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속의 인용문이 길기에 모두 옮길 수 없어서, 질문의 핵심만 아래에 소개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과연 고집멸도 사성제를 부정할까요
답변입니다.
반야심경을 포함한 반야경은 일반인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사성제 등의 법)에 의지하여 열반이 멀지 않은 대 성인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 서두에서 청문 대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대략의 수효 5천 명[分]으로 이루어진 큰 비구승과 함께 머무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으로 모든 누(漏)가 이미 다하고 다시는 번뇌가 없었다. 마음으로 잘 해탈하였고 지혜로도 잘 해탈하였으며, 마음이 길들여져 유연한 것이 마치 마하나가 같았다. 할 일을 이미 다하고 무거운 짐을 버리어 능히 공덕의 짐과 남에게 응하는 짐을 짊어질 수 있으며, 자기의 이득[己利]을 체득하고 모든 유(有)와 결(結)이 다했으며 바른 지혜로 이미 해탈을 얻었다. 오직 아난만을 제하니 그는 배움의 경지[學地]에서 수다원(須陀洹)을 얻었을 뿐이었다.
다시 5백 명의 비구니와 우바새ㆍ우바이가 있었으니, 모두가 성스런 진리를 보았다.
다시 보살마하살들이 있었으니, 모두가 다라니(陀羅尼) 및 모든 삼매를 얻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을 행하여 이미 등(等)과 인(忍)을 얻었다. 걸림 없는 다라니를 얻었고, 모두가 5통(通)을 얻었으며 그들이 말을 하면 반드시 다 받아 지녔다. 다시는 게을러지는 일이 없었고, 이미 이양과 명예를 버렸으며, 법을 설하되 바라는 바가 없었다. 깊은 법인(法忍)을 건너 두려움 없는 힘을 얻고 모든 마사(魔事)를 초월했으며 일체의 업장에서 남김없이 해탈했다. 인연의 법을 교묘하게 연설했으며, 아승기겁 이래로 대서원을 일으켰다. 얼굴빛이 화열(和悅)하여 항상 먼저 인사하고 말하는 바가 거칠지 않았으며,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음[無所畏]을 얻었다. 헤아릴 수 없는 억겁 동안 법을 설했으니 교묘히 뛰어났다. 모든 법은 아지랑이[幻] 같고 불꽃[焰] 같고, 물속의 달 같고, 허공 같고, 메아리 같고, 건달바의 성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고, 거울 속의 형상 같고, 변화한 것[化] 같다고 알았다. 마음에 걸림 없고[無礙] 두려움 없음[無所畏]을 얻었으며, 중생들의 마음 가는 곳을 모두 알아 미묘한 지혜로써 그들을 제도하여 해탈시켰으니, 뜻에 걸림이 없고 대인(大忍)을 성취하여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했다. 그리고 한량없는 불국토를 받아들이기를 서원했으며, 한량없는 불국토의 부처님들의 삼매를 생각하니,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능히 한량없는 부처님들께 청하고, 능히 갖가지 견해와 얽매임[纏] 및 모든 번뇌를 끊었으며, 백천 가지 삼매에서 유희하며 삼매를 냈다. 보살들은 이와 같이 갖가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했으니, 그들의 이름은 발타바라(颰陀婆羅)보살ㆍ계나가라(罽那伽羅)보살ㆍ도사(導師)보살ㆍ나라달(那羅達)보살ㆍ성득(星得)보살 …… 상거수(常擧手)보살ㆍ미륵(彌勒)보살이었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 나유타의 보살마하살들이 있었으니, 모두가 보처(補處)이자 거룩한 지위[尊位]를 이어받은 이들이었다.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번역문 )
여기서 보듯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저자(著者)는, 이 경전의 청문(請聞) 대중으로 '아라한'이 된 500비구와 '성스러운 진리를 본' 200명의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그리고 보살마하살들을 제시합니다. 즉, 불교를 잘 모르는 일반인이나, 불교를 좀 알더라도 아직 사성제에 대한 통찰지가 생기지 않은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반야심경>이나 <대반야경> 등 반야계의 모든 경전은 일반인을 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에 통달한 사람, 삼법인, 사성제, 십이연기 등등의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여 오래 수행을 하여 통찰지가 생긴 사람들을 위한 경전이 반야경입니다. 즉, 성인의 지위에 오른 분들, 음욕과 재물욕과 분노와 질투 같은 동물적 감성을 모두 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사유함으로써 종교적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성자와 같이 살아가는 분들을 위한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 <반야심경>을 포함한 반야계 경전입니다.
질문 속에 인용한 문장 가운데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 당신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는 올바른 지적입니다. 사성제가 무언지 모르고, 십이연기도 모르고, 삼법인도 모르는 사람들이 <반야심경>의 경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봉독할 경우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저 역시 불교 강의할 때,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통달하지 않은 사람은 <반야심경>을 봉독할 때, 뜻을 떠올리지 말고 그냥 입으로만 봉독하라고 권합니다. 경전을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는 공덕이라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포함한 대승불전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는 본 게시판 문답에서 여러 차례 답변한 바 있습니다. 아래에 몇몇 게시판 답글 소개합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22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379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