다.
그래서 지금 반상의 팽팽한 국면만큼이나 반외 盤外 심리전을 펼치며, 격한 언성으로 서로 간에 전력투구 全力投球를 하는 상황이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장정과 소녀가 말에서 내린다.
활을 어깨에 가로 매고 삽짝으로 들어오는 석늑과 향기다.
석늑의 말 안장에는 화살에 목이 꿰인 야생 염소 한 마리가 들려져 있다.
둘이 사냥을 나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모양이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 중부와 준이 왔구나”
“향기도 사냥 갔다 오는 모양이네”
“응, 사냥감이 안 보여 여태 헤매다 이제 오는 길이야.”
네 명이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해도 두 노인네는 서로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사람이 오가는 줄도 모른다.
향기가 두 노인에게 다가가
“선우 할아버지, 모용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하니까, 그제야 백두옹은
“향기 왔구나” 근성으로 답하고 또 서로가 언쟁을 벌인다.
반백 노인, 그러니까 ‘모용 할아버지’라 불리는 노인은 아예 인사도 받지 않고, 아는 체도 없이 계속 언성을 높인다.
“나쁜 놈의 자식, 어디 그따위 소리를 나불대고 있어?”
“야! 이넘아 내가 나쁜 놈이면, 네놈은 썩어 디질 넘이다”
끝이 없을 언쟁이다.
어깨에 걸쳐 온 활을 내려서 마루 귀퉁이에 놓으면서 향기가 한마디 한다.
“오늘은 술상 차릴 분위기가 아니네요”
순간 주위가 조용해진다.
두 노인네, 갑자기 험악스러워진 입을 닫고는 눈만 껌벅이고 있다.
모용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묻는다.
“향기야, 그게 무신 소리고?”
“인사 드려도 받지도 않으시고, 싸움질만 하시는데, 무슨 술상이 나오겠어요?”
앙칼지게 쏘아 붙인다.
“아…. 아니야, 싸움은 무신 싸움이고, 저 아우가 언행이 불손하여 교육 중이지”
“교육, 교육 좋아하네, 야! 이 망할 넘아, 누가 누굴 교육시켜?”
“허…. 이넘 버르장머리 보소, 이렇게 형님에게 사사건건 대드니, 교육이 필요하지”
“요넘이 곧 죽어도 행님, 행님 하지, 그래 오늘 내가 니넘에게 무상 교육 좀 시켜줄께, 회초리 어디 있노?”
또 시작이다.
“자, 보세요. 나오던 술상도 들어가겠습니다.”
“...”
석늑은 아예 못 본 체하며, 우물터에 가서 야생 염소 껍질을 칼로 벗겨내고 있다.
이중부와 한준도 옆에서 염소의 앞, 뒷다리를 한 쪽씩 잡고 당기며 거든다.
그런데 향기는 마루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우물 터만 바라보고 있다.
두 노인 그제야 분위기 파악이 된다.
유일한 여성인 향기가 정지에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며, 뭔가 먹거리를 준비해야 술을 한잔할 텐데, 요리사가 ‘나 몰라라’ 하는 태도다.
파업 罷業 중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두 노인네는 호전적 好戰的이며 험악스럽던 표정을 슬그머니 풀어버린다.
둘은 분을 삭이며, 말도 진중한 어투 語套로 바뀐다.
“네 넘 교육은 다음에 다시 해야겠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야 이놈이야, 누가 할 소리를... 그럼, 오늘 교육은 이만하고 다음에 제대로 교육시켜 줄게.”
겨우 사태가 가라앉는 느낌이다.
이제는 요리사를 요리 料理할 차례다.
“향기야 지난번에 가르쳐 준, 응조검법 鷹爪劍法 7식은 다 익혔냐?”
할 수 없이 백두옹은 비장의 무기를 끄집어낸다.
그러자 새침하던 향기의 안색 顔色이 급변한다.
얼굴 표정과 자세가 아주 공손해지더니, 어투도 상냥하게 변한다.
“선우 할아버지는 어떤 술이 입에 맞던가요?”
요리사의 파업은 찻잔속의 태풍으로 마감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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