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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썹목사
에잇, 재미없어 (눅 23:8)
누가복음 시리즈52
예수님을 향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질투와 증오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증폭되어 갔다. 그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처치 할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는데 절호의 기회가 제 발로 찾아 왔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 한 것이다.
(눅 22:4-5)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를 앞세워서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야심한 밤이었고, 예수님은 이제 막 기도를 끝내신 후였다.
(눅 22:47-48)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붙잡혀 부당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들은 로마의 힘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처치하려고 했다. 그래서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라는 작자가 왕 행세를 하면서 내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고소했다.
(눅 23:1-2)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물론 순전히 누명이었다. 빌라도도 이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간략하게 예수님을 심문한 다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눅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게 이왕 저지른 일인데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에 결판을 내야 한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눅 23: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밑도 끝도 없이 어거지를 써대니까 빌라도는 한편으로는 살짝 열이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슬쩍 귀찮아졌다. 괜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사건을 회피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빌라도는 유대 지역의 총독이었는데, 갈릴리 지역에는 분봉 왕이 따로 있었다. 헤롯이다. 아마 여러분도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예수는 빌라도의 관할 구역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관할도 아닌데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군다나 빌라도는 헤롯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껄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은 갈릴리 왕이 재판 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헤롯에게 일을 떠 넘겼다. 마침 유월절 기간이라 헤롯이 잠시 예루살렘(유대지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수월하게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눅 23:6-7)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빌라도를 거쳐 헤롯 앞에 서게 되었다. 헤롯은 속된 말로 똘끼가 좀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적이었고, 대개 감정적인 사람들이 그렇듯이 즉흥적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당히 강했다. 헤롯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부적절한 여자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당시 권력자들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왕들만 해도 왕비 외에 후궁을 얼마나 많이 뒀는가? 아니, 왕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웬만큼 돈 있고 힘 있으면 두 집 살림을 하는게 다반사였다. 그러니 로마제국 시대에 분봉 왕이 여자관계가 복잡한 건 사실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헤롯은 정도가 심했다. 단순히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부적절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것이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제수)와 바람을 피웠다. 그래서 요한이 비판한 것이다.
(막 6:18)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치고 남의 말 귀담아 듣는 사람 못 봤다. 당연히 헤롯은 요한의 비판이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요한을 감옥에 가둬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사람들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옥으로 일단락 지은 것이다.
(마 14:3,5)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그러다가 자기 생일에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다. 여자 + 자존심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 내용을 읽어 주겠다.
(마 14:6-8)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마 14:9-10, 우리말성경) 헤롯 왕은 난감했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도 있고 손님들도 보고 있으므로 소녀의 요구대로 해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헤롯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했습니다.
이처럼 헤롯은 동생의 아내와 눈이 맞을 만큼 부도덕했고, 쓴 소리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았다.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폭군이었고, 아무 맹세나 남발하는 경솔함에 허세까지 있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서 사람들 앞에서 체면 구기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냉혈한 이었다.
예수님은 지금 이런 사람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벌써부터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헤롯은 꽤 반가운 기색으로 예수님을 맞이했다. 왜냐하면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헤롯도 귀가 있으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말씀을 잘 가르친다더라, 귀신을 내쫓는다더라, 병자를 고친 다더라 등등. 헤롯은 내심 궁금했다. 한번쯤 만나고 싶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를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먼저 찾아 갈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유야 어찌되었든 예수가 제 발로 굴러 들어왔다.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어디 한번 기적이라도 일으켜 보라고 요구했다.
(눅 23:8-9) 헤롯이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헤롯은 예수님이 뭔가 재밌는 구경거리를 펼쳐 주길 기대했다. 아니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라도 풀어 주길 바랬다. 하지만 헤롯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영 재미없게 나왔다. 미동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눅 23:9, 쉬운성경) 헤롯이 예수님께 여러 가지 말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사람 중에 하나가 과묵한 사람이다. 사람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기적 한번 일으켜 보라고 했으면 맛보기라도 좀 보여줘야 될 것 아닌가? 예수가 제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하지만 누울 자리 봐가면서 다리 뻗어야지, 상대가 누군가? 로마의 분봉 왕 헤롯이다. 그러면 좀 사근사근하게 굴면서 알아서 기는 맛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지금 재판 받으러 끌려 온 것 아닌가? 어떻게든 헤롯 마음에 들어야 조금이라도 유리한 판결을 받지 않겠는가? 그런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무게를 잡고 있는가? 헤롯은 아무 대답 없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동안 가져 왔던 일말의 호감(호기심)마저 싹 사라졌다. 그 와중에 종교지도자들은 “이때다” 하면서 힘써 예수님을 고발했다.
(눅 23: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예수는 아무 말도 없지, 대제사장들은 쫑알쫑알 떠들어대지, 이쯤 되니 헤롯은 슬슬 만사가 귀찮아졌다. 예수를 놀림감으로 만들어서 조롱하다가 “에잇, 재미없어” 하면서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냈다.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긴 하지만 어쨌든 유대 지역에서 고소가 들어왔으니 유대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눅 23: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헤롯에게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고자 한다. 헤롯은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것이 결코 영적인 관심은 아니었다. 헤롯에게 예수님은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헤롯은 제 발로 찾아온 구원자를 자기 발로 걷어 차 버렸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와 유사한 사례가 사도행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벨릭스 총독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벨릭스는 곧바로 판결을 내리지 않고 꽤 오랜 시간동안 보류했다. 이 기간 동안 벨릭스는 아내와 함께 여러 차례 바울을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바울로서는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행 24:24-25)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벨릭스는 자주 바울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만큼 복음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순전히 복음에 대한 관심만은 아니었다. 다른 꿍꿍이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행 24:26-27)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벨릭스는 돈을 바라고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의 민심을 얻길 바랬다. 분명 벨릭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위해서 바울을 찾아 갔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어쩌면 바울이 돈을 좀 찔러줄지도 모른다는 사사로운 욕심이 있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상 모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유대인들의 민심을 잃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건 정치인으로서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처럼 벨릭스는 복음을 들으면서도 돈을 생각했고, 정치적인 잇속을 챙기려고 했다. 벨릭스는 바울을 만났다.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벨릭스의 마음은 여전히 돈에 기울어져 있었고, 정치생명에 발목 잡혀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걸 떨쳐내지 못했다. 벨릭스의 마음 상태는 마치 가시밭과도 같았다.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과연 벨릭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말씀을 듣고 결실 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성경 어디에도 벨릭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헤롯과 벨릭스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둘 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헤롯은 직접 만났고, 벨릭스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만났다.
둘째, 둘 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헤롯은 예수님을 심심풀이로 여기고 조롱하다가 그냥 돌려보냈고, 벨릭스는 돈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겨 복음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기껏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도 결국 구원 받지 못했다. 이건 마치 로또에 당첨 됐는데 용지를 잃어버려서 당첨금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할 지경이다. 땅을 치며 후회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과연 이게 헤롯과 벨릭스 만의 문제일까? 말씀을 들을 때는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자신에게 비추어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여기고 있고,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대하고 있는가? 물론 헤롯처럼 대놓고 불경스럽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벨릭스처럼 노골적으로 다른 꿍꿍이를 품지 않는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미묘하다. 사실은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고, 이로 인해 그 누구의 질책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히 회개도, 변화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잘 하는 줄 안다. 꽤 괜찮은 줄 알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줄 안다.
이만하면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다른 누구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딱 잘라 말해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과대평가 한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신의 실체를 마주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헤롯은 원하든 원치 않든 요한에게 쓴 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의 침묵을 마주해야만 했다. 벨릭스의 경우도 사도 바울로부터 경고의 말씀을 들었다(행24:25).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감히 어느 누가 우리에게 뭐라고 하는가? 아무도 못한다. 아니, 안한다. 그래서 어떤가? 좋은가? 아니다. 좋아하면 안 된다. 두려워해야 한다.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했다. 뭔가 특별한 일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벨릭스는 바울을 만나고 기뻐했다. 뭔가 부가적인 수입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의미는 조금 달랐지만 두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재미 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충족되지 않으니까 실망하고 돌아섰다. 아니, 예수님을 돌려보냈다.
여러분은 어떤 재미를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는가? 헤롯처럼 흥미진진한 어떤 사건인가? 아니면 벨릭스처럼 당장 손에 잡히는 이득인가?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여러분의 신앙이고 삶이다.
헤롯은 “재미”를 숭배했고, 재미를 위해 살았다. 모르긴 몰라도 꽤 재밌게 살았을 것이다. 벨릭스는 돈과 권력을 숭상했고, 이를 위해 살았다. 아마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여러분은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 여러분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빌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말씀을 맺겠다. 여러분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주 예수를 믿으라. 구원 받으라. 그리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라.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욕심을 내기 바란다. 매일 매순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https://ssub2.tistory.com/1815 [썹목사 함께 자라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