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絶頂)
影園 / 김인희
회색빛 하늘 아래 자동차는 울퉁불퉁한 강변을 거북이걸음으로 지나간다. 강가에서 나목들이 일제히 도열하는 모습이 장엄하다. 나무들은 강을 바라보고 버티고 서있다. 마치 강과 육지의 경계선이 되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지키는 파수꾼처럼 바짝 군기 잡은 모습이다.
한겨울의 강은 무심히 흐르고만 있다. 바람이 물살을 어루만져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한 번쯤 멈칫하고 돌아볼 만도 하련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능선에 기댄 태양이 강물을 희살 짓는다. 백제 여인의 정절을 끌어안고 침묵하는 강물을 바라보고 별 하나 말이 없다. 강을 바라보고 있던 통나무 그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을 빈터에 서서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체념의 늪에 깊이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냉소를 깨문다. 팔을 걷어 올리고 열정적으로 일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무엇이 이토록 싸늘하게 만들었을까.
예까지 오는 동안 치열했던 시간을 돌이켜 본다. 경지를 향하여 오르는 길이 험난하였다. 그 벅찬 노선에서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따뜻한 도움의 손길보다 팔짱 끼고 주시하는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느라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주먹을 꼭 쥐고 할 수 있다고 외마디 기도문으로 자위했다. 감상에 젖어 흐르는 눈물조차 사치라고 밀치면서 업무에 매달렸다.
동분서주하면서 대학원 논문 심사를 마치고 인쇄하였다. 학술정보연구서비스에 등재되었다는 최종 통보를 받았다. 이것과 저것 정산을 마치고 서류를 제출하였다. 회계감사를 통과하고 총회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 기관에 심사를 다녀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수년 동안 사업을 수행하지 못한 기관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심사 자료를 PPT로 작성한 후 발표 연습을 반복해서 했다.
당일 기관에 도착한 후 5분 이내로 발표하고 질문에 답하라는 요청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단체들은 따뜻한 대기실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복도에서 휴대전화를 열어 시간을 맞추면서 연습을 반복하였다.
차례가 되어 심사장에 들어섰을 때 온몸이 굳어졌다. 심사위원들의 책상에 가득하게 놓여있는 타 단체들의 실적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기관은 제출한 신청서와 PPT자료뿐이었다. 단 5분 브리핑으로 사업에 선정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바윗덩어리가 되어 심장을 압박했다. 우리 기관의 우수성을 역설한 후 쏟아지는 질문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주먹을 꼭 쥐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할 수 있는 한 정성스럽게 답변을 했다. 지금까지 그토록 간절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심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외마디 기도뿐이었다. 꼭 선정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우리 기관에 희망을 주고 싶었다. 새해에 좋은 일을 안겨주고 싶었다. 우리 기관이 다시 명성을 찾고 기관에 강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수 있다면 더 바람이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체념의 늪에서 기지개를 켠다. 다시 열정적으로 지내리라 다짐해 본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내리라 다짐해 본다.
밤하늘 더듬어 별을 찾는 일을 시작하기로 한다. 내가 별 헤는 시간이 가장 순수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책 한 권 펼치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따뜻하고 착한 언어로 인연을 엮으면서 지내리라. 그렇게 시를 쓰고 수필을 쓰면서 여류작가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
어쩌면 지금의 침묵은 절정(絶頂)일까.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기 전 찰나의 고요가 아닐까. 바다가 해일을 토해내기 직전의 정적이 아닐까.
작은 별의 저력을 믿는다. 산적한 업무 속에서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야무진 그의 빛깔을 믿는다. 차가운 공격을 받을 때도 울지 않고 의연하게 감내했던 다부진 향기를 믿는다.
작은 별!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동시킬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