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기네여.............. 언제 다 읽쥐?
그래두........잼나니.......... 함 쉬엄쉬엄 읽어보세여...
이상........의류md 2년차...........이엄슴당...
"TV를 보던 C는 어젯밤 심야 데이트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C의 밤은 뉴스의 그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C는 이틀 동안 서버의 시스템
재설정을 위해 밤샘 작업을 했었다. 저녁 8시가 지나서야 겨우 시스템이
안정화 되었다. 아침에 잠깐씩 눈을 붙였지만 극도의 피로가 몰려오는 상태.
하지만 문제를 해결했다는 뿌듯함과 오랜만에 일찍(보통 C의퇴근 시간은
10시 이후이다.) 퇴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은 피로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C는 최근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글을 쓰는 프리랜
서인 여자친구 역시 낮보다는 밤에 더 많은 활동을 한다. 저녁 9시가 막
지난 지금이 그녀에게는 가장 왕성하게 움직일 시간인 것이다. 그들은
약속을 잡고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후식
으로 커피까지 마신 C의 손에는 12시에 시작하는 심야 영화표가 들려져
있다.
그다지 재미있지 않은 영화였지만 C는 오랜만에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았
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C는 차를 몰고 동대문으로 향한다. 그들이 간 곳
은 밀리오레. 새벽 2시의 밀리오레는 조명등으로 대낮보다 밝고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댄다. 밀리오레 한편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를 구경하던 그
들은 쇼핑을 시작한다. 반팔 티 몇 벌과 면바지 하나를 사고 여자친구에
게 앙증맞은 머리띠도 하나 선물했다. 얼마되지 않는 돈으로 필요한 것
을 구입하고 선물까지 한 C는 기분이 들떠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남겨
진 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C는 집까지 바래다 준 후 찜질방으
로 향했다. 몇 시간 후면 아침이지만 찜질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C는 잠시 후 짧지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요즘 들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영화관들은 심야 영화를
필수적으로 준비하고, 남대문과 동대문에는 새벽에도 쇼핑족이 넘쳐난다
. 새벽의 찜질방에는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
로 모여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밤 잠 없는 네티즌들이 여기저기서 록
키 호러 네트 쇼를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Winamp 방송에는 사람들이 속
속 몰려들고 채팅족들은 밤새 수다를 떤다. 어디 그 뿐인가? 베틀넷을
떠도는 저 많은 미래의 프로게이머들은 또 어찌 외면할 것인가?
심야 영화족·야간 쇼핑족·밤샘 채팅족… 당신은 무슨 족(族)?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이들은 잠도 없는가? 아니면 이들은 직업도
없는가?
잠깐 옛 기억을 떠올려보자. 정확하지는 않지만 80년대 초까지도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TV의 안내방송이 있었다. 착
한 어린이라면 9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야 했다. 어린이라고 왜 9시 이
후에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어린이는 9시에 자
야 한다는 것이다. 왜? 착한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동어반복. 착한 어린이는 착하기 때문에 착해야 한다! 이 얼마나 허망한
논리인가?
아무튼 언젠가부터 이 안내방송은 사라졌고, 그때의 착한 어린이들은 서
른의 나이로 밤거리를 헤매는 ‘나쁜 어른들’이 되었다.
안내방송이 사라진 후로도 오랫동안 밤은 깨어 있어서는 안되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어른들도 자정이면 애국가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자정 이후의 영업은 외국인들이 출몰하는 특수한
지역에서만 가능했었다. 동시대의 기억 속에 밤은 통행금지, 방송중단
등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금지와 금기로 가득찬 영역이었던 밤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향
유하는 밤으로 변화한 것은 90년대부터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문화적 빅
뱅 이후의 일이다. 사회과학적 사유와 독재에 대한 이성적 투쟁을 특징
으로 하는 80년대를 지나면서 거대담론에 대한 회의가 번져나갔고 포스
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유행이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90년대 초반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가 다양하고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가 대중들의 성감대를 자극했고 이후 한국사회의 문화적 변화에 많
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수천년간 서구와 세계를 지배해왔던 이성(理性)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
하기 시작한 포스트모던의 논리는 이성의 이름이 사실은 폭력이었음을
주장한다. 객관성, 과학, 이성 등은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논리적 기반을
송두리째 부정하였고, 객관성이란 사실은 주관성을 폭력적으로 관철시킨
것일 뿐이라는 설파하였다.
이러한 전복적인 주장은 권위주의, 엄숙주의에 진저리를 치던 젊은 세대
들에게는 복음처럼 들려왔고 이성의 이름으로 억눌려있던 모든 것들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폴로의 지배로부터 디오니소스의 복원, 맑스에서 니체로의 전화, 이론
에서 문화로의 방향전환, 노동사회에서 소비사회로의 업그레이드는 90년
대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이 과정에서 금지와 규제의 대상이었던 밤에 대한 대중적 인식도 변화하
게 된다.
오래 전부터 낮과 밤의 대립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대립으로 표현되
었다. 낮은 태양의 신 아폴로가 지배하는 시간이다. 밝음, 공명정대함,
법, 정의 등을 수호하는 아폴로가 있는 한 사회는 질서를 유지한다. 이
와는 반대로 밤은 아폴로와는 반대의 성격을 지닌 디오니소스의 시간이
다.
술과 향락, 퇴폐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디오니소스는 숲의 요정인 님프들
을 농락하고 뿔 달린 방탕아 사튀로스와 절친한 망나니, 실패한 신족(神
族)이다.
그러므로 디오니소스가 지배하는 시간은 도둑이 침범할 수 있는 위험한
시간이며, 법과 질서가 파괴되고 암흑의 세력들이 활동하는 위험천만한
시공간이 된다. 시간적으로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밤은 디오니소스의
오명과 함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인류로부터 버림받은 세상인 것이
다.
하지만 밤을 두려워 하는 자는 정녕 누구인가? 대중들은 디오니소스에
열광해 왔다. 거친 노동과 삶의 팍팍함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술을 마셨고,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카니발을 벌였으며 가면을 쓰고 낮의
질서와 권위를 잠시나마 전복시켰다. 카니발 기간에는 왕을 제물로 삼는
희생양 제의도 서슴치 않았다.
물론 이러한 전복은 축제의 기간에만 한정이 되고 축제 이후에는 낮의
질서를 더욱 강화 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중들의 욕망 속
에 디오니소스, 에로티즘, 죽음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이 강렬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결국 밤을 두려워하는 자는 대중들이 아
니라 낮의 영역에 속해 있는 자들. 다시 말해 억압적 이성과 질서와 법
률과 시간을 만들고 지배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폭로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교
리가 전파되면서 소수의 사람들이 밤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
저 밤거리로 뛰어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폭주족들이었다. 굉음을 내며
돌아다니고 교통사고를 일으키며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주범들
이지만 감추어져 있던 밤의 욕망을 거침없이 질주했던 최초의 집단으로
기억될 만하다.
‘노동하는 낮·휴식을 위한 밤’ 개념 없어져
올빼미족은 오프라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온라인에 접속하여 밤새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의 문화는 오프라인의 문
화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하다. 네트워크는 사람들에게 익명성을 선사
했다. 익명성은 질서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다. 근대사회가 질서를 유지
하는 방식은 개인을 만들어내고, 그 개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통제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트워크는 이를 거부
한다.
아이디를 바꾸고 IP주소를 수시로 변경할 수 있다. 완전한 익명성을 보
장 받을 수는 없지만 인터넷을 접속해있는 사람끼리 이름은 중요하지 않
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ID가 더 중요하며 ID는 가상의 이름이며
언제라도 변경 가능한 가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트워크로 몰려드
는 사람들이 밤에 익숙하고 밤을 주요한 활동시간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듯 하다.
밤이 밝음의 질서로부터 해방된 시간인 것처럼 네트워크는 이름의 질서
로부터 해방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밤과 네트워크가 결합하게 되면 그
효과는 무한증폭 된다. 새벽의 사이버 공간에서는 모든 금기들이 해체된
다.
채팅방에서 언어의 질서와 권위는 파괴되고 성적인 금기들도 쉽게 무시
된다. 음습하고 기괴한 욕망들이 거침없이 내뱉어지고 한쪽에서는 두려
움 없이 노출증을 발산한다. 접촉하지 않은 신체들이 네트워크를 넘어
서로를 더듬고 낮의 질서가 부여한 육체의 거리와 경계는 쉽게 파기된다
.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은 이처럼 낮의 질서
와는 거리가 먼 밤의 네트워크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보여준다. 인
터넷의 보급과 함께 2001년의 시공간은 확장되거나 혹은 극도로 축소되
어 소멸되어 버린다.
노동하는 낮과 휴식과 재생산을 위한 밤이라는 사회적 생산력을 위한 시
간의 배분은 시공간의 뒤틀어짐과 함께 변화된다. 고속 경제성장을 위해
한국사회는 휴식의 시간이며 사적인 영역인 밤마저도 낮에 종속된 것으
로 격하시켜왔다.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고 성인들도 12
시 이후에는 돌아다닐 수도 TV를 볼 수도 없었다. 왜? 그들은 자야만 했
기 때문이다. 잠을 자지않고 낮의 생산력을 감소시키는 것은 고속성장을
저해하는 국가적인 범죄 행위였기 때문이다.
24시간 편의점·인터넷 보급으로 새로운 밤문화 생성
하지만 90년대 이후 사회는 생산 만큼이나 소비도 중요한 경제행위로 자
리잡는다. 밤 문화가 이렇게 만연하게 된 데에는 문화적 빅뱅에 의한 대
중의 인식 변화와 인터넷 문화와의 결합 그리고 시공간의 뒤틀어짐 외에
도 한국 사회가 노동과 소비 그리고 생산력을 배분하는 방식이 변화했다
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밤의 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첫번째 문화적 코드가 24시간 편의점이었음
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대학과 번화가를 중심으로 생겨난 24시간 편의
점은 암암리에 밀약하던 올빼미족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며 낯선 이미지
들을 연출했다. 채팅으로 날밤을 세우던 통신족과 삐끼, 주유소 아이들,
폭주족 등의 10대들이 24시간 편의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고 동질
감을 느꼈다.
그것도 줄을 서서 컵 라면을 먹으면서 말이다. 당시만해도 여전히 낯설
고 위험하게 여겨지던 밤의 문화가 소비를 위한 장소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IMF와 벤처의 열풍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개념에 변화를 가져온다. IMF
는 수많은 실업자를 낳았고 청년실업자의 수도 급증했다. 물론 다른 한
편에서는 금리 등 재테크 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이익을 남기는 사람
들도 생겨났다.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노동의 강도와 시간이 증
가하였다. 벤처 회사들은 젊은 패기를 앞세워 출퇴근도 없는, 회사가 곧
집이고 휴식처이며 일터인 사무실 문화를 조성했다.
게다가 지난 30여 년간의 경제성장은 생산하는 만큼 소비를 해야 하는
자본주의 본래의 경제순환구조를 작동시키기 시작한다.
한국사회는 전에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요지경으로 빠져든 것이다.
한쪽에서는 배는 고프지만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
는 소비능력은 충분하지만 도저히 소비할 시간은 없었다. 물론 소비능력
과 충분한 시간을 둘 다 갖고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고 사회 전체
적으로는 경제 사이클을 위해 소비가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이를 해결할 방식은 단 하나, 심야 시간에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
다. 당국이 야간영업 규제를 푼 것도 이 즈음이다. 청년 실업자들은 장
시간의 채팅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우러 편의점으로 갖고, 벤쳐 직원들은
일을 하다가 야식을 시켜먹거나 새벽 쇼핑을 즐겼다. 또 다른 부류의 사
람들은 밤이 가져다주는 낯선 매력에 빠져 자동차 극장으로 심야영화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밤은 소비의 시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처럼 밤은 여러가지 국면을 거쳐왔다. 재충전 시간으로서의 밤을 거쳐
다시 낮의 생산을 소비하기 위한 밤에 이르게 된 것이다. 2001년의 밤의
문화는 저항과 창조와 소비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 문화는 분명 낮의
문화와는 다르다. 밤에는 지켜야 할 격식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훨
씬 느슨하고 개인적이고 익명성을 띈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를 통해서만
이러한 특별함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